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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127년 전 독립신문에 실린 ‘K-등산·K-치안’…서양인이 경험한 ‘북한산성 병사’ 미담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포인트가 여럿 있다. 그 중 ‘투톱’에 시쳇칼로 ‘K’자를 붙이자면 ‘K치안’과 ‘K등산’이라 할 수 있다. 지하철이나 카페 등에 두거나 흘린 물건이 몇시간이 지나도록 무사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외국인 관광객의 영상이 즐겨 상영된다. 
이름하여 ‘K치안’이다. 또 시내에서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 도심 속 산행을 즐기는 ‘K등산’은 어떤가. 
이 또한 외국인들이 절대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 된다. 왜냐. 외국인들은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하며 산다’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중 ‘K등산’의 성지로 부각된 ‘원톱 산’은 북한산(삼각산·해발 836.5m)이라 할 수 있다.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성곽(북한산성)까지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2시간 정도면 정상에 올라 서울과 한강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K치안’과 ‘K등반’의 전통이 127년 전 북한산에서 시작됐다. ‘독립신문’ 1899년 8월11일자 ‘착한 병정’란에 등장한다. 한 외국인이 당시의 핫플이었던 북한산 등반에 나선 이야기가 이 날짜 신문에 보도된다.

■127년 전 K치안·K등산의 대표 선수
이러한 ‘K치안’과 ‘K등반’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무려 127년 전에도 존재했다. 그것도 K등산의 핫플인 북한산에서….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독립신문’ 1899년 8월11일자는 ‘착한 병정(병사)’라는 소제목을 붙인 기사를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에 머무르고 있는 어느 외국인 부인이 북한산성에서 머물며 피서를 즐기다가 가마(轎軍)를 타고 돌아오는데….”
그런데 중간에 문제가 생겼다. “가방(큰 주머니) 속에 명품 시계와 바느질 도구, 많은 액수의 돈을 넣어 가지고 오다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길에서 여러 번 쉬노라고 가방을 어디다 놓고 왔는지 돌아와서야 깨달았다.”

독립신문 1899년 8월11일자. 북한산을 지키는 병사가 한 외국인 여인이 잃어버린 가방을 주워 뒤늦게 분실사실을 알아치리고 돌려준 사실을 보도한 기사. 가방 속에 놓아둔 거액의 현금과 명품 시계 등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 병사의 이름은 이헌진이었다.

그제서야 ‘아차!’한 외국인 부인은 일행 중 한 사람(‘대한 사람’으로 지칭)을 보내 돌아오던 길을 거슬러 가서 찾아보도록 했다. 외국인 여성의 부탁을 받은 ‘대한 사람’이 북한산성에서 3~4리 못미친 곳까지 돌아갔다. 그때 머리를 짧게 깎은 병정(병정) 한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병정은 무언가를 찾으며 다가오는 ‘대한 사람’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다. ‘대한 사람’이 잃어버린 물건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그 병정은 “내가 그 주머니(가방)를 주웠는데,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바위 틈에 넣어 두었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내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 바위 틈에 둔 물건을 찾았다. 이 때의 신문기사가 심금을 울린다. 
“주운 주머니 속에 넣은 물건이 하나도 흠축(欠縮·없어진 부분)이 없었다.”

미담기사가 보도되자 "이헌진이라는 병사의 심지를 보아하니 북한산성을 지키는 직분만 감당하기에 너무 아깝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안도의 한숨을 쉰 ‘대한 사람’은 병정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병정은 “나는 북한산성을 지키는 병정 이헌진”이라고 소개했다.  
신문은 “(소문이 퍼져) 이 병정의 심지(心志·마음에 품은 의지)를 보아하니 병정으로만 다니기엔 아깝다고 치하가 분분했다”고 전했다.   
127년 전 북한산에서 피서를 즐긴 외국인과, 그 외국인의 잃어버린 금품을 찾아준 ‘북한산성 병정 이헌진’이 누구인가. 
두사람이 ‘K치안’과 ‘K등산’의 원조 대표선수일 수 있다. 그러나 이헌진이 K치안의 원조이겠지만, 외국인 여인은 K등반의 원조는 아니다. 

외국인 가운데 최초로 등반한 것으로 기록된 이는 1884년 6월부터 2년6개월간 미국 공사관 무관을 지낸 조지 클레이튼 포크인 것 같다. 북한산 산영루의 풍경과 누각에 앉은 사람들을 담은 사진을 남겼다. 의료선교사이자 외교관인 호러스 앨런은 1884년 12월26일자 일기에서 “…포크 중위가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북한산성을 방문한 바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최초의 서양인 K등반가
쇄국정책을 펴던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것은 1876년(조일수호조약)이었다. 
이후 일본(1880)-미국(1883)-영국·독일(이상 1884)-러시아(1885)-프랑스(1888)-벨기에·이탈리아(이상 1901)가 서울에 상주 공사관을 설치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국인들에게 ‘도심 주변의 북한산’은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최초의 자료는 미국 공사관 무관(1884년 6월~1886년 12월)인 조지 클레이튼 포크(1856~1893)가 남긴 ‘북한산 등반 사진’일 것이다.
북한산 산영루의 풍경과 누각에 앉은 사람들을 담은 사진이 그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의료선교사이자 외교관인 호러스 앨런(1858~1932)은 포크를 가장 먼저 북한산을 탐방한 첫번째 외국인으로 서술한 바 있다. 
“…일찍이 포크 중위가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북한산성을 방문한 바 있다…북한산성은 병력 200명으로 1만명의 적군을 막아낼 수 있는 요새다. 조선국왕은 바로 이곳으로 피신했다.”(앨런의 일기 1884년12월26일자)
그러니 ‘K등산’을 경험한 첫번째 외국인은 주한 미공사관 무관 신분이었던 포크 중위라 할 수 있다. 정확히 142년 전에….

주한미공사관 서기관과 대리공사를 지낸 샤를 샤이에 롱이 ‘프랭크 레슬리스 포퓰러 맨슬리’ 1889년 1월호에 무려 5쪽의 북한산 등산기를 전한다. 이 등반기에는 북한산과 관련된 4장의 삽화가 실려 있다. 외국인의 최초 북한산 자필 등반기인 것 같다.

■최초의 자필 ‘북한산 등반기’
이후 주한미공사관 서기관과 대리공사를 지낸 샤를 샤이에 롱(1842~1947)이 잡지 ‘프랭크 레슬리스 포퓰러 맨슬리(Frank Leslie’s Popular Monthly)’ 1889년 1월호에 아주 흥미로운 북한산 등산기를 전한다. “어느 날 대한제국 외아문 독판(외교통상부 장관) 조병식(1832~1907)의 특별 허가로 북한산을 탐방할 기회를 갖게 됐으며, 친구를 초대할 수 있는 특권도 얻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북한산은 어떤 유럽인도 볼 수 없었다. 실제로 북한산이라는 이름에는 늘 의도된 신비감이 감돌았다. 5월11일 영국인 친구 S와 함께 음식과 하인들을 넉넉히 준비하여…미뤄왔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우리는 북한산을 보고 우연히 발견한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

롱은 “대한제국 외아문 독판 조병식의 특별 허가로 친구와 함께 북한산을 탐방할 기회를 갖게 됐다”고 기록했다. 그는 “ 이상 걸을 수 없었고, 그저 기어오르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정상에 오른 롱은 “가장 최초로 북한산에 오른 백인일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롱 일행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산봉우리로 향했고…그 길은 정말 끔찍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고, 그저 기어오르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자갈을 긁으며 거칠고 가파른 산비탈을 묵묵히 올라갔다. 말을 할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움직이는 데 모든 힘을 쏟아야 했다. 마침내 산비탈의 샘에서 떨어지는 시냇물을 만났다…얼마나 시원하고 깨끗했던가! 신이시여, 이 싱그러운 즙이여!” 
롱은 등반기의 제목을 ‘북한(산), 국왕의 성채(Bok han-The King’s citadel)’이라 했다. 글에는 북한산 전경, 중흥사 대웅전, 북한산성 남문과 서문 등 4장의 삽화를 곁들였다. 이것이 K등산을 경험한 외국인의 첫번째 ‘생생 등반기’일 것 같다.   

호러스 앨런은 “북한산에는 국왕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고, 도성은 물론이고 서해로 뻗어가는 한강까지 조망할 수 있다고 전한다. 1894년 관립 프랑스어 학교 교장을 지낸 에밀 마르텔은 “경성에서 서양인의 피크닉이라 하면 대개 북한산이 통념으로 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서양인의 최애 피크닉 장소
이후 외국인의 북한산 K등산이 이어진다. 
1892년 4월~1894년 3월 사이 주한 프랑스 공사관 총영사를 이폴리트 프랑뎅(1852~1924)은 북한산을 등반한 뒤 관련 사진을 남겼다. 
사진은 북한산 전경 및 근경, 산영루, 훈련도감 유영, 중흥사 전경, 대서문, 중흥사 대웅전 등을 담고 있다. 
이때 프랑뎅이 찍은 사진들은 후대 외국인들의 관련 기행문 및 서적에도 부단히 인용된다. 
앞서 원조 K등반가(조지 포크)를 소개한 바 있는 호러스 앨런의 등반기 또한 눈길을 끈다. 

궁내부 시의를 지낸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와 이탈리아 총영사를 역임한 카를로 로세티 역시 북한산을 탐방한 사진을 찍었다. 1898년부터 6년간 주한미공사관 서기관-궁내부 찬의관-외부 고문관 등을 거친 윌리엄 샌즈는 “한국 땅을 벗어나 휴일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시의 옛 궁궐로 소풍을 가거나 산마루에 있는 북한산성으로 탐험을 즐긴다. 아름다운 곳이 헤아릴 수 없고, 모든 계절이 다 즐길 만 했다.”고 했다.

“서울 근교에는 안쪽보다 외국인들에게 더욱 흥미를 줄만한 공간이 있다. 도시의 북쪽에 삐죽빼쭉하거나 반구형의 암석으로 된 바위투성이 봉우리들로 구성된 ‘국왕의 산성’(북한산성)을 언급하고자 한다.”(<더 코리안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1895년 6월호)>)
앨런은 “높은 지맥의 정상 부근에 커다란 동굴에는 수정 같은 샛물이 솟아나고…한폭의 비단 뭉치를 제멋대로 던져놓은 듯한 한강은 드문드문 솟아있는 산 사이를 지나 바다까지 뻗어간다…”고 전한다. 1894년 관립 법어(프랑스어)학교 교장을 지낸 에밀 마르텔(1874~1949)의 회고를 보라.

영문잡지인 <더 코리안리뷰> 1903년 10월호에는 국내 인물인 오승근이이 ‘북한산성’이라는 제목의 7쪽 자리 글에서 북한산을 소개하면서 ‘북한산 8경’을 꼽았다.

“경성에서 서양인의 피크닉이라 하면 대개 북한산이 통념으로 되어 있었다…4시간이면 등산이 가능한데 지게꾼들을 데려와서 말과 대나무 가마로 간다.”(<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 1934)
마르텔은 “등산 때는 야단스럽게 부엌의 여러 도구를 비롯해서 스토브까지 가져갔다”고 덧붙였다. 등산에 취사도구까지 들고갔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1898~1904) 주한미공사관 서기관-궁내부 찬의관-외부 고문관 등을 거친 윌리엄 샌즈(1874~1946)는 한술 더 뜬다.
“한국 땅을 벗어나 휴일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시의 옛 궁궐로 소풍을 가거나 산마루에 있는 북한산성으로 탐험을 즐긴다. 아름다운 곳이 헤아릴 수 없고, 모든 계절이 다 즐길 만 했다.”(<비외교적 비망록>·1930)

1892년 4월~1894년 3월 주한 프랑스 공사관 총영사를 이폴리트 프랑뎅은 북한산을 등반한 뒤 관련 사진을 남겼다. 1906년 9월29~10월3일 서울에 머물렀던 산더는 북한산 탐빙길에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겼다. 1911년 방문한 독일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1870~1956) 역시 여러 장의 북한산 사진을 찍었다.

■외국인의 최애코스-북한산8경
이 무렵 국내 인사가 외국인을 위해 영문으로 북한산을 소개한 글도 있다. 영문잡지인 <더 코리안리뷰> 1903년 10월호에 오승근이라는 인물이 ‘북한산성’이라는 제목의 7쪽 자리 장문에서 북한산의 역사와 북한산성의 건립 내력, 사찰의 현황 및 연혁 등을 열거했다. 그 중 오승근이 꼽은 ‘북한산 8경’이 이채롭다. ①노적낙하(露積落霞)-노적산의 구름폭포 ②봉성문종(奉聖開鐘)-봉성사(실제로는 중흥사)의 저녁 종소리 ③동정월색(東亭月色)-동장대에 비치는 달빛 ④나한귀운(羅漢歸雲)-구름에 둘러싸인 나한, ⑤상운폭포(祥雲瀑布)-상운사의 무지개빛 폭포, ⑥원효낙조(元曉落鳥)-원효사의 일몰, ⑦청하귀승(靑霞歸僧)-청하산을 도는 승려, ⑧산영간수(山映看水)-굉음 내며 흐르는 산영정의 물 구경 등이다.

1910년 5월27일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서울에 부임한 독일 대사가 총영사와 일본인 경무국장, 헌병대장, 통역 등과 함께 북한산성을 구경했다”고 전했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8월22일자는 “서울의 동부 연동교회 목사인 제임스 게일(1863~1937)이 피서차 북한산성을 찾았다”고 소개했다.

이와같은 현지인(오승근)의 북한산 소개글은 한국을 방문했거나 거주한 외국인들의 등반 안내서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1901년 11월 이후 대한제국 궁내부 시의를 지낸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1869~1911)는 북한산 승가사-문수사-부왕사-중흥사-백운대를 탐방한 일기를 남겼다.(1902년 6월8일) 분쉬는 1904년 3월27일에도 한번 더 북한산에 올랐다. 그 무렵 주한 이탈리아 영사(1902~1903)를 지낸 카를로 로세티(1876~1948)의 <코레아 에 코레아니>에 북한산 노적봉 아래 중흥사를 촬영한 사진이 담겨있다. 일본 주재 독일대사관 무관인 헤르만 산더 대위(1868~1945)야말로 많은 북한 사진을 남긴 외국인이다.

1912년 1월8일 순종은 조선총독부의 요청에 따라 국왕의 임시 궁궐로 조성된 북한산성 행궁을 영국 성공회에 대여해줬다. 영국 성공회가 남긴 사진 자료에 ‘유니온 잭(영국 국기)를 행궁 내전에 걸고 대청마루에 앉아 독서를 즐기는 성공회 인사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1906년 9월29~10월3일 5일간 서울에 머물렀던 산더는 북한산성 중성문·행궁·경리청·산영루 후면 비석군 등의 사진을 남겼다. 또한 1911·1925년 두차례 방문한 독일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1870~1956)가 북한산에 올라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1910년 5월27일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서울에 부임한 독일 대사가 총영사와 일본인 경무국장, 헌병대장, 통역 등과 함께 북한산성을 구경했다”고 전했다. 서울에 부임하는 외교관의 첫번째 유람지가 북한산성이었던 셈이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8월22일자는 “서울의 동부 연동교회 목사인 제임스 게일(1863~1937)이 피서차 북한산성을 찾았다”고 했다.

1711년 조선조 숙종 임금은 "내란과 와환의 위기에 닥칠 때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피신할 수 없다"면서 "도성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백성과 함께 북한산성에 들어가 지킬 것”이라고 북한산성 산성 축조를 강행했다.

■성공회의 여름별장
기막힌 일도 생겼다. 국권을 잃은 뒤인 1912년 1월8일이었다. 국왕의 임시 궁궐로 조성된 북한산성 행궁을 영국 성공회에 대여해준 것이다. 
그 날짜 <순종실록>은 “조선총독부의 전청(轉請·간접적인 요청)으로 북한산성 사고(史庫) 건물을 10년간 영국 교회에 빌려주는 것을 허가했다”고 기록했다. 과연 성공회가 남긴 사진 자료에 ‘유니온 잭(영국 국기)를 행궁 내전에 걸고 대청마루에 앉아 독서를 즐기는 성공회 인사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진 뿐이 아니다. 대한상공회 마크 트롤로프 주교(1862~1935)가 1915년 ‘모닝캄(MORNING CALM)’에 기고한 글을 보라.
“…몇 년 전 서울에서 10마일(약 16km)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 언덕 위에 버려지고 반 폐허가 된 행궁을 더위를 피할 목적으로 리스(lease)한 것을 기억…우리는 월세 내는 것을 대신해서 행궁을 수리 보존하기로…매년 여름 더위를 피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
트롤로프 주교는 이어 “행궁은 서울보다 1500피트(457m) 높은 곳에 있고…북한산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산성은 1711년 6개월 간의 공사 끝에 완성한 조선의 ‘철옹성’이라 할 수 있다. 원효봉-영취봉-백운대-만경대-용암봉-문수봉-나한봉-중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굽이굽이 연결, 총 둘레 11.6㎞의 산성을 완성했다. 단 6개월만(1711년 4~10월)에 해치운 공사였다.지형(평지와 산지, 봉우리)에 맞게 성벽을 효율적으로 조성한 대역사였다. 낮은 계곡부는 온축으로, 험준한 지점에서는 성벽 없이 여장만 조성한 곳도 있다.

■“20만 백성과 항전하겠다”
곱씹어보면 뼈아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북한산성이 어떤 곳인가. 1711년 6개월 간의 공사 끝에 완성한 조선의 ‘철옹성’이라 할 수 있다.
왜 하필 북한산에 성을 쌓을 생각을 했을까. 전통적인 피란처인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어쩌고…. 이유가 있었다. 17세기말~18세기초 서울의 인구는 급증했다. 1648년(인조 26) 10만 명 남짓이던 서울의 인구는 69년 후인 1717년(숙종 43) 19만명으로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난리가 일어나고 임금이 (선조나 인조처럼) 도성을 비운다면 20만명 가까운 서울 백성들은 어찌 되겠는가.

숙종은 축조가 마무리된 북한산성 행차에 나서(1712년 4월10일) 동장대에 올라 “도성 지척에 금성탕지가 있으니 어찌 백성 수호하는 도성 버리랴.”고 읊었다.

이에 숙종은 “도성민이 나의 적자(赤子·백성)인데 난리를 맞았다고 어찌 버리고 가겠느냐”(1710년 10월 20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도성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백성들과 함께 북한산성에 들어가 지킬 것(與民入守)”이라 선포했다. 1711년 2월9일 시작된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백운대~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굽이굽이 연결, 총 둘레 11.6㎞의 산성을 완성했다. 단 6개월만(1711년 4~10월)에 해치운 공사였다. 평지와 산지, 봉우리에 따라 온축, 반축, 반반축 등으로 쌓았다. 낮은 계곡부는 온축으로, 험준한 지점에서는 성벽 없이 여장만 조성한 곳도 있다. 산성의 전체 면적은 여의도의 2배인 5.2㎢ 규모에 달한다. 삼군문(수도방위사령부) 병사들이 구간별로 사역했고, 승군들도 도왔다. 축성 장인이 총출동했고, 도성 주민이 거들었다. 

매일신보 1914년 11월4일자는 “데라우치가 일왕의 생일(천장절)을 맞아 북한산 동장대에 올랐다”고 했다.

공사가 마무리되자 숙종은 막 축조가 마무리된 북한산성 행차에 나섰다.(1712년 4월10일) 숙종은 어가를 타고, 혹은 내관들의 등에 업혀 동장대(산성 지휘소)에 오른 뒤 감탄사를 연발하며 시 한수를 뽑아냈다.
“…무수한 봉우리 깎아지른듯 구름에 접했네. 도적과 외적이 다가올 수 없고, 원숭이라도 기어오를 수 있을까…도성 지척에 금성탕지(철옹성) 있으니 내 어찌 우리 백성 수호하는 도성 버리랴.(何棄吾民守漢州)”(숙종 어제시 ‘북한산성 열성어제’)
이후 북한산성의 기능은 다양해졌다. 유사시 국왕의 임시 거처로 조성된 행궁에는 왕실 족보와 어제·어보·어책·의궤 등을 보관하는 보각(譜閣) 및 사고(史庫)가 설치됐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15일자는 “북한산성에 봉안했던 어첩과 어보, 어책 등을 해마다 봄·가을마다 포쇄(말림)했다”고 전했다. 

데라우치 일행 중 하나인 다치바나 고이치로(立花小一郞) 총독부 경무총장이 생일을 맞은 일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시를 읊었다.

■북한산에서 ‘천황을 위해!’를 외친 조선총독
그러나 국권이 침탈된 1910년 이후 어찌 되었을까. 앞서 언급했듯 조선 왕조의 피란궁궐로 조성된 북한산성 행궁이 성공회에 임대되어 외국인들의 여름 별장으로 활용된 것이다. 그것도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그 무렵 북한산 등반자료를 보면 꼴보기 싫은 인물이 등장한다.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조선총독(재임 1910~1916)이다.
매일신보 1914년 11월4일자를 보라. “데라우치 총독이 10월31일 일왕(요시히토·嘉仁·1912~1926)의 생일(천장절)을 맞아 마차 2대에 분승하여 북한산 동장대에 올랐다”고 했다. 북한산의 가을 풍취에 흠뻑 빠진 데라우치 일행 중 하나인 다치바나 고이치로(立花小一郞) 총독부 경무총장이 기막힌 시 한수를 읊었다. 

최근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포함한 ‘한양의 수도성곽’이 조선시대 방어체계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중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밤새 내린 비가 그치자 먼지 한 톨도 남지 않았다. 가을은 장엄한 초록빛 풍경이 펼쳐지는 계절이다. 천황(일왕)의 은총은 바다처럼 깊고 한계가 없다. 동장대에서 장수를 기원하는 잔을 든다.”
북한산에 올라 일왕의 은총을 운운하며 장수를 기원하는 잔을 든다고 했으니 참으로 복장 터질 노릇이다.  
어떠한가. K등산의 열풍과 K치안의 찬사, 그 전통이 이렇게 뿌리깊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또 하나 언급할 게 있다. 북한산성을 한양도성-탕춘대성과 함께 ‘조선시대 방어체계’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등재여부는 내년(2027)에 결정되는데, 매우 낙관적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산은 더욱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될 것이고, K등산의 성지로 입지를 굳히게 될 것 같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이순우, ‘근대 시기 북한산성 관련 사진의 변천과 사료적 가치’, <북한산성 사료총서> 제1권(고지도·고사진 모음집),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장상훈, ‘조선후기 지도 속의 북한산성’, <북한산성 사료총서> 제1권(고지도·고사진 모음집),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고양시·경기문화재연구원, <사적 162호 북한산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등재신청을 위한 학술조사연구총서>(학술총서 2책),

기호철, ‘다시 읽는 북한지(해제·교감·역주)’, <북한산성 사료총서> 제2권, 경기도·경기문화재단, 2018

허미형, ‘북한산성 행궁 정비 및 복원 계획안’,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경기문화재단, 2011

박현욱, ‘북한산성의 군사경관’, <북한산성의 가치 재조명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경기문화재단, 2017

조윤민, <성(城)과 왕국>, 경기문화재단 펴냄, 주류성, 2013

이근호, <18세기 전반의 수도방위론>, ‘군사(軍史)’, 국방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