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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덕후(벽·癖) 아닌 자와 사귀지 마라”…‘기괴’ ‘집착’ 역대급 마니아의 총집결

“벽(癖·덕후 혹은 마니아)이 없으면 버림받은 사람이다…”
지난 1월 초 중국을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이 한·중 벤처 스타트업 서밋에 참석하여 조선의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1750~1805)를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 선생이 청나라 유수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조선 내에서 혁신을 강조하고 주장했다”고 언급했다. 박제가는 개방적 사유와 국제적 시각을 갖춘 대표 학자라 할 수 있다. 4번이나 북경을 방문해서 110명이 넘는 인물들과 교유했다. 한족 뿐 아니라 만주족, 베트남 지식인, 위구르 왕자 등과도 소통했다. 그렇게 쌓은 인맥을 통해 국제적 시각을 갖추고 얻은 정보를 역작인 <북학의>라는 책에 담았다. 

북학파 실학자 초정 ‘박제가’는 평소 “벽(癖)이 없으면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박제가는 “‘세상을 바꾸는 이는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박제가의 덕후 찬양론
그런데 이 대목에서 ‘박제가’의 색다른 어록 하나를 떠올렸다. 맨 앞에 인용한 ‘벽 찬양론’이다.(박제가의 ‘백화보 서’)  
“‘벽(癖)’은 편벽된 병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벽(癖)’이 무엇인가. 한자 ‘벽(癖)’자의 부수는 환자가 땀을 흘리고 있는 형상이다. 갑골문자의 ‘질(疾)’은 ‘침상에 누운 환자가 땀을 흘리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땀 흘리는 병자의 모습을 담은 ‘벽(癖)’은 박제가의 언급처럼 ‘질병’, 혹은 ‘병폐’로 치부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박제가는 “벽(癖)이 있는 사람이라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박제가가 언급한 ‘벽(癖)’은 ‘괴짜’로 풀이 할 수 있다. 요즘의 화법으로 ‘덕후’ 혹은 ‘마니아’라 할 수 있겠다. 
박제가는 당대 ‘꽃에 미쳐 꽃그림에 몰두한’, 이른바 ‘꽃 그림 덕후’였던 인물(김 군)을 소개하면서 ‘평범한 인간들’을 조롱하고 있다.
“아아! 벌벌 떨고 게으름이나 피우면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치는 위인들은 편벽된 병이 없음을 뻐기고 있다.”

박제가가 언급한 '벽'(덕후)의 소유자는 김군(중인화가 김덕형 추정)이다. 박제가는 “꽃과 그림에 빠져있는 김군을 두고 당대 사람들이 조롱하고 손가락질 했지만 김 군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고, 기예는 천고(千古)의 사람들과 견줄 수 있다.”고 했다.

■꽃그림 덕후
그런데 박제가가 ‘꽃그림 덕후’로 언급한 ‘김 군’은 어떤 인물일까. ‘김 군’은 중인 출신으로 시·서·화에 능했던 김덕형(1750?~?)으로 추정된다. 
박제가는 그가 그린 여러가지(100가지) 꽃을 그린 화첩(‘백화보·百花譜’)에 서문을 써준 것이다.  
“김 군은 화원으로 달려가 눈으로 꽃을 주시하며 하루 종일 눈을 깜짝이지 않는다. 그 아래서 자리를 깔고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손님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백화보 서’)

조선의 풍운아 허균(1569~1618)도 “세상에 그 말이 맛없고 면목이 가증스러운 사람은 다 벽(癖)이 없는 무리”라고 외쳤다.

당대 사람들은 ‘김 군(김덕형으로 추정)’을 두고 조롱하고 손가락질 했다.
“김 군을 보고 미친놈 혹은 멍청한 놈이라며 비웃고 조롱하며 욕하지만…김 군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고, 기예는 천고(千古)의 사람들과 견줄 수 있다. 김 군이 그린 ‘온갖 종류의 꽃(百種之花)’은 역사에 길이 남을 공적…향기의 나라에서 배향하는 위인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김군이야말로 꽃의 왕국에서는 영세토록 나라의 제사를 받을 만고의 위인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극찬이다,   

고려의 천재 문인 이규보는 ‘시벽(詩癖)’을 자처했다. 이규보는 “매일 몇 편의 시를 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이 다시는 몸에 남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규보는 이 고질병은 죽지 않으면 낫겠지만 시벽은 멈출래야 멈출 수 없다”고 했다.

‘김 군’ 혹은 ‘김덕형’은 ‘꽃에 미친 꽃덕후 혹은 꽃마니아’라 할 수 있고, 고상한 표현으로는 ‘꽃의 화가’로 일컬어질만 하다.
그런데 박제가 뿐이 아니다. 그때 말로 ‘벽’, 요즘 말로 ‘덕후’ 혹은 ‘마니아’는 조선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멋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 명말청초 소품문의 대가인 장대(1597~1676)는 “벽이 없으면 깊은 정도 없다”면서 “벽이 없는 자와는 사귀지도 마라”고 했다. 
또 풍운아 허균(1569~1618)도 “세상에 그 말이 맛없고 면목이 가증스러운 사람은 다 벽(癖)이 없는 무리”(<성소부부고> ‘한정록’)라고 외쳤다. 

조선 전기 문인 성간은 궁궐 도서관 격인 장서각 도서를 죄다 설볍했다. 결국 지나친 독서 때문에 30세에 요절했다. 세조의 조카인 이숙은 “내가 죽으면 거문고·술과 함께 <자치통감> 한 질을 반드시 묻어달라”고 할 정도로 <자치통감>을 사랑했다.

■'시벽'은 고질병
그런만큼 ‘벽’ 혹은 ‘덕후’. ‘마니아’를 자처하는 인물이 많았다. 그중 고려의 천재 문인 이규보(1168~1241)는 ‘시벽(詩癖)’을 자처했다.
“나이 칠십 넘어~이제 문장을 버릴 만도 하건만…떼어버릴 수 없는 시마가 있어(無奈有魔者)~날 이 지경에 만들었네.”(<동국이상국후집>)
그는 이어 “매일같이 심장과 간을 깎아서 몇 편의 시를 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이 다시는 몸에 남아있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살거나 죽거나 오직 시를 짓는 내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조선 중기 문신인 이식은 “농사는 어렵고 재미있는 것은 독서 뿐인데, 어릴적 부터 몸에 밴 ‘이놈의 문자벽(文字癖)을 늦은 나이 되도록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읊었다. 다산 정약용도 “불우한 늙은이(다산)는 서책만 치우치게 좋아한다”고 했다.

이규보는 다른 시에서 “어쩌다가 딱한 이 늙은이가는 ‘시벽과 주벽’(詩酒癖)을 함께 가졌다”고 토로한 뒤 “죽은 뒤에야 이 병도 없어질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시벽을 꼭 나무랄 필요가 없다”고 위안했다. 시를 둘러싼 이규보의 집착은 놀라웠다. 
남이 보내온 시 한 편에 화답할 때마다 10편은 기본이고, 많을 때는 30여 편까지 보내야 직성이 풀렸다. 
그는 “지금의 고질병은 죽지만 않으면 낫겠지만 시벽은 멈출래야 멈출 수 없다”(<동국이상국후후집>)고 했다. 시벽(시병)은 죽을 때까지 못말리는 병이라는 것이다. 이규보는 스스로의 시벽과 주벽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토정 이지함은 당시 병중에도 책을 읽고 있던 성혼에게 “비록 청(淸·책)과 탁(濁·여색)의 다름이 있지만 생명을 해치고 본성을 손상시키는 점에서는 책과 여색이 똑같다.”(<우계집>)고 강조했다.

■책에 미쳐 요절
조선의 선비 문인들도 그랬다. ‘책벌레’이자 시를 짓지 않고는 못사는 ‘천생 시인’을 자처했거나, 그렇게 인정받은 인물이 많았다.
그중 ‘서음(書淫·책에 미친 사람)’의 대표주자로는 책을 읽다가 요절한 성간(1427∼1456)을 꼽을 수 있다.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 등에는 성간의 일화가 남아있다. 즉 “성간은 유교경전은 물론 제자백가와 천문·지리·의약·역학·도교 경전·불경·수학·역어 등을 두루 섭렵했다”면서 “궁궐 내 장서각에 소장된 책의 위치나 차례, 내용 등을 꿰뚫었다”고 전했다. 
서거정은 “성간이 장서각에 파묻혀 책을 밤낮으로 열람하니 동료들이 ‘서음’, 혹은 ‘전벽(傳癖)’이라 놀렸다.”고 전했다. 그런데 성간은 평소 “난 서른살만 살면 족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과연 지나친 독서 때문에 과로하여 몸이 여위고 파리하게 되어 30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실학자인 이덕무는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癡)’, 즉 ‘책만 보는 바보’라 했다. '책만 읽는 바보'라고 했지만 은근슬쩍 자신의 독서편력을 자랑한 것이다.

■책과 여색은 동급?
앞서 덕후(마니아)가 아니면 ‘맛없고 가증스런 사람’으로 폄훼했던 허균은 어떠한가. 허균은 자신의 책읽는 버릇을 이렇게 자랑했다. 
“평생 서음(書淫)으로 이름났으니 오거서(五車·많은 책)는 언제나 따라다녀…상자 열어 서가에 가득 꽂고 읽으며 기뻐한다.”(<성소부부고>) 
그는 “보지 못했던 책을 읽을 때에는 마치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볼 때에는 마치 옛친구를 만난 것 같다”고? 했다.
“나의 천성은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즐거워하나 언행(言行)에 허물이 있을까 저어되니, 이 책들이나 의지해 문을 걸고 늙으리라.”(<한정록>) 

추사 김정희는 “나는 원래 금석에 벽(癖)이 있다”고 자랑했다. ‘금석 덕후’를 자랑한 추사는 1816년 북한산 비봉에 서있던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냈다.

이밖에도 세조의 조카인 강양군 이숙(1453~1499년)은 “내가 죽으면 거문고·술과 함께 <자치통감> 한 질을 반드시 묻어달라”고 할 정도로 <자치통감>을 사랑했다. 조선중기의 문신인 하응림(1536∼1567년)도 소동파의 시를 사랑한 나머지 손수 한 질을 베껴 순장토록 했다.
조선 인조대의 문신 이식(1584~1647)은 시골생활 도중 ‘그 놈의 문자벽’을 은근 자랑하는 시를 짓는다. 
“농사로 먹고 사는 일 어쩌면 그리 졸렬한지 재미 느끼며 잘하는 건 그저 독서뿐 아이 때부터 몸에 밴 이놈의 문자벽(文字癖)을 늦은 나이 되도록 아직도 잊지 못하다니….”(<택당집>)

명종과 중종 연간의 인물인 윤원형과 이상은 ‘지벽(地癖)’ 혹은 '전지벽(田地癖)'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를테면 부동산투기꾼이다. 권세가 윤원형은 "호화저택을 10여채나 짓고 해변의 간척지와 내륙의 기름진 전답을 모두 사사로이 점유했다”고 탄핵을 당했다. 아산의 토호 이상은 빼앗을 토지의 주인에게 여종을 붙여 정을 통하게 한 뒤 그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여 토지문서를 빼앗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도 “불우한 늙은이(다산)는 서책만 치우치게 좋아한다”고 했다.(<다산시문집> 제6권·송파수작)  또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1527~1578)은 ‘책과 여색’을 비교하는 어록으로 유명하다. 
즉 이지함은 당시 병중에도 책을 읽고 있던 성혼(1535~1598)을 걱정하는 멘트를 날린다. 
“비록 청(淸·책)과 탁(濁·여색)의 다름이 있다. 그러나 생명을 해치고 본성을 손상시키는 점에서는 책과 여색이 똑같다.”(<우계집>)
이지함은 그러면서 “공(성혼)에게는 모든 성현의 글이 나쁜 물건”이라고 까지 했다.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은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癡)’, 즉 ‘책만 보는 바보’라 했다. ‘바보’를 자처했지만 ‘취미=독서’임을 은근 슬쩍 자랑한 것 같다. 

조선중기 문인 이귀는 걸핏하면 상소를 올리는 것으로 유명해서 “이귀는 상소 잘하는 벽, 즉 소벽이 있다”는 평을 얻었다.

■추사의 금석벽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금석벽(金石癖)’을 대놓고 자랑했다. 
“나는 본디 금석에 벽이 깊은데(我本癖金石) 그대는 시 노래를 절로 잘했네.(君自善歌詩)~”(<완당전집> 제9집 ‘시’)
자랑할만했다. 추사는 최고의 금석학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북한산 승가사 곁의 비봉에 서있던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낸다.(1816) 
그 때의 감격을 추사는 이렇게 전한다.(<완당전집> 제1권 ‘진흥왕의 두 비석을 상고하다(眞興二碑攷)’에서) 
“이끼 가득찬 글자의 획을 따라 여러 차례 탁본한 결과~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자가 분명했다…금석학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중국에서 ‘별별 덕후’의 끝판왕은 남송 시대의 인물인 유옹이었다. 그의 벽은 ‘부스럼딱지먹기(瘡痂癖)’, 즉 ‘창가벽’이었다. 심지어는 화상을 당한 지인의 상처 부위에서 떨어지지도 않은 부스럼딱지까지 떼어 먹었다. 지인은 훗날 “유옹이 나를 먹어치우는 바람에 온몸에 피가 흐른다”고 농담했다.

■땅을 사랑한 부동산투기벽
그렇다면 ‘나쁜 벽’, ‘나쁜 덕후’, ‘나쁜 마니아’는 없었을까. 명종 시절 권력을 농단한 윤원형(1503~1565)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윤원형은 이른바 ‘지벽(地癖)’으로 악명을 떨쳤다. ‘지벽’은 문자 그대로 ‘땅 덕후’, ‘땅 마니아’라 할 수 있고, 시쳇말로 상습 부동산 투기꾼이라도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도가 지나쳤다. 1565년(명종 20) 대사헌 이탁(1509~1576) 등이 윤원형을 맹비난하는 상소를 올린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저택을 10여 채나 이어 짓고…. 해변의 간척지와 내륙의 기름진 전답을 모두 사사로이 점유하니~어찌 지벽(地癖)이 아니겠습니까.”(<명종실록> 1565년 8월14일)
윤원형의 축재와 사치생활을 비난하면서 특히 땅을 사 모으고, 저택을 마구잡이로 짓는 행태를 ‘지벽’이라 칭한 것이다.(<명종실록>) 

중국 진나라 시대 인물인 화교는 부자였지만 지극히 인색해서 돈만 아는 전벽(錢癖)이라 일컬어졌다. 하루는 친구들이 화교가 외출한 틈을 타 화교의 집 정원을 찾아가 자두나무가 따먹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일을 알아차린 화교는 아우들이 먹다 뱉어버린 자두씨를 일일이 계산해서 돈을 받아냈다.

‘부동산투기꾼’ 중 이상(1620~1690)이란 인물이 가장 악질적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천안 출신인 이상은 세력으로 억압해서 남의 비옥한 토지를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반드시 빼앗았다. 실록의 사관이 <숙종실록보궐정오>에 소개한 이상의 토지 사기 수법이 기가 막혔다. 
빼앗을 토지를 눈여겨 본 뒤 젊은 여종을 ‘꽃뱀’으로 등장시켜 범행대상인 집주인과 정을 통하게 했다. 그런 다음 남자 종을 동원, “사통한 사실을 폭로·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 겁에 질린 땅주인은 처벌을 피하려 문서를 넘겼다. 그런 식으로 빼앗은 토지가 한 둘이 아니었다. 
실록은 그런 이상을 두고 ‘전지벽(田地癖)을 가진 학자’로 폄훼했다.(<숙종실록 보궐정오> 1688년 5월11일)
지금의 용어인 ‘부동산투기’는 조선시대에는 땅을 사랑하는 ‘지벽’ 혹은 논밭을 사랑하는 ‘전지벽’이라 했던 것이다. 
상소를 일삼는 상소꾼은 ‘소벽(疏癖)’이라 일컬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조선중후기 문신인 이귀(1557~1633)라 할 수 있다.
“이귀는 벼슬이 없을 때부터 상소하기를 좋아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즉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상소했다. 사람들이 이를 두고 ‘상소 잘하는 벽이 있다’하여 비웃었다.(人嘗笑其有疏癖)”(<선조실록> 1598년 11월1일)

죽림칠현의 중심인물인 혜강은 ‘단벽(鍛癖)’으로 유명했다. 벼슬에 구애받지 않고 초야에서 쇠를 두들기는(鍛) 대장간을 운영하며 청렴하게 살았다. 당나라 때 은둔의 선비라는 육우는 ‘다벽(茶癖)’으로 유명했다. 차 상인들로부터 ‘다신(茶神)’의 칭호를 얻었다.

■부스럼딱지 먹기벽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는 별의별 ‘벽’이 많았다, 희한하고 엽기스럽기까지 했다. 
그중 ‘별별 덕후’ 중 끝판왕은 중국 남송 시대의 인물인 유옹(劉邕)이다. 그의 벽이 ‘부스럼딱지먹기(瘡痂癖)’였으니까…. 그런데 부스럼딱지의 맛이 복어와 비슷했단다. 하루는 화상을 당한 맹영휴를 찾아가 그의 상처 부위에서 떨어진 부스럼 딱지를 먹었다. 깜짝 놀란 맹영휴는 떨어지지도 않은 부스럼딱지까지 떼어 유옹에게 먹였다. 훗날 맹영휴는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유옹이 나를 먹어치우는 바람에 온몸에 피가 흐른다”고 농담했다. (<송서> ‘유목지전’)

북송의 서·화가인 미전은 ‘석벽(石癖)’, 즉 돌덕후였습니다. 얼마나 돌을 애호했던지 기묘한 돌인 기석(奇石)을 보면 그 돌에게 절을 올리고, ‘형(兄)’이라 불렀다.

■돈만 아는 전벽젹
역시 진나라 사람인 화교(?~292)는 국왕과 견줄 정도로 재산을 모았지만 쉼없이 돈을 세는 버릇이 있었다. 돈을 쓸 줄도 몰라 ‘전벽(錢癖)’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다른 말로 수전노(守錢奴)였던 것이다. 하루는 친구들이 화교가 외출한 틈을 타 화교의 집 정원을 찾아가 자두나무가 따먹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일을 알아차린 화교는 아우들이 먹다 뱉어버린 자두씨를 일일이 계산해서 돈을 받아냈다.(<세설신어> ‘검색’)
병적으로 돈만 밝히는 ‘전벽(錢癖)’ 중에 양나라 소굉(473~526)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양 무제의 동생이기도 한 소굉은 집안 창고 100여 칸에 무려 3억전(錢)을 모았다. 그렇게 축재한 돈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돈을 쌓아둔 창고문은 닫히자마자 잠기는 특수장치를 설치해놓기도 했다. 
소굉은 형인 무제의 의심을 사는 바람에 역모죄로 죽을 뻔했다. 집안에 엄청난 무기를 숨겨두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쌓아놓은 것이 무기가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일절 동생을 ‘터치’하지 않았다.  

원나라 화가인 예찬은 ‘결벽(潔癖)’으로 역사에 이름을 알렸다. 심지어 정원의 오동나무도 깨끗이 씻었다. '오동나무까지 깨끗이 씻는다'는 이른바 '고사세동도'는 시인 묵객들의 작품소재가 되었다.

■단벽·다벽·석벽·결벽·주벽·마벽… 
죽림칠현의 중심인물인 혜강(232~262)은 ‘단벽(鍛癖)’으로 유명했다. 벼슬에 구애받지 않고 초야에서 쇠를 두들기는(鍛) 대장간을 운영하며 청렴하게 살았다. 풀무질을 유독 좋아해서 벗인 향수와 마주앉아 풀무질 하며 방약무인했다고 한다. 또 당나라 때 은둔의 선비라는 육우(陸羽·733~804년)는 ‘다벽(茶癖)’으로 유명했으며, 차 상인들로부터 ‘다신(茶神)’의 칭호를 얻었다. 
북송의 서·화가인 미불(1051~1107)은 ‘석벽(石癖)’이었다. 얼마나 돌을 애호했던지 기석(奇石)을 보면 의관을 정제한 뒤 그 돌에 절을 올리고, ‘형(兄)’이라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원나라 화가인 예찬(1301~1374)은 ‘결벽(潔癖)’으로 역사에 이름을 알렸다. 극단적으로 먼지를 싫어한 예찬은 틈나는대로 손을 씻었는데, 물과 수건을 든 시녀가 늘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정원의 오동나무도 깨끗이 씻었다. 그의 ‘세동고사(洗桐故事)’는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소재가 되었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210~263)은 ‘가슴 속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술로 식혀야 한다’는 ‘주벽(酒癖)’으로, 서진의 왕제(생몰년 미상)는 지독한 말(馬)사랑으로 ‘마벽(馬癖)’으로 이름을 떨쳤다. 

진나라 두예는 황제 앞에서도 “나는 좌전벽(左傳癖)이 있다”고 밝혔다. <춘추좌전>에 빠진 두예는 <좌전집해>라는 주석서를 저술했다. 두예는 ‘좌전벽’은 글깨나 읽는다는 이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벽(덕후)’의 롤모델이 됐다.

■은근슬쩍 자랑한 ‘좌전벽’
자신의 건전한 벽(癖)을 은근 슬쩍 자랑하는 이들도 많았다. 예컨대 진나라 두예(222~284)는 <춘추좌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느 날 진 무제(265~290)가 “경은 무슨 버릇(癖)이 있냐”고 묻자 두예는 “저는 좌전벽(左傳癖)이 있습니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두예가 말하는 ‘좌전(左傳)’는 공자의 역사서 <춘추>를 두고 노나라 좌구명이 해설한 <춘추좌전>을 가리킨다. <춘추좌전>에 빠진 두예는 <좌전집해>라는 주석서를 저술했다. 두예는 ‘좌전벽’은 글깨나 읽는다는 이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벽(덕후)’의 롤모델이 됐다.

초정 박제가는 “아아! 벌벌 떨고 게으름이나 피우면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치는 위인들은 편벽된 병이 없음을 뻐기고 있다”고 조롱했다.

이제 정리해보자. ‘간서치(책만 읽는 바보)’임을 자처한 실학자 이덕무는 ‘벽’의 기운을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기이하고 빼어난 기상이 없으면 어떤 사물이든지 속됨에 빠진다. 산에 이 기운이 없으면 기와조각이요, 물에 이 기운이 없다면 썩은 오줌이다.”
벽이 없는 사람은 한마디로 ‘속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벽을 자랑하시려는가. 나는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니 <사기벽(史記癖)>을 자처하고 싶은데 어떨지…. lkh07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