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뿐이 아니었다. 더욱 구체적인 증거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종실록> 1722년 4월 20일자를 보라. 조흡이라는 인물의 진술인데, 상당히 구체적이다. (왕세자의 처조카인) 서덕수가 동궁(왕세제의 처소)의 별실에서 궁녀를 상대로 독약을 시험했는데, 그 궁녀가 죽어나갔다는 것이다. 서덕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들은 궁녀가 죽어나간 소문을 듣지 못했는가.”
■시험삼아 궁녀와 종5품 내명부 여인을 독살시키다
그러면서 서덕수가 “이 약이 신통한 효험이 있으니 다른 곳에 쓰려고 한다”면서 “그 약을 구하려면 천 여 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10여 일 후인 5월 3일의 <실록>을 보면 왕세제의 여종이자 백망(왕세제의 최측근)의 첩인 이영(二英)이라는 여인이 “백망이 잠을 잘 때 밀봉한 황색 환약을 이부자리 밑에 두고 보지 못하도록 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백망이 준 2320냥의 은(銀)을 궁녀들에게 바치고 궁녀가 독약을 쓰도록 했다고 자백하기도 했다.
그런데 독약 시험에는 이름모를 궁녀 한 사람만 희생된 것이 아니다. 이미 1721년 11월 무렵, 동궁(왕세제의 처소)에 속한 소훈(昭訓) 이씨를 상대로 독약을 시험했는데, 소훈 이씨의 숨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이 때 왕세제의 환관인 장세상이 “이 약을 더 얻는다면 쓸모가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소훈’이 어떤 지위인가. 세자궁(세제궁)에 딸린 종 5품 내명부 여인이다. 이름없는 궁녀는 물론 종 5품의 내명부 여인까지 독살의 희생양이 된 것이니 그 참담함이란….
■대질심문에 말문이 막힌 연루자들
어떻든 이런 모든 자백으로 미루어보면 왕세제(영조)의 책임론이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목호룡의 고변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정확했는지 그와 대질심문한 연루자들은 말문이 막혀 쩔쩔맸다.
“국청에서 의논하여 아룄다. 목호룡의 말은 사리가 분명하여 근거가 있으나, 정인중은 하나도 변파(辨破)하는 단서가 없었습니다. 다만 ‘근거가 없다.’ ‘허언(虛言)이다.’ ‘없다.’ ‘아니다.’라는 등의 말로만 하고….”(<경종실록> 1722년 4월12일)
“심상길도 목호룡과 대질심문하자 말문이 막히었고….”(<경종실록> 4월 14일)
그러니까 목호룡이 노론와 왕세제 측의 경종독살음모를 너무나 구체적으로 고변하는 바람에 연루자들이 할말을 잃었다는 것이다.
결국 목호룡 고변으로 촉발된 ‘옥사’의 기록을 담은 ‘임인옥안’은 왕세제(영조)를 역적의 수괴라는 내용을 담게 되었다.
■수사를 미루는 이해할 수 없는 이복형
이제 김씨 성을 가진 궁녀의 신원만 파악하면 전모가 드러날 판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경종이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계속 내린 것이다.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이복동생(영조) 측의 혐의가 짙은 데도 “김씨성을 가진 궁녀가 너무 많다”며 번번이 ‘수사중단’의 전교를 잇달아 내린 것이다.
“1722년(경종 2년) 국청에서 김씨 성의 궁인을 조사하자고 하니 ‘김씨 성의 나인은 원래 없었다’는 비답이 나왔다. 재차 조사해야 한다고 하자 임금은 ‘원래 없었다’면서 굳이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나인을 조사하는 일은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노론을 타도하려는 계책은 근거가 없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다시 조사하라는 말을 하지 마라.’”
경종은 자신을 죽이려던 노론과 동생(세제)을 비호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는 것이다. <경종실록>은 바로 이 대목에서 “임금의 답이 뜻밖에 나왔으므로 많은 사람이 의혹을 갖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 후에도 김일경 같은 소론 강경파가 ‘김씨 성의 궁인을 조사하라’는 주청을 끈질기게 올렸다. 그러나 경종은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다”(1722년 8월 18일)느니, “김씨 성의 궁인 가운데 누구인지를 지적하지 못했으니 조사할 수 없다”(10월19일)느니, “수많은 김씨 가운데 어떻게 범인을 찾겠느냐”느니 하면서 차일피일 미뤘다.
■게장과 생감을 올린 이유는
경종이 그렇게 미온적인 대처로 시간을 질질 끌고 있을 때 파국이 다가온다.
가뜩이나 약골인 경종의 몸에서 심각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경종실록> 1724년 8월2일 기사를 보라.
“경종의 병환이 여러 날 동안이나 회복되지 않아 수라를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 이 때에 이르러는 한열의 징후까지 있었다. 임금(경종)이 세자 시절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고질병을 얻었고,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 혼미한 증상이 있었다.”
약방에서는 이미 1년 전부터 갖가지 약을 100여 첩이나 처방했지만 별무신통이었다. 8월 20일부터 파국이 시작된다.
“경종이 가슴과 배가 조이듯 아파서 의관을 불러 입진토록 했다.”
임금의 몸은 급속도로 악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튿 날인 21일부터 두고두고 논란을 일으킬 급박한 사건들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蟹醬)과 생감(生枾)을 함께 올린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의원들은 두시탕(豆시湯)과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올리도록 청했다.”(<경종실록> 1724년 8월 21일)
이 무슨 내용인가. 전날인 20일 수라를 들지 못할 정도로 맥이 빠져있던 경종 임금이 게장과 생감을 모처럼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의학계에서 매우 꺼리는 상극의 음식이라 어의들이 극구 만류했다는 것이다.
훗날 영조는 “이 게장과 생감은 대비(인원왕후)가 보낸 것도 아니고, 수랏간에서 올린 것이므로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해명했다.(<영조실록> 1755년 10월9일) 하지만 당시 왕세제가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절대 올려서는 안될 게장과 생감을 지나치게 많이 권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어쨌든 경종의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복통과 설사가 더욱 심해졌고, 급히 황금탕을 지었지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인삼과 부자를 같이 쓰면 큰일 납니다”
3일 뒤인 8월 24일 두고두고 논란을 낳은 경종 독살설의 2막이 시작된다.
이날 경종 임금의 환후가 위중해져서 맥이 낮아지고 음성이 점점 미약해진 것이다. 약방 도제조 이광좌 등이 물러나와 여러 의원들과 격론을 벌였다.
이 때 어의 이공윤이 공언했다. ‘
“삼다(蔘茶)를 써서는 안된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2첩만 진어하면 설사는 금방 그치게 할 수 있다.”
이공윤의 처방에 따라 계지마황탕(발열·오한 때문에 맥박이 약해지고 몸이 가려운 것을 치료하는 처방)을 올렸다. 그러나 경종의 환후는 더욱 위급해졌다.
모든 신하들이 임금에게 달려갔다. 경종 임금이 내시(內侍)를 의지하고 앉아 눈을 부릅뜬 형국으로 바라보았다. 약방도제조 이광좌가 문후를 올리자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때 왕세제(영조)가 울면서 말했다.
“인삼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
그러자 이광좌가 삼다(參茶)를 올려 임금이 두 번 복용하였다. 이 때 어의 이공윤이 이광좌에게 “삼다를 쓰지 마라”고 급히 경고했다.
“삼다를 많이 쓰지 마라. 내가 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게 되면 기(氣)를 능히 움직여 돌리지 못할 것이다.”
■“네가 뭔데 인삼약제를 쓰지 말라고 하느냐”
그러자 왕세제가 이공윤을 꾸짖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꼭 자기의 의견을 세우려고 인삼 약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
인삼의 처방으로 임금의 눈이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하진 것 같았다. 왕세제가 ‘그것 보라’는 듯이 한마디 더했다.
“내가 의약(醫藥)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 그래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陽氣)를 능히 회복시키는 것만은 안다.”
하지만 이내 경종의 용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었다. 임금의 기(氣)와 호흡이 미약해졌다. 이광좌가 다시 삼다(參茶)를 올렸지만 임금은 스스로 마시지 못했다. 의관은 삼다를 숟가락으로 떠서 넣었다. 왕세제는 “성상(경종)이 정(情)으로는 형제지만 의(義)로는 부자의 관계나 다름없다. 빨리 종묘와 사직에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자”고 했다.
그러나 경종 임금은 끝내 회복하지 못한채 이튿날 승하하고 말았다.
사실 인삼과 부자는 한방에서는 그야말로 극약처방이다. 가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일 때 강한 독성의 부자가 몸의 독기를 제거하고, 인삼이 원기를 회복시키는 치료이다. 의사가 아니고서는 절대 처방할 수 없는 약제인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밝혔듯 ‘의약의 이치를 모르는’ 왕세제가 어의의 반대를 부릅쓰고 인삼과 부자의 처방을 고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신은 게장을 먹지 않습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이어지고, 급기야 경종이 승하하자 민심은 새롭게 등극한 영조의 품을 완전히 떠났다.
그런 영조가 택한 것은 피의 숙청이었다.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역적의 수괴로 만든 목호룡과 김일경 등 반대파들을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민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랬으니 한낱 군졸에 불과한 이천해 같은 이가 지존인 임금을 향햐 악담을 퍼붓고, 총 20만명이 가담한 이인좌의 난(1728년)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어디 그것으로 끝났을까. 영조가 즉위한 지 31년이나 지난 1755년(영조 31년)에도 엄청난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그해 2월 일어난 나주 벽서(흉서)사건과, 5월 일어난 과거시험 답안지 사건이 그것이다. 앞서 인용했듯이 2월의 나주 벽서 사건으로 윤지 등 22명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참형·효시·교형 등으로 죽어나간 이가 7명이었다. 모두 65명이 형을 받았다.
특히 이 사건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던 신치운의 진술은 영조의 가슴을 후벼팠다.
“신은 자복합니다. 신은 갑진년(1724년) 이후 게장을 먹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
이는 곧 영조 당신이 이복형의 경종의 수라에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넣은 장본인이 아니냐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영조는 길길이 뛰었다.
<영조실록>은 “이 때 영조는 분통해서 눈물을 흘렀고, 곁에 있던 장사들도 모두 부들부들 떨었다”고 전하고 있다.(1755년 5월 20일)
■미친듯 죄인의 수급을 돌린 영조
그 해 5월 2일이었다. 나주 벽서사건을 토벌한 기념으로 과거시험이 열리고 있었다.
이 때 이인좌의 난 때 사형 당한 심성연의 동생인 심정연이 답안지를 작성하다가 파리머리만한 글씨로 이른바 ‘난언패설(亂言悖說)’을 가득 쓴 것이 적발됐다.
또 제출한 답안지를 정리하면서, 과제(科題)를 쓰지 않은 종이를 발견했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변서(上變書)’였다.
그 내용을 훑어본 영조는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종이 가득히 음참(陰慘)한 내용이 가득하구나. 차마 볼 수가 없다. 마음이 땅에 떨어지는 듯하다. 방자하게 휘(諱)를 쓰기까지 했으니,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아마도 심정연은 금기로 되어 있는 임금의 이름(금·昑)까지 들먹거리면서 욕했음이 분명했다. 글씨체가 심정연의 답안지와 같았으므로 이 상변서를 작성한 이 또한 심정연이었음이 분명했다. 영조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1755년(영조 31년) 5월 6일 영조는 직접 갑주를 입고 이른바 역적들의 사형집행을 친히 주관했다. 사형집행장엔 취타(吹打)가 울려퍼졌다.
판부사 이종성이 “어찌 지존께서 형을 직접 주관 하느냐”고 걱정했다. 그러자 영조는 화를 벌컥 내고 상을 치면서 “저 자를 충주목으로 유배시키라”고 곧바로 명했다.
분기탱천한 영조는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죄인 윤혜의 수급을 깃대 끝에 매달게 했다. 그런 뒤 백관에게 여러 차례 내보이도록 하고 명했다.
“자 어떠냐. 이제 김일경과 목호룡의 생각을 품은 자는 나와서 엎드리라.”
광란의 칼춤을 춘 영조는 소차(小次·행차 도중 임금이 잠시 쉬려고 만든 장막)에서 술에 취해 드러누웠다. 그 사이 취타(吹打·연회 때 울린 연주악)는 계속 울러퍼졌다.
영조는 날이 샐 무렵에야 잠이 깨어 갑주를 입은채 환궁했다. 영조의 시대는 칼부림이 춤춘 광란의 시대였다.
아버지 영조를 향한 효심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15살 때인 1749년부터 13년간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한다. 세자는 소론을 절멸시키라는 노론의 끈질긴 상소를 번번이 기각시켰다. 아버지와 노론세력은 큰 불만을 품었고, 급기야 1752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사도세자, “모두 따르지 않겠다.”
영조는 나주 벽서와 과거시험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소론 소탕령을 내렸다.
이로써 처형된 소론 강경파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소론 온건파도 몰아냈으므로 바야흐로 노론일당독재 체제로 변혔다.
영조는 세제(영조)의 대리청정을 이끈 노론 4대신과 목호룡의 고변으로 사형당한 김용택 등을 충신으로 추켜세웠다.
또 게장은 왕세제(영조)가 아닌 수라간에서 올린 것이라는 인원왕후의 변명이 실린 <천의소감>을 발간했다. 또 노론의 정신적인 지주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종사했다. 이제 소론과 남인은 명맥만 유지됐다. 자신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이른바 ‘임인옥안’도 말끔히 수정됐다.
영조는 그러면서 세자(사도세자)에게 신신당부했다.
영조는 나주 벽서 사건의 국문현장에서 사도세자에게 “앞으로는 너에게 달려있다. 흔들림없이 역적의 무리를 소탕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당시 대리청정 하고 있던 세자는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노론이 소론의 절멸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릴 때마다 “모두 따르지 않겠다”고 번번이 거부했다.
급기야 1756년(영조 32년) 1월17일 사도세자가 “노론의 정신적인 지주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문묘에 종사하고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을 정려하자”는 상소를 거부하고 만다. 무소불위의 일당독재를 이룬 노론은 사도세자의 태도에서 불길한 느낌을 감지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762년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광란의 시대에 걸맞은 결말이 아닌가.(끝)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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