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개 돼지보다 못하다. 산도 안되고 형무소도 안된다면 시신을 등에 지고 종로거리를 다닐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89년전인 1930년 4월 16일(음력 3월 1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권오기가 달려갔다. 그러나 형 권오설의 숨이 끊어질 즈음이었다. 

“형님! 형님!”하고 애타게 부르자 형 권오설은 겨우 눈을 떠서 동생의 목을 감싸고 볼을 비비면서 “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고 했다. 동생 오기는 눈물을 삼키며 형무소 문을 나섰다. 다음날인 17일, 동생이 다시 형무소를 찾았을 때 형 권오설은 이미 운명한 뒤였다. 동생은 형무소측에 “살아서 내보내지 않는게 법이라면, 죽어서는 내보내야 하는게 아니냐”고 항의하면서 “시신을 산에 묻게 할 거냐, 형무소에 빈소를 마련하게 할 것이냐”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형무소측은 “산도 안되고, 형무소는 더더욱 안된다”고 거절했다. 얼렁뚱땅 화장해서 적당히 처리할 것이 분명했다. 동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너희는 개 돼지만도 못하다. 시신을 지고 종로거리로 나가겠다”고 꾸짖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의 철제관 전시모습. 1930년 4월17일 선생이 옥중에서 순국하자 일제는 서푼짜리 송판으로 관을 만들고 그 안에 선생의 시신을 넣은 뒤 함석으로 둘러싸 용접 밀봉해버렸다.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철제관곽으로 밀봉한 시신 

우여곡절 끝에 시신은 신간회 사무실로 옮겼다. 비보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와 맏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62살의 아버지(권술조)는 억장이 무너졌다. “고문한 흔적은 온몸에 푸릇푸릇한 점을 이뤘으니 이 모두가 독을 쏜 자국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손수 아들의 입에 반함(飯含·상주가 직접 그 주검의 입 안에 구슬과 쌀을 물려주는 것)을 하고 시신을 염했다. 

다음은 입관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일제가 서푼짜리 송판으로 만든 권오설 선생의 관을 두꺼운 함석으로 감싸고 덮어 용접한 뒤 밀봉해버렸다. 그런 뒤 가족들에게는 “고향에서 묻되 봉분을 짓지말고 평장(平葬)으로 하고, 절대 외부인의 조문을 받지 말라”는 협박했다.


■가슴을 친 아버지, ‘하늘이시여!’ 

이 때문에 권오설 선생의 시신은 정상적인 나무관에 옮기지 못한채 함석철관 그대로 고향인 경북 안동 가일마을 앞 공동묘지에 묻혀야 했다. 일제경찰의 서슬퍼런 명령에 봉분도 마련하지 못했다. 

일제는 권오설 선생의 무덤이 독립운동의 표상이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환갑을 넘긴 아버지가 33살 젊은 나이에 숨져간 아들을 위해 쓴 제문이 가슴을 때린다. 

“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병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하니 충직(忠直) 때문에 죽었느냐…고문으로 꺾이고 분질러짐을 당한 날에도  죽지 않았는데…하루 아침에 변을 당했으니….”

아버지는 독립투사 아들이 결코 헛되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원통하고 슬프도다!”라고 애달파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으로 묻는다고 했지만, 독립투사 아들, 그것도 고문으로 죽은 아들이라면 가슴으로도 결코 묻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08년 부부합장을 위해 선생의 유해를 수습하다가  밀봉된 흔적이 분명한 철제관을 확인했다. 일제는 선생을 고향인 안동에 묻되 봉분을 만들면 안되고, 외부인의 조문도 불허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빨갱이'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의 이름은 낯설다. 1919년 3·1운동을 계승한 1926년 6·10만세운동의 기획자이자 주도자인 선생인데도 그렇다. 왜일까. 바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냉전·전쟁·분단의 구도에서 사회주의자는 제 아무리 특출한 독립운동가라도 ‘빨갱이’로 낙인 찍힐 수 밖에 없었다. 

권오설 선생은 1897년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맥을 잇은 경북 안동의 가일마을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 전신)과 중앙고보, 경성부기학교 등을 차례로 중퇴한 선생은 1919년 고향으로 내려와 교육·청년·농민운동을 펼친다. 원흥학술강습소(원흥의숙)과 일직서숙을 열어 청소년들의 신식교육을 도맡았고,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하고 풍산청년회를 창립했다. 1923년부터는 풍산소작인회 집행위원이 되어 소작운동까지 벌였다. 

이것이 권오설 선생에게는 새로운 도약이었다. 소작운동을 벌이려면 인재가 필요했다. 선생은 바로 풍산학술강습회를 개설했는데, 안동지역에서 약 200명 정도가 수강했다. 권오설의 지도를 받고 서울로 유학한 권오운과 권태성 등은 훗날 6·10만세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권오설을 사회주의자로 이끈 고향선배

권오설이 사회운동을 펼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고향 선배 두 사람이 있었다.

뒷산너머 오미동 출신인 김재봉(1891~1944)과 풍산들 건너편 하리 우롱골의 이준태(1892~1950)이었다. 김재봉은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표 회의에 조선노동대표로 참석한 뒤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조선공산당 건설을 목표로 귀국한 인물이다. 1923년 8월에는 꼬르뷰로(코민테른 민족부극동총국 소속의 한국문제 전담기관)의 내지부 책임자가 된다. 서울에서 청년 및 노동운동에 투신한 이준태는 1922년 무산자동맹회를 이끌고 신사상연구회를 만들었다. 1923년 여름에 귀국한 김재봉은 바로 이 이준태의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한다. 

‘조선에서 공산당을 건설하라’는 명을 받고 귀국한 김재봉은 이준태와 함께 공산당 건설의 기반이 될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할 준비에 나섰다. 이 중 고향 안동에도 하부조직이 필요했는데, 이때 권오설 선생이 낙점됐다.

권오설 선생의 옥중 사진. 권오설 선생은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다.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이 되다

1924년 4월 권오설 선생은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조선노농총동맹 임시대회에 참여했고, 10인으로 구성된 상무위원회 위원이 된다. 선생은 서울에서 인쇄공과 양말직공, 고무직공 파업을 지도하기도 했다. 

1925년 4월 17일 창당된 조선공산당에서 권오설 선생은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됐다. 선생은 고려공산당청년회의 조직부 책임자로서 청년·학생들의 규합에 노력했다. 특히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일을 추진했다. 선생 등이 파견한 유학생 21명 중에는 선생의 막내동생인 권오직과 안동 와룡 중가구동 출신인 안상훈이 포함돼있다. 권오설 선생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불과 7개월 후인 11월 일제에 의해 탐지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은 권오설 선생은 조직정비에 나선다. 권오상·조두원·정달헌·이병립·윤기현 등 학생들을 대거 입당시킨다. 

이들은 훗날 6·10만세운동을 이끈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로 활약했다. 권오설 선생이 학생운동계 대표들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조선공산당은 안동출신인 이준태와 권오설이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권오설은 특히 임시 상해부에서 들어오는 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은 이때 해외로 망명한 김천 출신의 김단야(1901~1938) 등과 연결되고 있었다. 

권오설 선생의 아버지(권술조)가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은 아들을 기리며 쓴 장문의 제문.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온몸에 푸릇푸릇 검은 점이 있으니 이 모두가 독을 쏜 자국”이라고 안타까워했다.|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메이데이 시위에서 순종 장례식 시위로 계획변경

조선공산당의 핵심이 된 권오설 선생은 1926년 5월1일 메이데이 시위를 기획한다. 대대적인 연합시위를 펼치면서 그 과정에서 민족통일전선을 이루자는 것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돌발변수가 생겼다. 

4월25일 순종이 서거한 것이다. 선생은 계획을 수정한다. 순종 장례에 참가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을 전국에 뿌리내리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었다. 권오설 선생은 상주(喪主) 차림으로 변장한 뒤 압록강을 건너 안둥현(安東縣) 역전 근처 초원에서 김단야를 만나 활동 방향을 논의하고 돌아온다.

‘만세 시위를 펼칠 것과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 시위는 자칫 조선공산당의 와해를 부를 수도 있는만큼 투쟁 지도부는 공산당중앙과 분리시켰다.

권오설 선생은 조선노동총동맹의 중진이었고, 학생운동계의 중추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 두 조직으로 6·10투쟁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 권오설 선생의 지휘아래 투쟁지도부가 결성된 것이다. 대중시위를 펼치자면 보수·진보를 아우르는 조직이 필요했다. 이른바 통일전선체 구성이었다. 그 해결방안으로 천도교 진영의 구파가 가세했다. 각자 역할분담도 했다. 천도교청년동맹은 격문 인쇄와 만세운동의 지방확산을 맡았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들에게는 인산(순종 장례일) 당일 행렬에서 시위를 점화하고 이끌어내는 임무를 맡겼다.

        

■천려일실로 발각된 6·10 만세운동 인쇄물

그러나 시위의 여건은 좋지 않았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혈안이 돼있었다. 군대와 경찰을 총동원해서 물샐틈없는 경비에 나섰다. 의심을 살만한 인물을 한사람씩 분석하고 추적했다. 이 마당에 과연 순종의 장례일에 맞춰 대규모 전국적인 시위를 벌일 수 있었을까. 

역시 차질이 생겼다. 두 사건이 빌미가 됐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던 코민테른 상하이 연락부가 순종의 서거 소식을 듣자 대대적인 항일시위를 벌일 호기로 판단하고는 ‘곡복(哭服)하는 민중에게’의 제목을 붙인 격문 5000장을 인쇄 발송하고 운동자금까지 보냈다. 그런데 권오설 선생 앞으로 배달된 격문이 수취인에게 전달되기 전에 총독부 경찰에 의해 압수됐다. 

1927년 10월17일자 동아일보. 권오설 선생 등 공산당 피고인 5명이 미와 와사부로 종로경찰서 고등계 경부 등 5명을 고문혐의로 옥중 고소했다는 내용을 1개면을 털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고소에는 무려 7명의 변호사가 참여했다. 고소장을 제출한 후루야 변호사는 “경찰관이 피고를 폭행해서 답변을 강요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유린하고 형사소송법에 보호된 피의자의 변호권을 무시하고 사법재판의 공평진실을 그릇되게 하는 법률파괴행위”라고 강력하게 규탄했다.

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권오설 선생은 상하이에서 배달된 격문 말고도 시위에 쓸 5종의 선언문 및 전단 5만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것을 마침 포섭되어 있던 인쇄공 박래원에게 맡겼다. 박래원은 권오설이 건넨 거사자금으로 작업을 마친 다음 인쇄물들을 같은 인쇄업계 일꾼인 손재기의 집에 보관해놓았다.

손재기의 집은 개벽사(가정주부 대상의 여성잡지) 옆인 천도교당 구내였다. 공교롭게도 일제 경찰은 당시 위폐사건 수사를 위해 천도교계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벽사의 여직공 중 손재기의 부인과 특별히 친한 사람이 있었다. 그 여직공은 우연히 손재기의 집을 찾아왔다가 비밀 인쇄물이 든 상자를 발견했다. 마침 친구가 출타중이어서 없었다. 여직공은 호기심이 발동해 상자 안에서 인쇄물 2장을 집으로 가져갔다. 이것이 일경에게 발각됐다.

이것에 단서를 잡은 일제경찰은 손재기-박래원 등의 윗선을 더듬어 올라갔고, 결국 권오설 선생과 그 동지들을 검거했다.


■6·10만세운동은 학생운동인가

이 대목에서 하나 분명하게 언급할 사항이 있다. 6·10만세 운동과 관련된 일반적인 평가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보면 6·10만세운동은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이다…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된 항일운동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6·10만세운동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운동은 세갈래로 진행되었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사회주의자 권오설 선생이 중심된 노총계(조선노동총동맹)를 중심으로 추진되다가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실패했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전문학교생들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 즉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두번째 갈래(이른바 사직동계)와, 중앙·중동고보 학생들이 중심이 된 세번째 갈래(이른바 통동계)가 시위운동을 성사시켰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세갈래 추진체가 ‘따로국밥’으로 움직였고, 그중 권오설 선생의 노총계는 실패하고 학생들이 주도한 두 갈래는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1927년 10월18일 권오설 선생 등의 고문경관 고소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일제강점기에 옥중에서 고문경관을 고소한 희대의 사건으로 주목을 받았다..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가려진 공적

하지만 이것은 해묵은 반공이데올로기의 개입이라는 평가가 있다. 즉 어떤 독립운동이든 공산당 혹은 계급주의자의 편에 서면 안된다는 금기사항이 작용되었다는 것이다. 

고 김용직 전 서울대 교수(1932~2017)는 “6·10 만세운동을 노총계(권오설)-사직동계(조선학생과학연구회)-통동계(중동·중앙고보생) 등으로 ‘3등분’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평했다. 물론 세갈래 중 지금의 고교생들이 주축이 된 ‘통동계’는 다분히 소박한 차원의 학생집단이었다. 그 학생들이 만든 격문에서 민족대표로 추대된 사람들이 이미 항일 투쟁의 전위에서 이탈한 최남선(1890~1957)이나 최린(1878~1958)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일러준다. 

그러나 권오설의 노총계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구성원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를 ‘따로’ 조직으로 볼 수는 없다. 

단적인 예로 인산(순종 장례) 당일에 종로 4가 사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선창한 이선호는 안동 예안의 부포 출신으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상무를 맡던 핵심인물이다. 연희전문생 권오상은 권오설 선생과 같은 가일마을 출신이고 역시 사회과학연구회의 조직지도를 맡고 있었다. 권오상은 조선공산당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6·10만세운동의 주역인 권오운은 권오설 선생의 집안 동생이고, 권태성은 풍산들 북쪽의 풍산 안교동 출신이며, 류면희는 예안의 삼산 출신이었다. 권오운과 권태성은 상경에 앞서 풍산하기강습회에서 권오설 선생의 교육을 받기도 했다. 비록 권오설 선생은 거사 3일전인 6월7일 체포되었지만 선생의 지도를 받은 가일마을을 중심으로 한 안동출신 청년들이 6·10만세운동의 전면에 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학계에서는 권오설 선생과, 선생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한 권오직(1906~?) 등의 고향인 안동 가일마을을 ‘안동의 모스크바’라 일컫는다. 그러니 6·10만세운동을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되고 추진된 민족독립운동’으로 단순화 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동아일보는 권오설·강달영 등 고문경관을 고소한 이들과 사건을 대리한 변호인들은 물론이고 고문경관으로 지목된 미와 와사부로 종로경찰서 주임경부(맨밑의 왼쪽 사진)와 요시노 도조 경부보의 사진을 실었다.

■옥중 폭로, ‘고문경관’ 미와 경부를 고소한 권오설 

6·10 만세운동은 비록 3·1운동과 달리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권오설 선생 등 지휘부가 거사직전에 체포된 이유가 컸다. 하지만 물샐틈없는 감시 속에서도 전국적으로 시위와 동맹휴업 등 2만명이 넘는 이들이 참가했고, 이중 1000여명이 체포되거나 구속됐다. 이 운동은 1929년 11월3일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롤모델’이 되었다. 안타깝게 체포된 권오설 선생은 무려 1년10개월동안 미결수로 예심과정을 거친 뒤에야 7년 구형에 5년 금고형을 언도받았다. 

권오설 선생은 옥중에서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을 벌였다.

선생은 경찰과 검사의 심문에 진술한 내용을 공판 과정에서 뒤집는 경우가 많았다. 판사가 왜 진술내용을 뒤집냐고 물으면 “경찰과 검사의 요구대로 말하지 않으면 그들이 좋아하지 않아서 거짓으로 진술했다”고 했다. 고문과 협박이 계속되자 차라리 그들이(검·경) 원하는대로 진술한 것이라 했다.

권오설 선생의 투쟁 중 백미는 바로 ‘고문 폭로’였다. 

재판이 한창이던 1927년 10월 17일 동아일보는 ‘공산당 피고 5명이 요로 경관을 고소했다’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다룬다. 즉 권오설·강달영·전정관·홍덕유·이준환 등 피고들이 변호사인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후세 다츠지(布施辰治)·김병로·이인·김태영·허헌·한국종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해서 이른바 고문 일제경찰들을 ‘폭행독직죄’로 고소한 것이다. 

고소를 당한 자들은 종로경찰서 주임경부인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와 경부보인 요시노 도조(吉野藤欌), 그리고 조선인 경부보 김면규와 순사부장인 오모리 히데오(大森秀雄) 등 4명이었다.

“고소인(공산당 피고)들은…종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던 1926년 6월14~8월8일 사이 종로 경찰서 2층 신문실과 경찰부 신문실에서 우메노(梅野) 형사 및 유(劉)·한(韓) 형사 등과 함께 갖은 폭행을 가해 권오설은 앞니 두 개가 부러지고 다른 피고들도 중상을 당했다는 것인데…같이 수감되었던 다른 피고의 증언까지 세웠다고 한다.”


■일본열도에까지 파문을 일으킨 고문경관 고소사건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전하면서 “많은 변호사가 대리인이 되어 이처럼 주요 경찰관을 고소한 것은 근래에 보기 드문 중대사건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고 전했다. 

고소장을 제출한 후루야 변호사는 “경찰관이 피고를 폭행해서 답변을 강요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유린하고 형사소송법에 보호된 피의자의 변호권을 무시하고 사법재판의 공평진실을 그릇되게 하는 법률파괴행위”라고 강력하게 규탄했다. 

권오설 선생 등을 고문한 미와 와사부로는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하는 그 미와 경부(탤런트 이재용 분)를 가리킨다. 권오설 등은 “고문 때문에 앞니가 덜거덕거려 바람만 스쳐도 고통스럽다”면서 다양한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죽도록 두들겨맞았다. 다리 안쪽에 각목 2개를 끼워 하루 밤낮을 고문당했다. 또 손가락 사이에 부채를 끼우고 양쪽을 쥐어….”

이 사건은 식민지 조선 뿐 아니라 일본 열도에까지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인 인권변호사인 후세 다츠지(1880~1953)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에서 일어난 고문사건을 맹렬히 성토해서 여론을 환기시켰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26일자는 ‘취조를 앞두고 불안 중의 경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피고소 경관들도 적지않이 불안에 떨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인들을 고문한 일제경찰이지만 ‘고문경찰’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도 걱정이고, 그 때문에 자기 부인이 충격을 받을까 그것도 염려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30일자는 ‘천하의 시청을 집중한 고문경관 고소사건의 전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의 노동농민당과 노동당이 합동으로 고문경찰을 강력히 규탄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면서 “이 사건은 일본정계에도 일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소사건이 권오설 선생 등의 승리로 끝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소장을 제출한 다음날인 10월 18일 동아일보 기사도 “권오설의 앞니 두 개가 부러졌다지만 그것이 고문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넘어져 그렇게 된 것인지 입증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시내 모 경찰서 경관의 말을 인용했다. 하기야 일제가 고문사실을 인정할 리도 없었다. 일제검사가 불기소처분을 내리자 권오설 선생 등이 항고했지만 판사가 기각했다. 

그러나 고소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고소당한 경관들도 어지간히 캥겼던 것 같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26일자는 ‘취조를 앞두고 불안 중의 경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피고소 경관들도 적잖이 불안에 떨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공산당 피고인 권오설 외 네사람이 종로경찰서 경찰 4명을 고소해서 세간의 이목을 놀래키고 있는데 고소당한 경관들도 적지않케 염려하고 있단다. 피고소 경찰 중 모씨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나는 그래도 괜찮지만 네 아내는 남편이 고문하다가 고소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 때문에 구인 당하게 되면 심약한 여자가 혼자 어떻게 견딜까 걱정하고 있다’고 토로했단다.” 

조선인들을 마구 구타하고 고문한 일제경찰이지만 ‘고문경찰’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도 걱정이고, 그 때문에 자기 부인이 충격을 받을까 그것도 염려된다고 했단다.

권오설 선생은 공판조서에서도 일제통치를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판했다. 

“내가 21, 22살 때 고향인 안동에 고바야시라는 일본인 지주가 돈 2000~3000원을 가지고 와서 고리대금업을 벌여 사람들을 괴롭히고 3년 만에 토지 500마지기의 지주가 되었다. 이게 올바른 통치냐.”

권오설 선생은 심지어 치안유지법의 핵심조차 파악하지 않고 법정에 나선 예심판사를 한껏 조롱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그 혹독한 시절에 재판정에서 일제 통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일제 공권력을 상대로 당당하게 법정투쟁에 나선 권오설 선생 등의 기개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권오설 선생은 옥중에서 신장염으로 고생하지만 영치금이 없어 주사도 맞지 못했고, 병감(病監)에 수용되기 일쑤였다.


옥중의 권오설 선생이 옥사했다고 알린 전보. ‘작야 오설 옥사’(어젯밤 권오설이 옥사했음)를 알리고 있다.|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가족 친지에게는 “돈 좀 보내달라”고 약한 모습

선생은 미결수 신분으로 무려 20개월 동안 지냈다. 얼마나 형무소 생활이 열악했는지 선생은 어느 동지에게 보낸 편지 겉봉에 발신처를 ‘서대문 우리 속에서’라 표현했다. 

형무소를 '돼지우리'라 한 것이다. 일제와는 치열하게 싸웠지만 고문을 받느라, 병과 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가족과 친지, 동지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모습도 보여줬다.

심지어 동생 권오기에게는 “구루마(손수레)를 끌더라도 돈을 구해 보내라”고 호소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돈 좀 보내라. 사식 좀 넣어달라. 몸이 아프다”라고 했을까. 그러면서도 “부모님에게는 절대 알리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면서 어머니의 회·진갑과 부친 회갑 등을 감옥에서 맞이하는 아들의 심정을 구구절절 토로했다. 

1928년 어머니 환갑날에 시를 보냈다.

“…우리 아버님! 우리 어머님도 온갖 풍상! 갖은 고초 가운데 오늘 환갑 지나신 뒤 오고 오는 날과 달에 한결같이 굳세고 튼튼하시와 우리 집의 바람이 날이 갈수록 새롭기를 빕니다,”


■마지막까지 고문당하다

그렇게 버티던 권오설 선생은 감형되었고, 1930년 7월 출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출옥 100여일을 앞두고 갑자기 순국한다. 온갖 고문과 병마 속에서도 버티던 선생은 왜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었을까.

1925년 권오설 선생이 앞장 서서 모스크바로 유학을 보냈던 동생 권오직 때문이 아니었을까. 형의 권유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를 졸업한 권오직은 1929년 2월26일 국내로 잠입해서 활약하다가 체포됐다. 그로부터 한달여뒤 형 권오설 선생이 순국했다. 

아마도 일제 경찰이 체포된 동생 권오직과의 연관성을 집요하게 캐물으면서 또다시 고문을 자행한 것이 아닐까. 선생의 유해는 그렇게 비참하게 함석철관 속에 밀봉된채 묻히고 말았다.

권오설 선생의 자필공술서. 권오설 선생은 법정에서도 일제 식민지통치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꾸짖었고, 준비없이 재판에 나선  판사를 조롱했다.

■풍비박산 난 가문

참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의 사연은 그나마 해방 전까지는 억울하지는 않았다.

선생이 옥사하고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채 봉분도 없이 묻혔으며, 식구들 또한 힘겹게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도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고 애써 자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45년 8월15일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했으니 고생 끝에 낙이 와야 했다.

그러나 권오설 선생의 ‘해방 후’는 ‘해방 전’보다 오히려 더 기가 막혔다. 좌우갈등과 남북분단, 한국전쟁 등의 소용돌이가 권오설 선생 가문을 빨아들였다. 

선생의 두 동생인 권오기와 권오직이 월북했다. 권오직(1906~?)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1948년)과 주중공 대사(1952~53)를 역임한 뒤 1953년 8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를 통해 후보위원에서 제명·출당되었다. 

부친(권술조)은 해방 직전인 1944년 작고했다. 고향을 지키는 이들은 어머니(풍산 류씨)와 선생의 아내 부림홍씨, 권오기의 첫아내 김순녀씨, 권오직의 첫아내 노재순씨 뿐이었다.     가문은 둘째 동생 권오기의 외동아들인 권대용씨가 지켰다. 권대용씨는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권오설 선생의 아들로 입양되었는데, 결국은 큰아버지와 생부(권오기), 작은 아버지(권오직)의 제사까지 받들어야 했다. 

권오설 선생의 고향인 안동 가일마을. 가일마을에서는 권오설 선생을 비롯해 권오직 등 사회주의 지도급 인사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래서 가일마을을 ‘안동의 모스크바’로 일컫는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반열에 오르다

앞서 살펴보았듯 권오설 선생은 침체된 민족운동에 활기를 안겨주었고,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가교라는 평을 들은 6·10만세운동의 기획자이자 주도자였다. 

그렇지만 선생이 독립유공자의 대우를 받게된 것은 불과 14년 전인 2005년의 일이다. 왜냐. 사회주의자, 즉 빨갱이의 낙인 때문이었다. 항일투쟁을 벌여 나라를 되찾는데 몸과 마음을 받쳤지만 그 길이 사회주의였다고 해서 백안시 되었던 세월이었다.

이해는 갔다. 분단과 전쟁, 냉전이라는 엄중한 상황에서 아무리 독립유공자라 한들 사회주의자에게 서훈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객관적인 평가조차 힘든 판국이니 입도 벙긋 할 수 있었겠는가.

1980년대 이후 극단적인 논쟁이 난무하면서도 차츰 평정심을 찾아 사회주의 독립투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졌다. 

결국 2005년 3·1절을 맞아 사회주의 운동을 벌인 인물 중에서 독립유공자를 가려 뽑았다. 사회주의 운동가 중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한 경우 이를 항일민족투쟁으로 인정하자는 사회적인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국가유공자 포상을 하려면 매우 중요한 한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즉 항일투쟁의 공적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나 그후 존립에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포상하는데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포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거나, 또는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한 인물은 포상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랬으니 조선공산당 창립의 주역이지만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권오설 선생은 독립유공자로서 차고도 넘치는 자격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권오설 선생(독립장·3급)과 독립유공자의 자격을 되찾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는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대통령장·2급) 등 54명이다.

그렇다면 이즈음 한번 물어보자. 의열단장이자 조선의용대장,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부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어떤가.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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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duhan 2019.04.19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으면 일본의 조선 통치가 오히려 가혹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