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7년 11월28일 선조가 분기탱천합니다.
“어떤 자가 내 허락 없이 조보(조선시대 관보)를 발행했는가. 인쇄·배포한 자와 그것을 허가해준 자 모두를 색출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선조의 명에 따라 30여 명의 조보인쇄발행업자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그해 8월부터 약 100일간 민간인이 인쇄·발행·배포한 조보는 약 100일 만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조보는 단순히 행정소식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임금과 대신들의 잘못을 따지는 상소문과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 올리는 보고문, 그리고 임금 스스로의 책임론까지 고백하는 글까지 그대로 실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격인 승정원의 주서(7급 공무원)이 골라 편집한 것을 여과 없이 게재한 것입니다. 그러니 요즘의 신문을 방불케 하는 고발 및 현장기사가 생생하게 실린 것입니다.
원래 조보는 중앙 및 지방 관청에서만 필사본으로 돌려보았습니다. 그런데 1577년 8월 서울의 민간업자들은 의정부에 “조보를 활자로 대량인쇄해서 경향 각지의 사대부들에게 유료로 배포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신청서를 냅니다.
의정부도 사헌부의 품의를 받아 “그러라”고 허락해줍니다. 선조는 약 100일이 지나서야 이 같은 사실을 알고 격노했습니다. 민간인쇄업자가 인쇄한 뒤에 구독료를 받고 판 이 조보에는 어떤 내용이 실려 있을까요.
지난 4월 민간인쇄조보가 발행되던 바로 1577년 11월의 조보 8쪽이 발굴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깜짝 놀랍니다. 요즘 언론의 고발기사와 르포기사는 저리가라 입니다. 과연 어떤 기사가 실려 있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9회는 ‘1577년 11월 28일 선조는 왜 신문폐간을 명했을까’입니다.
조보(朝報)는 조선시대의 관보라 할 수 있다.
임금의 전교와 담화, 유생과 관료들의 상소문과 임금의 답변, 관리들의 임면, 중앙 및 지방 관서에서 올라오는 각종 보고서 등 모든 정사업무를 소개했다.
이외에도 천재지변과 기문기사(奇聞記事·가십)도 실었다. 조보를 발행한 관서는 국왕의 비서조직인 승정원(대통령비서실)이었다.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이들은 주서(정 7품) 2명과 가주서 1명이었다. 기사작성 같은 실무는 주서 및 가주서가 담당했고, 총책임자인 도승지가 감독했다.
언론사의 기자가 기사를 쓰고 데스크의 손을 거쳐 편집국장 책임아래 보도하는 식이었다. 물론 사헌부와 사간원 등의 서리들도 조보의 편집에 일정부분 간여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렇게 선별 편집된 기사를 기별청(조보소)에 붙이면 각 관청에서 파견된 기별서리가 조보의 내용을 베꼈고(필사) 기별군사들이 해당 부처에 배포했다.
그렇다면 각 지방관청에는 누가 배달했을까. 중앙과 지방의 사무연락을 위해 지방 수령이 파견해둔 아전인 경주인(京主人) 등이 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필사조보’는 한계가 뚜렷했다. 대중적으로 널리 공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별서리가 속기로 필사했기 때문에 그 내용을 해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누가 조보를 인쇄하라고 했냐.”
그런데 1577년(선조 10년) 8~11월 딱 3개월간 ‘필사조보’가 아닌 ‘인쇄조보’가, 그것도 민간에 유료로 배포된 적이 있었다.
깔끔한 활자로 인쇄된 신문을 구독료를 내고 본 이른바 민간인쇄신문이 발행된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은 최악의 언론탄압 사건으로 마무리됐다.
사상 처음으로 배포된 민간인쇄신문(조보)은 단 3개월 만에 철퇴를 맞았다. 선조 임금은 길길이 뛰었고, 대신들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봐 부들부들 떨었다.
이 사건으로 신문(조보)을 배포한 30여명이 혹독한 고문을 받아 사경을 헤맸다. 이들은 죄질에 따라 차등으로 처벌을 받았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꼭 440년 전으로 되돌아가보자.
때는 바야흐로 1577년 11월28일 선조가 비망기를 내렸다.
비망기는 중요한 업무지시나 명령을 전할 때, 특별히 국왕의 심기를 그대로 담아 내리는 문서를 뜻한다.
국왕의 정치적 입장이 담겨있는 것이 보통이어서 매우 민감한 사건을 처리할 때 활용됐다. 따라서 임금이 비망기를 내리면 신료들은 바짝 긴장하기 마련이다. 이날의 비망기에도 서릿발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과인이 우연히 조보를 보았다. 경악스럽다. 누가 조보를 인쇄하라고 했느냐. 어째서 임금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멋대로 만들었느냐. 이것은 사사로이 사국(史局·실록청 혹은 사마천의 역사책 <사기>를 뜻함)을 만든 것과 다름없다. 만약 국가기밀이 다른 나라에 흘러들어간다면 어찌되겠는가.”
선조는 “빨리 진상을 파악해서 보고하라”고 진노했다. 그러나 신료들은 난감했다. 조보의 발행을 지금의 내각인 의정부가 승인했고 사헌부가 또한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신문발행한 허용한 자와 찍어낸 자를 색출하라!”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와 정사인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등에 실린 진상을 더듬어보자.
1577년 8월 어느 날 ‘서울의 직업없는’ 식자들이 의정부에 문서를 올렸다.
“중국에서도 소식지(通報)를 인쇄해서 배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희도 중국 사람들처럼 조보를 인쇄해서 독자들에게 팔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보는 승정원에서 여러 기별서리가 일일어 베껴서(필사로) 발행했다. 그런데 어느 날 민간인들(직업없는 식자들)이 이 조보를 활자로 인쇄한 뒤 구독자들에게 신문값을 받고 팔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의정부도 시쳇말로 청년실업률을 고려했는지 덜커덕 허가증을 내주고 말았다. 의정부의 품의를 받은 사헌부 역시 쿨하게 허락했다.
민간 조보 인쇄·배포업자들은 약 석달간 승정원이 편집한 조보를 열심히 인쇄해서 각 관청과 지방 수령들이 서울에 파견한 경주인들에게 구독료를 받고 팔았다. 조보를 받아본 사람들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조보를 받아보는 사대부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조보는 약 석 달 간 배포되었는데….”
문제는 선조 임금에게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간인들이 구독료까지 챙기면서 조보를 인쇄·배포한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있어서는 안될 일이 생겼다”고 앙앙불락했다. 선조의 진노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임금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민간에 조보 발행 및 배포를 허락한 의정부과 사헌부 관리들은 전전긍긍했다.
“누가 감히 이따위로 일을 처리했는가?”(선조)
“저 저 저 누가 조보인쇄발행을 요구했고, 누가 이것을 허락해줬는지 확실치 않습니다.”(대신들)
“맨처음 주창한 자들을 색출하라. 극형에 처하리라.”(선조)
■“누가 그따위로 지껄이는가”
대신들은 쩔쩔맸다.
“(3개월 전인 1577년) 8월 어떤 사람이 연명으로 ‘조보를 인쇄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소장을 의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의정부에 소속된 대신들은 ‘허가사항이 아니니 발행해도 무방하다’는 등의 의견이 많아 그저 ‘자네들 마음대로 하라’고 허가해줬습니다. 이것이 그렇게 큰 죄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희 모두 사임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선조의 노기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조보는 그저 잠깐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것을 대량 인쇄해서 배포까지 하다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관련자들을 끝까지 추궁해서 죄를 다스려야 한다.”
선조는 조보를 인쇄·배포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30명이 넘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들을 ‘기인(其人)’이라 표현했다. 기인들은 사경을 헤맬 정도로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보다못한 사헌부가 “잘못도 없는 이들이 너무 혹독한 형신을 받고 있으니 고문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려달라”고 간청한다.
“조보를 인쇄·발행한 사람들은 고의로 범법 행위를 한 게 아닙니다. 그저 이익을 챙기려 한 것일 뿐입니다. 중국의 경우도 조보 인출 행위는 죄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대부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인(其人)들로서는 허락을 얻어 한 일인데 너무 혹독한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 명령을 거두어 주소서.”
선조는 사헌부의 이 상소문에 더욱 발끈했다.
“사대부 중에 누가 그 따위 소리를 지껄였는가. 그대들은 감히 누구를 변호하려고 드는 것인가. 반드시 간사한 자가 배후에서 지휘한 것이 틀림없다. 내 끝까지 추궁하여 엄벌에 처할 것이다.”
■애꿎은 백성만 처벌받았다
결국 조보를 인쇄하고 구독료를 받고 배포한 기인 30여 명은 죄질에 따라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른바 민간조보를 찍던 활자 또한 몰수했다.(1578년 1월 15일)
율곡 이이는 이 대목에서 조정대신들의 책임회피를 통렬하게 꾸짖고 있다.
“민간 조보의 인쇄 및 배포는 의정부와 사헌부가 허락해줬다. 잘못은 의정부·사헌부 관리들에게 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백성만 처벌을 받았다. 감히 조보의 인쇄를 허락해준 죄를 자수하지 않고 지금까지 머뭇머뭇거려 애꿎은 백성들만 형벌을 받았구나. (의정부 및 사헌부 관리들은) 겁도 많고 의리도 없구나.”(<석담일기>)
선조 임금의 서슬이 저토록 추상같은데 감히 “내가 허가를 내주었다”고 자복할 간큰 신하들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1577년 8~11월 발행된 민간인쇄신문은 약 100일간의 짧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승정원이 편집하고, 기별서리가 베껴낸 이른바 ‘필사조보’는 여럿 남아있다. 규장각 74건과 국사편찬위원회 318건, 국립중앙박물관 1건, 개인 가문(경북 문경의 평택 임씨) 15건 등이 있다. 그러나 1577년 3개월간 발행된 민간인쇄조보의 존재는 오리무중이었다.
■440년 만의 현현
그런데 꼭 440년 후인 올해 1월 경북 영천 용화사 주지 지봉 스님(영천역사문화박물관장)은 한 인터넷 고서 경매사이트를 검색하다가 깜짝 놀랐다.
<성리대전>(송나라 때 성리학설을 집대성한 책)이 출품되었는데, 정작 책보다는 책의 표지가 단연 눈에 띄었다.
“<성리대전> 책의 표지는 이미 낡아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이를 붙여 딱딱하게 새 표지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 종이에 쓰여진 글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출품자가 붙인 설명서를 보니 ‘조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출품 고서는 4차례나 유찰된 끝에 결국 지봉 스님의 품에 들어갔다. 유찰된 4개월간 지봉 스님은 나름 문제의 ‘조보’에 쓰여진 내용을 연구했다.
그 중에 ‘공의전’이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공의전은 조선조 인종의 부인인 인성왕후를 가리킨다. 공의전이라면 지봉 스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공의전의 남편인 인종의 태실(태를 묻은 곳)이 바로 영천 은해사 뒷산에 있기 때문이다. 지봉 스님은 경남대 김영주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에게 발굴 조보를 보냈다.
■최초의 일간신문?
김영주 교수의 연구결과는 흥미로웠다. 발굴된 조보는 모두 8쪽이었는데, 그 중 발행일자를 알 수 있는 문건은 5쪽이었다.
그런데 그 발행날짜(선조 10년 11월6일, 15일, 19일, 23일, 24일)가 심상치 않았다. 먼저 선조 10년이라면 무슨 뜻인가. 1577년이 아닌가. 발행날짜가 11월이라는 얘기는 또 무엇인가.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석담일기> 등을 종합하면 이른바 민간인쇄신문은 1577년 8월부터 11월27일까지 발행됐다. 선조가 민간 인쇄 조보를 우연히 보고 철퇴를 내릴 때가 11월28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확보된 조보는 선조의 폐간명령을 받기 직전에 활자로 발행된 민간인쇄조보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하나 착안사항은 발행날짜(6일, 15일, 19일, 23일, 24일)이다. 무슨 뜻인가.
주간보다 자주 발행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23일, 24일자가 있다면 일간신문의 형태는 아니었을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론이다. 또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민간인쇄조보에 사용된 활자는 목활자가 대부분이었지만, 금속활자도 10~15% 정도 섞여있다는 것이다.
■인종비의 마지막 순간
그렇다면 내용은 어떨까. 앞서 언급한 공의전 인성왕후(인종의 부인)의 병환과 소전염병의 창궐, 또한 혜성의 일종인 치우기(蚩尤旗)의 출현 기사가 실려있다.
우선 공의전의 병환 소식을 살펴보자.
“공의전의 약방 제조가 (공의전께) 안부를 여쭙고 (임금께) 글을 올렸다. (공의전 왕대비가) ‘밤부터 아침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답했다.”(1577년 11월6·19일 조보)
공의전 인성왕후는 남편 인종(재위 1544~1545)이 재위 9개월만에 승하한 뒤 32년간 자녀없이 왕대비로 살았던 기구한 인물이다.
그런데 1577년 10~11월 사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다. 이번에 발굴된 조보를 보면 ‘공의전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했다’는 기사가 두 번(6일·19일)이나 조보에 실렸다. <선조실록>을 보면 공의전은 11월 29일 64세를 일기로 승하한다.
<선조실록> 11월28일 기사를 보면 공의전은 “내가 죽는다고 해서 나를 치료하고 간호한 의원과 의녀를 문책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뒤 다음날(29일) 눈을 감는다. 이번에 발굴된 조보를 보면 ‘왕대비(공의전)가 위독하다’는 기사까지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확보한 조보의 발행날짜와 똑같은 <선조실록> 기사는 찾을 수 없다. 왜냐면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가장 엉망한 사료가 바로 <선조실록>이다.
선조의 즉위년(1567년)부터 임진왜란 직전(1591년)까지의 사초가 임진왜란의 와중에 불탔기 때문이다.
즉 선조의 의주 몽진길에 임금의 총애를 받던 사관 4인방(조존세·박정현·임취정·김선여)이 사초책을 모조리 불태우고 도망갔다. 그랬기에 훗날 <선조실록> 편찬작업 때 사료부족으로 큰 곤욕을 치렀다.
결국 <선조실록>은 실록 가운데 가장 형편없다는 평을 듣게 됐다. 단적인 예로 <선조실록> 1577년 11월은 딱 이틀치(28일·29일)의 기사만 남아있다.
그나마 이율곡이 남긴 <석담일기>가 <선조실록>의 조보 관련 기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석담일기>가 없었다면 1577년 8~11월 사이에 일어난 민간인쇄조보 사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조선시대 구제역 기사
지금으로 치면 구제역 같은 소전염병이 창궐했다는 일종의 사회면 기사도 등장한다.
“서울에 우역이 크게 돌아…수레와 연결된 멍에를 걸친 채로 길에 쓰러져 죽은 소가 600마리나 됩니다. 뜰에 가득 모인 사람들이 슬피 울부짖고 있으니 그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능음(凌陰·빙고)에 (왕실용 얼음을 저장하려면) 수레 1000량은 써야 하는데….”(1577년 11월 15일 조보)
이 기사는 능음 공역이 한창인데, 공역에 쓸 수레를 끌 소들이 전염병에 걸려 쓰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다.
음력 11월15일이면 한겨울이었다. 한강의 얼음을 잘라 빙고에 보관하는 공역을 펼쳐야 했다. 수레와 수레를 끌 소와 말이 필요했다.
“(전염병 창궐에도) 공역을 늦출 수 없다고 합니다. 공사판 일꾼들을 닦달하고 매질을 가한다 해도 사람 어깨에 멍에를 메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고 달리 멍에를 씌워 수레를 끌게 할 방도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이대로 공역를 강행한다면 백성들의 원성을 누그러뜨릴 수 없다”고 경고한다.
선조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 형식이지만, 당대 사회의 상황과 여론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생생한 사회면 기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문헌은 ‘소전염병’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에 생생한 기록이 있다.
“1577년 가을에 홍수가 나서 곡식이 상했다. 팔도에 전염병이 그치지 않았는데, 우마지역(牛馬之疫)까지 겹쳤다. 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농부들이 소 대신 논밭을 갈았는데, 9명이 힘을 모아야 두마리 소 몫을 했다.”
<선조실록> 12월23일조도 “호남과 영남에 전염병이 창궐해서 사람과 가축이 죽어나갔다”고 기록했다. 우마지역은 지금으로 치면 구제역에 해당되는 전염병이었을 것이다. 조보는 사람과 소가 전염병으로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얼음창고 공사를 강행하던, 그래서 민심이 흔들리던 1577년 겨울의 서울 풍경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다.
■‘불길한 혜성이 나타났다’
날씨 기사도 어김없이 보인다.
조보의 기자는 매일매일의 성변(별의 위치나 빛에서 생긴 변화)과 천변(기상이변) 등을 기록한 성변해서 올리는 성변측후단자를 토대로 날씨기사를 작성했다.
“(1577년 11월) 14일 밤은 구름이 짙게 끼어 치우기(혜성의 일종)를 관측할 수 없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22일 밤 초경(밤 7~9시))부터 이경(밤 9~11시) 까지는 구름이 끼어 (치우기를) 볼 수 없어….”
조보가 보도한 1577년의 치우기 기사는 <선조실록>에 극적으로 보인다. ‘극적’이라고 한 이유가 있다.
앞서 밝혔듯이 선조 즉위년(1567년)부터 임진왜란 직전(1591년)까지의 사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관이라는 작자들이 사초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1577년의 실록기사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 5월 5일 선조가 16년전, 즉 1577년의 치우기 출현을 회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지난 정축년(1577년) 치우기가 나타났다. 별이 장대했다. 별의 움직임을 관측한 자들은 이렇게 점을 쳤다고 한다. ‘저 별이 나타난 것은 조선이 침입을 받지만, 왜적은 필시 패망하고 만다.’ 신기하게도 조선은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었지만 (1593년 4월) 왜적이 물러났다. 기이한 일이 아닌가.”
치우기(蚩尤旗)는 혜성의 일종이다. 특히 꼬리가 굽어 깃발처럼 나부끼는 형상의 혜성을 치우기라 한다. 치우는 옛 동이족의 전설적인 수령으로 전쟁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인지 예부터 “이 별이 나타나면 병란이 일어난다”(<사기> ‘천관서’)고 했다. 아마도 1577년 치우기가 나타나자 선조 임금을 비롯한 모든 신료, 그리고 백성들까지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이다. 어땠든 조보에 언급된 1577년의 치우기 기사는 절대 ‘가짜뉴스’가 아님을 일러주고 있다.
선조 임금은 16년 전 경험했던 치우기의 불길한 등장을 생생하게 기억해낸 것이다.
■“모든 허물은 나에게 있다”는 선조의 자책 기사
홍수와 인수 전염병, 여기에 요망한 혜성인 치우기의 출현까지….
천재지변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신료들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사직을 청한 것 같다.(11월 날짜미상의 조보)
그러나 선조는 “모든 허물은 나에게 있다”면서 신료들의 사직서를 반려한다.
“어리석은 과인이 외람되게 임금의 보위를 받잡았다. 그러나 권력의 기강을 다잡지 못했고, 정사도 잘 처리하지 못했다. 경들은 사직하지 마라. 화합해서 바로 잡아달라.”
그러나 신료들은 다시 상소를 올려 “신들을 경질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린다.
“속히 신들의 직책을 면하시고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들로 바꾸신다면 성상은 황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양주 목사는 유임돼야 합니다.”
11월 24일 조보에는 경기 감사가 교체 예정인 양주 목사(이기·1522~1600)의 유임을 촉구한 서한이 실렸다. 조보에 따르면 양주 목사는 파리목숨이었다.
1577년에도 위독한 공의전(인성황후)의 완쾌를 위한 기도제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목사가 교체되는 등 너무 자주 바뀌었다.
아마도 지금의 목사(이기) 역시 교체가 예정되었던 것 같다. 그러자 경기 감사가 “아니되옵니다”라는 서한을 조정에 올린다.
“양주목사는 오로지 백성을 위한 삶으로 일관한 보기드문 인물이니 유임시켜야 합니다. 목사의 선정 덕분에 경내의 백성들이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경질된다면 백성들은 부모와 보금자리를 잃고 떠도는 것 처럼 마음아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조실록> 1578년 2월 24일 기사에도 경기감사의 서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경기 감사가 양주 목사 이기의 대쪽같은 성정으로 선정을 베푼 데 대한 일로 서장을 올렸다.”는 내용이다. 오히려 조보가 3개월이나 빨리 경기감사의 서한을 보도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 근무태도가 엉망이다”
조보를 작성한 승정원을 비판하는 기사도 등장한다. 아마도 사헌부나 사간원, 혹은 홍문관 같은 3사가 승정원의 근무태도를 지적했을 것이다.
“승정원은 오로지 성실하게 왕명을 출납해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근무태도가 영 불성실하고 태만합니다. 임금의 명이 잘못되었다면 당연히 복역(復逆·승지가 임금의 명령이 그르다고 판단될 경우 그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접수를 거부하고 되돌려주는 것)해야 하는데 최근들어 그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일찍 퇴근하는 일도 많아 물의를 빚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임금의 전교를 늦게 전하는 바람에…. 청컨대 담당 승지를 파직시키고, 동참한 승지도 교체하옵소서.”(날짜 미상의 조보)
중요한 것은 조보를 작성한 부서가 다름아닌 승정원 주서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서를 탄핵하는 상소문까지 여과없이 조보에 실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특정 언론이 자사를 비판하는 기사를 그렇게 여과없이 실을 수 있을까.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장군이 호화수레나 타고… 어찌 적군을 맞겠나”
날짜 미상의 조보를 보면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는 병마절도사(지역 사령관)를 비판하는 기사도 보인다.
“마교(馬轎·말이 끄는 가마)는 조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도였다. 그 말도 안되는 사치풍조가 생긴지 30년이 좀 넘었다. 감사(지방의 관찰사 혹은 도지사)라 해도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감히 타지 못한다. 하물며 무관직인 병마절도사가 편안하게 타고다닌다. 교만하고 사치스럽기 이를데 없다.”
조보는 그러면서 “만약 전쟁이 나서 적군과 마주치면 어쩔 거냐”고 혀를 찬다.
“평소 ‘안장 얹은 말(軍馬)’를 타는데 익숙하지 않은 장수가 적군을 마주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쌩쌩 달리는 군마를 타고 활을 쏘며 창칼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법적인 근거도 없는 이 마교의 제도를 하루빨리 엄금해야 한다.”
■동정기사도 빠짐없이…
조보에는 관리들의 동정도 주요기사로 처리됐다.
이번에 발굴된 조보가 5~8일치 기사에 불과했는데 조정에 휴가를 신청한 관리의 동정이 여럿 등장한다.
“통례원(지금의 행자부 의정관실) 소속 인의(종 6품)인 유염이 황해도 연안 지방에 사는 병든 어머니를 만나보려고 휴가를 신청했다.”(11월19일 조보)
“…허숙이 홍주에 사는 병든 어머니를 만나려고 병조에 휴가를 신청했다. ○○○가 병든 어머니를 위해 이조에….”(23일자 조보)
“송응형은 안동에 사는 자식의 혼인 문제로…. ○○○는 부모님 산소 성묘하는 일로 <경국대전>에 의거해서 휴가를 달라고….”(24일자 조보)
또 사헌부 장령 허진·노직 등이 지병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한 것까지 나와있다.(23일자 조보)
■100일의 언론자유
이번에 발굴된 조보가 1577년 8~11월 사이 100일 남짓 발행된 이후 선조 임금에 의해 폐간된 민간인쇄신문이다.
“인사행정이나 사직·휴가 신청, 그리고 서한 등에서 드러난 11명의 인물(유염·신식·한효순·허진·노직·허숙·한수·유대수·남전·송응형·이기 등)이 모두 <선조실록>에서 등장해요. 당시 역임한 직책들과 조보의 내용가 일치합니다. 동시대 인물이 확실합니다.”(김영주 교수)
물론 요즘처럼 기자(승정원 주서)가 직접 취재해서 나름대로의 관점을 담은 기사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각 지방이나 일선 부서에서 올린 장계나 서계 등 보고서는 당대의 사회상을 생생한 필치로 고발한 르포기사와 다를바 없다.
게다가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올리는 상소문은 임금과 권력가들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다. 조보는 바로 이와같은 내용을 여과없이 싣고 있다.
김영주 교수는 “심지어 재변 발생에 대한 선조의 자책과 상신들의 사의표명 기사까지 싣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조보를 통한 직접소통이 아니겠으며, 조보에 의한 여론 환기가 아니겠는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김영주·이범수, ‘조선시대 민인긴쇄 조보의 발굴과 언론사적 의의’, 언론정보학회, 2017
김영주, ‘조보에 대한 몇가지 쟁점’, <한국언론정보학보> 제43호, 언론정보학회, 2008
김경수, ‘조보의 발행과 그 성격’, <사학연구> 제58, 59호, 한국사학회, 1999
최준, <한국신문사>, 일조각, 1990
서진원, ‘조보에 관한 기록학적 고찰’ 서울대석사논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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