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대혈(탯줄 속 혈액)을 보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2015년 제대혈 보관건수가 60만건에 달했다지요. 제대혈에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을 만드는 조혈모 세포가 풍부하고 연골·근육·뼈·신경 등을 만들 수 있는 간엽줄기세포가 다량 함유돼있어서 백혈병 같은 혈액질환과 뇌성마비 및 발달장애 치료에 활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제대혈 보관은 신라시대부터 면면이 이어온 안태의식, 즉 태를 묻는 의식과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태를 묻는 의식은 중국에는 없었던 우리 고유의 풍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왜 그렇게 태를 묻는데 정성을 쏟았던 걸까요. 태를 어떻게 생각했기에 그렇게 신주 단지 모시듯 했을까요. 한가지 더. 조선조 영조 임금은 왜 도승지(비서실장)를 불러 ‘내가 하는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그대로 써서 교서로 반포하라’고 했을까요. 이번 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87회는 ‘우리 조상들은 왜 탯줄에 목숨을 걸었을까’입니다.
중국의 예법을 신주모시듯 했던 조선에서 단 한가지 중국을 따르지 않은 풍습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胎)를 묻는 풍습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저간의 사정이 나온다.
“태를 묻는 풍습은 신라-고려부터 시작됐다. 예로부터 중국의 풍습이 아니다.(非中朝古方也)”(<선조수정실록>)
이 무슨 기록인가. 즉 1570년 선조 임금이 즉위한지 3년이 되던 해 조정에서는 임금의 태(胎)를 다시 잘 묻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임금이 즉위하면 왕자나 세자 때 묻었던 태를 다시 꺼내 좋은 자리에 묻는게 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자리를 찾는다는 게 쉽지 않았다. 처음엔 강원도 춘천의 길지를 찾아 공사를 벌이던 중 바로 그 자리에서 누군가 예전에 태를 묻었던 흔적을 발견했다. 공사가 즉시 중단됐다. 다시 황해도 강음(금천)에서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터를 닦다가 정혈에서 몇십보 떨어진 자리에서 예전에 누군가 묻어두었던 작은 항아리를 또 발견한 것이다. 황해도 관찰사인 구사맹은 “아니 정혈도 아닌 곳에 작은 항아리 하나 묻혀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거대한 공사를 중단할 수 없다”면서 공사를 강행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난리가 났다. 사헌부가 “구사맹을 불경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앙앙불락했다. 결국 구사맹은 파직됐다. 급기야 세번째 자리를 찾아야 했던 선조의 태는 임천(충남 부여) 땅에 묻게 됐다.
■인생만사가 다 탯줄에 달려있다
이 기사에서 태를 묻는 것이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진 고유의 풍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태는 왜 묻는가. <태장경>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문종 즉위년(1450년) 때의 일이다. 당시 경상도 성주에 있던 세자(단종)의 태실이 기울어져 있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론이 일자 <태장경>이 인용됐다.
“<태장경>이 이르기를 ‘사람이 태어날 때는 탯줄로 인해 장성하게 되고. 현명할 지 어리석을 지(賢愚), 잘될 지 못될 지(盛衰)가 모두 탯줄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탯줄은 신중히 다뤄야 합니다.”(<문종실록> 1450년 9월8일)
<문종실록>은 이어 “탯줄이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구경(9개 유교경전)에 정통하며, 원만하고 마음이 밝으며, 병이 없게 되고,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미 세종 때인 1436년에도 음양학에 정통한 정앙 역시 임금의 탯줄을 길지에 다시 묻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린 바 있다.
“남자는 15살에 태를 간수하게 된다. 학문에 뜻을 두고 혼인할 나이를 기다리는 것이다.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들이 우러러 보게 된다.(欽仰) 길지는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바치는 듯 해야 한다.”(<세종실록> 1436년 8월8일)
여기서 말하는 길지는 평지에 젖무덤처럼 봉긋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를 가리킨다. 왕실의 태실은 바로 봉우리 정상의 젖꼭지 부위에 자리잡는다. 이런 곳을 찾아 태를 묻어야 남자나 여자나 반듯하고 예쁘게, 남들이 우러러보는 존재로 출세한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없었던 풍습
<선조수정실록>이 언급했듯 태를 고이 묻는 풍습은 신라 때부터 시작됐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의 탯줄을 높은 산에 묻었는데, 지금(고려)도 이 산을 태령산(胎靈山)이라 일컫는다”고 기록했다. 나아가 <고려사>는 “김유신의 태가 신으로 변했고(化爲神) 통일이후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고려 때까지) 혁파되지 않았다”고 했다. 태가 신으로 변한다는 믿음으로 신령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신라시대 도의 선사의 태를 안장한 기록도 남아있다. 도의는 821년 중국의 남종선(형식적인 일체의 형상과 의례를 배척하고 오로지 자기 스스로에게 서약하고 귀의하는 것을 수행의 기본으로 하는 선종의 일파)을 신라에 전한 승려다.
“도의 선사는 본래 왕씨였다. 선사가 태어났을 때 어떤 신비로운 승려가 나타나 선사의 태를 강가의 언덕에 묻으라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태를 묻으려 하니 큰 사슴이 와서 지켜주었다. 사슴은 그 해가 다가도록 떠나지 않았다.”(<조당집>)
바로 신생아의 운명이 신비로운 승려(異僧)의 불법에 의해 좌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가 아기의 평생 운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준 기록이다. 신령스러운 동물인 큰 사슴(大鹿)이 1년 내내 태가 묻힌 곳을 지키고 있었다는 얘기는 바로 안태 장소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고려 때도 ‘태를 묻는 기록’은 적지 않다. 문헌상 확인되는 임금만 해도 태조 왕건, 인종, 신종, 강종, 원종,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 공민왕, 우왕, 창왕 등에 이른다. 특히 고려시대 과거에서는 잡과의 지리업 시험과목 가운데 태장경이 들어있었다. 풍수지리의 술법 가운데 태장경이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고려말 조준(1346~1405)은 “신우(우왕)와 신창(창왕)의 태실을 파헤쳐 없애자”면서 무시무시한 상소문을 올린다. 즉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과 손자이므로 마땅히 태를 묻은 태실을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태실의 파괴는 곧 조상과 이어지는 핏줄을 끊는다는 뜻이었다. 훗날 조선의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등된 후 태실이 철거되는 아픔을 겪는다.
■성화봉송식 같던 안태의식
이렇듯 조상들은 태를 어머니가 태아를 키워낸 생명줄로 여겼다. 즉 ‘사람의 현우, 성쇠가 모두 탯줄에 달려있다’고 믿었으니 아무렇게나 처리할 수 없었다. 특히 왕실의 현우성쇠(賢愚盛衰)와 수복이 나라와 백성의 운세라 여겼기에 왕자의 태는 끔찍하게 관리됐다.
즉 궁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태를 항아리에 담아 산실의 길한 방향(吉方)에 보관해둔다. 삼일이 지난 뒤 이레 안에 태를 씻는 날짜, 즉 세태일을 정한다. 세태일이 되면 의녀가 태항아리를 들고 나와서 질자배기에 옮겨담는다. 그런 다음 월덕(月德) 방향의 샘물을 떠다가 100번 씻은 뒤 술로 다시 씻어 태항아리에 넣는다. 태항아리의 바닥 한 복판엔 개원통보 한개를 놓는다. 왜 개원통보인가. 개원통보는 당나라 현종 때 주조한 동전이다. 현종의 초기 치세를 뜻하는 ‘개원의 치’(713~741년)는 태평성대의 상징이다. 태항아리 바닥에 개원통보를 넣은 이유는 분명하다. 갓 태어난 세자에게 훗날 개원지치를 방불케하는 태평성대를 일궈달라는 희망을 전한 것이다.
잘 보관한 태항아리는 보통 5개월 이내(공주는 3개월)에 태실을 선정해서 정중하게 봉안한다. 안태의식은 자못 성대했다. 마치 요즘 올림픽의 성화봉송의식을 방불케했다.
“악대를 앞세운 안태사(행사를 주관하는 관리)의 봉송행렬이 지나는 고을마다 화려한 행사를 베푼다. 채색누각을 세우고 나희(산대놀음)을 베푼다. 고을마다 태항아리를 정청에 안치하고 관찰사를 비롯해 현지 관리들이 모두 나와 공복차림으로 절을 두번 올린다.
■안태의 폐해는 조선의 병폐였다
왕조와 백성의 번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어온 풍습이었지만 이런저런 폐단이 많았다. 우선 봉송행사를 이끄는 안태사의 행차가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농번기에 화려한 봉송행사를 펼치는 것은 아무래도 백성들을 고달프게 만들 뿐이었다.
“1438년(세종 20년) 세종은 ‘안태사가 지나가는 각 고을은 너무 화려한 행사를 펼치지 말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각 고을마다 채색누각을 세우고 화려한 행사를 펼치느라 경기·충청·경상 등 3도의 백성들이 농사를 폐할 정도로 바쁘게 되어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세종실록>)
이 글의 맨처음 인용한 <선조수정실록> 기사의 본질은 역시 안태의 폐단을 낱낱이 고하는 것이었다. 임금의 태를 묻는다면서 세번이나 장소를 바꾼 것을 개탄한 내용이었다.
“(강원도 춘천-황해도 강음-충청도 임천 등 세번이나 안태장소가 바뀌었다.) 굶주린 백성들이 돌을 운반하는데 동원되어 성태(聖胎·임금의 태)를 묻은데 그 피해가 3개 도시에 미쳤다. 식자들이 개탄했다. 길지를 고르려고 심지어 사민들의 무덤을 모두 파헤치고 혈을 정하는데 이것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늘의 도리를 비추어봐도 근거가 없다.”(<선조수정실록>)
즉 안태의식에 동원되는 인원도 문제이거니와 조달해야 할 잡물 또한 엄청났으니 그 피해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금표를 만들어 그 구역 안에서는 농사도 짓지 못하게 했으니 백성들로서는 죽을 노릇이었다. 출입금지 거리는 자그만치 200(대군)~100보(왕자)였다. 게다가 안태한 곳에 산불 차단을 위해 나무와 불을 불살라버리는 이른바 화소지역까지 두었다. 대략 200보였다. 그곳에서 벌목을 하거나 장례를 치르면 처벌을 받았다. 그러니 태실로부터 200~300보가 졸지에 금단의 땅으로 바뀐 것이다.
예컨대 1670년(현종 11년) 두 공주의 태를 봉안할 때 백성의 전답 일부가 금표 안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관둔전(각 지방의 운영 경비를 보조하려고 국가가 마련해준 토지)으로 보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전한 <현종개수실록>의 사가는 “이같은 조선의 풍속 폐단에 식견있는 자들은 병통으로 여겼다”고 개탄했다.
“꼭 들판 한가운데의 둥근 봉우리를 택해서 태를 묻고 태봉이라 한다. 그곳에 표식을 하여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하는 것을 금지한다. 성상(임금)부터 왕자와 공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봉이 있으니 이같은 풍속의 폐단에 대해서 식견있는 자들은 병통으로 여겼다.”
참으로 통렬한 자아비판이다. 그렇지만 그런 안태의 폐단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88년 후인 1758년(영조 34년) 영조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듯 도승지를 불러 “내 말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하라”면서 직접 입으로 부른 교서를 반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것이 입으로 쓴 ‘태봉윤음’이다. 영조는 우선 “지금 태 하나를 묻는데 고을 한 곳을 사용하니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개탄한다. 그러면서….
“태 하나에 고을 한 곳은 절대 안된다. 형의 태봉 아래에 아우의 태를 묻고, 손위 누이의 태봉 아래 손아래 누이를 묻으면 된다. 산 하나에 차례차례 묻어라.”(<영조실록)
즉 아우의 태를 형의 태봉 아래 묻고, 손아래 누이를 손 위의 누이 태봉 아래 묻는다는 것이다. 또한 한 산등성이가 다하면 다른 산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그 산 안에 또다른 산등성이를 이용하라 했다. 묻는 간격도 2~3보를 넘지 못하게 했다.
정조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1790년(정조 14년) 6월24일 원자(순조)의 태를 묻을 때 “절대 백성들에게 누를 끼치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백성과 고을에 폐를 끼칠 수 있는 모든 일을 심사숙고하라. 전례를 상고해서 되도록 검소하게 치러라. 이것 역시 국운이 영원하기를 비는 뜻에서 나온만큼….”
정조는 안태의식도 국운융성을 기원하는 뜻에서 펼치는 것이지만 백성과 고을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정조는 특히 동원된 백성들에게 저치미(儲置米·국가비축미)를 품삯으로 지급하고 필요 이상의 인원을 부리지 말도록 했다. 또 해당 고을이 부담해왔던 갖가지 물품조달 역시 저치미를 사용하도록 했다.(<(순조)원자아기씨안태등록>) 정조 임금의 말마따나 아무리 뜻이 좋으면 무엇하는가. 정조는 백성을 고달프게 만드는 일체의 행위는 결국 나라의 안녕에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태는 남몰래 묻은 까닭은
왕실 뿐 아니라 사대부들도 태를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태를 잘 묻어두었던 왕가와 달리 사대부들의 태는 주로 불에 태웠다.
“보통 사대부 집안의 남·여아의 태는 죄다 불에 태웠다”는 <중종실록> ‘1517년 11월23일’의 기록이 있다. 이 대목을 잘 설명해주는 기록이 있으니 바로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와 <양아록>이다. 즉 이문건의 손자 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자세히 기록한 자료다.
“(1551년 1월6~18일) 여자 종들로 하여금 태를 가지고 천변에 가서 깨끗이 씻은 다음 항아리 속에 담아 기름종이로 쌌다. 생기의 방위인 동쪽에 매달고 태를 풀 위에 놓고 태웠다. 태운 것을 핏물 속에다 채우고 땅에 묻고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남자 종들에게 “태항아리를 북산에 묻으라”고 했는데, 이들이 잘못 듣고 남산에 가서 묻은 것이다. 이문건은 이 점에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다시 남자 종들에게 “태항아리를 다시 가져오라”고 시킨 뒤에 이것을 다시 남몰래 북산에 묻도록 했다. 이문건은 을사사화(1545년)에 연루돼 23년간 경북 성주땅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성주의 조곡산에는 태종의 태가, 신석산에는 세조의 태가 나란히 봉안돼있다. 아마 이문건이 불에 태워 몰래 봉안한 손자의 태는 세조의 태가 있는 신석산 일원일 가능성이 크다. 이문건은 필시 임금의 태가 묻힌 곳 인근에 손자의 태를 묻음으로써 무병장수와 입신양명을 갈구했을 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다른 사람 몰래 태를 묻는다는 것은 민속학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풍습이다. 민속학에서 안태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인적이 없는 틈을 타서 처리해야 한다. 만약 태를 잃으면 아이가 불행해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불임녀가 몰래 훔치거나 짐슴이 묻어놓은 태를 먹을 때도 있다. 이 경우 아이에게는 열꽃이 피어 오른다는 속설도 있다. 태를 태울 때는 입으로 불어서도 안되고, 불을 쪼여서도 안된다. 덥다거나 냄새난다고 하는 등 말을 일절 해서도 안된다. 살아있는 나무 아래에서 안장하는 경우도 많다. 무성한 나무처럼 잘 자란다는 뜻이다.
■쥐날에 탯줄을 자르면 도둑이 된다
안태의 풍습은 아이의 무병장수와 출세를 염원하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태를 자를 때는 칼이나 가위같은 금속성 도구는 금물이다. 대칼로 잘라야 한다. 자손이 귀한 집안의 경우엔 남편이 이빨로 자르면 좋다고 한다. 어느 지방엔 사내아이는 낫으로, 여아는 가위로 자른다. 도끼로 자르면 큰 인물이 된다는 속설도 있다. 탯줄은 배꼽에서 한뼘 쯤 떨어진 곳을 기준으로 아기쪽으로 세번 훑고 산모 쪽으로 세번 훑은 다음 무명실로 묶고 자른다. 너무 짧게 잘라주면 소변을 자주 본다해서 적당하게 잘라야 한다. 자르는 시간도 반드시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고집하기도 한다. 호랑이가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일(子日·쥐)에 태우면 쥐처럼 숨어다니고 거짓이 많으며, 도둑질까지 배운다고 해서 터부시했다.
태는 때때로 약으로 쓰였고, 떨어진 배꼽은 배냇저고리와 함께 과거나 송사에 효험이 있다고 여겼다. 또 때로는 잘 말려서 가루로 내어 그걸 기름에 개어 종기나 부스럼에 쓰기도 했다. 아이들의 경기에도 좋다고 한다. 어떤 경우엔 태를 독한 술에 담가 땅 속에 묻고 삼년만에 꺼내면 태는 사라지고 노란 술만 남는데 이것은 만병통치약으로 쓰이기도 했다. 태는 대개 지랄병, 간질병, 폐병 등의 중병을 치료하는 데 약으로도 쓰였다.
■일제가 왕실의 태항아리를 도굴·훼손한 까닭
현재 경기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에는 조선왕실의 태실 54위가 안치돼있다. 곳곳에 흩어져있던 태실이 서삼릉으로 옮겨진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1929년 3월1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왕직(일제 강점기에 조선왕실과 관련된 사무일체를 관장한 부서)에서는 각기 명산에 봉안했던 태봉 39곳을 철회해 버리고 태봉 안에 있던 태항아리를 경성으로 이안하여 임시로 시내 수창동 이왕직에 봉안해두었다. 시외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에 있는 서삼릉 역내에 영구히 봉안하기로 하고,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 이안할 예정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태항아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태항아리의 상당수를 도굴 및 훼손한 것으로 파악됐다. 즉 1996년 문화재관리국이 서삼릉 태실 54기 가운데 헌종·경종·인성대군(예종의 아들)의 태실을 표본조사한 결과 헌종·인성대군의 태항아리는 가짜로, 경종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도굴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표본조사에 참여한 문화재위원들은 “일본인들이 조선백자항아리를 의도적으로 꺼내 외부로 유출했음을 알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도그럴 것이 조선인들 중에 왕실의 태실을 감히 훼손·도굴하려는 자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인들은 조상의 혼백이 묻힌 무덤을 파헤칠 꿈도 꾸지 못했다. 게다가 왕실의 태실, 그것도 국왕의 태가 묻힌 신성한 곳을 누가 감히 넘볼 수 있단 말인가.
문화재위원들은 “조선왕조가 신성시했던 태실을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차원에서 강제로 옮기는 과정에서 태실 내의 백자항아리들을 일본을 유출했거나 파기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경향신문> 1996년 3월 16일자)
■어느 군청공무원의 개가
얼마전 태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떴다. 문화재청이 ‘영조대왕 태실 석난간조배 의궤’를 보물(1901-11호)로 지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의궤는 영조의 태실을 만든 경위와 조성방법 등이 기록된 책이다. 영조의 태실은 충북 청주 낭성면 무성리에 보존돼 있다. 그런데 이 보물을 입수하고 지극정성으로 관리해온 어느 공무원의 분투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지금은 청주시 고인쇄박물관에 근무중인 이규상 운영사업과정이 그 주인공이다. 이규상씨에게 의궤를 입수한 전말을 들어봤다.
“1985년 청원군청 공무원으로 임용된 저에게 처음 맡겨진 업무가 문화재 업무였습니다. 그런데 2년 뒤인 87년 어느날 대대로 무성리 마을 이장님이 저를 찾아왔어요. 그 마을 이장은 영조의 태실을 관리해왔던 봉지기 후손이었죠. 그 이장님은 대뜸 ‘다락방에 보관한 책인데 당신이 좀 맡아달라’고 하셨어요.”(이규상씨)
“아니 이장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을까요.”(기자)
“그러게요. 지금도 수수께끼죠. 그 책을 보는 순간 ‘귀한 책이겠구나’ 생각했어요. 표지가 천으로 돼있고 행차 그림하며, 정교한 글자체하며….”(이규상씨)
“그래서 어떻게 관리했어요?”(기자)
“유명한 향토사학자를 찾아갔죠. 술과 밥을 사며 설득했습니다. 한 1년 쯤 걸린 것 같은데 그 분이 풀어놓은 해설본이 한 200장 가량됐어요. 엄청난 분량이었는데…. 의궤라는 걸 알았죠. 태실 위치를 어떻게 정할 거냐 하는 내용도 있었고…. 지방별로 동원된 일꾼과 장인의 인원수가 날짜별로 기록돼있었고….”(이규상씨)
“향토사학자라는 분도 대단한 실력이네요.”(기자)
관리가 문제였다. 이규상씨는 일단 보충자료를 수집해서 이듬해 충북도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했다. 충북도는 1990년 12월 이 의궤를 충북 유형문화재 170호로 지정했다.
“근데 당시 청원군엔 박물관이나 수장고가 없었어요. 그래서 군청 문화공보실의 캐비닛에 보관할수밖에 없었습니다.”(이규상씨)
문화재를 군청 캐비넷에 보관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불과 30년도 안된 이야기인데 꼭 호랑이 담배피울 적 시절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물론 책이 훼손되지 않도록 항습처리는 했습니다. 지금은 청주 고인쇄박물관 수장고로 옮겨갔고….”(이규상씨)
아무리 봐도 신기한 일이다. 그 마을 이장은 왜 대대로 간직해온 의궤를 생면부지의 말단공무원에게 주었을까. 나중에 그 의궤가 문화재, 그것도 보물급인 것을 알았다면 후회하지 않았을까. 이런 속물의 생각이 맴돌았다. 이규상씨에게 물어보니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마을 이장님, 의궤를 저한테 주고 몇 년 뒤에 돌아가셨어요. 그러니 지금은 이 의궤가 어느 집안에서 나온 것인지, 그 후손들도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된거죠.”(이규상씨)
“지금도 어느 집에서 나온 의궤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얘긴가요?”(기자)
“그렇죠.”(이규상씨)
그렇다면 마을 이장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이 귀한 왕실의 자료를 관에서 맡아 보관해달라’며 기증한 것일까. 한 집안의 가보로 만족할 수 없었던 보물이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된 사연이다.
■제대혈과 태의 의미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니 2015년 제대혈 보관 건수가 60만건에 달했다. 제대혈이 무엇인가. 신생아 탯줄 속 혈액을 뜻한다.
출산 때 채취해서 냉동보관했다가 본인이나 가족이 난치병에 걸렸을 때 이식한다는 것이다. 제대혈에는 적혈구·백혈구·혈소판 등을 만드는 조혈모 세포가 풍부해서 백혈병·재생부량성 빈혈 등 혈액 질환에 주로 쓰인다고 한다. 요즘엔 연골·근육·뼈·신경 등을 만들 수 있는 간엽줄기세포가 다량 함유됐다는 점에서 뇌성마비나 발달장애 등의 뇌신경 및 난치성 질환에도 활용된단다. 물론 비전문가라서 얼마나 효능이 있는지는 필자는 잘 모른다.
그러나 신라-고려-조선으로 면면히 이어진 ‘태 사상’이 비과학적이고 허황되기만 한 풍수지리가 아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태는 어머니와 태아를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묶어준 매개체이다. 태는 어머니와 태아 모두의 분신이며 태란 낱말 자체가 근원, 조짐, 처음의 뜻을 갖고 있다. 생명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옛 사람들은 태가 조상의 생명력과 이어져있고, 시신과 혼백은 후손과 닿아있다고 믿었다. 그랬으니 사람의 어리석음과 현명함, 번성함과 쇠함이 모두 태에 달려있다고 한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필영, ‘민속의 지속과 변동:출산의례중 안태를 중심으로’, <민속학> 제13호, 한국역사민속학회, 2001년 12월
육수화, ‘조선왕실의 추란과 안태의 재조명’, <민족문화논총> 제35집,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07년 6월
<조선시대 왕실교육>, 민속원, 2008
김문식·김정호, <조선의 왕세자교육>, 김영사, 2003년
최원석, ‘신산불이의 아이콘, 태봉산’, 경향신문 2014년 10월3일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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