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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고려 조선을 뒤흔든 사교육 열풍

  “학교의 흥폐가 스승의 도(道)에 있는데…. 심지어 ‘해(亥)와 시(豕)’, ‘노(魯)와 어(魚)’의 글자를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선생이라 합니다.”
 1429년(세종 11년) 사간 유맹문의 상소를 보면 성균관과 향교 선생들의 질이 형편없음을 고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갈 곳 없는 늙고 병든 사람들을 성균관 교관(선생)으로 발령내는 일이 다반사이며, 그마저 자주 바뀌는 형국”(중종의 언급)이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1527년(중종 22년) 지사 김극핍의 상소가 사태의 심각성을 전한다.
 “유생들이 선생 한사람의 기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학부형들은 ‘관학(성균관) 공부가 안된다’며 유명 과외선생에게 수업을 받는다고 합니다.”(<중종실록>)
 공교육의 선생들은 믿을 수 없으니 실력있는 과외선생을 찾는 것이 당대의 유행이라지 않은가.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명단. 고려 조선시대 땐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낙지’가 ‘입지’가 된 사연
 김극핍의 상소야말로 무너진 공교육과 창궐하는 사교육의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하기야 “유생이 독서하는 이유는 과거합격을 위한 것이 아니냐”던 성종 임금의 말대로 옛 선조들은 오로지 과거 합격에 목을 매지 않았던가.
 “유생은 경서를 연구하더라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시골에 폐기되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치게 됩니다.”
 1479년(성종 10년), 서거정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유생들은 결국 폐인이 되고 만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합격에 목을 매는 것은 당연했다. 
 오죽했으면 영남의 유생들은 추풍령은 거치지 않고 문경새재나 궤방령으로 넘었다지 않은가. 하기야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추풍령보다는 경사스런(慶) 소식을 듣는다(聞)는 뜻의 ‘문경(聞慶)새재’나, 합격방이 붙는다는 뜻을 지닌 ‘괘방령(掛榜嶺)’을 통해 한양으로 갔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떨어질 낙(落)’자는 절대 써서는 안될 금기어였다. 그러니 어떤 유생이 낙지를 구워 다른 유생에게 전해주면서 “‘입지’ 구운 것 좀 드시오”라고 했단다. ‘떨어질 낙(落)’ 발음이 아니라 ‘설 립(立)’자를 써서 ‘낙지’를 ‘입지’라 한 것이다. 입지(立志), 즉 뜻을 세운다는 뜻이니 얼마나 합격이 간절했으면 낙지를 입지라 했을까. 이 뿐인가. 어떤 유생은 시험 때마다 고양이가 지나가면 합격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밤에 병든 고양이가 점포 문밖에 쪼그리고 앉아있자 부채를 휘둘러 자기 앞을 가로질러 가게 했다. 유생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 뒤 숙소로 돌아갔다.
 신숙은 마침내 1568년(선조 2년) 별시에 급제하는 영예를 안았다. 결과적으로 고양이 덕을 본 것이다.  

 

 ■사교육의 원조는 경당
 ‘과거=출세’의 등식이었으니 유생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그러니 잘 가르친다는 사교육 선생들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못말리는 교육열이었니 만큼 사교육의 뿌리 또한 깊다. 고구려 때 유행한 ‘경당’까지 이어지니 말이다.  “고구려에서는 문지기·말먹이의 집에 이르기까지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경堂)이라 하며 자제가 결혼하기 전에는 밤낮으로 이곳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였다.”(<구당서> <신당서> ‘고구려전’)
 신라에도 개인교사가 있었다.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617~686)이 대표적이다.
 “설총은 구경(九經·유교 9가지 경전)’을 이두로 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설총을 종주로 삼고 있다.”
 이같은 사설학원 혹은 학교는 고려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는 마을마다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2~3곳이 있고, 미혼의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경서를 배웠다.”(<고려도경>)
 ‘마을의 경관과 서사’란 사학 혹은 학원의 형태로 운영됐을 것이다.  

송나라 때 황제가 직접 관정했던 '전시'를 그린 그림. 황제가 직접 뽑은 사대부는 황제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군이 됐다.

■이규보·이승휴·이색·이제현은 사교육 추종자
 그 덕분에 고려의 내로라하는 학자·문인들과 그의 제자들이 모두 사교육의 도움을 받았다.
 사교육의 으뜸되는 장소는 역시 사찰이었다.
 예컨대 <제왕운기>를 슨 이승휴는 12살의 나이였던 1235년(고종 22년), 원정국사의 처소에서 공부했다. 이 때 원정국사는 싹수사 푸릇푸릇한 이승휴에게 특별히 신서라는 독선생을 붙여 <주역>과 <좌전>을 가르쳤다. 또 목은 이색의 아들 이종선은 용두사에서. 손자는 진관사에서 각각 공부했다. 익재 이제현의 손자는 이색이 아들을 가르친 혜구 스님에게 교육을 받았다.
 사교육의 ‘종결자’는 뭐니뭐니해도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가 아닐까.   
 이규보가 14살 때 당대 최고명문 사학인 문헌공도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이규보의 아버지(이윤수)의 교육열은 만만치 않았다.
 1183년 봄, 이규보의 아버지는 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았지만, 아들은 개경에 남겨두었다.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다.
 아들을 지금으로 치면 ‘특목고’인 문헌공도에 보내놓고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대비, 고액 족집게 과외를 시키게 된다.
 이규보가 ‘이 이부라는 이에게 드린다’는 고율시를 보자.
 “공(이 이부)이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도 어릴 때 참여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전집 권 8 고율시’)
 이규보의 과외교사는 ‘이 아무개’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규보는 고액과외를 받았음에도 그 해(1183년) 국자감시에서 보기좋게 낙방하고 만다. 그 해 뿐 아니라 이규보는 3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 4수 만에 합격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어렸을 적 영재였던 이규보는 지금으로 치면 급작(수능모의고사)에서 수석을 두번이나 차지했지만 정작 과거(국자감시)에서는 3수 끝에 합격했다.

■수능모의고사 수석 이규보의 좌절
 사실 이규보는 문헌공도가 여름철에 마련한 ‘특별과외’에서 수석을 차지한 영재였다.
 무슨 말이야. 문헌공도는 해마다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50일간 하과(夏課)라 해서 일종의 여름철 특별과외를 펼쳤다.
 강사는 졸업생 가운데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지만 아직 관직 발령을 받지 못한 이들이 맡았다.
 “이들을 교도(敎導·강사)로 삼아 구경(九經·9개 유교경전)과 삼사(三史·사기, 한서, 후한서)를 가르쳤다. 간혹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에 따라 등수를 정했다.”((<동국이상국집>)
 ‘촛불에 금 그어놓고 펼치는 시험’을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했다. 이를 다른 말로 ‘급작(急作)’이라 했는데, 일종의 수능 모의고사였던 셈이다.
 이규보는 이 급작을 두고 “하과는 과거에 대비하여 시와 부를 익히는 공부”(<동국이상국집> ‘후집 권 7 고율시’)라고 말했다. ‘하과’는 과거시험 대비용 ‘족집게 과외’였던 것이다. 갓 급제한 졸업생 선배들이 후배들을 사찰에 모아놓고 혹독한 합숙과외를 펼치면서 출제경향과 예상문제, 그리고 답안지 작성요령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규보는 이 하과에서 두 차례나 수석을 차지했다. 수능모의고사에서 전국 1등을 차지했다고 할까. 그런데 정작 과거시험에서는 3번이나 떨어졌던 것이다.

 

 ■80대 전문강사
 재미있는 것은 이규보가 셋째아들인 이징에게까지 개인과외수업을 시켰다는 것이다.
 “내 셋째아들 징은 썩은 나무 강 새길 수 없네. 장성한 나이인데 글을 알지 못하니 밥주머니 되어 곡식만 축내누나. ~그대는 늙을수록 학문 더욱 정심하여~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만들기를 기약하누나.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동국이상국집> ‘신대장에게 내 아들 징을 가르치는 것을 사례함’)
 이규보가 신대장(申大丈)이라는 과외선생을 위해 지은 시이다. 아들이 어리석고 글을 읽지 못헤서 어쩔 수 없이 과외선생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신대장이라는 사람은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집에 개인교습소를 차려 학생들을 가르친 전문학원강사였는데, 학생수가 엄청났다고 한다.
 “(신대장은) 동몽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모여들어 서숙을 이뤘네.”(<동국이상국집>)    
 말하자면 고려시대 스타강사였던 셈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화를 꽂고 마을을 돌던 모습을 그린 평생도의 한 장면. 과거급제를 위해 못말리는 사교육열풍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기를 끌었던 고려시대 과외교사
 그런데 이규보가 언급한 신대장과 같은 과외선생이 고려 시대에 많았나 보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예종 대에 급제한 김수자라는 인물은 금양현위-국학학유 등을 지낸 뒤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는 손수 재배한 채소를 팔고, 날마다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또 나홍유라는 인물은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고 과거에 여러차례 응시했으나 낙방한 뒤 글방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진사가 된 구사평은 아예 발벗고 번듯한 학원을 차린 것 같다. 이색의 <목은시고>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구사평은 내(이색)가 젊었을 적에 교분을 쌓았던 인물인데, 그 후 만나지 못해 생사조차 모르게 된 지 오래다. 나중에 들으니 선주(善州·선산) 지방에 집을 번듯하게 지어놓고 서재를 두어 생도 30여명을 가르쳤다. 또한 빈객대접도 풍성하게 했다.”
 또 진수재(晉秀才) 같은 이도 스타강사였던 것 같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보면 “진수재라는 인물이 용산의 별장에 학생들을 모아 학업을 익히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규보는 이 별장에 학생들이 ‘마치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고 표현했다.
 “모든 선비들 마치 물고기 떼처럼 모여들어(白面學子魚聚族), 공부에 뜻을 갖고 여기를 서숙으로 삼는구나.”
 물반 고기반일 정도로 수강생들이 몰려들었다는 뜻이 아닌가.

 

 ■전설의 스타강사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고려의 전설적인 스타강사는 역시 고려 충렬왕대의 인물인 강경룡일 것이다.
 그 전설의 이름은 왕조가 바뀐 조선 초기까지 ‘사교육의 신’으로 추앙됐으니 말이다.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의 일이다. 충렬왕이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 <고려사절요>는 이 이유를 설명한다.
 “선비 강경룡이 집에서 글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 10명이 성균시에 모두 합격했다. 합격자들이 스승 강경룡을 찾아 인사를 드리느라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강경룡의 동네에 살고 있던 익양후 왕분(신종의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얼마 후 익양후 왕분이 충렬왕을 알현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강경룡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충렬왕이 강경룡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하사품을 내렸다.
 “이 노인(강경룡)은 비록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구나. 그의 공이 얼마나 큰가.”        
 요즘으로 치면 강경룡이 가르친 제자 10명이 모두 서울대나 고시에 합격했다는 소리니 얼마나 대단한 강사인가.  
 그런데 이 일이 있은지 131년이 지난 1436년(세종 18년), 강경룡의 이름이 다시 출현한다.
 지성균관사 허조가 세종대왕에게 아뢸 말씀이 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려 충렬왕 때 강경룡이라는 사람이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유생 유사덕은 집에 서재를 마련, 어린아이 수십명을 가르치고 있고, 경상도 용궁사람 박호생도 10여 년 동안이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원컨대 (강경룡의 예로) 이 사람들을 포상하신다면….”(<세종실록>)
 세종은 허조의 상언을 좇아 유사덕과 박호생을 포상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이 결과적으로 사교육을 부추겼다는 이야기다.
 천고의 세월이 지나도 못말리는 사교육 붐이 아닌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