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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홀연히 나타난 또다른 홍길동…, 홍길동전은 대체 누구의 작품인가

‘홍길동전은 허균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금까지 ‘홍길동전의 작자=허균(1559~1618)’이라는 등식은 공리처럼 여겨졌다. 그와 함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전의 명대사는 풍운아 허균이 창조해낸 조선시대 ‘적서차별’의 상징말로 일컬어졌다.


■어느 향토사학자의 제보로 밝혀진 홍길동전의 존재

하지만 최근 허균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 지소 황일호(1588~1641)이 쓴 홍길동의 간략한 일대기가 존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전주의 향토사학자 조봉래씨(68)가 국문학자인 이윤석 전 연세대 교수를 통해 황일호의 <지소선생문집>에 실린 ‘노혁전’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지소선생문집>은 연구자들에게는 알려진 문집이지만 ‘홍길동전’이 아닌 ‘노혁전’이란 제목 때문에 조명받지 못했던 것이다. 노혁전에서 노혁은 홍길동의 다른 이름이다.

황일호의 삶은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을 당한 허균과 흡사한 궤적을 그렸다. 병자호란 때까지는 평범한 관료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헌부 장령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로 자신의 직분이 충실했다. 

조선중기 문인인 지소 황일호(1588~1641)의 <지소선생문집>에 실린 ‘노혁전’. 노혁이 홍길동의 다른 이름이라고 썼다. 황일호는 16세기 전설적인 도적이었던 홍길동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간략한 일대기를 썼다. 이윤석 전 연세대교수 제공

그러나 병자호란 후 몇몇 벼슬을 지내고 의주 부윤으로 근무했는데 이때 일어난 사건 때문에 사형을 당했다. 

황일호는 병자호란 후 심양으로 잡혀낸 소현세자를 모신 정뇌경(1608~1639)을 제사지낸 일로 청나라가 크게 노하자 삭탈관직됐다. 정뇌경은 청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아 청나라 통역관이 된 조선 출신 역관 정명수(?~1653)을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처형당한 인물이었다. 황일호는 바로 그 정뇌경의 제사를 지내려다가 삭탈관직된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황일호는 명나라로 망명해서 청나라를 치려고 했던 최효일(?~1644)의 망명을 도와준 혐의로 붙잡혀 끝내 사형당했다. 여기에는 정명수의 미움을 산 것이 결정적이었다. 1641년 조선에 온 정명수는 “황일호가 최효일과 내통해서 음모를 꾸몄으니 둘다 죽이겠다”고 앙앙불락했다. 조선 조정은 백방으로 황일호를 살릴 방도를 찾았지만 정명수가 끝내 “죽여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 끝내 처형되고 만다. 


■황일호의 <홍길동전> 줄거리

그런 황일호는 전주 판관으로 일하던 1626년 전라감사의 종사관이던 임게로부터 16세기 유명한 도적이었던 홍길동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이를 바탕으로 간략한 일대기인 ‘노혁전’을 썼다. 

“노혁의 본래 성은 홍(洪)이고, 그 이름은 길동(吉同)이니, 실로 우리나라 망족(望族·명망 있는 집안)이다. 불기(不羈·구속을 받지 않음)의 재주를 품었으며, 박혁(장기와 바둑)을 잘하고 글에 능했다.”

노혁전의 앞부분이다. 그러나 본명 홍길동은 천한 신분인 자신에 대해 크게 한탄한다.

“내 재주는 옛 사람보다 나은데 매우 미천한 몸에서 태어나 국가가 우리를 급하게 붙들어 매어놓으니 나는 끝내 거지처럼 얻어 먹으면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구나.”

이에 홍길동은 매일매일 여러 귀인(貴人)들 앞에서는 공손하게 대하고 나가서는 죄수들을 불러들여 땅거미가 지면 상동문 밖에 모였다가 흩어져 남의 것을 빼았으니 모두 홍길동이 시킨 일이었다.“

결국 홍길동은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을 무대로 삼은 ‘전국구’ 도둑의 우두머리가 됐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는 주변을 털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서울을 떠나 여기저기 다니며 보화를 훔쳤다. 

“길동은 무뢰배 수백명을 모으고 좋은 말을 훔쳐 타고 졸개들은 팔방으로 내달렸는데 번개처럼 빠른 것이…사람들이 그 향배를 에측할 수 없었고 (조정에서는) 길동이 도적이 된 것도 몰랐다. 대낮에도 말을 달려….” 


■40년 만에 홀연히 업계(도둑계)에서 은퇴한 홍길동 

그러나 사람은 죽이지 않고 재물만 빼앗았다. 조정에서는 상금을 걸고 홍길동을 추적했으나 잡지 못했다. 

40년간 도둑들을 이끈 홍길동은 갑자기 마음을 바꾼다. 어느날 산중에 지은 소굴에서 훔쳐온 것을 나눠주고 “그대들은 가라. 나도 또한 여기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이 늙은이가 젊은 날에는 다른 재주가 있었지만 맡을 일이 없어 이렇게 된 것이다. 40년간 도적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홍길동은 그러면서 “대장부가 변화를 당해서는 매미가 껍질을 벗는 것 같아야 하니, 나는 마땅히 지금부터 새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무리를 해산했다. 이후 홍길동은 관서 지방 관찰사 홍진동(洪震同)에게 가서 몸을 의탁했고, 혼인해서 자식을 많이 낳고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황일호는 “도적의 꾀를 내다가 늘그막에 깨달아 본연의 선함으로 돌아오는 것이 고리를 굴리는 것 같으니, 이는 호걸의 일”이라면서 “내가 느낀 바 있어 전을 지어 소인을 경계한다”면서 마무리했다. 

이윤석 교수는 “‘노혁전’은 비록 전(傳)의 형식을 갖췄지만, 내용상으로는 야담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므로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다”면서 “당시에 전하는 홍길동 관련 이야기를 모두 모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실존인물 홍길동, 체포하지도, 고발하지도 않았다

알다시피 홍길동은 실존인물이다. 1500년(연산군 6년) 무렵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연산군일기>는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다”면서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그 무리를 다 잡아야 한다”는 3정승의 보고가 올라왔다.

두 달 뒤인 12월29일 <연산군일기>에는 “강도 홍길동이 옥정자(玉頂子·갓 꼭대기에 옥으로 만들어 단 장식)와 홍대(紅帶·붉은 띠) 차림으로 첨지(僉知·당상관)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청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했지만 지방관들이 체포하지도, 고발하지도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위관리의 관복까지 입고 충청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홍길동은 큰 도적의 대명사로 인구에 회자됐다.

홍길동이 체포된지 88년이 지난 1588년(선조 21년) <선조실록>은 “예전에 강상죄(도덕과 윤리를 배반한 대죄)를 저지른 자로는 홍길동과 이연수(부모를 죽인 인물), 두 사람 뿐이었으며, 항간에 욕을 할 때는 으레 이 두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이후 홍길동이라는 이름 석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도둑계의 레전드’로 윤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황일호 역시 전주 판관으로 일하던 1626년 전라감사의 종사관이던 임게로부터 전설적인 도적인 홍길동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홍길동의 간략한 전기(노혁전)을 썼던 것이다.


■도둑계의 레전드

홍길동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실록에 등장한 1588년보다 38년 뒤인 1626년, 그것도 임게라는 인물을 통해 전해들은 황일호 역시 홍길동을 ‘도둑계의 전설’로 대우해줬다.

“아! 지난 날 홍길동으로 하여금 높은 벼슬을 하여 그 세상에 없는 재주를 펼 수 있게 하였다면…”하고 아쉬워하면서 “하지만 금지하는 법이 너무 빽빽해서 이들로 하여금 세상에 용납될 수 없게 했었다”고 서얼차별제도를 비판했으며, “도적의 꾀를 내다가 늘그막에 깨달아 본연의 선(善)함으로 돌아왔으니…이 역시 호걸의 일”이라고 칭찬했다. 

황일호는 그러면서….

“세상의 저 앉은 자리에서 한 자 한 치도 떨어지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꾸민 것을 드러내어 자랑하지만, 안으로는 욕심이 많으며 총애를 믿고 국록을 도둑질하여, 마침내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니, 진실로 노혁의 죄인이다. 내가 느낀 바 있어 전을 지어 소인을 경계한다.”

황일호는 홍길동을 통해 조선의 통치계급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황일호의 <지소선생문집 >. 이 문집은 공개된 문헌이지만 ‘홍길동전’이 아니라 ’노혁전’이라는 제목이 붙어서인지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았다가 이번에 발굴됐다. |한국학 종합DB에서

■“홍길동전이 허균작이 아닌 이유”

이윤석 교수는 “황일호의 홍길동 일대기 발견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힌다.

‘홍길동전=허균작’이라는 철옹성 같은 통설이 깨졌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허균과 30년 차이 인물인 황일호 역시 홍길동의 전기를 썼을만큼 ‘홍길동전=허균’이라는 단순등식은 더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홍길동전은 이제 허균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허균과 황일호는 홍길동과 관련된 비슷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황일호가 항간에 전설처럼 떠돈 홍길동 이야기로 한문 <홍길동전>을 썼듯, 허균 역시 알려진대로 <홍길동전>을 썼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이번에 황일호의 한문 <홍길동전>이 발굴됐지만, 아직 허균의 <홍길동전>은 아직 소개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않아도 이윤석 교수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라는 주장을 거듭해왔다.

예컨대 지난해 10월 발행된 이 교수의 책(<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은 ‘허균(1559~1618)이 한글 <홍길동 전>의 작자가 아닌 5가지 이유’를 밝혔다. 전주의 향토사학자 조봉래씨도 이 책을 보고 이 교수에게 ‘노혁전’ 자료를 제보한 것이다.


■왜 후대인물 장길산이 등장하나

그렇다면 이윤석 교수는 왜 ‘홍길동전이 허균작일리 없다’고 단언하는 것일까. 

시중에 전하는 ‘홍길동전’에서 길동이 입신출세할 수 없는 신분임을 깨닫고 어머니에게 신세한탄하는 작품내용을 보면 ‘허균작’일리 없다는 것이다. 즉 “옛날 장충의 아들 길산이 천한 종에서 태어났으니 13세에 그 어미를 이별하고…”라는 내용이다. 홍길동이 예를 든 ‘장충의 아들, 길산’은 바로 ‘장길산’을 지칭한다. 

이윤석 교수는 바로 이 대목을 지적한다. 장길산은 허균이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능지처참을 당한 때(1618년)보다 70여 년 뒤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이라는 것이다. 1692년(숙종 18년) <숙종실록>은 신출귀몰하는 대도(大盜) 장길산의 존재를 소개하고 있다. 

“도둑의 우두머리 장길산이 양덕에 숨어있는데 포도청에서 장교를 보내서 잡으려 했지만 관군이 놓쳤다. 그 현감의 죄를 물어….”(<숙종실록>)

또 5년 뒤인 1697년(숙종 23년)에는 서울 출신들이 승려 세력 및 장길산 무리와 결탁해서 서울로 쳐들어와 정씨성을 가진 사람을 조선의 임금으로 세우려는 음모가 적발됐다는 고변이 있었다. 물론 이 사건은 무고로 밝혀져 무고한 자들만 처벌받았지만. 숙종은 이때도 “장길산을 빨리 붙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큰 도둑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가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잡지 못했다. 빨리 잡아라.”(<숙종실록>)   

이윤석 교수는 “어떻게 1618년에 죽은 허균이 70여 년 뒤의 인물인 장길산을 언급할 수 있었겠느냐”면서 “홍길동전은 적어도 숙종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했다. 이 교수는 특히 “작품 속에서 홍길동이 ‘옛날 사람 장길산 운운…’한 것으로 보아 <홍길동전>은 장길산이 알려진 이후 수십년이 지난 이후에 창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길산의 이야기는 훗날 누군가 슬쩍 삽입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윤석 교수는 “장길산 이야기는 거의 모든 홍길동전의 이본에 등장하는 내용”이라면서 “창작 당시부터 들어간 내용일 가능성이 짙다”고 말했다. 

1954년 2월10일자 경향신문 광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실상은 아무도 모르는 홍길동전’이라는 광고문구가 이채롭다. 이 광고에서 홍길동전의 작자를 ‘정비석’이라 했다. 

■선혜청과 선혜낭청 이야기

이윤석 교수는 또 한 부분을 지적한다. 

홍길동이 조선을 떠나기 전에 임금에게 벼 1000석을 빌려달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때 ‘선혜낭청’과 ‘선혜청’이라는 관리와 관청이 등장한다.

“임금이 길동의 일을 신기히 여겨 이튿날 선혜낭청에게 명령을 내려…벼 1000석을 실어…서강 사람과 선혜청에서 일하는 사람 등이 연고를 몰라….”

그런데 선혜청과 선혜낭청은 대동법 시행 후 대동미나 대동포의 출납을 맡아본 관청이었다.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로 바쳐야 했던 세금을 쌀로 통일해서 바치는 개혁세법이었다. 대동법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부터 시행됐다. 하지만 이윤석 교수는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숙종 때인 1709년(숙종 35년)이므로 선혜청과 선혜낭청이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한글소설은 1800년 무렵 시작된 장르

이윤석 교수는 ‘한글소설은 1800년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장르’라는 점을 강조했다. 허균이 살았던 1600년 무렵에는 나올 수 없는 장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있지 않은 허균이 그것도 한글로 소설을 창작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이 교수는 이어 “전해지는 30여종의 <홍길동전> 이본은 모두 19세기 중반 이후의 작품들”이라면서 “그 중에 어떤 것이 진짜 허균의 <홍길동전>인지를 가려내야 ‘<홍길동전>의 작자=허균’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문헌에만 기록돼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한글 <홍길동전>=허균작’이라는 통념이 철옹성처럼 굳어졌을까.

<홍길동전>의 작자를 허균이라 주장한 최초의 연구자는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조선문학 담당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1878~1967)다. 다카하시는 1927년 조선 중기문인 이식(1584~1647)의 <택당집>에 실린 ‘허균은 또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비겼다(筠又作洪吉同傳以擬水滸)’는 구절을 들어 <홍길동전>의 작자를 허균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다카하시의 경성제대 제자들을 중심으로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택당집>이 소개한 허균의 <홍길동전>이 한글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택당집>에서도 ‘한글 홍길동전’을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더라도 그것은 한문이었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이윤석 교수는 “무엇보다 허균의 <홍길동전>의 경우 실물이 전해지지 않는게 크나큰 맹점”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한글 <홍길동전>에는 작자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다.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듯  

그렇다면 지금까지 전해지는 한글 홍길동전의 작자는 누구일까. 이윤석 교수는 “후대의 한글 <홍길동전>은 허균이나 황일호의 한문 작품에서 차용한 것이 아니라 민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를 작가 나름대로 창작해낸 작품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론도 있을 것이다. ‘장길산’ 내용은 허균의 홍길동전을 토대로 후대 누군가가 차용했을 가능성도 있고, 또 대동법이 처음 실시된 1608년은 즉 허균의 생전 시절이며, 따라서 대동법을 다루던 선혜청과 선혜낭청 이야기도 허균의 홍길동전에 포함될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황일호의 <홍길동전>은 발굴되었지만 허균의 <홍길동전>은 아직 소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수십년간 굳어진 통념을 깨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학계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할 것 같다.


■홍길동전을 쓴 작자들의 기구한 운명

한가지 사족으로 달겠다. 홍길동전을 썼다는 황일호와 허균의 운명이 어찌 그리 비슷한지 모르겠다.

조선 중기 한문 4대가 중 한사람인 이식(1584~1647)의 <택당집>은 허균의 <홍길동전>을 소개하면서 능지처참을 당한 허균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중국에서 <수호전>을 쓴 사람의 후손은 3대가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었을 정도로 업보를 당했다. 그런데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반역죄로 사형당했으니 귀머거리나 벙어리보다 더 혹독한 업보를 치렀다 할 수 있다.”      

허균 뿐 아니라 황일호 역시 엉뚱하게도 조선출인의 청나라 통역관의 미움을 사 억울하게 처형당했으니 <홍길동전>의 저자 다운 비운을 겪은 셈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