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수는 적임이 아닐 듯 하옵니다. (귀가 어두워) 돌발발언이 튀어나오면 어쩝니까.”
1738년(영조 14년), 영조 임금은 청나라로 파견할 외교사절(동지정사)로 도승지 이덕수를 임명했다. 그러자 사헌부는 반대의 뜻을 전했다.
이덕수의 문학과 지조는 견줄 자가 없지만, 외교사절로서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덕수는 귀가 들리지 않은 증세, 즉 ‘중청(重聽)’을 앓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직상소를 여러번 올렸지만 번번이 반려됐다. 대신 영조는 옆사람을 시켜 큰소리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웃음(目笑)을 지었다고 한다.(<영조실록>)
그런 이덕수를 청나라 외교사절 단장으로 보낸다니…. 아닌게 아니라 걱정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영조 임금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중국어에 대해서는 모두 귀머거리 아닌가. 어찌 이것이 병폐가 될 것인가?”
누구든지 중국어는 까막눈일텐데 이덕수의 귀가 어둡기로서니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다. 물론 사헌부의 지적을 받은 이덕수 본인이 고사해서 외교사절 임명은 불발로 끝났다. 하지만 청각장애인을 외교사절로 임명할 정도로 어떤 선입견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장애인 재상
지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윤지완(1635~1718년)의 일화도 재미있다.
<숙종실록>은 “윤지완이 정승이 된지 오래되지 않아 이상한 병을 얻어 한쪽다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기록했다. 그를 두고 ‘다리가 하나 뿐인 정승’이라 해서 ‘일각정승(一脚政丞)’이라 했다.
사실 윤지완의 인물평은 좋은 편이 못된다. 그는 인현왕후의 복위(1694년)를 계기로 재등용된 ‘소론’이었다. 그러나 중전에서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를 두고 “장씨가 세자(경종)의 모후이므로 특별대우해야 한다”는 등의 상소를 올려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노론의 미움을 샀다. 그런 탓에 <숙종실록>은 “윤지완이 사람됨이 굳세고 사나우며 배운 것이 없어 식견이 없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대목도 보인다. 다리를 잃은 윤지완이 끈질지게 사직서를 내면, 임금(숙종)이 역시 끈질기게 반려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다리 병이 심해서 대궐의 섬돌을 오르내릴 수 없습니다. 면직시켜 주소서.”(윤지완)
“무슨 소린가. 특별히 출입 때 부축을 받아도 좋다고 허락했거늘 어찌 사양하는가?”(숙종)
윤지완은 무려 79차례나 사의를 표명한 끝에 겨우 면직을 허락받았다. ‘사의표명-반려’의 과정이 무려 79차례라니…. 더 대단한 일이 있다.
면직 이듬해인 1695년 <실록>을 보면 숙종은 도승지를 보내 다시 한 번 “복직하라”고 청한 것이다. 윤지완은 이 때도 역시 병을 칭하며 ‘고사’했다. 참으로 ‘찡한’ 군신관계가 아닐 수 없다.
■“이 사람은 주석지신입니다.”
태조·정종·태종·세종 등 네 임금이나 ‘모시며’ 법전을 편수하고 예악을 정비한 문경공 허조(1369~1439년)는 또 어떤가.
허조는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肩背구루)’ 척추장애인이었다.(서거정의 <필원잡기> ‘대동야승 1’)
태조 이성계는 그런 허조를 등용, 조선의 예법을 만들고 석전의식을 개정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태종의 일화가 유명하다.
‘이조정랑’ 인선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던 태종이 관원의 명부에서 허조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무릎을 쳤다는…. 태종은 세종에게 선위하면서 허조를 특별히 지칭하면서 “이 사람이 진실로 재상”라고 칭찬했단다. 또 축하연회를 끝낸 태종이 허조를 앞으로 나오게 해서 손으로 어깨를 짚은 뒤 세종을 돌아보며 말했단다.
“이 사람이 나의 주석(柱石)입니다. 주상!”
‘주석’은 ‘주석지신(柱石之臣)’의 준말로, ’나라를 받치는 중추적인 신하’를 뜻한다.
허조는 형인 허주를 아버지처럼 모셨다. 매일 새벽 닭이 울면 반드시 형을 찾아 문안인사를 올렸을 정도였다. 형의 집을 찾을 땐 반드시 동구 밖에서 시종들을 물리치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니….
<세종실록>의 허조 졸기(卒記·부음기사)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을 읽을 수 있다.(1439년)
허조의 ‘대쪽 성품과 공평무사’ 등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반면, 허조의 장애를 염두에 둔 내용은 단 한줄도 없다. 임금이나 동료들이 허조의 장애를 전혀 편견없이 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1548~1522년)는 건습병(蹇濕病·일종의 고관절염)으로 인한 앉은뱅이 증세로 고생했다. 광해군은 중관(中官·내시)들에게 “심희수를 부축해서 오르내리게 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또 중종 때 우의정을 지낸 권균(1464~1526년)은 간질 증세로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중종은 “말미를 줄테니 사직은 불허한다는 답서(不允批答)를 내리라”는 영을 내린다.
어린아이의 안내를 받아 길을 가고 있는 시각장애인.시각장애인용 장죽을 잡았다. (김준근의 <풍속도>에서) |숭실대박물관
■복지정책의 원조
돌이켜보면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복지정책의 뿌리는 깊다.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역사 속 복지정책의 원조는 신라 3대왕인 유리왕(이사금)일 것이다. 서기 28년 11월(음력), 유리왕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할머니가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백성을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니…. 이것은 곧 나의 죄다.”
유리왕은 옷을 벗어 덮어주고 먹을거리를 준 뒤 다음과 같이 명했다.
“환(鰥·홀아비), 과(寡·홀어미), 고(孤·고아), 독(獨·홀몸노인) 등과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부양하게 하라.”(<삼국사기> ’신라본기·유리 이사금조’)
유리왕의 복지정책에 감화된 이웃나라 백성들이 신라로 몰려왔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표현했다.
“(유리왕의 복지정책 덕분에) 신라의 풍속은 즐겁고 편안했다. 가악(歌樂)의 시초인 ‘도솔가(兜率歌)’가 퍼졌다.”
‘도솔가’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요순시대의 ‘고복격양가(鼓腹擊壤歌)’를 연상시켰으리라. 모두가 꿈꾸는 이상사회가 복지정책의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고려 때 들어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복지정책은 더욱 발전한다. <고려사> ’지(志)’의 ‘식화·진휼조’를 보자.
“1308년(충렬왕 34년) 임금이 하교했다. 여든 살 이상인 자 가운데 독질(篤疾·난치병 환자)과 폐질(廢疾·장애인)로 자존 능력이 없는 자들의 가족 중 한사람의 부역을 면한다. 만약 부양할 자가 없으면 마땅히 동·서 대비원(大悲院·국립의료원)에서 요양시킨다. 모든 식량은 국가가 담당하고 관리를 파견한다.”(<고려사> ’지(志)· 식화·진휼조’)
찬찬히 뜯어보면 매우 선진적인 복지시스템임을 알 수 있다. 가족이나 혹은 사회복지사가 총출동하는 ‘그물망식 무한돌봄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전하 배고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조선조 세종 시대에 들어와 더욱 적극적인 복지정책이 시행된다.
“환과고독과 잔질(殘疾·장애인)은 왕자(王者)의 정치에서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에게 환곡(식량을 빌려줌)을 우선 베풀고, 거처할 집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세종 즉위년·1418년)
막 즉위한 세종의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이다. 3년 뒤인 1421년 2월, 잇단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장애인과 병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라”는 명을 내린다. 그것도 못미더웠던지 “과인의 명대로 하지 않은 수령은 중죄로 처단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과인이 장차 감찰관을 파견해서 반드시 확인할 것이다. 만약 여염 가운데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었다면 중죄로 처단할 것이다.”
1419년(세종 1년), 사냥을 참관한 뒤 발길을 돌린 세종 임금의 어가가 개성의 영빈관에 이르렀다. 개성유후 한옹이 지역 유지들과 회회인(이슬람계 백성)들을 인솔하고 국왕을 영접하러 나왔다.
그 틈에 소동이 일어났다. 맹인(盲人·시각장애인) 114명이 어가 앞을 막아선 것이다. <세종실록>은 “맹인들이 어가 앞에서 궁핍함을 호소했다(告窮乏于駕前)”고 기록했다.
“전하, 배고파 도저히 살 수가 없사옵나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대통령의 전용차를 막고 불법으로 집단행동을 벌인 꼴이니 말이다. 하지만 <실록>의 표현은 담담하기만 하다.
“상(임금)은 그들의 호소를 듣고 유후사에 명하여 쌀 40석을 주었다.”
만고의 성군다운 ‘쿨한’ 임금님이 아닐 수 없다.
점복을 주업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장애인들. 시각장애인 판수(判數)가 제삿상에서 오른손으로 북을 두드리고 왼손으로 바닥에 잇는 꽹과리를 쳐 가면서 경(經)을 읊고 있다.|숭실대 박물관
■“서울시가 부양하라!”
조선의 장애인 정책은 갈수록 구체적인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시각장애인들을 구휼하기 위한 국가기관인 ‘명통시(明通寺)’를 설립했다. 시각장애인들의 먹고 살 길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마련해준 것이다. 명통시 소속 시각장애인들은 독경이나 점복으로 살았고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제를 관장하기도 했다. 조정은 정기적으로 쌀과 콩을 하사했으며, 때때로 노비는 물론 건물까지 내려주는 특전을 베풀었다.
시각장애인들 뿐 아니라 지체장애인들을 위한 관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457년(세조 3년) 임금은 각종 장애인 대책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한다.
“잔질(장애인)과 독질(난치병 환자)로서 의지할 곳 없는 자와 맹인들을 위해서는 이미 명통사를 설립했지 않은가. 농아(聾啞)와 건벽(지체장애인)들은 한성부(서울시)가 돌봐줄 ‘도우미(保授)’를 널리 찾고, 동서 활인원이 맡아 후하게 구휼해야 한다. 또한 계절마다 부양한 결과를 계문(보고)해야 한다.”
분기마다 농아와 지체장애인들의 구휼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다.
■“세상에 버릴 사람 없습니다.”
언급했듯이 <실록>에서 장애인 관료들의 신체결함과 업무능력을 언급하는 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보아도 선진적인 사고로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계층을 바라본 이들이 많다.
“시각장애인은 가르칠 수 있다. 눈동자로 보는 것은 막혔지만 신기(神氣)로 보는 것이 있어서 빛깔에 대해 밝게 듣는다. 남의 언어를 잘 들어 생각함이 상당히 넓고 사물의 형체로 상상한다.”(<인정(人政)> 제8권 ‘교인문’)
조선 후기 철학자 최한기(1803~1877년)의 말이다. 그는 “(시각장애인은) 때론 눈은 있지만 마음이 어두운 사람보다 더 나은 경우가 있다”고 주장했다.
1431년, 조선의 궁중음악을 정비한 박연(1378~1458년)이 세종대왕에게 간한다. “당시 관습도감(궁중음악을 담당하는 관청)에 시각장애인들을 발탁해야 한다”며 시각장애인들의 장점을 주장한다.
“그들은 눈이 없어도 소리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以其無目而審於音 且以天下無棄人也)”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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