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1577년 8~11월 사이 발행된 선조시대 민간인쇄신문인 조보에 대해 알아봤다.
이 당시의 조보는 딱 100여일간 민간업자가 인쇄·발행·유료배포했다고 해서 유독 관심을 끌만 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의 조보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물론 선조시대의 100여일처럼 활자로 대량 인쇄되지 않고 필사의 형태로 배포되었다.
■“조보는 전쟁중에도 발행됐습니다”
조보가 문헌(조선왕조실록)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조 중종 때였다. 즉 영사 성희안이 중종 임금에게 고한 내용 중에 있다.
“1508년(중종 3년) 신(성희안)이 지난번에 북경을 떠나 요동에 도착했을 때의 조보(朝報)를 보니 논박을 받아 산관(散官·면직)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탄핵을 받아 경질된 신료들의 기사를, 그것도 요동땅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성희안이 본 것이 조선의 조보라면 이미 중종대에 중앙에서 발행한 조보가 중국땅(요동)까지 배달되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조보의 전달시스템이 요동땅까지 구축될만큼 체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15년(중종 10년) 대사헌 권민수는 “모든 국사에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승정원의 직무유기 때문”이라 비판하면서 조보의 국가기밀누설 가능성을 우려했다.
“모든 국사가 비밀이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승정원이 잘 단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책이 결정되면 외부인이 먼저 알고서 ‘오늘은 무슨 일을 의논했다’고 합니다. 어찌 나라의 큰일이 이처럼 비밀이 지켜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중종 임금의 답변이 의미심장했다.
“조보는 예부터 있는 것이다.(朝報之事 自古有之) 그러나 승정원 스스로 비밀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조보란 중종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1597년(선조 30년) 지평 남이신의 언급에도 조보의 역사가 뿌리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선조가 “(국가비밀유지를 위해) 조보를 없앤다”는 명령을 내자 남이신은 “우리나라에서 조보의 유래가 오래되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조보는 난리통에도 발행했고, 임금이 피란했던 시기에도 나왔습니다. 잠시라도 발행을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명나라 장수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조보발행을 중단하면 오히려 중국 장수들의 의심을 살 것입니다.”
전쟁 중에도, 심지어 임금이 도망다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조보는 발행되었다는 것이다.
조보의 호외 형식인 분발(分發)이라는 용어는 태종 때인 1413년(태종 13년)부터 등장한다. 분발은 중요한 사항이 있을 때 이 사실을 조보의 발행 전에 먼저 초안해서 회람하는 일이다.
이 때의 기록은 “사헌부가 이방녹사(吏房錄事·승정원의 하부관리)를 탄핵했는데, 그 이유가 분발을 늦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2월16일의 아조(衙朝·매월 6번씩 임금에게 올린 업무보고)에 승정원 서리(이방녹사)가 분발을 늦게 했습니다. 그래서 당상관들은 3엄(嚴·임금의 거둥 때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세 번 치는 북소리)이 끝난 뒤에야 출근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승정원 서리가 늦게 분발하는 바람에 당상관들이 임금과의 대면업무보고에 단체로 지각했다는 것이다.
■조보의 기자는 승정원 7급 공무원
이미 밝혔듯이 조보는 일종의 관보라 할 수 있다.
임금의 전교와 담화, 유생과 관료들의 상소문과 임금의 답변, 관리들의 임면, 중앙 및 지방 관서에서 올라오는 각종 보고서 등 모든 정사업무를 소개했다. 이외에도 천재지변과 기문기사(奇聞記事·가십)도 실었다. 조보를 발행한 관서는 국왕의 비서조직인 승정원이었다.
특히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이들은 주서(정 7품) 2명과 가주서 1명이었다. 기사작성 같은 실무는 주서 및 가주서가 담당했고, 총책임자인 도승지가 감독했다. 언론사의 기자가 기사를 쓰고 데스크의 손을 거쳐 편집국장 책임아래 보도하는 식이었다.
물론 사헌부와 사간원 등의 서리들도 조보의 편집에 일정부분 간여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렇게 선별 편집된 기사를 기별청(조보소)에 붙이면 각 관청에서 파견된 기별서리가 조보의 내용을 베껴오면(필사) 기별군사들이 해당부처에 배포했다. 그렇다면 각 지방관청에는 누가 배달했을까. 중앙과 지방의 사무연락을 위해 지방 수령이 파견해둔 아전인 경주인(京主人) 등이 담당했을 것이다.
■“악필 기자를 경질하소서!”
원고지에 손글씨로 기사를 써서 넘겼던 1990년대 이전까지 ‘악필 기자’는 원성의 대상이었다.
데스크와 편집자, 교열자는 괴발개발 무슨 글자인지 모르게 흘린 기사를 보고 비명을 지르기 일쑤였다. 만약 조선시대였다면 그러한 악필기자는 ‘글씨를 못쓴다’는 이유로 경질되었을 것이다. 1600년(선조 33년) 사헌부가 승정원 가주서 이형원을 탄핵했다. 이유는 ‘졸필’이라는 것이었다.
“가주서 이형원은 비밀스런 조보를 졸필로 어지럽게 글씨를 썼습니다. 도대체 해득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기자의 임무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경질하소서.”
주서와 승지 뿐이 아니었다. 조보의 내용을 제때 필사하지 않은 기별서리도 중벌을 받았다. <형전사목>은 “만약 임금의 전교를 다음날까지 조보에 싣지 않거나 판보하지 않을 경우 유배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제때 소식을 알려야 하는 언론인의 사명을 다하지 않은 기자(기별서리)를 엄벌에 처한 격이다.
■‘이것은 오프더레코드다. 발설은 국기문란이다.’
조보와 관련해서 가장 민감한 것은 역시 ‘오프더레코드’ 였다. 임금은 민감한 정치현안에 대해 ‘오프더레코드’를 걸기 일쑤였다.
국가기밀의 누설방지 차원에서 제한한 일도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명나라군과 왜군이 강산을 누볐던 임진왜란·정유재란 때는 더더욱 민감했다.
예를들어 1594년(선조 27년) 선조와 류성룡이 명나라 파병군과 왜군, 그리고 조선의 정세를 두고 폭넓게 의견을 나눴다.
“영상(류성룡)과 과인이 나눈 이야기는 조보에 내지 말아야 한다. 외국인이 알까 두렵다. 적병과 밀통하는 정탐자가 성중에 오갈 수도 있지 않느냐.”(<선조실록>)
1596년(선조 29년) 선조는 작은 관청들이 조보를 베껴 읽게 하는 행위를 일절 금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우리나라의 조보는 누구나 베껴 읽고 있다. 조종조에 이런 사례가 있는가. 비록 군사비밀이 아니어도 국정을 수행하는데 방해된다. 게다가 아직도 서울에는 중국인 관원들이 많이 남아있다. 대체로 중국인들의 속셈은 헤아리기 어렵다. 모든 일을 면밀하게 실필 것이다. 앞으로 큰 관청이라면 몰라도, 작은 관청에서는 조보를 배껴 배포하는 일은 일절 금한다.”
그러나 임금이 ‘오프더레코드’라고 신신당부한 내용을 조보에 게재한 경우도 있었다. 담당 주서와 승지는 당연히 문책을 받았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조선 조정은 명나라 파병군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매사 노심초사했다. 조정에서는 “(정유재란 때 파병된) 명나라 장수 양원의 진노가 풀리지 않았다”느니, “명나라군을 압록강 근처에 주둔시키고 그들의 의중을 살핀다”느니 하는 논의를 한창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이와같은 논의 내용이 조보에 버젓이 게재되었다. 그러자 사간원 헌납 최천건이 조보의 발행처인 승정원의 담당승지를 탄핵했다.
“중국 장수와 관련된 이야기는 비밀에 부쳐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조보에 실려 외부에 전파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부당한 짓입니다. 담당 승지를 문책하소서.”
자칫 명나라 장수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걸어놓은 ‘오프더레코드’를 어떤 기자(승정원 주서)가 깬 것이다.
■보도지침을 어긴 죄
광해군 역시 보도지침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했다.
“1619년(광해군 11년) 광해군이 ‘지금 이후로 서궁과 저주에 관한 일은 조보에 내지 마라’고 지시했다.”
서궁(西宮)은 광해군에 의해 쫓겨난 폐비 인목대비가 유폐된 덕수궁을 일컫는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인목대비전 소속 궁녀들이 선조의 첫번째 정부인인 의인왕후의 능에 뼈를 묻고 잘라낸 고기점에 임금의 이름을 써서 까마귀와 솔개에 먹였다’는 바로 그 저주 사건을 일컫는다.
광해군 대신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옹립하기 위한 저주였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자신이 폐한 인목대비 이야기는 물론 저주니 뭐니 하는 민감한 이야기들이 조보에 통해 알려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했다.
떠오르는 신흥국 후금과 기존의 명나라 사이에 줄타기 외교를 벌이던 광해군은 국경에서 올라오는 보고 역시 조보에 내지 말라고 보도를 통제했다.
또 중국이 파견하는 사신에게 미주알고주알 조선 국내의 사정을 알릴 필요가 없다면서 숨겨야 할 일은 절대 조보에 게재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럼에도 지금의 기자격인 승정원 주서가 뭘 믿고 그랬는지 임금이 중국사신을 맞이하면서 내린 지시사항을 모두 조보에 실었다.(1619년 8월12일) 광해군의 진노가 하늘을 찌른다.
“비밀에 붙일 일은 조보에 내지 말라고 한 두 번 지시한 것이 아닌데…. 중국 사신과 관련된 과인의 지시사항이 모두 조보에 났다는 구나. 이는 임금의 명을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느냐. 해당 주서를 문책하라.”
■왜적에 조보를 팔아넘긴 자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보도지침이 지켜지지 않았다.
수습기자격인 신입 승정원 주서가 보도지침을 아랑곳하지 않고 국가기밀사항까지 모두 조보에 냈다.
광해군은 “제발 좀 내 말 좀 들어라. 담당 승지는 관리감독 좀 철저히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백금 50~60량을 받고 관리의 임면 내용까지 실은 조보를 왜인에게 팔아넘기는 자들이 있었다. 역시 광해군 때의 일이다.(광해군 13년 1621년)
“듣자하니 간사한 모리배들이 조보를 백금 50~60량을 받고 왜인에게 팔아넘긴다고 한다. 경상감사는 이러한 무리들을 철저히 단속하라.”(<광해군일기> 1621년)
■오프더레코드까지 조보에 실은 승정원 주서
인조 때도 마찬가지다. 1632년(인조 10년)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계비) 승하한 인목대비의 처소에서 비단백서 3폭이 발견됐다. 놀라운 내용이 적혀있었다.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폐할 임금이 누구이고, 새로 세울 임금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따지고보면 이미 10년 전 폐위된 광해군과 그때 등극한 인조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못난 인조는 ‘분명 인목대비가 나를 폐하려고 저주를 걸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인조는 인목대비의 측근이자 선조의 후궁이던 귀희와 상궁 옥지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했다. 인조는 두 여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전교를 쓰면서 특정 부분에 부표, 즉 표시를 해두었다.
“과인이 내린 두 여인에 대한 사형 판결문에 다소 거북한 내용이 들어 있어서 특별히 표시해 해두었다. 뭔가 깊은 뜻이 있어 표시해준 것이다. 그런데 승정원의 승지가 그 표시를 살피지 않고 아무런 여과없이 조보에 게재해버렸다. 기별 서리들이 조보를 베껴 배포했다. 부당한 일이다. 해당 승지를 철저히 조사하라.”
임금이 왕실과 관련된 민감한 사형판결문을 내리면서 ‘이 부분은 보도하지 말라’는 뜻의 표시를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보를 담당한 승정원 주서가 이를 감안하지 않고 모조리 판결문을 조보에 게재했다는 것이다.
■날마다 실리는 기상이변소식
요즘도 방송이나 신문에 날씨가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지만 하늘만 바라보고 살았던 옛 시대에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기상이변이 일어나면 농사를 망치게 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유교 사회에서는 특히나 자연재해를 하늘이 내리는 심판으로 여겼다.
1657년(효종 8년) 찬선 송준길이 효종 임금에게 “기상이변이 잦으니 주상께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면서 조보에 실린 날씨기사를 언급한다.
“신이 서울에 들어온지 오래되었사온대 날마다 조보에 천변(기상이변)의 기사가 실립니다. 그 중에는 사소한 변고도 있지만 태백성(금성)이 낮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심상치 않습니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면 두어달 사이에 반드시 큰 사고가 일어난다는 옛말이 있지 않습니까.”
송준길의 언급을 곱씹어보면 조보가 매일 발행되었고, 또 기상이변 기사가 빠짐없이 실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색을 삼가라”는 기사까지 실렸다
조보에는 별의별 소식이 다 실렸다.
지금도 극비사항으로 치부될 것 같은 국왕의 건강상태까지 미주알고주알 조보에 실린 것 같다. 1572년(선조 5년) 율곡 이이의 상소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이이)이 서울에 있으면서 조보를 보니 ‘옥체(선조)의 건강이 조화를 잃어 약을 써도 효과가 없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기사를 읽고 신은 걱정이 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주상의) 춘추가 한창이지만 질병이 잦고 음색이 맑지 못하니 여색을 삼가야 합니다.”
세자빈의 간택 날짜까지 조보에 보도됐다. 예컨대 1612년(광해군 4년) 옥사에 연루된 황상이라는 인물은 친국에 나선 임금(광해군)으로부터 집중적으로 추궁 당했다.
“비바람 때문에 미뤄진 세자빈의 간택날짜를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 조종조 때에도 이런 비바람이 불면 불길했다는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거냐.”(광해군)
광해군의 추궁에 황상은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 “조보에서 본 얘기”라 거듭 해명한다.
“어린(22살) 제가 어디서 보고 배웠겠습니까. 간택 날짜가 연기되어 새로 잡혔다는 사실은 조보를 보고 알았을 뿐입니다.”(황상)
이 뿐이 아니다. 모역사실을 조보를 통해 만천하에 공개해서 본보기를 삼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1612년(광해군 4년) 대북파의 이이첨 등은 이미 영창대군 옹립한 혐의로 사사된 소북파 유영경과 그의 심복들도 추형(죽은 죄인을 가중처벌)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미 죽은) 유영경의 시신을 저잣거리에 전시하는 김에 그의 심복들인 김대래와 이홍로, 김일승 등도 가중 처벌해야 합니다. 특히 잔당 김일승은 곤장을 맞다가 죽었는데, 역모죄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허리띠 속에서 흉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죄상을 조보에 써서 사방팔방에 돌려보이기만 하고….”
이이첨 등의 상소에서 드러났듯 조정은 유영경 모역죄의 전말을 조보에 게재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내란음모죄 기사였던 것이다.
■탄핵상소문까지 속보로 보도한 조보
특정 신료를 탄핵하는 상소문도 신속하게 조보에 실렸다.
예컨대 대북파의 영수인 이이첨은 1921년(광해군 13년) 원접사 직분(조선을 방문하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임시직)을 맡았다.
그런데 명나라로 출발한 지 불과 며칠 뒤 유학 신지익이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이첨이 흉악하고 교활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상소문의 대체적인 내용이 조보에 실렸다는 것이었다. 조보를 발행한 승정원이 광해군에게 저간의 사정을 보고했다.
“이이첨이 원접사의 명을 받아 도성문을 나선 지 겨우 며칠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이첨을 공격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상소의 내용이 조보에 실렸습니다. 도중에 조보를 보게되면 반드시 석고대죄할텐데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누가 대신합니까. 대책마련이 시급하기에 보고드립니다.”
승정원으로서는 ‘큰일났다’ 싶었을 것이다. 이이첨이 당대의 권세가였던 것도 문제였지만, 중대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사신을 중도에 탄핵했으니 큰 파문이 일어날 수 있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나서 이이첨을 적극 변호했다.
“이이첨처럼 충성스럽고 곧은 절개가 없습니다. 요망한 상소이니 신경쓸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이첨이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띠고 가는데…만약 조보를 본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주상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낭패스러운 지경이 될 것입니다.”
실록 내용을 곱씹어보면 조보가 매우 민감하면서도 따끈따끈한 소식을 담고 있으며, 전국적으로도 신속하게 배달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보에 등장하는 참 나쁜 사람이 누구냐”
조보에는 이처럼 특정 대신들을 공격하는 상소나 비판이 여과없이 실렸던 것 같다.
1594년(선조 27년) 선조는 사헌부가 올린 상소문 중 특정대신을 공격한 문구를 조보에 내지 말라는 명을 내린다. 그 자초지종이 흥미롭다. 선조는 상소문에 등장하는 ‘참 나쁜 사람이 누구냐’고 승정원 승지에게 묻는다.
“상소문이 이런 내용이 있다. ‘어찌 이익을 좋아하는 무리를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파괴하도록 맡겨둡니까. 이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시골의 어리석은 사내라도 모두 불가함을 아는데 전하께 감히 한 말씀도 드리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자네는 아는가. 상소문이 지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선조)
“예. 좌의정 윤두수. 우의정 유홍이라 합니다. 둘다 이익을 탐하고 염치없는 사람들인데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승지)
“그래? 매우 불편한 표현이구나. 이 말은 조보에 내지 마라.”
■이조판서를 낙마시킨 조보
조보가 공론의 수단이 되어 막 이조판서에 제수된 인물을 낙마시킨 일도 있었다.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1569년 7월 이조판서 박충원이 사임했다. 박충원은 원래 재주와 행실이 없지만 그럭저럭 처세하여 판서(장관)까지 올랐다. 박충원이 전장(銓長·이조판서)가 되자 여론이 좋지 않았다. 정철·신응시·오건 등이 모여 조보를 보고 입을 모았다. ‘이 사람이 어찌 이조판서에 합당한 인물인가.’ (이 말이 돌고 돌아) 박충원에게 들어갔다. 여론이 악화되었음을 깨달은 박충원은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청문회 정국을 연상시킨다. 어떤 인물이 고위공직자가 되었을 때 언론기관의 검증 기사 때문에 여론이 들끓어 결국 낙마한 이야기와 어찌 그렇게 비슷한가.
그러고보면 선조 시대의 민긴인쇄 조보나 전통적인 의미의 조보나 다를 바 없다.
조선시대 조보는 단순한 관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한정된 중앙 및 지방관청(전통적인 의미의 조보)에서, 혹은 일부 사대부 계층까지만(선조 때 민간인쇄 조보) 볼 수 있었지만 그 내용과, 내용이 전하는 의미는 지금의 신문에 견줘 손색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조보가 선조 시대의 민간인쇄조보처럼 폭넓게 발행·배포된 열린사회가 계속 이어졌다면 어찌 되었을까. 만약 한글 형태로 배포되어 일반 백성들까지 볼 수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뭐 기자가 취재해서 쓸 것도 없지 않은가. 지금의 대통령비서실 격인 승정원이 각 지방에서 쏟아내는 민의(民意)와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3사가 거침없이 제기하는 상소문, 그리고 최고지도자인 국왕의 자아비판까지 여과없이 조보에 게재하는 판이었다. 얼마나 투명한 사회였는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 시대의 조보가 폭넓게 배포되지 않았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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