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위된 광해군이 이틀 동안이나 대궐안에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속히 대궐 밖으로 끌어내 안치하라.”
인조반정이 일어난지 이틀 뒤인 1623년 3월 14일 인목대비가 앙앙불락했다. 철천지 원수인 광해군이 대궐에 있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다고 새 임금(인조)과 반정공신들을 다그친 것이다. 심지어 인목대비는 “내가 두 번 절하고 청한다”고까지 했다.
“역괴 혼(琿·광해군의 이름)이 아직도 대궐에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시각도 용납 못할 대역죄인을 어찌 편히 앉혀놓고 있느냐. 경들은 종묘사직을 위해서라도 빨리 안치시키도록 하라. 그런 후에야 (서궁에 유폐된) 내가 대궐로 옮겨갈 것이다. 절대 소홀하게 처리하지 말라. 내 경들에게 두 번 절하며 청하노라.”
■“폐주라 부르지도 마라. 폐인이라 해라!”
인목대비는 심지어 “폐인(廢人)은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러 하늘에 죄를 진 자이니, 폐주(廢主)라고도 부르지도 말라”는 추상같은 명령까지 내렸다.
“내가 10여 년 동안 철옹(鐵瓮) 속에 갇힌 채 사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역괴(逆魁·광해군)의 악행 가운데에서 그 일부만 알고 있는 형편이다. 경들은 모름지기 그 죄악을 숨기지 마라. 원통함을 씻는 것이 나의 지극한 소망이다.”(1623년 4월11일)
인목대비에게 광해군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였다. 이른바 계축옥사(1613년)로 친아버지(김제남)과 8살짜리 아들(영창대군)이 죽고, 자신마저 페서인으로 유폐되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광해군과 부인(폐비 유씨), 폐세자(이지)와 폐세자빈(박씨) 등은 강화도로 위리안치했다.(1623년 3월21일)
인목대비는 “폐주와 폐비를 각각 다른 섬에 유폐시키라”고 했다. 그러나 인조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차라리 내가 대비에게 꾸지람을 듣겠다”면서 강화도에 함께 보냈다.
다만 폐세자 이지와 폐세자빈은 강화 교동에 보냈다. 인조가 광해군을 차마 죽이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이 무엇인가.
이복동생 코흘리개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서모인 인목대비를 폐한 죄를 물었다. 그런 광해군을 폐한 반정세력이 똑같이 쿤아버지(광해군)를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땅꿀파기로 탈출 시도한 폐세자
광해군 일가는 하루 아침에 쿠데타로 쫓겨나 대역죄인이 된 충격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광해군은 그럭저럭 참아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폐세자 이지와 폐세자빈 박씨는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들 부부는 보름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했고, 함께 목을 매었다가 여종에 의해 겨우 구출되는 등 졸지에 빠진 절망의 늪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했다.
“폐세자가 처음 위리안치되었을 때 폐빈(廢嬪)과 같이 죽기로 약속했습니다. 15일이 넘도록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엔 폐빈과 함께 목을 맨 것을 여종이 바로 풀어 주어 구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누군가 가위와 인두를 보낸 후부터 조용했는데….”(<인조실록> 1623년 5월22일)
폐세자 부부는 처음에는 죽을 각오로 곡기도 끊기도 하고, 목을 매달기도 하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것. 그런데 서울에서 배달된 가위와 인두를 보고는 생각을 바꿔 탈출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인조실록>에 기록된 폐세자 부부의 심야탈주미수극 전모는 이렇다.
“가위와 인두를 보고는 마침내 굴을 뚫겠다는 생각을 낸 것 같습니다. 폐동궁(폐세자)은 자기 손으로 땅을 팠고, 폐세자빈은 자루에 흙을 담아 방 안에 옮겨두었습니다.”
그렇게 흙을 판지 26일만에 마침내 외부로 통하는 굴이 뚫렸다.
“5월 21일 삼경(밤 11시~다음날 새벽 1시)에 폐세자가 도망쳐 나와 마니산으로 가려다가 가야산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러다 나졸들에게 붙잡혀….”
■폐세자빈 박씨의 죽음
폐세자가 판 땅굴의 길이는 70자, 즉 21m에 이르렀다. 가히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처럼 불굴의 탈주본능을 드러낸 것이다.
듀프레인의 탈주극은 성공으로 마무리됐지만, 폐세자의 탈주극은 실패로 끝났다. 조선판 쇼생크 탈출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은 벌집 쑤셔놓은 듯 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난리를 쳤다.
“강화도에서 땅굴을 파고 도망치려던 사건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땅굴을 그만큼 파려면 괭이와 가래를 여러 날 썼을텐데 관리들은 정녕 몰랐다는 말입니까. 탈출한 뒤에 발자국 소리로 알아차렸다니 어찌 이런 일이….”
당장 국문이 시작됐다. 별장 권채와 중사 박홍수, 나인 막덕 등 페세자를 모셨던 자들이 붙잡혀 심문을 받았다.
폐세자의 탈주극에 연루된 권채 등이 심한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비극이 이어졌다. 남편의 탈주극이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을 들은 폐세자빈 박씨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5월 24일 미시(未時··오후 1~3시)에 폐빈 박씨가 목을 매어 자살했다. 원래 폐빈 박씨와 같이 있는 나인이 폐세자를 밀어 내보냈다. 그러나 폐세자가 나온 뒤에 방향을 몰라 방황하는 동안에 지키던 군사가 알고서 잡아넣었다. 폐세자빈 박씨가 나무에 올라 바라보다가 남편이 체포되는 장면을 지켜보고는 낙심해서 땅에 떨어졌다. 폐세자빈은 3일간 음식을 전폐하다가 목을 매어 죽었다. 폐세자빈의 나이는 26세였다.”(<공사견문> <속잡록>)
장차 조선의 국모를 꿈꾸던 26살 여인이 나락으로 떨어진 남편을 바라보고는 한많은 목숨을 끊은 것이다.
■“폐세자를 죽여라!” “죽이면 안된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료들은 폐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앙앙불락했다.
인조는 “폐조(광해군) 때도 골육간 참변이 일어나지 않았냐”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며 폐세자의 생명을 보전해야 한다”고 버텼다.
그러나 신료들은 “폐세자의 처리는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 그리고 2품 이상의 관리들이 모은 의견에 따라야 한다”면서 ‘폐세자의 처단’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적지않은 이견이 드러났다. ‘폐세자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지만, 일부 대신들이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뒤늦게 양심선언하고 나섰다. 사간 정온이 대표적이었다.
“저는 원래 다른 의견을 냈지만 날이 저물기도 했고, 워낙 급한 사안이라 해서 ‘죽여야 한다’는 공론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골육의 참변은 없어야 한다는 주상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폐세자 처단에 반대하던 제 처음 생각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저를 파직시켜주옵소서.”(<정사록>)
대사헌 오윤겸과 대사간 박동선, 헌납 이목과 정언 신천익, 집의 조희일 등도 “정온의 말을 들으니 저희도 두려움과 후회가 밀려든다”고 입장을 바꿨다. 지의 이준, 장령 윤황 등도 옳지않다고 했다. 영의정 이원익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은(全恩), 즉 당연히 살려줘야 한다는 뜻을 견지했다.
“비록 임금이 죽이라 해도 신하들이 고심해야 하거늘 오히려 아래 사람들이 죽이기를 청하다니오. 도리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후세에게 무엇을 보여주겠습니까.”
인조의 부인(인열왕후)도 “사람의 일은 어찌 될 지 모르는 것이므로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면서 “제발 폐세자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의 공신들인 이귀와 김자점 등은 강경했다.
“정부와 삼사가 합동으로 ‘대의를 받들어 처단하자’는 공통의 공론을 냈는데 이 무슨 다른 목소리냐”고 일축했다.
6월3일 사헌부마저 “죄인 이지를 빨리 처단하시어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라”고 재촉했다. 마침내 인조는 6월 22일 “부득이 삼사의 의견대로 따르겠다”고 허락한다.
결국 인조는 탈출미수사건이 벌어진 지 한 달 여 만인 6월25일 금부도사 이유형을 폐세자에게 보내 “자진하라”는 명을 내렸다.
■폐세자, 그 최후의 순간
폐세자는 부인과 똑같은 26살의 나이로 목숨을 끊는 신세가 됐다. <인조실록>은 폐세자 이지의 최후를 생생한 필치로 기록했다.
“금부도사 이유형이 자진의 명을 내리자 폐세자가 최후의 한마디를 했다.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한 이유가 있다. 부모(광해군 부부)의 안부를 알고 나서 자결하려 했다. 지난번 땅굴을 파고 탈출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다른 뜻은 없었다.’”
폐세자는 바로 방안에 들어가서 몸을 씻고 머리를 빗은 다음 의관과 신발을 갖추었다. 이어 칼을 찾아 손톱과 발톱을 깎으려 했지만 금부도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매정한 처사였다.
페셰자는 “죽은 뒤에 깎아 주면 좋겠다”고 당부한 뒤 곧장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폐세자가 애써 웃음을 지었다.
폐세자는 자리를 펴고 촛불을 밝히게 하고는 북쪽을 향해 두 차례에 걸쳐 4번, 서쪽을 향해 또 두차례 4번 절했다. 폐세자가 유언을 남겼다.
“송나라 충신 문천상(1236~1282)은 8년간 원나라 감옥에 있었다. 어떤 이가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느냐’고 꾸짖었다. 그러나 어찌 문천상의 충심을 알았겠는가. 문천상이 죽은 뒤 어떤 이가 시를 남겼다. ‘원나라가 문천상을 죽이지 않아 임금의 의리와 신하의 충성 둘 다 이뤘네.’(大元不殺文丞相 君義臣忠兩得之)”
■실록 기자의 유감표명
문천상이 누구인가. 송나라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협상을 위해 원나라에 파견됐다가 억류당했다.
얼마 뒤 도망쳐 다시 군대를 조직해서 원나라군과 대항했지만 포로가 되어 연경(북경)에 갇혔다. 원나라 세조(쿠빌라이)는 문천상의 재능을 아껴 벼슬을 제안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문천상은 결국 사형당했다.
폐세자는 원나라에 끝내 굴복하지 않은 문천상과 자신을 같은 반열의 충심깊은 인물로 거론한 것이다. 그런 문천상 같은 인물인 자신을 죽인 인조를 손가락질 한 것이다.
이렇게 유언을 남긴 폐세자는 방안으로 들어가 가는 허리끈으로 목을 매어 당겼지만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지는 다시 숙주(熟紬·삶아서 익힌 실로 짠 명주)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인조실록>을 쓴 기자는 페세자의 자결을 재촉한 신하들을 비판했다.
“‘폐인을 살려줘야 한다’ 주상의 명을 신하들이 받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성상의 미덕을 받들기는커녕 법대로 집행해야 한다고 핑계대면서 시끄럽게 다투고 논쟁을 벌였다. 다른 신하들도 여러 차례 말을 바꾸어 오락가락했다. 임금을 덕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리에 부끄러움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신하들에게 책임을 돌릴 이유가 없다. ‘살려주겠다’는 임금의 의지가 강했더라면 신하들이 아무리 떠든들 무슨 관계가 있었겠는가.
■‘본시 한뿌린데 왜이리 박대하나.’ ‘다시는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폐세자 이지를 둘러싼 이야기가 제법 많다. 이지가 태어난 1598년(선조 31년) 12월 4일 아침 대궐 뜰 마당 웅덩이에서 연꽃이 피더니 금방 떨어졌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상서로운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자진을 명받고 26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는 모습을 보고는 그제서야 ‘이지의 신세가 떨어진 연꽃같다’고 여겼다.
폐세자 이지가 강화도로 위리안치되러 가는 길에 지었다는 시가 가슴 찡하다.
“티끌 속의 뒤범벅이 미친 물결 같구나(塵환飜覆似狂瀾) 걱정한들 무엇하리 마음 스스로 평안하다.(何必憂愁心自閒) 26년은 참으로 한 바탕 꿈이라(二十六年眞一夢) 흰구름 사이로 돌아가리(好須歸去白雲間).”
위리안치된 이후에 지은 시도 있다.
“본시는 한 뿌린데 어찌 이다지 박대하는고.(本是同根何太薄) 이치로는 마땅히 서로 아끼고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을(理宜相愛亦相哀) 어떻게 이 새장 벗어나(緣何脫此樊籠去) 녹수 청산 마음대로 왕래하랴(綠水靑山任去來).”
인조를 향한 원망이 한가득 배어있다. 심지어 조롱(새장)을 탈출하겠다는 노골적인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공사견문> <속잡록> <응천일기> 등)
생때같은 자식이 죽는 꼴을 본 어머니(폐비 유씨)도 그 충격에 시름시름 앓다가 4개월 뒤인 10월 세상을 떠났다.
정재륜의 <공사견문>에는 폐비 유씨와 관련된 이야기가 몇편 나온다.
“폐비는 일찍이 불교를 믿었다. 항상 ‘후생에는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광해군을 없애라!’
이제 남은 것은 광해군 뿐이었다. 아들·며느리와 부인까지 비명에 보낸 광해군이지만 나름 꿋꿋하게 버텼다.
그러나 유배지의 인심은 녹록치 않았다. 이괄의 난(1624년)과 정묘호란(1627년)·병자호란(1636년) 등 변란이 이어지자 강화~태안~교동~강화로 계속 옮겨다녔다.
급기야(1637년)는 가장 먼 제주도로 내쳐지는 신세가 됐다. 광해군을 모시던 자들은 노골적으로 홀대했다.
계집종으로부터 ‘영감’이라는 막말까지 들었고, 죽임을 당할 고비도 몇차례 넘겼다.
예를들어 이괄의 난 때 충남 태안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강화로 돌아올 무렵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폐주를 강화에서 태안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로 안치할 때의 일이다. 광해군을 옮기라는 왕명을 받든 관리들(별장 및 선전관)이 호송 중에 관사에 들라치면 저희들이 웃방(上房)에 들고, 폐주는 서쪽방에 머물게 했다. 왕명을 받드는 신분증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사헌부와 사간원이 ‘아무리 폐주라도 그런 버릇없는 짓거리를 했느냐’고 탄핵했다. 관련 별장과 선전관이 파면됐다.”(조극선의 문집 <야곡삼관기>)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중에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구굉·신경원·신경인·홍진도 등이 연명으로 경기수사인 신경진에게 “잘 처리하라”는 글을 보냈다.
이것은 “광해군을 몰래 없애라”는 의미의 글이었다. 그러나 경기수사인 신경진이 따르지 않아 광해군의 목숨이 가까스로 보전됐다.
그러나 광해군을 다시 제주도로 옮기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때 호송업무를 자청한 무사가 있었는데, 이 자가 바로 자객이었다. 광해군을 죽여 공을 세우겠다는 속셈이었다.
이 역시 광해군을 유배지에서 잘 보살펴준 신경진 덕분에 광해군 시해시도는 무위에 그쳤다.(<병자록>)
■‘영감(광해군), 뭘 잘했다고 대우받으려 하시오?’
광해군이 제주도로 옮겨갈 때의 일이다.
따라 나선 궁비(궁궐의 여종) 중에 워낙 싸가지없게 행동하는 여인이 있었다. 보다못한 광해군이 꾸짖었다. 그러나 이 궁비가 광해군에게 큰소리로 쏘아붙였다.
“아니 ‘영감’은 임금의 자리에 있을 때 무엇이 부족해서 더러운 자들에게 반찬까지 요구해서 김치판서·잡채참판이란 말까지 있게 하였소? 또 무엇이 부족하여 장사치와 통역관까지 돈을 받고 벼슬을 주었소? ‘영감’께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누구더러 ‘제대로 모시라’고 호통을 치는 거요. 영감이야 정치를 잘못해서 위리안치됐지만 우리는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가시덩굴 속에 갇혀있단 말이오?”(<공사견문>)
김치판서와 잡채참판이 무슨 말인가. 광해군 시절 좌의정에 오른 한효순이 더덕을 넣은 꿀떡을 바쳐 정승 자리를 얻었다는 쑥덕공론이 있었다. 또 잡채요리로 유명한 이충이라는 사람이 호조판서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이 ‘더덕정승’과 ‘잡채판서’라는 말이 민간에 돌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공사견문>에는 김치판서와 잡채참판으로 전해졌다. 광해군을 쏘아붙인 궁비의 직격탄은 지금으로 치면 ‘사이다 발언’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공사견문>은 ‘영감’ 소리를 들은 광해군은 아무 말 없이 장탄식만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공사견문>의 기록은 심상치 않다. 궁비의 발언을 오히려 질타하고 있다.
■‘저 궁비는 천벌을 받을거야’
“광해군은 궁비의 질타를 듣고 한마디 말도 없이 탄식만 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궁비의 패악하고 교만한 말에 분개했다. 사람들은 ‘반드시 저 궁비에게 하늘의 재앙이 내릴 것’이라 했다. 과연 이 궁비는 다른 일로 죽고 말았다.”
<공사견문>은 효종(인조의 둘째아들)의 사위인 정재륜(1648∼1723)이 궁중을 출입하면서 남긴 기록이다. 폐주 광해군을 좋게 표현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정재륜은 당시 궁비의 발언은 사이다는커녕 여론의 질타를 받은 싸가지 없는 욕설이었다고 평가했다. 광해군을 향한 동정론도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제주도로 끌려가는 광해군에게는 목적지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배 위의 4면을 휘장으로 막았다.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호송관(별장)들은 광해군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험난한 뱃길에 죽을 고비도 여러차례 넘겼다. 이윽고 배가 제주도에 도착하자 휘장을 떼어냈다.
“이제 제주도와 왔다”는 말에 광해군은 깜짝 놀라며 안절부절 못했다.
“내가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 내가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
광해군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과연 후회를 했을까.
■광해군을 향한 질타는 옳은 것일까
제주도도 이첩된 광해군은 폐위된 지 19년 만인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 한많은 세상을 떴다.
임금 자리에 있었던 10년보다 9년이나 더 산 것이다.
<인조실록>이 전하는 광해군의 최후는 쓸쓸했다.
“광해군이 위리안치된 가운데 67살의 나이로 죽었다. 제주목사(이시방)가 열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 이때 조정의 의논은 모두 ‘그르다’고 했지만 식자들은 옳다고 여겼다.”
인조는 일단 애도의 표시로 “3일간 조정업무를 정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인조실록>의 기사가 시사하듯 광해군의 장례를 두고 찬반여론이 팽팽했다.
예조(판서 이현영과 참판 심액)는 “비록 광해군이 쫓겨났지만 다른 종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인조 임금이 한번쯤 대신들과 함께 상복을 입고 곡(哭)을 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고 건의한 것이다. 이현영은 특히 “광해군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관뚜껑을 덮은 뒤에는 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고 첨언했다.
그러나 반정공신인 신경진(1575~1643)은 “광해군이 지은 죄를 생각한다면 이미 수의나 관을 마련해준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주장했다. 이시백은 한술 더떠 반정의 정당성을 부정한 이현영을 국문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결국 인조는 신경진과 이시백 등의 의견을 따랐다.
인조는 또 광해군의 명복을 빌려고 7일 동안 소선(素膳·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하려 했다. 그러나 이 역시 ‘과공비례’라는 지적을 받았다.
“아니 3일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하고 조회를 정지시킨 것도 비례(非禮)인데, 또 7일간의 소선이라구요? 아니되옵니다. 조회의 정지기간이 끝나면 수라를 회복하소서.”
결국 광해군은 역시 반정으로 쫓겨간 연산군처럼 ‘왕자(王子)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했다. 광해군과 문성부인(폐비 류씨)의 가묘와 묘제 역시 연산군처럼 ‘그의 외손’이 관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광해군은 연산군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그것이 옳은 평가일까. (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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