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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운석의 경고, "운석은 하늘의 재앙"

 1492년(성종 23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돈이 “운석이 떨어졌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극돈은 매우 신기한듯 운석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빛깔은 뇌설(겉이 검고 속이 흰 버섯의 일종) 같고, 모양은 복령(주름이 많은 공모양의 흑갈색 버섯) 같은데…. 손톱으로 긁으니 가루가 떨어졌습니다.”
 요즘 같은 첨단의 세상에서도 운석이 떨어지니 한바탕 난리굿을 떠는데 하물며 예전에는 어땠으랴.  

 2013년 2월 러이사 우랄산맥 인근 첼랴빈스크주 체바르쿨 호숫가에 떨어진 운석. 운석은 세 조각으로 부서졌으며, 전체 무게가 600㎏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
 “104년(신라 파사왕 25년)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삼국사기>)
 “1057년(문종 11년) 황주에 운석이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고려사>)
 “1533년(중종 28년) 유성과 비성(飛星·혜성)이 사방에 비오듯 했고 나왔다 사라지는 길을 다 측후할 수 없었다. 운석도 비처럼 쏟아졌다.”(<중종실록>)
 “1563년(명종 18년) 하늘에 떨어지는 형상이 나는 제비 같았다. 땅에 떨어질 때 소리가 나고 연기가 생겼다. 두꺼운 땅에 떨어진 것은 땅속에 10척 쯤 들어갔는데 모양은 돌과 같았다. 큰 것은 주먹만 하거나 바리만 했고….”(<명종실록>)  
 “1672년(현종 13년) 영천군에 돌덩어리가 갑자기 떨어졌다. 하늘에서 대포소리가 났고…. 돌의 크기는 말(斗)과 같고, 무게는 36근이었다, 형체는 거북이 엎드린 것 같고 그 위에 짐승 발자국 흔적이….”(<현종실록>)
 “1714년(숙종 40년) 안성에 운석이 떨어졌다. 북치고 쇠방울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밭 한 가운데 갑자기 검은 돌이 떨어져 세조각 났다.”(<숙종실록>)
 각 문헌마다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런데 예전과 지금의 호들갑은 좀 다르다. 지금이야 운석의 가격이 어떻게 과학적인 가치가 어떻고 하는 차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운석을 상서롭거나 아니면 요사스러운 조짐, 즉 하늘의 계시로 여겼다. 

첼랴빈스크에 떨어진 운석으로 만든 2014 소치 동계올림픽 금메달. 단 7개 만들었으며 그램당 232만원의 고가였다. 러시아의 빅토르 안이 행운의 운석금메달 주인공이 됐다. 

■진시황과 운석
 예컨대 <사기> ‘진시황본기’를 보자.
 “운성(隕星)이 떨어졌는데 땅에 닿자 돌이 되었다. 누군가 그 돌에 ‘진시황이 죽어 땅이 나뉜다’고 새겼다. 진시황이 그 돌 가까이 거주하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돌을 불태워버렸다. 진시황이 기분이 언짢아져~천하를 순행했다.~이듬해 7월 진시황이 서거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하늘에서 떨어진 신성한 운석의 기운을 이용해서 진시황을 저주하는 글귀를 새겼고, 그 글귀대로 진시황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운석 사건에 대해 반고는 “돌은 음류(陰流)이니 신하가 군주를 위태롭게 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진나라가 결국 진시황의 뒤를 이은 진2세(호해) 시절, 신하(지록위마의 장본인인 조고를 가리킴)에 의해 위태로워졌고,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로 양분된 것을 의미한다. 결국 진나라의 망조는 결국 누군가 운석의 조짐을 빌려 만천하에 알려주었다는 소리가 된다. 

 

 ■하늘이 돌을 떨어뜨렸다
 운석이 떨어지면 곧잘 인용했던 중국의 고사가 바로 <춘추> 희공 16년의 기록이다.
 “기원전 644년, 송나라에 ‘돌이 5개가 떨어졌다.’(隕石于宋五)”
 두 말 할 것 없이 ‘운석’의 기록이다. <춘추>의 해설서인 <좌전>은 이 대목에서 “하늘에서 돌멩이가 떨어졌는데(隕石) 이는 하늘 위의 별들이 쏟아져 내린 것(隕星)”이라 했다. 그런데 <춘추>는 ‘돌이 떨어졌다’는 의미의 ‘석운(石隕)’이라 하지 않고, ‘돌을 떨어뜨렸다’는 뜻의 ‘운석(隕石)’이라 거꾸로 표현했다. 이것이 두고두고 궁금증을 낳았던 것 같다. 이를 두고 송나라 유학자인 정자(程子)는 흥미롭게 풀이했다.
 즉 <춘추>에서 ‘돌이 떨어졌다(石隕)’고 하지 않고 ‘돌을 떨어뜨렸다(隕石)’고 한 까닭이 ‘운석’을 ‘사람(人事)의 잘못’으로 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이 사람의 잘못을 책망하려고, ‘돌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송나라에 운석이 떨어진지 5년 뒤 나라에 변고가 생겼다. 송나라 양공이 초나라 성왕에게 사로잡혀 모욕을 당했고(기원전 639년), 그 이듬해에는 홍수(泓水·허난성을 흐르는 강이름)에서 다시 초 성왕에게 대패 당했다.(기원전 638년) 송 양공은 그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기원전 637년)
 ‘쓸데없는 양보로 대세를 그르쳤다’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를 낳은 어이없는 패배였다. <춘추>의 해석자들은 결국 송나라 패배의 조짐은 결국 5년 전의 운석에서 비롯됐다고 본 것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3년 11월 23일 전남 고흥군 두원면 성두리 야산에 떨어진 운석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지금은 한국 지질자원연구소에 보관돼 있다.

■해괴제를 지낸 까닭
 그랬으니 옛 사람들은 석운, 아니 운석 현상이 나타나면 ‘하늘의 심판’ 혹은 ‘하늘의 조짐’이라며 심상찮게 여겼다.
 “14년(신라 남해왕),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을 노략질했다. 신라가 6부 군사들을 보내 막았는데, 낙랑이 이 틈을 타 텅빈 금성(경주)를 공격했다. 밤에 유성(별똥별)이 나타나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리들이 두려워 물러가다가….”(<삼국사기> ‘신라본기’)
 “645년(고구려 보장왕), 별똥별이 고구려 진영에 떨어졌다. 당 장수 설인귀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공격해서 고구려군 3만명을 죽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02년(선조 35년), 경주에 운석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늘이 내린 재앙의 경계가 아닐까.”(<고대일록>)
 군주는 운석이 떨어지면 전전긍긍,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며 몸과 마음을 닦아야 했다.
 세종과 문종은 황해도와 함길도에 운석이 떨어지자(1423년과 1452년)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 해괴제란 나라에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이를 풀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뜻한다. 함길도 운석사건의 경우 불덩이(不塊)가 땅에 떨어져 주변의 31척 5촌(10m) 가량의 땅이 꺼졌으므로 문종이 사자를 보내 해괴제를 지냈다고 한다.

 

 ■석운과 운석의 고사
 1563년(명종 18년) 경상도 산음현 북리에 운석이 떨어진 것을 두고 <명종실록>을 쓴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운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재변이다. 정사가 해이해지고 쇠퇴하는 날에 운석이 떨어지고, 혹은 국가가 쇠잔하고 혼란할 때도 떨어졌으니…. 그러니 군주가 허물을 반성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때가 아닌가.”(<명종실록>)
 1657년(효종 8년)의 일이다. 기상이변이 몇년간 이어지고, 태백성(금성)이 대낮에 나타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데도 임금이 효릉(인종의 능)에 능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 때 찬선(정 3품) 송준길이 “아니되옵니다”를 외친다. 송준길이 예로 든 것이 바로 그 ‘석운과 운석’의 고사였다.
 “<춘추>가 ‘석운’ 대신 ‘운석’, 즉 ‘하늘이 돌을 떨어뜨린다’는 표현을 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정자께서 ‘운석의 재변을 인사(人事), 즉 인재로 돌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재변은 반드시 인사의 잘못입니다. 재변을 막는 것도 인사에 달려있습니다.”
 송준길은 그러면서 “전하가 공구수성(恐懼修省·두려워하여 수양하고 반성함)하지 않으면 재변을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효릉(경기 고양군)까지 30리길을 산넘고 물건너 말 달리며 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1억5000만 년 전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운석. 대형운석은 6500만년 전의 공룡 멸종을 불러왔다고 한다. 

■‘일·월식은 비정상적인 남녀관계 때문’
 어디 운석 뿐인가.
 옛 사람들은 모든 이변(異變)이 하늘이 사람에게 보여주는 조짐이라고 여겼다.
 미수 허목(1595~1682)의 시문집인 <기언(記言)> ‘요상(妖祥)’ 편을 보자. 이 책은 천지와 일월성신 등 자연과 그 현상들, 그리고 인간이 지켜야 할 질서와 도리를 쓴 책이다. ‘요상’은 ‘요망한 기운이나 조짐’을 뜻한다. ‘요상’ 편은 옛 문헌에 나오는 갖가지 자연현상과 인간의 관계를 총정리 해놓았다.
 예컨대 일식과 월식을 보는 옛 사람들의 해석은 더욱 흥미롭다.
 즉 “해는 모든 양(陽)의 으뜸이고 군주의 표상인데 일식 때문에 가리고 먹혔으니 재앙의 조짐”이라는 것이다.(<춘추호씨전>)
 “여자가 남편을 타고 올라서고 신하가 군주를 등지며 권력이 신하에게 있고 오랑캐가 중국을 침범하는 것은 모두 양기가 미약하고 음기가 성한 증거이다.”
 이를 두고 <예기>는 “남자를 가르치지 않아서 양사(陽事·남녀의 육체관계)가 알맞지 않으면 하늘이 꾸짖어서 일식이 있게 된다”고 해석했다. 이 때 “천자(황제)는 소복을 입고 육관(六官)의 직책을 정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식은 여자가 남자를 올라타는 격이며. 남녀의 비정상적인 육체관계를 상징해서 하늘이 견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월식은 어떤가. <예기>는 “부인의 유순한 덕이 갖춰지지 않아 음사(陰事·남녀간 잠자리)가 알맞지 않을 때 월식이 생긴다”고 했다.
 이 때 “황후는 소복을 입고 육궁(六宮)의 직책을 정비한다”고 했다. 정리하자면 일식과 월식은 음기와 양기가 서로 다투고 비정상적으로 합쳐질 때 오는 변고(變故)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 경우 황제와 황후는 소복을 입고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통한 쇄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사와 우박, 흙비의 의미는
 요즘처럼 황사가 나타나면 어떨까.
 한나라 경방이 쓴 <역전(易傳)>은 351년 양주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황무(黃霧)가 낀 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누렇다는 것은 누렇고 탁한 기운이 천하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의 진출을 가로막고 도를 끊었기 때문에 후사를 잇지 못하는 재앙이 생긴다.”
 말하자면 <역전>은 황사가 훌륭한 사람의 기용을 막아 결과적으로 세대간 단절이 일어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혜성이 출현하면 어떨까.
 “요성(妖星·불길한 별)은 21개인데 그 첫번째가 혜성”이라 했다.(<진서> ‘천문지’) 혜성 중에서도 패성(패星·꼬리없는 혜성)은 나쁜 기(氣)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며 어둡고 혼란스러운 별이라는 관념이 짙었다.(<춘추호씨전>)
 서리와 눈, 우박과 흙비는 무엇인가. <춘추>에는 “노나라 희공 29년(기원전 631년) 가을에 많은 우박에 내렸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를 두고 <춘추호씨전>은 “음양이 조화를 이뤄 흩어지면 서리와 눈이 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나쁜 기운이 되어 흙비와 우박이 온다”고 했다. 특히 우박은 “음기가 양기를 위협하고 신하가 군주를 침범하는 기상”이라 해석했다. <춘추호씨전>은 당시 노나라의 정권이 군주(희공)가 아니라 대부인 계(季)씨에게 넘어가 있음을 꼬집은 것이다. 

최근 경남 진주에 떨어진 운석. 예로부터 운석이 떨어지면 하늘의 징조, 하늘의 계시라고 여겨 지도자들이 몸을 닦고 정사를 반성했다.

■소인배를 등용하면 산이 무너진다
 만약 2011년 발생한 우면산 붕괴를 옛 사람들은 어떻게 봤을까.
 <역전>은 “소인이 득세하면 그 요망한 기운이 산이 무너지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즉 “음(陰)이 양(陽) 위에 올라가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면산 붕괴는 소인들의 득세 때문에 발생한 ‘인재(人災)’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홍수도 마찬가지다. “정사를 멋대로 농단하는 자의 재앙은 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물은 곧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역전>)
 이밖에도 <진서>를 보면 “조상을 공경하지 않고 정치와 법령이 적절치 않으면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하고 성읍을 무너뜨리며 사람들이 빠져죽는다”고 했다.
 유학의 국교화를 이룬 한나라 동중서는 더 나아가 “백성이 근심하고 원망하면 큰 물이 진다”고까지 했다. 부역이 많고 세금이 무거운 경우에도 그 견책으로 강과 바다가 범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지진은 어떤가. <역전>은 “땅이 갈라지는 것은 신하의 마음이 이반되어 윗사람을 따르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고 했다. “음이 양 위에 올라서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이변은 군주의 탓
 이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군주)의 관계를 다룬 허목의 <기언>을 읽으면 군주라는 직분은 정말 못해먹을 짓거리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모든 기상이변과 천재지변의 책임이 모두 백성을 잘못 다스린 군주에게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익의 <성호사설> ‘천지문·재이편’의 언급처럼 “임금은 지극히 높지만 임금 위에 하늘이 있다”니까….
 “임금이 하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백성이 임금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인가. <춘추>이후 불길한 징조가 나타날 때마다 반드시 인간과의 관계를 결부시켰다.”
 이익의 마무리 말이 멋있다.
 “이변이 생길 때 임금이 두려워하고, 이변이 없을 때도 두려워 하면 이변이 변하여 상서(祥瑞)가 될 수 있다.”
 임금이 늘 겸손하고 늘 스스로를 닦으면 나쁜 조짐조차 상서롭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석이 떨어질 때 지도자가 할 일
 숭례문 보수공사가 결정된 1478년(성종 9년) 4월1일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대신들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성종 임금이 화를 벌컥 냈다.
 “흙비가 내렸는데, 혹시 숭례문 보수공사 때문이 아닌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경들은 왜 한마디 말도 없는가.”
 그러자 대신들은 “매우 훌륭하신 말씀”이라면서 “임금이 재이(災異)를 만나 두려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1524년(중종 19년), 흙비와 우박·서리·지진 뿐 아니라 강릉에서 화재까지 발생했다. 이 때 시강관 임추가 아룄다.
 “흙비는 백성이 고단하다는 것을, 서리는 음기가 극진하다는 것을, 우박은 음기가 양기를 협박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 원래 고요한 땅이 지진 때문에 움직였고, 음기가 극진하여 양기인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재변은 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중종이 화답했다.
 “반드시 재변이 일어나는 뜻이 있을 것이다. 과인을 비롯한 상하가 두려워 하고 서로 심신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요즘들어서도 재변은 이어지고 있다. 일·월식은 물론 황사(흙비)에, 지진에, 홍수에, 우박에…. 최근에는 때아닌 운석까지 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하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송준길의 말처럼 ‘공구수성(恐懼修省)’ 하겠다고 나서는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