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박' 방영을 계기로 영조와 영조의 이복형 경종, 그리고 이인좌의 난 등 예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리바이벌합니다. 경종과 영조 시대의 갖가지 이야기들을 담아놓은 글입니다. (글이 길어 상 하로 나눴습니다.)
“김일경은 자기 자신을 일컬을 때마다 ‘저(矣身)’라 하지 않고 ‘나(吾)’라 했다.”
1724년(영조 즉위년) 12월 8일이었다. 영조는 즉위하자 마자 소론의 핵심인물 김일경을 국문장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마땅히 고개를 숙여야 할 ‘죄인’ 김일경은 고개를 뻣뻣히 세우고 임금이 당도해 있는 친국장에 들어섰다. 영조가 소리쳤다.
“보기싫다. 저 자의 머리를 덮어 씌우라.”
김일경은 대단했다. 피와 살이 튀는 고문에도 ‘말할 때마다 반드시 선왕(경종)의 충신’이라 했다. 더구나 자신을 일컬을 때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
그 스스로 경종의 신하이지, 영조의 신하가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영조가 “네가 부도(不道)했음을 자백하라”고 추궁했다. 그러자 김일경이 일축했다.
■“난(吾) 경종의 신하요. 시원하게 죽이시오.”
“난 성품이 원래 충직해서 부도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김일경은 영조의 폐부를 깊숙히 찌른다.
“지금 즉시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선대왕(先大王·경종)의 빈전(殯殿)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서 죽는다면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해보라.”
“이미 충곡(衷曲·간절한 마음)한 말을 다했으니, 달리 진달할 바가 없습니다.”
김일경은 더욱이 “나의 한평생 독서는 옛 군자(君子)를 배우려는 것이었다”면서 “어찌 자신이 사지에 빠졌다 하여 한평생 지키던 바를 잃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내 스스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自視靑天白日)”면서 “시원하게 죽여달라”고 공언했다.
결코 선왕(경종)을 향한 지조를 버릴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자 영조가 펄펄 뛰며 분한 마음에 눈물까지 흘렸다.
영조는 그 말에 기막힌 듯 “저 자를 죽인들 과인의 마음이 시원하겠느냐”면서 “지극히 음흉하고 참혹한 자가 아니냐”고 가슴을 쳤다.
이날 역시 국문장에 끌려온 41살의 목호룡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지독한 형신에 시달렸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저를 도마 위의 고깃덩이로 생각하며 죽을 운명이라 합니다. 고(告)한 자는 죽는 법이라니, 장차 고한 자로서 죽을 겁니다. 그러나 흉심(凶心)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종사(宗社)를 위했던 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죄는 없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영조가 기막힌듯 “네가 종사를 위했다는 죄는 내(영조)가 역적을 비호했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목호룡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부지(扶持)하고 전하(영조)의 심사를 만세에 밝혔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대왕(경종 때) 임금을 독살하려 한 역모를 고한 공로로 공신이 된 자신을 이렇게 혹독하게 죽이려는 이유가 뭐냐고 항변한다.
“회맹단의 삽혈(삽血·공신이 된 후의 서약식에서 바르는 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군졸 이천해의 막말, “국가가 무도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 여가 지난 1725년(영조 1년) 1월 16일, 영조의 어가가 이교(종로 5가에 있던 다리)를 지날 때였다.
웬 군졸(軍士) 한 사람이 가로막고 임금에게 갖은 ‘흉언’을 퍼부었다. <영조실록>을 보자.
“형조 참의 박성로가 상언했다. ‘이천해의 말은 오늘의 신하된 자가 들을 수 없는 바이기 때문에 차마 붓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非今日臣子所可聞 故不忍자筆)’”
한낱 군졸의 신분으로 지존인 임금에게 무슨 막말을 퍼부었기에 ‘붓으로 차마 쓸 수 없을 정도’였을까.
화가 난 영조가 신하들과 나눈 격정토로에서 ‘이천해 흉언’의 ‘대강’이 나온다. 영조는 이천해가 ‘고자(告者·남의 잘못을 고하는 사람)’이라고 자칭한 것에 열을 받았다.
“그 자가 실성했다지만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 그 자가 자칭 ‘고자’라 하는 말을 도승지도 들었지 않은가.”
영조는 이천해가 뱉은 또 하나의 흉언을 언급했다. 이천해가 “국가가 이토록 무도할 수 있느냐”고 지껄였다는 것이다.
영조는 기가 막혔다. 그는 “죄인의 흉악한 말은 문서에 쓰지 마라”고 명했다. 사관(史官)에게도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으니 역사서에 쓰지 마라”고 엄명을 내렸다. 중요한 것은 한낱 군졸의 신분인 이천해가 극심한 고문에도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천해에게 24번이나 압슬(壓膝)을 가했다. 그럼에도 이천해는 불복(不服)하였고, 심지어 아프다는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영조는 ‘이처럼 흉악하고 사나우니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며 혀를 내둘렀다.”(<영조실록>)
압슬형이 무엇인가. 죄인의 무릎 아래 사금파리 등을 깐 뒤 무릎 위에 압슬기를 놓고 누르거나 무거운 돌을 얹어 고통을 주는 고문기법이다.
이천해는 그런 지독한 고문을 24차례나 참아내면서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 지독한 모습을 지켜본 영조가 이천해 사건을 계기로 ‘압슬형’을 폐지했다니….
“이천해가 흉악하고 사나와서 견뎠겠지만 다른 사람이야 어찌 견디겠느냐. 과인이 보기에도 참혹했다. 이후에는 압슬형을 없애라.”(<영조실록> 1725년 1월 28일)
■20만명의 봉기, ‘조정에 간신이 가득합니다.’
어디 이뿐이랴. 1728년(영조 4년) 그 유명한 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큰 위기에 빠졌다. 영남에서만 7만명, 전국적으로 20만명이 가담했다.
이것은 임금을 겨냥한 민심의 배반을 뜻했다. 이 때 난을 이끈 이인좌가 “(반란군의)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석으로 곡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당의통략>)
그로부터 27년이나 흐른 1755년(영조 31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급히 장계를 올렸다.
나주 객사에 이른바 ‘흉서(凶書)’가 걸렸다는 것이었다. 대대적인 범인 색출에 나섰다. 가뜩이나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신축년(1721년·노론 4대신 등 노론이 쫓겨난 사건)과 임인년(1722년·목호룡 고변사건) 때의 잔당과 무신년(1728년·이인좌의 난)의 잔적들로서 번성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이 나라를 원망함이 심각하고 근거없는 말이 날마다 일어났는데, 이 때 흉서가 걸렸다.”
흉서의 내용은 그야말로 흉(凶)했다. 워낙 참담한 표현이어서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장계를 받아본 영조는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황건적 같은 무리로구나.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의 잔당이다. 그러나 과인은 무신년 때도 동요되지 않았다.”
이같은 일이 다반사이니 걱정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어찌보면 의연하게 대처하려는 영조의 여유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혼란한 시대였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어쨌든 대대적인 수사 끝에 괘서(흉서)를 내건 일당이 붙잡혔다. 주범은 윤지라는 인물이었다.
윤지는 영조의 즉위년인 1724년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 윤취상의 아들이었다. 윤지는 무신년의 난(이인좌의 난) 때 제주도를 거쳐 나주로 유배됐다가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는 고문을 받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조는 분을 참지 못하고 대역죄의 형벌로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집을 헐어 그 자리에 연못을 파는 형벌을 받고 말았다.
■“당신은 이복형을 죽였어!”
영조로서는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도저히 풀려날 수 없는 과거의 족쇄에 얽혀있었으니 말이다.
김일경이나 목호룡이 “영조 당신은 나의 임금이 아니니 빨리 죽여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인좌는 선왕(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에 20만명이나 되는 민초들이 가담했을까. 또한 한낱 군졸의 신분이었던 이천해는 왜 지존인 임금을 향해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흉언을 퍼부었을까.
모두 “영조 당신은 이복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자야!”라고 외쳤던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 모든 사건은 이미 아버지인 숙종 때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3번의 환국(換局·정권교체)으로 정국을 요리했다. 말이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환국이지 피바람을 몰고온 친위쿠데타였다.
이 와중에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등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을 핍박해 죽이거나 죽도록 만들었고, 수많은 대신들을 살해했다.
임금이라는 사람이 정쟁놀이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3년 내내 대기근에 발생,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숙종실록> 1697년 4월22일)고 한다.
■잇단 환국…천신만고 끝에 보위에 오른 경종
숙종이 남인을 서인 정권으로 복귀시킨 이른바 경신환국을 단행한 것이 1680년이었다.
이 때 축출된 남인의 처리를 놓고 강경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온건파인 윤증의 소론으로 나뉜다.
그러나 서인의 정권도 10년을 채우지 못했다. 숙종은 희빈 장씨를 앞세운 남인 세력에게 정권을 다시 넘긴다. 이것이 1689년(숙종 15년) 일어난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으로 송시열 등 서인 100여 명이 사형·유배·삭탈관직 등의 정치보복을 당한다.
하지만 숙종의 변덕으로 남인정권은 5년을 넘기지 못한다. 1694년(숙종 20년) 다시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를 앞세운 서인에게 넘긴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은 완전히 몰락했지만, 이제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본격화한다.
절대 다수를 차지한 노론은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영조)을, 소론은 희빈 장씨의 아들이자 숙종의 맏아들인 세자(경종)를 각각 지지했다.
노론으로서는 절박했다. 세자가 등극할 경우 어미(장씨)의 한풀이를 한다며 정치보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예가 있지 않은가. 노론은 연잉군을 절대 지지할 수밖애 없었다.
그러나 노론의 음모는 실패했다. 숙종이 64세의 나이로 승하하자(1720년) 세자가 보위를 이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집권당인 노론은 임금이 된 경종을 무자비하게 핍박했다.
1721년(경종 1년) 8월20일 정언 이정소가 “임금이 춘추 왕성한데 (생식기능이 없어) 후사가 없다”며 “빨리 나라의 대본(후사)을 생각해야 한다”고 감히 상소를 올린 것이다.
당시 경종의 나이 33살이었고, 부인 선의왕후는 춘추 16살이었다. 이정소의 말마따나 임금의 춘추가 왕성한데 무슨 세자를 논하는가. 이것은 명백한 반역이었다.
■경종, 친정체제 구축하다
노론측이 전전반측한 까닭이 있었다. 경종이 마침 양자를 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경우 새로 들일 양자가 경종의 뒤를 이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노론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노론측은 “선왕(숙종)의 골육은 금상(경종)과 연잉군(영조)인데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는 대비(인원왕후)의 한글교서를 내보였다.
결국 연잉군은 왕세제로 책봉됐다. 노론 측은 이에 그치지 않고 경종을 더욱 압박했다. 왕세제(연잉군, 곧 영조)의 대리청정을 촉구한 것이다. 사실상 양위선언을 촉구한 것이다. 이 때부터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경종 역시 세제의 대리청정 요구를 받아들였다가 철회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갈짓자 행보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의 4대신이라 일컬어지는 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 등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촉구하는 데 선봉에 섰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왕세제의 대리청정은 경종의 최종 판단에 따라 ‘없던 일’로 결정됐다. 경종 역시 이복동생(연잉군)에게 사실상의 양위를 뜻하는 대리청정을 명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승기를 잡은 소론 가운데서도 강경파는 ‘이 참에 노론을 쓸어버리자’면서 대대적인 노론잡기에 나선다.
1721년(경종 1년) 12월 6일 김일경 등 소론 측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한 ‘노론 4흉(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은 삼강오륜과 군신유의를 저버린 적신(賊臣)”이라며 그들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노론의 핵심인물들을 ‘4흉(凶)’, 즉 역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경종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경종은 “상소의 내용을 가납한다”고 하면서 상소를 올린 김일경 등을 이조참판으로 전격 제수했다. 또 노론 측 고위인사들을 줄줄이 경질시켰다. 그런 뒤 소론 최석항과 이광좌, 이조, 김연을 병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로 차례로 임명했다.
우유부단하는 듯 했던 경종이 마침내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역사는 신축년에 벌어진 이 날의 환국을 ‘신축환국’이라 일컫는다.
■“연잉군 당신이 성상(경종)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722년(경종 2년) 3월 27일 정국을 피바람으로 몰고온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이름하여 목호룡의 고변사건이다. 이 고변사건으로 노론 세력이 초토화된다. 이를 임인옥사라 한다.
목호룡이 누구인가. 그는 종친 청릉군의 노비였지만 연잉군(영조) 인척의 장지를 정해준 대가로 평민이 된 ‘풍수가’였다. 원래 연잉군 편이었지만 신축환국(1721년)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소론 쪽으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그는 둔갑술을 가르쳐준다면서 연잉군의 측근 및 노론의 젊은 세력들에게 접근했다. 그는 이들과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런만큼 그의 고변은 끔찍했다.
“성상(경종)을 시해하려는 자들이 있어, 혹은 칼로, 혹은 독약으로, 혹은 폐출로 모의한다고 합니다. 이는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목호룡은 그러면서 “역적 중에는 동궁(왕세제 영조)을 팔아 씻기 어려운 오욕을 끼치려 한 자가 있다”면서 “동궁은 빨리 누명을 씻어 국본을 안정시키라”고까지 했다.
겉으로는 동궁(영조)에게 '빨리 누명을 벗으라'고 촉구한 것이지만, 결국 역모의 수괴는 바로 왕세제, 바로 당신이라고 지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호룡은 역적 일당의 이름들을 줄줄이 대면서 그들의 역할까지 아주 자세히 고했다. 지목된 인사들은 이른바 노론 4대신의 자제들을 포함한 노론 세력들이었다.
■경종 시해 3단계 방법
왕세제의 최측근인 백망과, 왕세제의 처조카인 서덕수 등도 핵심인물로 등장했다. 목호룡은 경종 시해의 3단계를 ‘3수(三手)’라 칭했다.
“칼로 시해한다는 것은 선왕(숙종)의 장례식 때 궁궐로 넘어가 대급수(大急手)를 행하는 것이고, 약으로 시해하는 것은 상궁을 시켜 음식에 독약을 타서 시해하는 소급수(小急手)이며, 폐출을 모의하는 평지수(平地手)는 숙종의 국상 때 언문으로 세자(경종)을 무고하고 헐뜯는 가사를 지어 궁중에 유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평지수’의 방안으로 ‘세자(경종) 모(某)를 폐위시켜 덕양군으로 삼는다(廢世子某爲德讓君)’는 거짓교서까지 꾸밀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더욱 기절초풍하게 만든 것은 경종 즉위년(1720년) 실제로 경종 독살이 시도됐다는 것이었다. 즉 “경종 즉위년(1720년)에 실제로 반년간이나 경영된 것”이라 폭로한 것이다.
실제 경종 독살사건이 시도됐다는 자백이 나왔다. 1722년 8월 노론 김창집의 친족인 김성절이 3번의 형문 끝에 쏟아낸 자백을 보라.
“예. 장씨라는 역관이 독약을 사서 가져왔으며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성궁(聖躬·경종)에게 시험삼아 약을 썼습니다.”
그러나 독약이 약해 제대로 듣지 않고 임금이 토하는 것으로 끝나자 노론 이기지 등은 “이 약은 맹독이 아니다. 은화를 모아 더 강한 독약을 사와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자백에 따라 경종 즉위년(1720년)의 <약방일기>를 모두 찾아보았다. 과연 1720년 12월 14일 경종이 ‘거의 반 대야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담수(淡水)를 토했음이 확인됐다. 그 색깔 또한 좋지 않았다고 <약방일기>에 기록돼 있었다. 이 일기를 토대로 약방제조 한배야가 경종에게 물어보았다.
“(문제의 그 날) 수라를 드신 뒤 즉시 구토하셨습니까.”
“그렇다.”(임금)
“그렇다면 그 날짜 당일의 수라간 나인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자를 조사한다면 독약을 올린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범인 색출은 시간문제였다.(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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