몇 해 전 아주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미 하버드대 아누팜 제나 교수팀이 1722~2015년 사이 서방 17개국 지도자(대통령+총리) 279명과, 낙선한 후보자 261명의 수명을 연구 비교한 자료인데요. 당선자가 낙선자에 비해 2년8개월 이상 수명이 짧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연구와 함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2009)과, 2015년의 사진을 비교한 기사가 눈길을 끌었는데요. 대통령의 업무 스트레스에 따른 노화가 아니냐는 기사가 줄을 이었답니다.
■‘공신’(공부의 신), ‘워커홀릭’ 임금들
저는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미국 역대 대통령의 비교사진을 보면서 <숙종실록> 기사를 떠올렸는데요.
“만기(萬機·정사)를 주관하면서 노심초사하는 바람에 수염이 다 셌다. 식사도 거르는 바람에 몸이 초췌해졌다.”(<숙종실록> 1699년 10월 4일)
여기서 ‘만기’라는 단어가 눈에 띄죠. 예부터 군주가 하루에 처리해야 할 정사가 1만가지라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라 했습니다.(<상서> ‘고요모’) ‘만기친람(萬機親覽)’이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죠.
숙종이 그 정도니 만고의 성군인 세종(1418~1450)과, 중흥군주인 정조(1776~1800)는 오죽했겠습니까.
이중 세종은 ‘공신’(공부의 신) 답게 “한번 책을 잡으면 100번, 200번은 물론 어떤 책은 1100번까지 읽었다”(<세종실록>)고 했구요.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1423년 12월 23일)고도 합니다.
세종은 지독한 ‘워커홀릭’이기도 했죠. “매일 사경(四更·새벽 1~3시)에 일어나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돌봤다.
그 후 신하들을 차례로 접견하는 윤대(輪對)를 행했고, 다음엔 경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세종실록 1450년 2월17일)고 합니다.
그런 분이기에 한글창제는 물론이고 금속활자(갑인자) 발명과, 측우기·자격루 등 각종 과학기구 개발, <농사직설> 편찬과 대마도 정벌 및 4군6진 개척 등 천고에 빛날 업적을 이룬 겁니다.
정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781년(정조 5) “임금이 너무 작은 일까지 신경 쓰면 큰 일을 놓치기 쉽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렇게 응수합니다.
“작은 것을 통해야만 큰 것으로 나갈 수 있고 겉치레를 통해야만 실상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1783년(정조 7) 재해가 나자 정조는 자신의 침실에 ‘상황판’을 걸어둡니다.
“침실의 동·서벽에 재해를 입은 여러 도를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그곳에 고을 및 수령 이름과, 세금경감과 구휼 조목 등을 죽 써놓고, 한가지 일을 처리할 때마다 기록했다.”(<홍재전서> ‘일득록·정사 1’)
침실에 재해대책본부를 차린 겁니다. 1784년(정조 8)에는 해마다 새해 첫날이면 반포하던 ‘윤음’(연두교서)을 내지 않기로 합니다. 문득 겉치레 같다는 생각이 든겁니다. 하지만 영 찜찜했습니다.
밤새도록 뒤척이던 정조가 벌떡 일어나 윤음을 써내려갔습니다. “인간사, 정성껏 윤음을 내리는데 (하늘이) 응답을 해주지 않을까. 나는 내 정성만 다하면 된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쓰니 관찰사와 수령들은 명심하기 바란다.”
그해 몸이 편치 않았던 정조가 각 지방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친히 살펴보고 있었죠. 신하들이 “제발 건강 좀 챙기시라”고 걱정했습니다. 그러자 정조의 대답이 걸작이었죠. “나는 원체 업무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그러면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마음에 병에 시달린 군주들
임금 체면에 몸 쓸 일도 없고, 또 불철주야 정사에만 매달린 탓일까요.
세종은 평생 당뇨와 두통, 이질, 다리부종, 수전증, 풍질, 임질 등으로 고초를 겪었는데요. 특히 “하루에 물 한동이를 마실 정도로 소갈병(당뇨병)이 심해 눈 앞의 사람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떨어졌다”(1439년 6월21일·7월4일·1441년 2월20일)고 괴로워 합니다. 1425년(세종 7) 윤 7월19일 세종은 중병에 걸렸음에도 이를 참고 명나라 사신단을 맞이하기도 했는데요.
이 때 신료들이 검게 변한 임금의 얼굴빛을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세종실록>은 “얼마나 병세가 위중했는지 임금의 관곽을 이미 짜놓는 등 흉사에 대비했다”(1449년 11월15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세종은 명 황제(인종·1424~1425)의 죽음을 알리려고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여 곡례(哭禮)까지 무사히 마쳤습니다. 외교적인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 투혼을 발휘한 거죠.
세종은 “모든 일에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데 잦은 병치레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면서 “게으른 버릇이 나로부터 시작될까 두렵다”고 걱정했습니다. 백성과 사직을 생각하는 성군의 투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조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늘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면서도 공부에, 업무에 빠져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근년에 공개된 정조가 심환지(1830~1802) 등에게 보낸 편지에 나와있죠.
“눈코 뜰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眼鼻莫開 苦事苦事·1799년 12월26일)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而民憂薰心 朝家關念 夜夜繞榻 日覺衰憊·1799년 1월20일) “닭우는 소리 들으며 잠들었다가~비로소 밥 먹으니, 피로해진 정력이 갈수록 소모될 뿐….(疲鈍之精力 日益銷耗而已·1798년 10월7일)
■나랏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섬뜩하다
어디 세종·정조 두 분 뿐이었겠습니까. 지금부터 3300년 전 중국 상나라 반경~무경 시대(기원준 1300~1192) 갑골문에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 중에 “임금에게 마음의 병이 있다”(有疾心)”라는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예부터 옥좌에 오르는 군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라와 백성 걱정에 노심초사했을 겁니다.
예컨대 조선도 명종(1545~1567)은 “나이 30이 넘었는데 아직 나라에 경사가 없다”면서 “가슴이 답답하다. 잠자리가 늘 편안하지 않다. 심열(心熱)이 위로 치솟으면 입이 말라 물을 끌어다가 마시기 일쑤다”라고 노심초사했습니다.
선조(1567~1608)는 임진왜란 책임론이 제기될 때마다 “난 정신병에 걸렸다”면서 여러 차례 양위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두고 선조의 ‘정치쇼’라는 해석이 지배적인데요. 그러나 실록을 읽어보면 ‘100% 정치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선조는 누차에 걸쳐 “심질이 고질이 됐다. 불을 대하고도 춥고, 눈(雪)을 씹으면 되레 열이 생긴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 달린다”(1592년 11월 21일)고 했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가슴 속 답답한 기운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루가 1년 같고, 밤낮으로 눈물만 흘린다”(1596년 8월 27일)고 토로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대신들은 “지금이 어떤 때인데 선위 이야기를 그렇게 자주 하시냐”면서 “정말 민망하고 답답하다”고 일축해버립니다. 광해군(1608~1623)은 또 어떻습니까. 세자시절부터 걸핏하면 선위하겠다는 부왕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왕위에 올라서는 떠오르는 후금(청나라)과, 썩어도 준치인 명나라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를 펼쳐야 했죠. 1619년(광해군 11) 욱일승천의 기세로 요동을 차지한 후금이 조선에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우리(후금)과 맹약을 맺자”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명나라의 문책이 무섭다”면서 누구도 이 편지를 처리하려 하지 않습니다.
광해군은 “이 편지의 처리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는데 경들은 명분론만 내세우고 있다”면서 “약소국이 막 강대국이 된 후금을 대적할 수 없다”(<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2일)고 실리외교를 주장합니다.
광해군이 실무를 처리할 적임자를 지명했지만 당사자들이 “제가 왜 책임지냐.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1619년 7월 27일)고 발을 뺍니다. 광해군은 “경들은 어쩌자고 이렇게 미루는가. 만약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섬뜩하다”(1619년 8월 14일)고 가슴을 칩니다. 결국 인조반정(1623년)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다쓰러져가는 명나라와 손을 잡은 조선은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애초부터 왕이 될 생각이 없었다는 정종(재위 1398~1400)은 어떨까요. 그런 분이 동생(태종 이방원)에게 추대되어 임금이 된 이후 마음의 병 때문에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답니다.(<정종실록> 1399년 3월13일) 오죽하면 부인(정안왕후·1355~1412)이 “당신(정종)은 동생(이방원) 앞에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느냐. 빨리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라”(<연려실기술> ‘정종조고사본말’)고 했을까요. 이듬해(1400년)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왕위를 물려준 정종은 62세까지 편히 살다가 승하했답니다.
■나랏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섬뜩하다
어떻습니까. 왕조시대의 군주는 ‘만기(萬機’)를 처리하느라 ‘만병(萬病)’에 걸릴 수도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러나 반전의 통계를 보여드릴게요. 하나는 조선 임금들의 평균수명인데요.
조선 국왕 26명(단종 제외)의 평균 재위기간과 평균수명은 18.63년(평균재위)과 47.23세(평균수명)입니다. 지금 기준에서 조선 임금들의 수명이 엄청 짧은 것으로 보이죠.
과연 그럴까요. 당대의 기준에서 40대 후반까지 살았다면 ‘지극히 선방’한 것이 아닐까요. 18세기 서유럽인들의 평균수명이 고작 30대 초반이라는 통계가 있는데요. 의료수준이 더 낮았던 조선인의 평균수명은 이보다 더 낮았겠죠.
그에 비하면 당대 최고의 의료혜택을 받은 이가 바로 국왕이기에 그나마 47세 이상까지 살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아누팜 제나 하바드대 교수팀의 연구와 다른, 반전의 통계는 또 있습니다.
2011년 미 시카고 일리노이대 스튜어트 올샨스키 교수팀의 연구결과인데요. 자연사한 미국 대통령 34명(현재 35명)의 평균수명은 73세(현재 73.66세)로 집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인의 평균수명이 40살도 안됐던 초대~8대 대통령의 평균수명은 80세였거든요. 제가 역대 미국 대통령 관련 수치를 표로 정리하다가 느낀 건데요.
제럴드 포드(38대·2006), 로널드 레이건(40대·2004), 조지 H W 부시(41대·2018) 등 최근 타계한 미국 대통령의 나이는 93~94세였거든요. 생존한 지미 카터 39대 대통령(1924~)은 만 98세를 향해 달려가고 있구요.
한국은 어떨까요. 자연사한 역대 대통령(7명)의 평균수명도 87.42세거든요. 2020년 한국인의 기대수명(83.7세)과 비교해도 3.72세 오래 살았죠.
산전수전 다 겪고 최고지도자가 된 그 성취감과,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책임감 등이 오히려 장수의 활력소가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만족감이 재임 중의 지독한 스트레스를 상쇄시킨 것이 아닐까요.
이와같은 선출직 지도자와 조선시대 임금과는 단순비교가 쉽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본인이 싫든 좋든 세습 군주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잖아요. 임금마다 다르죠. 영조 같은 이는 52년간 임금 자리에 있었고, 82세까지 살았죠. 또 ‘흰수염’ 타령을 해던 숙종도 평균 수명(47.23세)보다 12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종(1468~1469)이나 인종(1544~1545)은 임금이 아니었다면 더 오래, 더 행복한 삶을 사셨을 지 모릅니다. 임금 자리가 싫었다는 정종은 딱 2년 만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물러난 뒤(1400년) 19년이나 더 살았잖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죠. 지도자의 자격을 오롯이 갖춘 ‘임금 체질’이 몇 분이나 될까요. 그런 면에서 세종이나 정조는 자타가 공인하는 ‘임금 체질’이었죠. 그런 분들이 나라를 다스려야 본인들은 물론이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도 행복일텐데….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후보들은 어떤가요. 한번 자기 자신을 역사의 거울에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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