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주 천보산(423m) 자락에 고색창연한 절터가 버티고 있다. 회암사터이다. 산의 아래쪽 계곡에 차곡차곡 쌓은 8개의 석축 위에 그대로 노출된 70여기의 건물터와 함께 그곳에서 활약한 고승들의 기념물까지…. 사적으로 지정된 구역만 1만여평(3만3391㎡)에 이르는 절터에 서면 600년의 시공을 초월한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회암사 하면 절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일화가 떠오른다. 양녕대군의 ‘살아서는 임금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이야기다.
1446년(세종 28) 4월23일 효령대군(1395~1486)이 회암사에서 법회를 열고 있었다. 그때 양녕대군(1394~1462)이 들판에서 사냥해온 짐승으로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형이 신성한 절간에서 고기를 굽자 효령대군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니 지금 불공을 들이고 있는데…. 좀 심하지 않느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이 했다는 말….
“나는 살아서는 국왕(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불자(佛者·효령대군)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세종실록>)
■살아서는 임금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세종대왕 3형제의 유쾌한 일화를 전하는 회암사의 창건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2세기부터 존재했던 사찰이었다.
다만 인도 승려인 지공 선사(?~1363)의 감화를 받은 제자 나옹(1320~1376)이 1374년 중건불사를 했다는 기록이 이색(1328~1396)의 <목은시고>에 실려있다.
“지공 스님이 회암사의 지세가 천축의 나란타사와 같다고 나옹(지공의 수제자)에게 말해 이곳에 회암사를 창건하게 했다.”
지공이 언급한 ‘나란타사’는 인도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와 학문의 요람이었다. 631년 이곳을 찾았던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602?~664)는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0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이 사원의 마지막 졸업생이었던 지공은 원나라를 거쳐 1326년 3월부터 2년7개월 동안 고려에 머문다. 고려 백성들은 “석가모니가 환생해서 고려땅에 왔으니 어찌 뵙지 않겠느냐”고 추앙했다. 지공 스님은 “천보산 자락이 (어릴 적 수학했던) 나란타사의 지형과 비슷하다”면서 “‘삼산 양수간(三山兩水間)’에 있는 회암사를 중창하고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고 제자(나옹)에게 전했다.(1357년) 회암사는 삼산(삼각산)을 안산으로, 양수(임진강과 한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야말로 ‘삼산양수간’인 것이다.
나옹의 주도로 시작된 회암사의 중창불사는 1374~76년 사이에 이뤄졌다. 중창 1년 뒤인 1377년(우왕 3) 이색이 남긴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는 262칸이나 되는 사찰 건물의 규모와 위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보광전 5칸은 남쪽으로 면했는데 그 뒤에는 설법전 5칸이 있으며 그 뒤에는 사리전 1칸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 3칸이 있다…회암사 전각만 모두 262칸이고 15척이나 되는 불상이 7구, 10척인 관음상 1구가 조성됐다.”
그러면서 이색은 “장대하고 미려하기가 동국(고려)에서 으뜸이고,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사찰이라고 하니 과장된 말이 아니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실제로 1376년 4월 열린 회암사 낙성식에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전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전국의 백성들이 포백(布帛·삼베와 비단)·과일·떡 등을 가지고 가서 바쳤다. 앞다퉈 들어오려고 절 문이 메워질 정도였다. 즉시 부녀자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관문을 닫으라고 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고려사>)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고려 조정은 나옹 스님에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죄’로 경상도 밀성(밀양)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그러나 나옹 스님은 유배지로 가는 도중 여흥(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다.
■유네스코 잠정목록인 이유
최근 14세기말, 즉 나옹의 주도로 중창한 회암사 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여왔다.
잠정목록 등재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필수적인 관문이다. 최소 1년 이상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세계유산등재를 위한 신청 자격이 부여된다. 회암사터는 과연 어떤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세계유산 등재의 핵심조건)’가 있다는 걸까. 문화재청과 양주시 등은 이 유적이 ‘14세기 동아시아에 만개했던 불교 선종 문화의 번영과 확산을 증명하는 탁월한 물적 증거’라는 점을 꼽았다. 즉 회암사는 선종 사원이다. 선종은 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종파이다.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과 다르다. 따라서 선종 사원의 핵심시설은 부처를 모시는 불전과 탑보다는 ‘현신의 부처’인 주지 스님의 공간(방장)과 수행공간 등이다. 회암사가 바로 ‘14세기 수행공동체 위주로 조성된 선종 사원의 모델’이라는 점이 세계유산 등재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다.
■풍경에 매달린 태조 이성계 부부의 체취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종교적인 가치에만 시선을 두고싶지 않다. 양녕대군 일화가 보여주듯 회암사에는 너무나 풍부한 스토리가 담겨있는데 그런 어려운 불교 사원 이야기만 하겠는가.
지금부터 22년 전인 2000년 5월로 돌아가보자. 당시 절터를 발굴 중이던 경기도박물관 조사단원의 눈에 심상치 않은 유물이 잇달아 출토되었다. 회암사의 중심건물인 보광전터의 두 모서리에서 명문 청동기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천보산 중턱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라는 뜻의 명문내용이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 134자를 검토하던 조사단은 이 금탁이 여느 풍경과 다르다는 점을 금방 알게 됐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홍무 27년(1394)’이라는 제작연대까지 보였다.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
한마디로 태조 이성계(1392~1398)가 1394년 회암사 보광전을 ‘무학대사와 총애하는 신덕왕후, 그리고 세자 방석을 위해’ 호화롭게 꾸몄다는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것은 명문에 이 보광전 불사의 공덕주(시주자)로 등장하는 ‘환관(판내시부사) 이득분’이다.
<태조실록>에 이득분과 관련된 심상치 않은 기록이 보인다.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가 중병이 들자 이득분의 집에 머물며 치료를 받았고, 결국 4일만에 그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태조실록> 기록(1396년 8월9·13일)이 심상치 않다. 환관 이득분이 태조 부부의 총애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이득분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방석(세자·1382~1398)과 방번(1381~1398)의 후원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득분의 기세도 강씨가 서거하고(1396년), 1차 왕자의 난(1398년)으로 방석과 방번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후 꺾이고 만다. ‘외방종편(죄인의 의사에 따라 서울 이외의 지방에 거주하게 하는 제도)’의 처분을 받게된 것이다.
<정종실록>은 “1399년(정종 2) 3월1일 이득분이 불사를 행하도록 임금(태조)에게 권하여 국고를 탕진하게 만들었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상소를 기록한다.
이득분에게 회암사 보광전을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꾸민 죄를 물은 것이다.
■목 잘리고 토막난 불상의 정체는?
회암사터에서는 또 한가지 의미심장한 발굴 결과가 드러났다.
발굴 현장 곳곳에서 때로는 짓이겨져 부서진 채, 혹은 머리가 무참히 잘린 채 몸통은 이쪽, 머리는 저쪽으로 흩어진 불상들이 수습된 것이다. 예컨대 동자상은 네 토막으로 잘린 채 발견됐는데 각각 반경 50~60m 떨어진 채 확인됐다. 몸뚱이는 5단지, 머리는 6단지, 팔과 다리는 7단지와 8단지, 뭐 이런 식으로 흩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 불타는 적개심으로 불상들을 훼손시켜 사정없이 내던졌다는 뜻이 아닐까.
대체 회암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고려말 선승들의 수행 공간으로 중창된 회암사는 조선 개국과 함께 위상이 달라졌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인 무학대사(1327~1405)가 머물던 사찰이었다. 태조 역시 회암사에 자주 들렀다.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1402년(태종 2)에는 아예 회암사 안에 궁실을 지어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다 무학대사가 입적하고(1405년) 태상왕인 태조가 승하(1408년)한 뒤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이 아니던가. 불교와 회암사를 지탱해온 두 사람이 사라지자 억불(抑佛)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1434년(세종 16)4월10일 회암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태종 부인인 원경왕후(1365~1420)의 수불(繡佛·자수로 부처나 보살을 표현)이 걸려있던 보광전의 수리를 핑계로 대대적인 축하 법회를 연 것이다. 무엇보다 행사를 열면서 왕실과 사족 부녀자들로부터 막대한 시주를 받은 것이 물의를 빚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행사에 참석한 부녀자 들이 “시주를 한다”면서 승려들의 무애희(불교의 악극) 때 옷을 벗어 주고, 심지어 승방에서 여러날 머물며 숙식을 했던 일이 드러났다. 참석자 가운데는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어머니인 안씨(?~1444)까지 끼어있었다. 이 때문에 회암사의 불사를 비판하는 상소문이 빗발쳤다. 이때 효령대군이 나서 “문제삼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등 설왕설래하다가 일반 사대부 여인들만 처벌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 후 50년이 지난 1484년(성종 15) 9월 9일에는, 승하한 정희왕후(1418~1483)의 국상 중에 종친과 저자의 부녀자 150여 명이 회암사에서 악기를 울리며 불공을 드리고 유숙까지 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사헌부가 나서 처벌을 요구했지만 성종은 “무식한 회암사 주지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냥 두라”고 봐줬다.
■노비 혁파 후 토지 하사
심한 억불책을 쓴 임금들마저 회암사에 관한한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이유가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고, 태종의 능침사(왕릉을 수호하는 절)로 지정되었으며, 효령대군(세종)과 인수대비(1437~1504·성종)의 비호까지 받았던 사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419년(세종 1) 11월 27일 상왕으로 물러나있던 태종이 회암사에서 일어났던 스님들의 여자종 능욕사건을 거론했다. “회암사 중들이 부녀자(여자 종)들과 가까이 있는데, 어찌 여자종들을 범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상왕은 사찰이 부리고 있는 노비들을 혁파하는 극강의 억불책을 폈다.
그러나 이틀 뒤인 29일 <세종실록>에 흥미로운 기사가 보인다.
“하루 아침에 사찰의 노비를 혁파했다. 중들이 ‘이젠 사찰의 땅까지 없애려 하는건가’하고 걱정할 것 같다. 불교를 물리치려고 하지만 갑자기 다 없앨 수는 없다. 회암사 같은 이름난 절에는 땅을 더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게 좋겠다.”
사찰의 노비를 혁파해놓고 좀 미안했던지, 회암사에 전토를 더 얹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그래도 여노비 능욕사건을 일으키는 사찰에 그런 은전을 베풀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만큼 회암사는 임금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만큼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던 사찰이었던 것이다.
■‘쓸모없고 못난 선비’라 욕설 퍼부은 세종
유생들은 끊임없이 불교와 회암사의 폐단을 거론했지만 소용없었다.
임금들은 조종(祖宗)의 유습이라든가, 종실의 효성이라고 하면서 유생들의 입을 막았다. 세종은 한술 더 떴다. 부인(소헌왕후)의 승하(1446년) 이후 잇달아 불사를 추진한다. 아들(수양대군)을 시켜 <석보상절>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하고, 손수 <월인천강지곡>을 찬술했으며, 철폐했던 내불당을 다시 건립했다.
세종은 불사를 극력 반대하던 조정 유신들에게 ‘쓸모없는 선비(迂儒)’, ‘못난 선비(竪儒)’라며 욕설까지 퍼부었다.
세조의 경우 “나는 비록 불교를 믿지만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뒤의 임금도 나를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여긴 성종은 할머니인 정희왕후(1418~1483)와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신앙생활을 어쩌지는 못했다. 1492년(성종 23) 도첩제 자체를 폐지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버린 성종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교 자체를 없앨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요승 보우의 업적은 휴정·유정대사 발탁
억불의 물결 속에도 나름 건재했던 회암사는 연산군(1494~1506)의 폐불로 위축됐다가 다시 살아난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였던 문정왕후(1501~1565) 덕분이었다. 문정왕후에 의해 발탁된 보우(1509~1565)는 불교의 세속적 권리를 회복하려고 선·교 양종과 승과를 부활했다.
그런데 이 승과 부활은 문정왕후와 보우의 간과할 수 없는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왜냐. 1552년(명종 7)의 제1회 승과에서 휴정(서산대사·1520~1604)이, 1561년(명종 16)의 7회 승과에서 사명(1544~1610)이 합격했기 때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은 73살의 노구를 이끌고 승병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유정은 어떤가. 역시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유정은 1604년(선조 37)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귀국하기도 했다.
한음 이덕형(1561~1613)은 1610년(광해군 2) 입적한 유정을 위한 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슬프다. 길고 짧은 것을 대보면 모두가 같고…유교와 불교가 어찌 다르랴, 오직 그 진리를 보전하여 마침내 세상에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이덕형의 <한음선생문고> ‘제송운문’)
성리학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덕형이 승려를 위해 제문을 쓴 것도 파격이지만 “유교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설파한 것 역시 예사롭지 않다. 문정왕후와 보우가 승과를 부활시키지 않았다면 휴정과 유정의 스토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폭삭 내려앉은 절터
그러나 두 사람의 불교 중흥의 꿈은 금방 산산조각난다. 보우는 순회세자(1551~1563·명종의 첫아들)가 13살의 나이에 요절하자 “복을 기원해야 한다”면서 회암사 무차대회를 기획한다.(1565년)
쇠락해가는 불교세력을 확장하고 왕실의 후원을 얻기 위한 행사였다. 무차대회는 승려·속인·남녀노소·귀천의 차별 없이 잔치를 벌이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행하는 불교의례를 가리킨다.
그러나 “전국에서 승려들이 수천명 몰려오고 있고, 그 행사가 너무 화려하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친다.
공교롭게도 문정왕후가 행사 도중 병환을 얻으면서 무차대회 또한 중지된다.(4월5일)
그러나 문정왕후는 결국 승하하고 만다. 이후 보우와 회암사는 유생들의 공적이 된다.
1년 여 뒤인 1566년 4월 20일 <명종실록>은 심상치않는 기사 2건이 보인다.
“문정왕후 승하 이후 제주도에 유배된 보우가 제주 목사(변협·1528~1590)에게 주살 당했다”는 내용과, “송도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내용 등이다. 회암사가 정말로 유생들에 의해 불에 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30년 후인 1595년(선조 28) 6월4일 “회암사 옛 터에 불탄 큰 종이 있다”는 <선조실록> 기사를 보면 회암사가 유생들에 의해 파괴되고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어떤가.
회암사터에서 왜 불상들이 목이 잘리고 몸통이 갈기갈기 찢긴채 흩어져 있었는지 어렴풋 그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이제 회암사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랐으니 얼마 있으면 정식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커졌다. 종교시설 뿐 아니라 각종 스토리가 차고 넘치는 회암사의 가치를 찾기를 바란다.(이 기사를 위해 김종임 양주회암사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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