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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의열단 ‘의백’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

“내가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 지 몰라.” 약산 김원봉(1898~1958)과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의 악연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물론 1차사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의열단 동지인 유석현(1900~1987)과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정정화 선생(1900~1991)의 회고담, 독립운동가 송남헌(1914~2001) 등의 <해방3년사>, 그리고 이런 자료들을 재구성한 <김원봉 평전>과 각종 논문 등을 종합해보자. 

의열단 의백 김원봉 선생. 의열단을 이끈 이를 단장이 아니라 의백이라 했다. 의형제의 맏형이라는 뜻 이다. 남이지만 피를 나눈 형제처럼 유혈투쟁을 벌이겠다는 의미였다.

■노덕술에게 화장실에서 잡혀가 모욕당한 의열단의 맏형

1947년 3월 하순 서울 청계천 은신처에서 변소에 앉아있던 약산 김원봉(1898~1958) 선생이 체포됐다. 김원봉 선생이 누구인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의 의백(단장)이자, 조선의용대장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불세출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선생이 변소에서 큰 볼일을 보다가 채 뒷정리도 하지 못한채 엉거주춤 고의춤을 잡고 일어선 채로 붙잡히고 말았다. 이쯤으로도 치욕일진대 천하의 김원봉 선생에게 수갑을 채운 자가 바로 악질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이었다. 노덕술은 한술 더떴다.

“의열단이라고 까불지 마라. 지금 이 나라에서는 빨갱이라면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아.”

선생이 “의열단이 너같은 친일경찰 놈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꾸짖자 노덕술은 선생의 따귀를 때리며 참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선생은 미군정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에게 끌려갔다. 노덕술은 장택상 밑에서 수사과장으로 변신해있었다. 독립투사를 때려잡는 악질경찰에서 해방 후에는 이른바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애국경찰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택상은 왜 김원봉 선생을 체포했을까.

의열단의 초기 멤버들. 의백(단장) 김원봉과 곽재기·강세우·김기득·이성우 등 창립 초기 단원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곽재기 의사의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를 분석해 확인했다.1920년 3~5월 사이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租界) 안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을 보면  신분노출을 꺼려 중국식 복장을 한 의백 김원봉 외 단원들은 모두 깔끔한 양복 차림을 하고 있다.

장택상의 아버지인 장승원은 칠곡의 대주주였는데, 일제강점기에 독립자금을 모금하려고 국내에 들어온 애국광복단원 박상진의 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처단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 독립단체는 김원봉 선생의 고모부인 황상규가 속한 단체였다. 그래서 아버지의 피살에 불만을 품은 장택상이 진보주의자들을 구금한 과정에서 김원봉 선생도 붙잡은 것이다. 이렇게 장택상과 노덕술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 김원봉은 3일 밤낮을 통곡한 뒤 의열단 동지인 유석현 선생 앞에서 한탄했다.

“내가 조국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이런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 있소.”(유석현의 <회고록>)

그러면서 선생의 독백이 이어졌단다. “내가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 지 몰라.”

정정화 선생의 회고록에도 당시의 이야기가 나온다.

“언젠가 약산(김원봉)이 중부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왜정 때부터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분개했던 일이 기억난다. …의열단의 의백(義伯·의형제의 큰형님)이었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겸 군무부장을 지낸 사람이 악질 왜경 출신자로부터 조사를 받고 모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세상이 아무래도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정화 선생은 “그런 약산이 얼마 후 월북했단 소리를 들었다"면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사상이야 어떻든 간에 왜놈의 앞잡이가 임정의 요인을 모욕적으로 다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모두가 분개했던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김원봉 선생은 그로부터 1년여 후인 1948년 4월 월북한다. 노덕술과의 악연은 왜 김원봉 선생이 월북했는지를 그 이유를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1923년 1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과 2월의 폭탄반입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호외. 왼쪽 사진은 의열단 의백 김원봉 선생의 21살 사진이다.

■'비폭력은 안돼!'

김원봉 선생이 누구인가.  

1920년대 이후 김구 선생과 함께 중국내 독립운동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분이다. 

선생의 이름은 12개나 된다. 김약산, 최림, 진국빈, 이충, 김세량, 왕세덕, 암일, 왕석, 윤봉, 김국빈, 진충, 김약삼 등이다. 그만큼 천의 얼굴로 신출귀몰 일제와 싸웠다는 뜻이다.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1919년 3·1운동 발발소식을 듣고는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뒤늦게 받아본 조선독립선언서를 읽고는 매우 실망했다. 비폭력 정신이라니…. 아니 시위가 폭력화할 것을 우려해서 33인 대표가 탑골공원도 아닌 태화관 음식점에서 약식으로 독립선언식을 치른 뒤 일본경찰에 통보한 뒤 자진해서 체포됐다니….

하지만 소극적인 민족대표 33인들의 태도와 달리 탑골공원에서는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선언서 낭독하고 시위에 나섰다. 시위는 전국으로 퍼졌고, 노동자 파업투쟁과 상인들의 철시투쟁으로 이어졌으며, 급기야 폭력의 양상으로까지 번졌다. 

민중의 힘을 목도한 김원봉 선생은 폭력투쟁만이 조국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굳혔다. 투쟁의 방법은 바로 의열투쟁이었다. 


■단장이 아니라 의백으로 추대한 이유

1919년 11월9일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의 10대 후반~20대 중반의 청년 13명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바후먼(把虎門) 밖의 중국인 농민인 판(潘)씨 집에 모였다. 김원봉을 비롯, 윤세주, 이성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곽재기, 권준,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강세우 등이었다. 밤새워 행동강령을 토론한 청년들은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의열이란 말그대로 ‘의사’와 ‘열사’를 가리키거나 그들의 특징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용어다. 의열단의 공약 제1조가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것이었다.

김원봉은 의열단의 의백(義伯)으로 추대됐다. 공식명칭을 아버지의 맏형이라는 뜻인 ‘의백’이라 한 뜻은 피를 나눈 형제간, 즉 형제결연을 다졌음을 의미한다. 의열단의 파괴·암살 폭력투쟁은 1920년 3월부터 본격 개시됐다.

즉 밀양·진영 폭탄반입사건(1920년 3월),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투척(9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12월),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1921년 9월), 김익상·오성륜·이종암 등의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저격미수(1922년 3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후 교전(1923년 1월), 황옥·김시현의 폭탄반입사건(2월), 김지섭의 도쿄 일왕 거주지 입구의 니주바시(二重橋) 폭탄투척(1924년 1월), 베이징에서 일제 밀정 김단하 암살(1925년 3월),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1926년 12월)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사건에 가담한 의열단원들은 극적으로 탈옥한 이(오성륜)도 있었지만 끝까지 싸우다 자결한 이(박재혁·김상옥·나석주)들도 있었고, 일제경찰에 의해 암살당한 이(김익상)도 있었으며 옥사(김지섭)하거나 사형당한 이(최수봉)도 있었다. 즉 거사참여는 곧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황푸군관학교 옛 정문. 김원봉 선생은 1926년 의열단원 20여명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 즉 국공합작으로 창설 운영되던 황푸 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한다. 코민테른이 파견한 소련 군사고문단도 학교운영에 참여했다. 6개월간 교육받고 10월5일 졸업한 선생의 황푸군관학교 이력은 항일역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비뽑기로 거사의 주인공을 결정 

그럼에도 의열단원들은 서로 “내가 먼저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1920년대 중반 독립운동은 침체에 빠져있었다. 국내에서는 독립투쟁의 맥이 끊긴 것 같았고, 임시정부는 사분오열되었다. 그런 판국이었으니 뜻있는 젊은이들은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나서며 의열단에 다투어 가입했다.

김원봉 선생의 동지인 김성숙 선생(1898~1969)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의열단에 가입한 젊은이들은 서로 먼저 죽으러 국내로 들어가겠다고 손들고 나섰어요. 폭탄 들고 먼저 가겠다는 거죠. 그당시 중국에서 국내로 잠입하자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래서 나중에는 제비를 뽑았어요. 먼저 죽으러 가겠다고 제비까지 뽑았으니 참….”

젊은이들이 거사에 몸과 마음을 바친 것에는 물론 본인들의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의백 김원봉의 역할도 지대했다. 김원봉은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며 조선 민중은 능히 싸울 힘이 있다”면서 “젊은이들이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김성숙 선생은 “김원봉은 자기 동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몇날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모든 정열을 쏟았다”면서 “그래서 동지들이 죽기를 겁내지 않았다”고 평했다.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김구와 김원봉은 닮았다”는 것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

김산(장지락)의 전기인 <아리랑>을 쓴 님 웨일스(1907~1997)은 “의열단원들을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의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다. 어떤 경우에도 결벽스러울 정도로 아주 깨끗하게 차려입었다.”

의열단은 지린(吉林)에 임시본부를 두고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난징(南京), 홍콩을 오가며 단원 모집과 폭탄 입수에 주력했다. 일제와 친일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長岐)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경비는 외무성이 직접 지출한다”는 요지의 훈령을 상하이 총영사관에 하달하기도 했다. 

압송 경비를 일본 정부(외무성)가 책임질 정도로 김원봉은 이미 일본 본국 정부 차원의 요주의 인물로 분류된 것이다. 조선에서도 웃지못할 해프닝이 터졌다.    

강도들이 재물을 빼앗으면서 ‘난 의열단원인데 군자금으로 가져가니 그리 알라’고 엄포를 놓는 사건이 일어났다. 충청도에서는 경찰이 좀도둑을 잡아놨더니 좀도둑이 ‘내가 의열단이다’라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순경들이 놀라 도망쳤다는 얘기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의열단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1923년 8월30일 미국 정보기관의 첩보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일본 상하이 총영사의 첩보는 “의열단 단원이 1000명을 헤아리게 됐다”고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임시정부에 불만족하는 자 및 노동 로국(소련)의 후원을 받기에 부족함을 간파한 자들로서 의열단에 참가한 자는 점점 증가했다. 의열단은 한국 내외에 걸쳐 극력 비밀 선전에 힘쓴 결과 단원이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1938년 10월10일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사진. 맨 앞줄 휘장 가운데가 김원봉 대장이다. 

■황푸군관학교에서 학맥을 쌓다

하지만 의열단의 암살 파괴 투쟁은 조선 민중의 속을 후련하게는 할지언정 조국 해방 투쟁을 위한 결정적인 동력을 주지는 못했다. 선생은 군대양성을 위한 조직적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고쳤고 당의 강령을 채택해서 최고지도자가 됐다.

1926년 봄 선생은 그를 위해 단원 20여명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 즉 국공합작으로 창설 운영되던 중국의 황푸(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다. 제4기생이었다. 황포군관학교는 쑨원(孫文)의 혁명 종지를 관철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이들을 혁명군의 골간으로 삼아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을 타고 국민혁명을 완수하려고 설립됐다. 학교에는 코민테른이 파견한 다수의 소련 군사고문단도 참여했다. 선생 등은 6개월간 교육받고 10월5일 졸업했다. 선생의 황푸군관학교 이력은 항일역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한일운동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강력한 지원세력을 국민당 공산당을 막론하고 중국 군대와 정부 내에 구축할 수 있었다. 이 학교 교장이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주석이었고, 정치부 주임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황푸군관학교 출신들은 국공 합작이 깨진 뒤에도 중국 국민당 국민정부에서 장제스 주석의 친위대 역할을 했고, 공산당 진영에서도 저우언라이(정치부 주임)나, 선생의 동기생(4기)인 린뱌오(林彪) 등이 핵심인물이었다. 


■가장 좌경화했던 시절

하지만 1927년 4월12일 장제스가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국공합작은 파탄났고, 중국 공산당은 1927년 8월1일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이 난창봉기는 중국 근현대사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사변이다. 황푸 군관학교의 조선인 졸업생들도 국공합작이 깨져 서로 총칼을 겨누는 중국 내전이 벌어지자 자발적으로, 혹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한편에 가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희생되기도 했다.

이때 오성륜과 김산, 김규광 등 조선의 혁명가들이 대혁명의 격류 속으로 뛰어들었다. 일제정보기관의 보고는 김원봉 선생도 “짚신을 신고 삿갓을 등 뒤로 드리운채 유자명 등 동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폭동을 준비하던 난창을 향해 떠났다”고 했다. 

1929년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온 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안광천(1897~?)을 만났다. 선생은 안광천에게 영향을 받아 1930년 4월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개설했다. 민족해방투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또 공산당 재건동맹에 참여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 방안을 마련했다. 이때가 선생의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좌경화 했던 때였다.

김원봉 선생은 동지 박문호의 누이이자 여성혁명가인 박차정 선생과 혼인했다. 박차정 선생은 조선의용대 시찰에 나섰다가 적탄을 맞아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박차정 선생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골수 우익의 지원을 받은 이유 

그러나 선생의 ‘왼쪽 투쟁’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일본이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 점령하고 괴뢰국을 세우자(1932년 3월) 중국 민중 사이에서 광범위한 반일의식이 고양되었다. 선생은 이때야말로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제휴해서 항일투쟁을 과감하게 전개할 때라고 여겼다.

선생은 1932년 봄 중국 국민정부가 있는 난징(南京)으로 급거 떠났다.

여기서 황푸군관학교 동창생들을 찾아다니며 의열단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선생이 접촉한 조직은 국민당 정부의 ‘삼민주의 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 였다. 

삼민주의역행사는 ‘남의사(藍衣社)’라고도 했다. 중국 국민당 산하의 파시즘 비밀조직으로 장제스의 지휘아래 중국과 국민당을 철저한 군국주의 노선으로 이끌고 간 일종의 정보기관이자 준군사조직이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황푸군관학교 출신 20여명이 구성한 국민당 내부의 당 조직이었다. 일종의 당중당 조직이었다. 공산당을 탄압하고 당 내부의 반대파를 제거하고 숙청하는 우익조직이었다.

김원봉 선생은 바로 황푸학교 동기생이자 이 조직의 서기를 맡은 텅제(藤杰)를 만나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마침내 지원이 성사되었다. 


■이육사 시인도 학생이었다 

여기에는 1932년 1월과 4월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이 이뤄낸 잇단 쾌거(이봉창·윤봉길 의거)가 천군만마가 됐다. 특히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쾌거를 두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못했던 일을 조선청년 1명이 해냈다”고 기뻐하면서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다. 김원봉 선생을 기꺼이 도운 것도 바로 이 김구-이봉창-윤봉길 선생 등이 큰 힘으로 작용한 셈이다.

중국의 국민정부는 난징 교외의 장닝(江寧) 탕산(湯山)의 사찰에 둥지를 만들어주었다. 김원봉 선생은 그곳에 이론과 실제를 겸비할 지도급 독립투사들을 길러낼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열었다. 1932년 10월20일 열린 입교식에는 난징의 중국일보 사장과 황푸군관학교 동창회장, 국민군 장성 등이 참석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의 제6대’로 명명했다. 일제를 의식해서 국민당이 운영하는 시설처럼 장한 것이다. 입교식에는 쑨원과 장제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태극기와 중국기가 함께 게양됐다.

2년 뒤인 1934년 4월에는 임시정부 지도자인 김구 선생이 학교를 방문해서 ‘조선혁명을 위해 최후까지 분투해 줄 것’을 격려했다. 김구 선생은 학생들에게 만년필을 한 자루씩 선물했다. 졸업생 중에는 항일민족시인 이육사 선생(1905~1944)이 끼어 있다. 학교는 1932년 10월부터 35년 9월까지 3년간 125명의 독립군 간부와 전사를 키워냈다..


■"실용적 민족주의자였다"

이 대목에서 살펴 볼 것이 있다. 우파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참여와 레닌주의 정치학교 운영으로 공산주의자로 매도된 김원봉 선생이 아닌가. 그런 선생이 이젠 공산당을 탄압한 국민당 정부, 그것도 모자라 백색테러단체인 남의사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좌파로부터도 배반·변절자로 손가락질 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원봉 선생은 본디 어떤 사람인가. 훗날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분대장이었던 김학철(1916~2001)의 회고담은 김원봉이 어떤 사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장제스를 암살하는데 협조해달라”고 청하자 김원봉 선생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동아일보 1924년 4월25일자. 김지섭 의사의 도쿄 일왕 거주지 입구의 니주바시(二重橋) 폭탄투척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장개석(장제스)이를 해치우는 것은 우리의 급선무가 아니요. 비록 그 자가 백번 죽어 마땅하지만 지금 그 자의 속셈은 우리를 이용해보자는 거요. 우리도 그 자와 맞장기를 두어 안될게 뭐 있소? 일제를 타도하려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이면 어떤 거나 다 이용해야 하지 않겠소.”

어떤가. 김원봉 선생은 실용주의적 사고를 둔 민족주의자이지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그런데 그 때가 처음은 아니다. 선생이 1925년 동아일보에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밝혔다.

“종족(민족)의 투쟁이 곧 계급투쟁으로 나타납니다. 조선 민중의 생존번영과 자유평등을 위해 분투노력한다는 그 실질문제에서 두 가지 운동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 두가지가 또 조선에서 합치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종족의 투쟁이 구경은 계급 투쟁이 되겠고, 계급의 투쟁이 곧 종족의 투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선생은 곧 민족과 민중운동의 유구함을 신봉하고 무산자를 축으로 하는 국제연대를 부정했다. 그런 면에서 김원봉 선생은 애초부터 사회주의자와는 입장을 달리하는 민족주의자였다. ‘민족=민중'으로 파악해서 민족해방운동은 민중의 계급해방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봄으로써 민중의 역할을 강조한 진보적인 민족주의자였던 셈이다.


■공산주의 보다 민족주의

사실 해방후 분단과 전쟁, 냉전의 잣대로 항일기와 해방 직후의 이념과 노선을 무 자르듯 자를 수는 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타도를 위해 이념과 노선을 따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과 일본에서는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이 풍미하고 있었다. 두 사조는 피압박 인민의 해방과 자유를 전제로 선전되어 수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김원봉은 공산주의보다는 아나키즘에 매료됐다.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의 문학작품을 읽고 눈뜨게 된 것이다. 마음 한쪽에는 낭민주의, 허무주의 같은 아나키즘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김원봉 선생은 동지인 오성륜, 김산 등이 전투적인 공산주의자로 변모했지만 오로지 의열투쟁노선을 견지했다. 하지만 그러나 공산주의 세력과 관계를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김원봉은 항일투쟁을 위해서는 어떤 단체나 국가와도 연대한다는 유연한 인식이었다. 신생국 소련은 피압박민족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피압박 식민지국가들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1920~30년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한국독립운동의 ‘하나의 줄기였을 뿐이었고, 국내외 진보적 지식인들이 열광했고, 선호했던 독립운동 방식의 하나였다. 

김원봉 선생은 이 와중에서도 ‘뼛속까지 민족주의였다’라는 설명이 맞겠다. 더 정의하자면 김구 선생이 민족주의 우파세력의 지도자라면 김원봉은 좌파세력의 한 축을 이룬 지도자라 할까.

중국 산시성 쭤취안현 윈터우디촌 마을 입구 절 문 정면에 적힌 조선의용대의 항일선전문구. ‘강제병 끌려나온 동포들 팔노군이있는 곧마당(곳마다) 조선의용군이있으니 총을 하랄노(하늘로) 향하여 쏘시요!’라 했다.  중국군 산하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의용대는 주로 후방에서 일본군의 귀순종용 업무 등을 맡았다. 

■조선의용대의 결성

이후 조선혁명가의 단결을 위해 노력한 김원봉 선생은 1935년 7월5일 중국내에 흩어져있던 5개 단체를 통합한 민족혁명당 창당했다. 선생은 사실상의 당수 격인 서기부장(총서기)을 맡았다. 하지만 김구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참여하지 않았고, 이청천 계열이 이탈하는 등 우파진영의 비협조와 질시로 사명을 다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원봉 선생은 일약 국제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다급해진 장제스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이 김구와 김원봉 등에게 한중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김원봉 선생은 ‘기회가 왔다’ 싶었다. 선생은 ‘학맥의 자양분’이었던 황푸 군관학교 출신의 국민당 정부 유력인사들을 만나고 심지어는 일본의 반전 세력까지 접촉해서 조선인 부대, 즉 조선의용대 결성안을 추인받는다. 

마침 일본의 침략에 따라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룬 때였다. 조선의용대 창설안을 심사한 곳은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였는데, 당시 위원장은 국민당의 장제스였고, 부부장은 공산당 측의 저우언라이였다. 저우언라인은 황푸 군관학교 시절 김원봉의 스승이었다. 

중국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서 이 부대를 관할한다는 조건으로 창설을 승인했다. 김원봉 선생은 본래 독자적인 무장부대로서 ‘조선의용군’이라는 이름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국측은 외국군대가 자국에서 창군되는 것이 이상하다면서 규모가 작은 ‘조선의용대’의 이름을 쓰도록 했다. 

마침내 1938년 10월10일 우한(武漢) 한커우(漢口)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결성식이 열렸다.

김원봉 선생은 “한국민족이 해방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이 더욱 포악해졌다”면서 “중국 형제와 손잡고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하자”고 역설했다. 조선의용대 창설 소식이 미국의 각 신문에 보도되자 재미교포들이 자진해서 의용대 후원회에 지원했다. 총대장은 김원봉 선생이, 부녀봉사단장은 선생의 부인인 박차정이, 소년단장은 17살 최동선이, 부대장은 신악이가 각각 맡았다. 군복을 입고 부대기 앞에 정렬한 이는 150명이었다. 2개 지대로 나뉘었는데, 1지대장은 박효삼, 2지대장은 이익성이 맡았다,

비록 남의 땅이고, 200여명의 소수인원이었지만 나라가 망한 후 국제정규전에서 독립군이 직접 참전한 것은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대 중국 관내에서 한인의 양대군사조직이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창설 및 발전을 선도했다.


■3개국어 능통한 조선의용대원의 역할

물론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중국군의 지원부대였기 때문에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25세 전후로 나라가 망한 후 30년간 대부분 혁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를 따라 떠돌았다. 부단히 혁명적인 훈도를 받았다. 튼튼한 신체와 장대한 체력을 갖췄고 희생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어도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등 세가지 언어문자를 해독했다.”(님 웨일스)

3개 국어에 능통한 이들은 주로 후방지역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중국군을 대상으로한 일본어 교육과, 일본군 포로 심문은 물론이고, 적점령지역이나 후방지역에서 일본군의 귀순종용 업무를 맡았다.

중국의 저명한 사상가인 궈모뤄(郭抹若·1892~1978)은 “조선의용대 친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칭찬했다.

“길가의 담벽이나 길가에 굵직하게 쓴 선전문구가 있었다. ‘(일본) 병사들은 전선에서 피 흘리고, 재벌은 후방에서 향락에 빠져있다.’ ‘병사들의 피와 목숨은 장군들의 금메달’….이것은 조선의용대 친구들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이들은 삼삼오오 조를 이뤄 페인트 통을 들고 촌분을 아끼며 일에 몰두했다. 모두 우리의 벗인 조선의용대 친구들이었다. 중국인은 한사람도 끼어있지 않았다.”

전투부대는 아니었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전투에도 참전했다. <대공보>의 1939년 4월13일자는 “의용대가 1940년 3월23일 매복전에서 적탱크 2량과 자동차 8량을 불태우고 적군 30~40명을 사살했다”고 기록했다.


■주력군을 화베이로 보낸 김원봉 대장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점차 화베이(華北) 지방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더많은 조선인 대원을 확보하려면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북쪽 지방으로 가는게 유리했다. 게다가 장제스는 또 한 번 ‘내부의 적(공산당)이 문제’라면서 공산당 견제와 타도에 더욱 힘을 쏟고 대일항전에는 소극적인 자세로 나갔다. 대일항전이 우선이었던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는 화베이의 팔로군(중국 공산당의 주력군)에 합류했다. 여기에 정통 팔로군 장군인 김무정이 조선의용군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 

그러나 김원봉 선생은 충칭에 남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의용대는 1941년 12월 후베이성(湖北省) 후자좡(胡家莊) 전투에서 손일봉·박철동·왕현순·최철호 등 대원 4명이 전사하고 부대장 김세광과 대원 김학철 등이 총상을 입거나 포로가 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1942년 봄 팔로군의 반소탕전에서도 김원봉 선생의 동지인 윤세주가 전사하는 등 피해를 당했다. 

김원봉 선생의 영향력이 윤세주의 전사 이후 현저하게 약화됐다. 훗날 공산주의자들은 원봉 선생을 두고 소부르주아라든지, 기회주의자라든지, 개인영웅주의자로 손가락질 했다.(계속)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창, 2008

김영범, <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한상도, ‘해방정국기 김원봉의 정치활동-독립운동가에서 정치가의 길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8

염인호, ‘김원봉-의열투쟁과 무장독립운동의 선구자’, <한국사시민강좌> 47, 일조각, 2010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이제는 말할 수 있다:MBC 특별기획-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MBC문화방송, 2002 


이원규, <약산 김원봉>, 실천문학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