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자 수행자들은 시쳇말로 ‘멘붕’에 빠졌다.
“잔소리꾼이 죽었으니 이제 해방이다. 우린 이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외치는 젊은 수행자도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부처님 사후 교단을 이끌어 갈 제자들이 깜짝 놀랐다. 이들은 서둘러 라자가하 성 교외의 바위굴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생전에 부처님이 설파한 가르침을 정리하고 제대로 전할 책무가 있었다.
회의에서 부처님의 최측근이던 아난 존자가 ‘내가 들은 바는 이와같다(如是我聞)’고 부처님에게 들은 설법을 암송했다. 핵심 제자들이 아난의 증언이 진정으로 부처님 말씀인지 검증했다. 그리고 500명의 비구가 검증된 부처님의 설법을 한 목소리로 외웠다.
이것이 경장(經藏)이다. 교단의 계율(생활규범)인 율장(律藏)도 제정했고, ‘경과 율’의 해설서인 논장(論藏)도 갖췄다. 이 세가지를 대장경이라 한다.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방대한 대장경을 필사(筆寫)로만 전할 수 없었기에 목판인쇄가 출현했다. 북송시기(983년) 제작된 관판대장경이다. 독실한 불교국가인 고려는 대장경의 나라였다. 초조대장경(1087년)과 속장경(1101년)을 잇달아 제작했다.
1232년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자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면서 새 대장경 제작에 나섰다. “거란의 침입 때(1011년)도 (초조)대장경을 새기니 놀랍게도 거란군이 후퇴한 예가 있다”(이규보)는 것이었다.
16년의 대역사 끝에 1251년(고종 38년) 대장경판이 완성됐다. 이것이 고려대장경(사진)이다. 팔만대장경이라는 애칭도 있다. 8만장이 넘는 경판의 양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심오한 뜻도 있다. 즉 불가에서는 속세의 수많은 번뇌를 ‘팔만사천 번뇌’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컬을 때도 ‘팔만사천 법문’이라 한다.
지금 봐도 감탄스러운 것은 약 1.5㎝의 크기로 총 5200만자가 넘는 구양순체의 방대한 글자인데도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은 필체냐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추사 김정희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다. 선인이 쓴 것이다.(非肉身之筆 乃仙人之筆)”라 감탄했을까.
최근 고려대장경판 가운데 일제시대 때 제작된 36개판이 국보의 가치가 있는지 열띤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논쟁으로 고려대장경의 가치 또한 다시 부각되고 조명되는 것이니 그 또한 반가울 따름이다. 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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