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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월대가 무엇이기에 광화문 앞을 파헤치고 도로 선형까지 바꿀까

광화문 광장에서 탁 트인 가을 하늘 아래 북악산과 어우러지는 광화문·경복궁의 조화를 보는 맛이 싱그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오랜만에 광화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라면 좀 이상하게 생각할 법 하다. 사직동에서 안국동으로 이어지는 광화문 앞 도로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고, 또 최근에는 그마저 높은 울타리로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얼마전 문화재청이 이와 관련된 보도자료를 하나 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올 연말까지 광화문 월대의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월대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불편함을 무릅쓰면서까지 복원한다는 것일까. 문화재청 궁릉유적본부는 ‘광화문 앞 월대의 전면 복원’은 1990년부터 30년 넘게 진행된 경복궁 복원 공사 중 ‘경복궁 중심축 복원에서 찍는 마지막 획’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광화문 앞에 얽힌 갖가지 사연을 더듬어보자. 

■동구릉에서 발견한 광화문 월대 돌기둥
한 젊은 연구자의 ‘우연한 발견’에서 이야기를 풀어본다. 
한때 문화재청 산하 궁능유적본부에서 전시 큐레이터로 근무했던 전나나씨(현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학예연구사)가 주인공이다. 궁능유적본부 근무 시절 조선 왕릉을 부지런히 답사했던 전 학예사의 시선에 꽂힌 석물(石物)들이 있었다. 
동구릉 마당 쪽에 쌓여있던 난간석주(난간에 쓰인 돌기둥) 18점과 동자석 20개, 용두석(용머리형 돌)이었다. 난간석주의 경우 현재 광화문에 일부 복원해놓은 월대의 돌기둥 1기와 너무도 흡사했다. 

월대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올 연말까지 이뤄진다.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진행하는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1866년 조성된 월대의 규모를 파악하여 복원의 자료로 삼을 작정이다.

전 학예사가 두 난간석주의 크기를 재보았더니 과연 쌍둥이라 할만 했다. 광화문 앞 석주(돌기둥)가 높이 152㎝, 너비 65㎝인데, 동구릉 석주도 높이 152㎝, 너비 64㎝였다. 두 석주의 양 옆 팔각형 구멍 크기도 22~23㎝로 같았다. 그뿐이 아니라 두 곳의 용두석 형태도 완전히 똑같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광화문 월대에 쓰인 부재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동구릉으로 해체 이전된 것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 단서는 99년 전인 동아일보 1923년 9월2일자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훼철되기 전의 광화문 앞 거리의 모습. 왼쪽은 1890년대의 사진이고, 오른쪽은 훼철 직전인 1923년 이전의 사진이다.

“경복궁 영추문~광화문 사이에 전차를 부설할 예정이어서 광화문 앞 돌난간을 헐어버릴 것”이라는 기사다. 돌난간은 월대를 지칭한다. 이듬해(1924년) “광화문에서 중학동~안국동에 이르는 길을 정비한다”(경성일보 7월1일)는 기사로 볼 때 이 무렵이면 완전히 헐린 듯하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무렵 헐린 월대의 부재들은 영제교(경복궁 흥례문~근정문 사이에 놓인 다리)의 천록(상상의 동물 조각상) 뒤쪽에 몰아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쌓아두었던 월대 부재 대부분이 일제강점기말~1970년대, 어느 시점에 동구릉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물론 그중 상당수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가운데 1기(현재 광화문 앞에 일부 복원된 월대의 부재)가 건청궁 뒷산인 녹산에서 확인되었다. 녹산은 1895년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시신이 불태워진 비극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달을 감상하는 명당자리?
‘월대(月臺)’는 ‘달 월(月)’자에서 보듯 ‘달을 감상하는 평평한 구조물’이라는 자못 낭만적인 냄새를 피우는 단어다. 그렇지만 달만 감상하기 위한 이른바 ‘뷰 값’하는 명당자리만은 아니었다.
궁중에서 개최하는 각종 의식을 위해 조성된 시설이 광화문 앞 월대였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그 월대가 초창기부터 존재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흥미로운 기사가 <세종실록>에 등장한다. 
1431년(세종 13) 3월29일 예조판서 신상(1372~1435)이 “광화문 밖에 섬돌을 쌓자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신상은 두가지 이유를 들었다. 관리들이 궁궐을 출입할 때 바로 광화문 앞까지 말을 타고 와서 내린다는 것이다. 이게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하나 광화문이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는 문인데, 이렇게 누추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신상은 “따라서 돌을 채취하여 계체(길고 평평한 돌·월대를 지칭한 듯)를 쌓고, 양쪽 곁에 난간석을 둘러야 하며, 강화도산 전돌로 바닥을 포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종은 “지금 막 농사철에 접어들었는데, 어떻게 백성들을 동원하겠느냐”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20일도 지나지 않은 4월18일자 실록에 “광화문이 완성됐다(光化門成)”는 기사가 보인다. 

■월대는 과연 세종 때 쌓았을까
두 실록기사 만으로는 세종이 원래 입장을 바꿔 월대를 세웠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불확실하다. 
다만 1550년(명종 5) 경복궁을 원경으로 비변사 관원들의 모임을 그린 ‘비변사계회도’와 겸재 정선(1676~1759)의 ‘경복궁도’에는 광화문 앞 월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지금 복원 계획에 따라 학술 발굴하는 경복궁의 광화문 월대는 무엇인가.
연구자들은 어떤 형식이든 광화문 앞에 월대와 같은 구조물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왜냐. 
비록 조선 후기지만, 창덕궁 돈화문과, 창경궁 홍화문, 경희궁 흥화문 등에 월대가 조성되어 있다는 기사들이 보인다. 예컨대 “1840년(철종 11) 창덕궁 돈화문 월대에서 시전 상인들을 접견했다”(<선전관청일기>)는 기사가 그것이다. 또 19세기 자료인 ‘동궐도’와 ‘서궐도안’에는 창경궁 홍화문과 경희궁 흥화문 앞 월대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렇게 조선 후기까지 창덕궁·창경궁·경희궁 등 각 궁궐에 존재한 월대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광화문) 앞에는 없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각종 그림에는 월대가 보이지 않을까. 임진왜란 전(1550년) 그려진 ‘비변사계회도’의 경우 비변사 관원들의 모임이 주제여서 주변 구조물인 광화문 앞 월대는 생략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임진왜란 후에 그려진 그림은 어떤가. 정선의 ‘경복궁도’에는 문루는 소실되고 뼈대만 남은 광화문 그림이 보인다. 광화문도 그럴진대 광화문 앞 월대는 오죽했으랴. 존재했더라도 전란으로 흔적조차 사라져버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전나나 학예사는 “본래 광화문 월대에 있는 난간석주의 수량은 좌우 20개씩 총 40개가 있었는데, 동구릉에 전해지는 것은 18개뿐”이라면서 “이 18점이라도 광화문 월대를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광화문 앞 월대가 훼철된 것은 1923년 무렵이었다. 동아일보 1923년 9월2일자는 &ldquo;경복궁 영추문~광화문 사이에 전차를 부설할 예정이어서 광화문 앞 돌난간을 헐어버릴 것&rdquo;이라는 보도가 나왔고, 10월 4일자에는 전차가 다니는 광화문 앞을 보여주고 있다.

■월대의 복원 기점은?
이전의 모습이 어떻든 지금 진행되는 경복궁 복원 사업은 그 기준점을 ‘중건 시기(1865~68년)’로 삼고 있다. 
월대 복원도 마찬가지다. 알다시피 경복궁은 임진왜란 와중에 소실된 이후 270여년간 폐허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1865년(고종 2) 4월부터 경복궁 중건의 대역사가 시작되어 3년2개월만인 1868년 6월 일단락된다. 
월대는 1866년(고종 3)에 조성된다. <경복궁영건일기> 3월3일자는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는데 작업자들이 궁 안에 쌓아둔 흙을 지고 왔는데 4만여짐에 이른다”면서 “한 짐 당 1푼씩 지급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조성된 월대는 1900년대초 찍힌 각종 사진에 그 모습이 담겨 있다. 광화문 앞으로 너른 월대가 T자형으로 설치되어 있다. 월대 왼쪽 오른쪽 측면에 난간석이 설치되었고, 좌우 각 20개의 난간석주(돌기둥)와 각 19개의 동자석, 8각의 난간대 19개가 배치되어 있다. 또한 월대의 남쪽에는 계단이, 가운데는 사악한 기운을 쫓아낸다는 서수상이 각 한 쌍 씩 설치되어 있다.
이렇게 조성된 월대가 일제강점기(1923~24)에 해체되어 경복궁 경내를 거쳐 동구릉까지 유랑하게 된 것이다.  

1923년 10월4일자 동아일보. 조선총독부가 전차개통과 함께 광화문 앞에 있었던 해태(치)상을 거적때기에 감아 처박아두었다는 기사를 썼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료 중에는 해체 후 영제교(경복궁 흥례문~근정문 사이에 놓인 다리)의 천록상 뒤에 몰아둔 월대의 난간석 등 부재들이 보인다,

■수상한 돌무더기는?
그 사이 월대는 사직동~안국동을 연결하는 직선도로의 땅 밑에 묻혀있는 신세가 됐다.
2007년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정도 반시계 방향으로 어긋나 있었던 광화문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는 공사가 시작됐다. 이를 위해 1968년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던 광화문을 해체했는데, 그 참에 광화문과 월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광화문 남쪽으로 11m까지 나아가 조사를 벌인 결과 고종 연간에 중건한 월대 유구(길이 8.3m, 폭 29.7m)가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그 결과를 토대로 현재 광화문 앞에 월대의 일부를 복원해놓았다. 이때 건청궁과 국립민속박물관 사이에 방치되어 있던 난간석주(난간 돌기둥) 1점을 복원 부재로 활용했다. 정현정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주무관은 “발굴성과를 토대로 보면 월대의 남북 길이는 52m, 동서 너비는 29.7m, 그리고 임금의 길인 어로의 너비는 5.2m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런데 2007년 발굴조사에서 심상치않은 실마리가 한가닥 보였다.
즉 고종 때 중건된 광화문터 밑으로 70㎝를 더 팠더니 광화문 창건 시기(1395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문의 석축 일부가 보였다. 그런데 그 창건 시기와 동일한 지층에서 고종 이전에 조성된 월대 추정 잡석 유구 일부가 확인됐다. 
그러나 2007년 발굴 조사에서는 이 잡석들이 세종 연간(1431년)에 세웠을 수도 있는 초기 월대인지 밝혀내지는 못했다.
물론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고종 연간의 월대유구를 찾아 복원의 자료를 확보한다는 것이 우선 목표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쌓은 월대 유구를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대박 발굴’이 될 것이다.

■광화문에서 그려본 조선시대 삽화 
물론 월대 조성과 상관없이 광화문 앞은 조선 초기부터 지금의 ‘광화문 광장’과 같은 역할을 감당해냈다. 
왕실의 환궁 및 장례와 같은 주요 행사, 임금이 친히 주재하는 과거시험(무과 전시), 군사행사는 물론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전하는 상언과 격쟁이 이루어진 공간이기도 했다.
이런 행사가 열릴 때마다 광화문 앞에는 채붕(혹은 산대·일종의 무대)을 설치하고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다. 1488년(성종 19)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동월(1430~1502)의 ‘조선부’는 광화문 앞에서 설치된 무대와 공연을 언급했다.
“광화문 앞에 비단을 둘러 꾸민 산대(무대)는 그 높이가 광화문과 같고, 지극히 교묘하게 조성됐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외줄타기하는 사람은 두 명의 동자를 세우고 춤을 추며 줄을 탄다. 가볍기가 파도위를 타는 신선 같다.…”
광화문 앞에 설치한 무대의 높이가 ‘광화문’과 같다면 얼마나 높게 설치했다는 얘기인가. 

1539년(중종 34) 4월10일의 일화도 눈길을 끈다. 중국 황태자의 책봉 사실을 알리려고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이 중종이 경복궁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광화문 앞 산대놀이에 넋이 빠져있다가 한참 뒤에야 궁궐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1545년(인종 1) 5월11일 중국 사신을 위해 무대를 만들고 각종 공연을 펼치던 중 무대 모퉁이가 붕괴되는 바람에 구경꾼 수십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다. 
광화문 앞에서는 갖가지 군사시범을 보이는 장소로도 활용됐다. 1459년(세조 5) 12월27일에는 세조가 부인인 정희왕후(1418~1483)와 함께 광화문에서 화포 쏘는 것을 구경했다는 실록내용이 눈길을 끈다. 화포를 어디다 쏘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또 1445년(세종 27) 6월3일자 <세종실록>은 “세자(문종·1450~1453)가 광화문 앞에서 무관 360명의 체력 평가시험을 주재했다”고 썼다. 광화문 앞은 왕실 어른들의 행차가 돌아오는 순간을 맞아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 4월6일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1395~1446)가 온천에서 돌아오자 흥인문(동대문)부터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도로변에 오색천을 장식했으며, 각종 거리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세종실록>은 “왕후가 행차할 때 사대부의 부녀들이 도로 좌우에 채색 장막을 치고 흥인문에서 광화문 밖까지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과 같았다”고 전했다.
또 광화문 앞은 이따끔 과거시험(무과)이 펼쳐진 곳이기도 했다. 1539년(중종 34) 11월23일 <중종실록>은 “경회루에서 펼쳐지던 무과 전시(임금이 직접 주재한 시험)를 광화문에서 치렀다”고 전한다. 한겨울 북풍이 거세게 부는 경회루보다는 볕이 잘 드는 광화문 앞이 시험을 치르기에 낫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도끼 들고 광화문 앞서 엎드린 유생
광화문 앞은 조선시대 내내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
예컨대 “1428년(세종 10) 5월24일 자재라는 사노비가 신문고를 치려다가 의금부 당직자들에 의해 제지당하자 광화문의 종을 치고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세종은 신문고를 치지 못하게 한 의금부 관리 2명을 파면했다. 
1443년(세종 25) 4월27일에는 경북 고령 출신인 무관 석호가 무려 60장이 넘는 상소 글발을 광화문 앞에 펼쳐 놓는 일도 있었다. 1770년(영조 40) 3월21일에는 청주 사람인 한유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한 통의 소장을 올렸다.
그가 탄핵한 인물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권세를 누리던 영의정 홍봉한(1713~1778)이었다. 
한유는 “국정을 농단한 간신 홍봉한을 참형에 처하라”고 촉구했다. 영조 앞에 불려 들어온 한유는 “망국동(亡國洞)의 망정승(亡政丞)이라는 동요가 있는 것 아시느냐”고 한다. ‘안국동(安國洞)’에 살고 있는 홍봉한을 빗댄 풍자 동요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한유는 흑산도로 유배를 떠났지만, 홍봉한 역시 경질되고 말았다.
1540년(중종 35) 10월 12일 광화문 서쪽 좁은 문에 누군가 종이가 맨 화살이 꽂혀있었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종이에 담아 화살로 쏜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전례에 따라 이 종이를 그냥 태워버린다.
경복궁 중건 사업이 한창 벌어지던 1865년(고종 3)에는 고된 노역을 달래줄 노동요 가사를 광화문에 떡하니 붙여놓고 신명나게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경복궁영건일기>)도 있다. 그 내용은 ‘어호 조타, 경복궁은 조선 중이 대지로다…이런 명당 또 있느냐’고 이어지는데, 다른 버전에는 ‘경복궁 역사,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족 만나나 볼까’하는 가사도 전한다.
고된 노역에 시달린 백성들의 애환이 광화문짝에 걸린 것이다.

■월대복원은 경복궁 복원의 화룡점정?
월대 발굴조사를 한다기에 끄집어낸 이야기들이다. 새삼 광화문 월대의 복원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았다. 
1990년 첫 삽을 뜬 ‘경복궁 복원’은 2045년까지 장장 55년의 기간을 두고 진행하는 사업이다. 중건 당시의 전각(500동) 가운데 1990년까지 남아있던 건물은 36개 동에 불과했다. 
1차 복원계획이 끝난 2010년까지 총 125동(기존 36개동 포함)에 달했다. 문화재청은 2차 복원 기간(2011~2045년)에 80개동을 더 복원할 계획이다. 총 205개동인데, 그래도 중건 당시(500동)의 41% 정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광화문-흥례문-근정전-침전(강녕전·교태전 등)-후원(건청궁) 등으로 이어지는 중심축과 태원전(임금 초상화를 모신 곳), 동궁(자선당·비현각 등), 함화당 및 집경당 등 보수·복원이 마무리되었다. 이 순간에도 생활공간 등을 위주로 복원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떨까. 박찬정 궁능유적본부 사무관은 “광화문 월대의 복원은 경복궁의 중심축, 즉 척추뼈를 완성하는 마침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모쪼록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제대로 된 경복궁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발굴조사와 복원작업에 심혈을 기울여주기를 바란다.(이 기사를 위해 박찬정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사무관과 정현정 주무관, 전나나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학예연구사, 양숙자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등이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