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여성 안중근' 남자현 선생 아시나요.

 광복 7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만 35년간 굴종의 역사를 견뎌온 우리네 어르신들의 고단했던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니다. 이번 주 주제는 '여자 안중근, 독립투사 남자현 선생의 삶'입니다.

 19살에 의병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47살에 만주망명을 결행했으며, 3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던 남자현 선생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남자현 선생은 61살이라는 나이로 중국거지 변장을 한 뒤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일본전권대사(부토 노부요시)를 죽이려다가 그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 때 선생은 37년 전 의병전쟁에서 전사한 남편의 피묻은 적삼을 입고 있었습니다.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남자현 선생을 기리며 팟케스트를 들어주십시요. 미리 썼던 기사내용을 팟캐스트에서 보충했습니다. 

 

1933년 2월27일 오후 3시45분, 하얼빈 교외 정양가 거리에서 거지 차림의 할머니가 일제경찰에게 붙들렸다. 여인은 피묻은 삼베 적삼을 감고 있었다.

  권총과 비수, 폭탄도 나왔다. 붙잡힌 여인은 독립투사 남자현 선생(1873~1933 사진)이었다. 선생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만주국 전권대사(부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려고 중국거지로 변장했다.

  하지만 조선인 밀정(이종현)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61살)였다.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17일 간이나 단식투쟁으로 버티다 순국했다.

  선생은 밥을 내미는 일경에게 “조선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 죽음은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라 외쳤다. 1891년 ‘낭랑 18살’에 혼인(남편 김영주)한 남자현 선생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있었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선포’(1895년) 이후 의병투쟁에 참전한 남편(김영주)이 전사한 것이다.(1896년) 37년 뒤의 거사 때 몸에 부적처럼 둘렀던 ‘피 적삼’은 바로 남편이 순국하는 순간에 입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유복자와 시어머니를 부양하던 남자현 선생은 1919년 3월 만주로 떠난다. 그 때 나이가 ‘무려’ 47살이었다. “남편의 원수이자 나라의 적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군의 어머니’로 일컬어졌다.

  ‘무지와 몽매도 적’이라며 조선여자교육회를 10여 곳이나 만들어 여성들의 항일투쟁 의식을 북돋았다. 무장투쟁에도 나섰다.

  1934년 조소앙이 <여협 남자현전>은 “남선생이 남녀 한인 600명을 조직해서 맹렬한 항전을 벌였다”고 소개했다.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잡입도 서슴치 않았다.
  사분오열된 독립운동의 통합을 독려하려고 혈서를 쓴 일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당시 1920년대 서간도 일대에는 90여개 독립운동단체가 난립하고 있었다.

  1921년부터 통합운동이 전개됐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보다못한 남자현 선생이 나섰다는 것이다.
  “일주일동안 산중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던 선생은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자들을 소집했다. 그 성의와 순국정신에 감격한 간부들은 누구나 그 뜨거운 눈물과 죽음을 각오한 피의 설유에 잘못을 회개하고 쌍방간 화합이 성립됐다.”(‘독립운동의 홍일점-여걸 남자현’, <부흥> ‘1948년 12월호’)
  선생은 의열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조소앙의 <여협 남자현전>은 선생이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주도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1928년 4월까지 임살단을 조직해서 단장이 됐다. 단원 4명을 통솔해서 직접 화약을 넣은 군병장기를 들고 경성에 들어가 사이토 총독을 암살할 것을 모의했다. 1925년 4월6일쯤이었다.… 그러나 적에게 사로잡혀 군병기를 빼앗기고 선생은 경성을 몰래 빠져나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1932년 국제연맹은 일제가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자 하얼빈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선생은 또 한 번 좌우 손가락을 끊어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는 뜻의 ‘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게 보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삼엄한 경비 속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남자현 선생(1883년)은 안중근 의사(1879년생)보다 4살 위이다. 그녀의 기개와 행동이 어쩌면 그렇게 안중근 의사와 닮았는지 모른다.  

  이쯤해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동포여, 무엇이 그리 바쁘뇨/황망한 발길을 잠시 멈추시고/만주벌에 떠도는 남자현이 혼백 앞에/자유세상 밝히는 분향을 올리시라.…아낙의 혈서와 무명지를 보게 되리라.”(시인 고정희의 ‘남자현의 무명지’)

  23일까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여성독립운동가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266명의 독립운동가가 소개되고 있다. 고정희의 시처럼 무엇이 그렇게 바쁜가. 짬이 없다는 핑계말고 여성독립투사들의 숨결을 한반 맡아보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