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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흙으로 빚었을 뿐인데…말 탄 가야 신라인이 '국보' 대접을 받는 이유

전국의 고고학 발굴현장에서 출토되는 가장 흔한 유물은 뭘까. 역시 점토로 빚어 구운 도기(질그릇 혹은 토기)일 것이다. 
그런데 그중 국가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된 도기는 단 9건에 불과하다. 왜일까. 
‘문화재보호법 제23조’가 규정한 국보·보물의 자격을 보자. ‘중요한 유형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할 수 있으며(1항), 보물 가운데 인류 문화의 관점에서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2항)’고 했다.
짐작이 간다. 질그릇의 경우 너무 흔한 유물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유물 중에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아야 겨우 국가지정문화재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질그릇 중에 ‘국가지정문화재’, 그것도 ‘인류 문화의 관점에서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유물’로 평가되어 당당히 국보로 지정된 유물은 무엇일까. 단 3건(5점)이다. 그중 ‘토우 장경호(흙인형을 장식한 목긴 항아리)’ 1건(2점)을 빼면 2건(3점)이 ‘기마인물형 도기’, 즉 ‘말 탄 사람을 빚은 질그릇(토기)’이다. 궁금증이 든다. 
대체 이 ‘기마인물형 도기’가 무엇이기에 351건에 불과한 국보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것도 2건이나…. 

■“나는 애국자가 아닙니다.”
먼저 5세기 전반 경남 김해 덕산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가야산 기마인물형 도기를 살펴보자. 
시계침을 1980년대로 돌려본다. 대구 가톨릭병원 이비인후과 과장이던 이양선 박사(1916~1999)가 4차례에 걸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품 293건(666점)을 기증한다. 특히 1986년 7월 29일 3차 기증 직후에 밝힌 소감이 심금을 울린다.
“나는 애국자가 아닙니다, 문화재를 사랑했기에 수집했고, 사랑하기에 국가에 기증하는 것입니다.”
평양 출신인 이양선 박사는 1951년 1·14 후퇴 때 대구로 내려와 경북대 의대 교수로 정착한 이후부터 문화유산 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보통의 수집가들과 달랐다. 청자·백자 같은 도자기와 유명 작가의 서화 보다는 고고유물 수집에 중점을 두었다. 골동품 감상 차원이 아니라 도굴 등에 의해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고고 유물의 맥락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반드시 출토지 등 유물과 관련된 정보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후에야 수집했다. 출토지를 모르면 그 출처를 알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유물의 고고학적·역사적 가치가 뚝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쳇말로 ‘닥치고 수집’이 아니었다. 지역적으로는 영남지방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수집품은 고고학자들로부터 ‘믿을 만하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1·14 후퇴 때 월남한 이 박사가 형편이 넉넉해서 유물을 사들인 것도 아니었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허름한 적산가옥에 살면서 때로는 돈이 없어 쩔쩔 매면서도 유물을 구입했다고 한다. 
이 박사의 자택을 방문한 바 있는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대구 시내에 이렇게 누추하기 짝이 없는 누옥이 남아있구나’하고 느낄 정도였다”면서 “낡고 바랜 국은(이양선의 호) 선생의 운동화가 지금도 눈에 밟힌다”고 전했다.   

■“도자기 3점과 바꾸었다” 
당시 골동품 업계에서 눈여겨 보지 않았던 도기를 수중에 넣으려고 소장하고 있던 값비싼 도자기와 바꾼 일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1986년 7월 기증 당시 ‘기마인물형 도기는 시가 7500만원에 해당하는 도자기 3점과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박사의 수집품 가운데 ‘원 픽’은 뭐니뭐니해도 이 ‘기마인물형 도기’였다.
이 박사는 1970년대 이 유물을 구입한 뒤 곧바로 국립경주박물관에 기탁(맡겨 둠)을 요청했다. 유물을 수중에 넣었지만 제대로 관리할 엄두를 내지 못해 박물관에 위탁관리를 요청한 것이다. 
이에 박물관측은 전시실에 기마인물형 도기를 전시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1986년 기증식에서 “이 도기는 사들인 직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 집에는 들여놓지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당시 학예실장이던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빛바랜 회색 ‘골덴’ 바지를 입고 와서 전시된 도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국은(이양선 박사의 호) 선생이 생각난다”고 회고했다. 
“휴일에도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나를 보고 ‘이 선생이 내 유물(기마인물형 도기)을 지키려고 출근했나보다. 이제 완전히 기증해도 안심이 되겠네’하며 함박웃음을 짓더라구요.”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등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의사 이양선 박사의 기증조건 중 하나는 “기증 유물이 어떤 이유로도 단 한 점도 국립경주박물관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시집보낸 딸을 가까이 두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박사는 기증 후 틈이 날 때마다 박물관에 들렀다.

■“경주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도록…”
마침내 기마인물형 도기를 비롯해 소장 유물을 일괄 기증한 이양선 박사의 기증 조건은 두가지였다.
“기증자료를 모아 한 권의 도록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 첫번째였다. 두번째는 “기증 유물은 어떤 이유로도 단 한 점도 국립경주박물관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해프닝도 있었다. 
1987년 3월부터 기마인물형 도기(국보)와 청동 옻칠 발걸이(보물) 등 핵심 유물을 골라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이양선 박사가 제동을 걸었다. 
“유물을 경주 밖으로 나가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냐”면서 받았던 훈장도 반납하고 “기증한 유물도 가져가겠다”고 노여워 했다. 박물관 관계자들이 나서 사과와 설득으로 무마시켰지만 이 박사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당시 실무자(학예연구사)로 기증 작업을 담당했던 박방룡 신라문화연구원장은 “시집 간 딸(기증유물)을 가까운 곳에 두고 싶은 친정 아버지의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애지중지하던 딸이 멀리 가면 어쩌나. 혹시 보기 어려워지는게 아닐까 노심초사했던 겁니다.”
기증 후일담도 전해졌다. 1986년 7월 기마인물형 도기의 기증 소식이 전해지자 어떤 기업에서 “만약 기증을 철회하고 넘겨주면기면 거액을 주겠다”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이양선 박사는 “그 기업이 제시한 금액은 내가 평생 들어보지 못할 거액이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경남 김해 지역에서는 김해 덕산 출토품으로 알려진 기마인물형 뿔잔을 김해의 대표유물로 여겨 조형물을 조성하고, 각종 안내서 등에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는 이 뿔잔의 김해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유물이 경주 밖으로는 절대 나가서는 안된다”는 기증자(이양선 박사)의 뜻을 거스르기는 곤란하다.이 유물을 소개하고, 전시하면서 내건 국립경주박물관의 설명문의 내용도 지적받을 만 하다. ‘출토지’가 ‘김해 덕산리로 전해진다’는 의미에서 관례대로 ‘전(傳) 김해 덕산리 출토’라고 하면 될 일인데, 굳이 “덕산이라는 지명에 전국에 많으므로 출토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이 역시 기증자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너무 깨끗해서 가짜로 오인
 ‘가야산’ 기마인물형 도기를 둘러싼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워낙 유물의 상태가 좋아서 오히려 가짜라는 오해도 받았다.

도자기 등 1만8000여 점의 가치있는 문화유산을 수집한 윤장섭 호림박물관 설립자(1922~2016)의 회고담이 눈길을 끈다.
즉 1970년대 초 대구에서 목욕탕 겸 여관을 운영하던 주인이 고미술품 중간상인에게 내놓은 매물이 바로 기마인물형 도기였다는 것이다. 책정된 가격은 1650만원이었다. 그러나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연대에 비해 유물 상태가 너무도 깨끗했다. 그래서 오히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가짜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결국 사지 않고 돌려보냈는데 나중에 대구의 수집가 이양선 선생의 손에 들어간 뒤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국가의 품으로 돌아온 기마인물형 도기의 크기는 높이 23.2㎝, 폭 14.7㎝, 밑 지름 9.2㎝ 정도이다.
나팔 모양의 받침 위에 직사각형의 편평한 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 완전무장하고 말을 탄 무사가 올려져 있다. 굽다리 접기(고배)와 같은 형태인 받침에는 두 줄로 구멍이 뚫려 있다. 받침의 네 모서리에는 손으로 빚어 깎아낸 말 다리가 있다.
말 몸에는 갑옷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말갈기는 직선으로 다듬어져 있다. 말 등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무사가 앉아있다. 무사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데 표면에 무늬가 채워져 있다. 무사의 등 뒤쪽에는 쌍뿔 모양의 잔을 세워놓았다.
이 기마인물형 도기의 제작국은 가야가 틀림없고, 출토지는 김해 덕산리로 알려져 있다. 반드시 출토지를 확인하고 유물을 구입한 이양선 박사에 대한 신뢰감도 크지만, 제작기법이나 형태를 봐도 ‘가야산’이 확실한 것으로 평가된다. 

우선 동시대(4세기 후반~5세기 전반) 가야 토기 굽다리 접시(고배)의 특징 중 하나인 나팔 모양의 큰 받침대가 눈에 띈다.
2019년 경남 창원 현동 아라가야 유적에서 배모양 도기가 확인되었는데, 그 제작기법이 기마인물형 도기와 매우 흡사하다.
즉 말 탄 인물을 올려놓은 받침대의 형태와 방패나 표면에 새겨진 문양과 표면의 색조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에 <삼국지> ‘동이전’에 “가야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삼한과 낙랑군, 대방군, 그리고 왜까지 철을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지 않은가. 완전무장한 기마인물형 도기는 바로 ‘철의 왕국=가야’를 상징하는 유물로 여겨졌다.

■뒤늦게 떠오른 출토지 논란
경남 김해시는 ‘김해 덕산 출토’로 전해진 이 유물을 김해를 대표하는 상징 문화유산으로 꼽았다. 
시청사 경내를 비롯한 시내 곳곳에 조형물을 설치하고, 지역 역사 문화를 알리는 안내서 등에 대표 유물로 홍보해 왔다.
지역 정치권에서도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 중인 기마인물상의 반환을 공식 요구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이 기마인물형 토기가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에 제작된 가야시대 유물이라는 점은 대체로 인정한다. 
그렇다고 ‘김해 반환’을 외치는, 정치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기마인물형 도기는 경주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면 안된다”는 기증자(이양선 선생)의 유지를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수집해서 국가에 선뜻 내주면서 내건 그 소박한 조건 하나 지켜주지 못한단 말인가. 

물론 국립경주박물관이 이 유물을 소개하고, 전시하면서 내건 설명문의 내용도 지적받을 만 하다.
‘출토지’가 ‘김해 덕산리로 전해진다’는 의미에서 관례대로 ‘전(傳) 김해 덕산리 출토’라고 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박물관 홈페이지는 ‘기마인물형 도기’의 출토지는 공란으로 남겨두었다. 또 전시 설명문은 굳이 ‘뿔잔은 덕산이라는 곳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덕산이라는 지명이 전국에 여러 곳이 있기 때문에 정확히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김해시의 반환 요구에 대한 ‘반작용 설명’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설명대로라면 이양선 박사가 출처가 불분명한 유물을 마구잡이로 수집한 ‘닥치고 수집자’였단 말인가. 
이 또한 이양선 기증자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근무했던 역대 모든 직원들이 “이양선 박사는 유물 구입 때 출처를 철저하게 규명하려 애썼고, 심지어는 출토지로 알려진 곳을 직접 답사까지 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 가야산 기마인물형 도기는 유물 자체의 가치도 국보급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집가의 정신이 그 유물에 담겨있는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신라산 기마인물형 토기 
김해 덕산 출토로 알려진 기마인물형 도기가 가야의 대표주자라면, 1924년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도기 한쌍은 신라를 상징하는 ‘시그니처’ 유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금령총은 일제가 1924년 5월 발굴조사를 시작한 폐고분 2기(126·127호) 중 1기(127호)였다. 
일제는 3년 전(1921년) 사상 처음으로 금관 등이 출토된 금관총의 전례를 떠올리며 잔뜩 기대에 차 있었다.
과연 이 127호분에서 굽은옥(곡옥)이 달리지 않은 금관이 금제 허리띠와 금방울(금령) 등과 함께 쏟아졌다. 일제는 금관총과 구별하기 위해 ‘금령총’이라 했다. 출토된 금방울(금령)을 특이한 유물로 꼽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령총의 핵심유물은 금관이나 금령(금방울)이 아니었다. 무덤 주인공의 머리맡에 넘어진채 발견된 기마인물형 도기 2점이었다. 말을 탄 인물은 주인(높이 26.8㎝)과 그 주인을 따르는 하인(높이 23.4cm)으로 해석됐다.

주인은 고깔 형상의 띠와 장식을 두른 삼각모를 쓰고, 다리 위에 갑옷으로 보이는 것을 늘어뜨렸다.
반면 하인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웃옷을 벗은 맨몸이다. 등에는 봇짐을 메고 오른손에는 방울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주인의 길을 안내하고 있는 형국이다. 말도 다르다. 주인의 말에는 뿔 같은 장식이 튀어나오고 각종 말갖춤새가 표현돼있다. 반면 하인의 말에는 장식이 그다지 많지 않다.
‘가야산’ 기마인물형 도기와 다른 점은 두 인물과 말의 표현이 무척 세밀하다는 것이다. 마치 모델이 존재하는 것 같다. 
게다가 이 도기는 ‘배(舟) 모양 도기’와 함께 출토됐다. 그래서 이 기마인물형 토기는 말에 탄 무덤 주인공의 영혼을 뭍길(말)과 물길(배)을 통하여 내세로 인도하는 모습을 표현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주인공을 수행한 하인과 함께….
이 한 쌍의 신라산 기마인물형 도기는 일찌감치(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2년 전인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의 컴퓨터 단층(CT)촬영 결과 이 기마인물형 토기의 특별한 구조가 확인됐다. 
즉 인물 뒤에 있는 깔대기 모양의 구멍 안에 물이나 술을 넣고 다시 말 가슴에 있는 대롱을 통해 물을 따를 수 있는 구조로 제작되었음을 밝혀낸 것이다. 말 내부의 체적을 계측한 결과 240㏄ 정도의 액체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박물관측은 이 도기를 주전자로 해석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신라산 기마인물형 도기가 주전자라기보다는 등잔일 가능성이 짙다는 견해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용도가 무엇이든 어떤가. 흙으로 빚은 가야와 신라산 기마인물형 질그릇(도기 혹은 토기)이 대한민국의 국보로서 차고 넘치는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이 기사를 위해 지건길·이건무 전국립중앙박물관장과 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 이정근 국립김해박물관장,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 이한상 대전대 교수, 김정수 뉴질랜드 교육위 회원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정수, ‘기마인물형 토기의 용도에 관한 소고’, <야외고고학> 41호, 한국문화유산협회, 2021
한도식, ‘기마인물형 토기-국은 이양선 수집문화재’, <가야인물형 토기를 해부하다>, 인제대 산학협력단·김해시, 주류성, 2019
이정근, ‘기마인물형 뿔잔의 제작기법과 등장배경’, <가야인물형 토기를 해부하다>, 인제대 산학협력단·김해시, 주류성, 2019
지건길, <고고학과 박물관과 나>, 학연문화사, 2011
김혁중, ‘기마인물형 토기와 가야 중장기병의 실체’, <가야인물형 토기를 해부하다>, 인제대 산학협력단·김해시, 주류성,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