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92회 대본입니다.)

최근 문화유산 분야에서 핫뉴스가 터졌는데요. 간송미술관이 자기들이 소장 중인 보물 불상 2건을 경매에 내놨다는 소식입니다. 국보 보물을 그렇게 시장에 내놔도 되는 건지도 궁금하고, 한 미술관이 소장한 유물을 내다 파는 것이 그렇게 뉴스가 되는 것지도 궁금합니다. 오늘은 보물을 매물로 내놓은 간송미술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봅니다.

일제 강점기에 전 재산을 털어 문화재를 수집한 간송 전형필 선생

<문=우선 궁금한 것은 국보 보물로 지정된 유물을 사고 팔 수도 있나요?>


답=당연히 있습니다. 매매할 수 없게 만들면 누가 국보·보물을 소유하며, 또 누가 지정하려고 애쓰겠습니까. 지금까지 매매된 지정문화재를 보면 보물인 월인석보와 경국대전 등 보물 문화재들이 개인에서 개인, 개인에서 국립박물관 등으로 팔렸습니다. 지정문화재의 경우는 보통 경매를 통해 공개적으로 매매됩니다. 그리고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소유자가 바뀌면 문화재청에 반드시 신고해야 합니다. 해외반출을 걱정하실텐데 국가지정문화재 및 일반동산문화재의 수출 등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금지됩니다.  


<문=이번에 간송미술관이 경매 출품한 보물 2건은 어떤건가요?>

답=보물 제284호 금동여래입상하고, 285호 금동보살입상입니다. 하나는 통일신라, 하나는 삼국시대 불상으로 알려져있는데요, 이중 한 건은 위작설이 제기된 바 있어서 검토해봐야 합니다.


<문=국보 보물도 신고만 하면 매매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간송미술관이 보물 2건을 파는거죠?>

답=지금 간송미술관에는 국보 12건, 보물 32건, 시도문화재 4건 등 모두 48건의 지정문화재가 있구요, 비지정문화재가 4000여 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전성우 간송미술관 이사장이 별세하면서 소장문화재 중 지정문화재는 가족에게, 나머지 비지정문화재는 간송미술관 재단에 출연했답니다. 뭐 보도를 보면 이 과정에서 상속세 부담 때문에 할 수 없이 소장 문화재 2건을 경매에 출품한다고 하는 거죠.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중 '연소답청'. 기생의 마부가 되겠다며 말을 몰아주는 양반과, 기생에게 담뱃불을 븥여주는 양반, 그리고 그 모습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마부 등을 그렸다. 양반사회를 향한 통쾌한 풍자그림이다.|간송미술관 소장

<문=문화재 상속세가 얼마나 되기에 소장 문화재를 팔아서 상속세를 낸다는 겁니까?>

답=그런데 이 부분에서 오해가 있는 데요. 제가 문화재청에 물어봤는데요. 기본적으로 국보 보물 시도지정문화재 48건은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12조 제2호에 따르면 모든 지정문화재는 비과세되는 상속재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만약 간송미술관 재단이 ‘성실한 공익법인’으로 국세청이 인정한 법인이라면 증여세 및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 또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48호 49호)에 나와 있습니다. 상속세 및 증여세를 낼 필요가 없는 법조항은 또 있습니다. 바로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박미법)인데요. 74조 ②항을 보면 ‘박미법’에 따라 등록된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경우 전시중이거나 보존중인 문화재에 대해서는 상속세가 유예됩니다. 이런 법들이 있기 때문에 간송측은 지정문화재든 비지정 문화재든 문화재에 관한 한 단 한푼의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간송미술관이 보물 2건을 시장에 내놓는 것은 단순히 문화재에 붙는 상속세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재단이 어려워지면 문화재 관리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니까 고육책으로 파는 거다 뭐 이렇게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유곽쟁웅’. 기방 앞에서 벌어진 난투극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기방을 관리하는 붉은 옷의 기부(기둥서방)은 하급공무원이다. 무예청 별감일 것이다. 기부는 분에 못이겨 씩씩대는 젊은 사내를 다른 선비와 함께 뜯어말리고 있다. 가운데 사내는 갓이 망가졌음에도 ‘어디 한번 더 덤벼보라는 듯’ 웃통을 벗어제친채 호기를 부린다. 오른쪽에 앉은 술에 취한 선비도  얻어맞은 듯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

<문=간송미술관 측의 입장이 있을텐데요?>

답=입장문을 내놨는데요. 뭐 문화재 상속세 때문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2013년 재단 설립 이후 대중전시와 문화사업 병행하면서 많인 비용이 발생했고, 이런 가운데 전성우 이사장의 별세로 추가 비용이 발생해서 불가피하게 소장한 불교 관련 문화재를 매각하고 지금까지 간송을 상징해온 서화와 도자, 전적 위주로 소장한다고 했습니다. 


<문=앞으로 불교 관련 유물들은 더 매각할 수도 있다는 얘기로 들리네요?>

답=그렇습니다.


<문=그런데 아까 국보 보물도 합법적으로 매매할 수 있다고 했는데요. 왜 유독 간송미술관이 유물을 경매에 내놨다니까 핫뉴스가 되는거죠?>

답=간송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 아시죠?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재산을 털어 문화유산을 수집해서 ‘문화재 독립운동가’로 칭송받는 분이죠. 그 분이 수집한 유명한 문화유산이 있죠?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책인데요. 일제 말까지 원본이 발견되지 않아서 뭐 화장실에 앉아 새 문자 창제를 고심하던 세종대왕이 화장실 창살 모양을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설까지 나왔죠.

간송이 구입한 문화유산중 백미는 역시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문=우리 어렸을 때도 화장실 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답=맞습니다. 그런데 전형필 선생이 경북 안동에서 이 해례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시 기와집 10채값인 1만원에 중간에서 매매를 알선한 거간에게 수고비라며 1000원을 더 얹어주고 사왔다잖아요. 귀한 문화유산은 귀한만큼 대접 받아야 한다면서 더 줬다는거죠, 이것이 무가지보라는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문=훈민정음 해례본 한 권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간송의 업적은 대단하죠?>

답=그렇습니다. 당시 경성제대 우리말글 연구 교수인 고노 로쿠로(河野六郞·1912~1998)가 해방 후(194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1940년 당시 경성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원본을 볼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거든요. 만약 해례본이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모골이 송연하죠.


<문=훈민정음 해례본 말고도 간송이 확보한 국보 보물이 엄청나죠?>

답=그렇습니다. 조선에서 알아주는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평생을 우리 문화유산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죠, 그중 당대 일본의 세계적인 고미술 무역상인 야마나카(山中) 상회와의 문화재 수집 전쟁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됩니다. 야마나카 상회는 뉴욕 보스턴, 시카고, 런던, 파리, 베이징에 지사를 둘만큼 세계적인 골동품 거상으로 급성장한 문화재 거래업체인데 그 회사와 4번에 걸쳐 수집전쟁을 겨룬 거죠?

처음엔 참기름병이 되어 나타난 조선백자. 18세기 작품이다. 원래 조선백자의 특징은 단순 절제미로 축약되지만 이 백자는 다양한 색채를 자랑한다. 돋을 무늬로 난초는 청화, 국화는 진사, 국화줄기와 잎은 철사, 벌과 나비는 철사 또는 진사로 칠했다.|간공미술관 소장



출처: https://leekihwan.khan.kr/entry/간송-전형필과-야마나카의-문화재-전쟁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문=뭐 그렇다면 골리앗과 다윗 싸움 아니었을까요?>

답=그러게요, 1933년 벌어진 1차전에서는 졌어요. 당시 야마나카 상회가 손애 넣고 있던 조선의 석조문화재를 걸고 일본 오사카에서 야외 경매를 실시했는데 간송이 이곳에서 통일신라 3층 석탑과 고려 3층 석탑. 석조사자탑, 조선 석등 등 4점에 총 1만2700원을 주고 낙찰받았는데요, 기와집 13채값과 맞먹었죠. 그런데 잘 사들인 것 같았은데 나중에 보니까 불국사에 서있던 통일신라시대 탑으로 알고 샀던 3층석탑이 알고보니 고려시대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그래서 이 탑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에 만족했죠.


<문=한마디로 바가지 쓴 거네요?>

답=이를테면 그렇죠. 그러나 1년 뒤에 벌어진 2차전에서는 통쾌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것이 바로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인 ‘혜원 전신첩(국보 135호)인데요.


<문=그 유명한 작품을 어떻게 손에 넣은거죠?>

답=1934년 간송은 일본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조선의 건축과 예술>이라는 책에 실린 흑백도판을 보면서 특히나 신윤복의 풍속화 2점을 뚫어지고 쳐다보고 있었는데요. 그 두 점이 나중에 ‘주유청강(舟遊淸江)’과 ‘상춘야흥(賞春野興)’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었습니다. ‘주유청강’은 양반들이 기생들과 한강에서 뱃놀이 하는 모습을 그렸고, ‘상춘야흥’은 화사한 봄날에 고관대작들이 기생들을 데리고 야외에 나와 봄놀이하는 모습을 그렸는데요. 이 그림 뿐 아니고 총 30여 점을 지금은 야마나카 상회가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혜원 신윤복의 '월야밀회'. 우리나라 최초의 키스신이라는 주장이 있다. 몰래 지켜보는 여인의 시선이 남다르다. 간송 전형필은 야마나카 상회가 갖고있던 혜원의 풍속도첩을 2만5000원에 구입했다. |간송미술관 소장


<문=야마나카 상회라면 너무 강한 상대 아니었나요?>

답=그러나 간송은 “혜원 그림 만큼은 확보하자”고 마음 먹고, 야마나카 상회에 연락했더니 30장에 5만원 달라고 했습니다. 5만원이면 기와집 10채 가격이 너무 비싸잖아요. 그래서 간송은 ‘인연이 없나보다’하고 포기했는데 야마나카 상회에서 ‘가격조정 좀 해보자‘고 연락이 왔다랍니다. 


<문=가격조정이라면 흥정하자는 말이잖아요?>

답=그렇습니다. 그래서 간송이 중개인하고 당장 오사카로 날아갔답니다. 간송 앞에는 당시 야마나카 상회의 대표인 야마나카 사다지로가 나타났는데요. 간송이 일단 작품을 확인했는데 참으로 대단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당시 양반사회를 풍자한 풍속도가 어디 있는가. 한량과 기녀들의 일탈한 사랑을 은밀하면서 애로틱하게 표현한 작품들이 보였다는 거죠. 남녀의 야밤 자유연애를 그린 ‘월하정인’과, 첫 키스신의 장면인 ‘월야밀회’ 등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단오풍정’은 조선 최초의 누드화로 꼽힙니다. 무엇보다 혜원의 풍속도에는 여성(기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요. 여인들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이토록 잘 표현한 작품이 없다는 평을 듣죠. 담 안에 갇혀있던 여성들을 울타리 밖으로 해방시켰다는 겁니다. 


<문=반면 작품 속 남자들은 좀 시시껄렁하죠?>

답=남성들을 ‘찌질이’로 표현했죠. 여자종의 손목을 잡아끄는 젊은 선비를 그린 ‘소년전홍’과, 성매매 현장을 표현한 ‘삼추가연’, 질탕한 스킨십을 그린 ‘청금상련’, 선비의 눈빛이 음흉한 ‘정변야화’ 등에 한심한 남자들로 나옵니다. 이 중에는 ‘당신의 마부가 되겠다’면서 기생이 탄 말을 모는 양반과, 기생의 담배불을 붙여주는 남자, 그리고 황당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진짜 마부를 그린 ‘연소답청’이 압권이죠. 또 기생집에서 술에 취해 난투극을 벌이는 ‘유곽쟁웅(기방난투)’도 당대 양반사회의 일면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대의 금기를 깬 것입니다.

세계적인 골동품 무역상이었던 야마나카 상회의 주인 야마나카 사다지로.

<문=간송이 혜원 신윤복 그림에 푹 빠졌네요?>

답=그렇습니다. 간송으로서는 절대 놓쳐서는 안될 작품들이어서 야마나카 대표하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죠. 야마나카가 “멀리서 왔으니 4만원까지는 내려드린다. 그 이하는 절대 안된다”고 했어요. 그러자 간송은 “2만원 이상은 절대 안된다”고 응수했답니다. 야마나카가 거절하자 간송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서 “인연이 없나 보네요. 섭섭하지만 제가 직접 그림을 보았으니 눈이 호강한 것으로 만족하렵니다”라 했대요. 


<문=엄청난 신경전인데요?>

답=그렇습니다. 간송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작별인사를 고하고 떠나려 하자 야마나카가 그러더랍니다. “(간송) 선생. 제가 장삿속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닌데…. 이 화첩은 선생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라고 다시 흥정이 시작되고 지루한 싸움 끝에 2만5000원 현금으로 낙착되었답니다. 68살의 일본 골동품상이 28살의 젊은 조선인 수장가의 승리를 인정한거죠. 기와집 25채값이죠.


<문=지금 기와집 25채면 얼마 정도 될까요?>

답=글쎄요, 2만5000원이면 당시 서울의 8칸짜리 고급 한옥집 25채 가격이라는데 한 채 10억원짜리 아파트라도 250억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액수라 할 수 있죠, 20억원짜리면 500억원. 그런데 간송하고 야마나카 상회하고는 또한번 경매 드라마를 벌이는데요. 바로 참기름병을 두고 전쟁을 벌이죠.


<문=참기름병이라구요?> 

답=그렇습니다. 경매전쟁은 1936년 벌어지는데 싸움이 시작은 1920년대 초로 올라갑니다. 즉 1920년대 초 어느 날 참기름을 팔던 행상이 서울 황금정(을지로 1가)에 사는 단골 일본인 여성을 찾아서 참기름을 팔았는데요. 기름을 담은 병을 유심히 본 일본인 여성이 “기름병도 참 예쁘네요. 저 병도 주세요.”하면서 1원을 더 얹어 5원에 참기름을 가득 담은 병을 샀답니다. 그런데 이 일본인 여성의 남편은 골동품상이었답니다.

고려 3층석탑. 야마나카 상회가 주최한 경매에서 한옥 6채 값인 6000원에 구입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석탑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되는데 그쳤다.|간송미술관 소장

<문=남편이 골동품상이라구요? ‘서당개 3년’ 속담이 떠오르네요?>

답=그러게요. 골동품상 남편은 병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대요. 병 표면에 붉은색, 검은색, 푸른 색 안료로 국화와 난초, 벌과 나비를 새겨넣었답니다. 남편은 부인의 안목을 극찬했답니다. 


<문=그렇게 예쁜 백자가 어떻게 기름병이 된거죠?>

답=18세기 전반 왕실의 도자기를 굽던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는데. 그 마을 주민이 가마터에 묻혀있던 백자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냥 참기름을 넣어 내다팔았던거죠. 단돈 1원이었던 백자는 다른 골동품상에 60원에 팔렸고, 한단계 거쳐서 600원으로, 1932년 경매에서는 3000원으로 뛰었답니다. 


<문=그럼 10년만에 3000배가 뛴 거네요?>

답=그렇습니다. 그런데 소장자가 죽으면서 유품 200점이 경매에 나왔는데, 경매 도록을 본 간송과 야마나카 상회, 그리고 또 한사람의 일본인 수집가가 이 백자에 꽂힌겁니다. 경매 예상가는 6000원으로 추정됐는데 더 올라갈 것 같았답니다. 


<문=그러니까 간송, 야마나카, 그리고 또다른 일본인 수집가가 다투었다면 3파전이 된거네요?>

답=그렇습니다. 원래 간송은 경매장에는 대리인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본인이 직접 참석했답니다. 처음엔 3000원으로 시작했는데, 일본인 수집가가 5000원을 부르면서 그때부터 본격 경쟁이 시작되었답니다. 6000-7000으로 뛰고 간송측이 8000원 부르자 일본인 수잡기는 포기를 선언했는데요. 그래서 간송이 이겼다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9000원 부르더랍니다.


<문=야마나카 상회 측이었나요?>

답=그러자 간송 측이 ‘1만!’을 불렀고, 그때부터는 500원 단위 사움이 벌어졌대요. ‘1만500원!’ ‘1만1000원!’ ‘1만1500원!….’ 순식간에 ‘1만4500’이 되었답니다. 그런 다음엔 호가가 10원 단위로 세분화되고…..

야마나카 상회가 1934년 됴코에서 개최한 지나조선고미술전관에서 전시된 도자기류. 이중 12번(백자 주병)은 아카보시 고로라는 유명한 한국도자기 수집가가 구입해 1965년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이같은 목록을 통해 이런 저런 이유로 야마나카 상회를 통해 반출되고 판매된 한국문화재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 |주홍규의 논문 ‘야마나카 상회와 일본으로 유출된 한국문화재’에서



출처: https://leekihwan.khan.kr/entry/간송-전형필과-야마나카의-문화재-전쟁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문=이쯤되면 해보자는 거네요. 자존심 싸움이었네요?>

답=그렇습니다. 1만4510, 1만4520, 1만4530…. 간송측이 ‘1만4580!’을 부르자 그제서야 야마나카 상회측이 포기를 선언했답니다. 간송과 야마나카 사이에 펼쳐진 조선백자 경매사상 최고의 명승부는 이렇게 간송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낙찰받은 조선백자는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라는 긴 이름이 붙었고 국보(제29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문=정말 간송이 아니었다면 다 일본인 손에 넘어갔겠네요?>

답=그렇습니다. 국보 보물급 유물 중에는 일본 도쿄에 살던 영국인 변호가 존 갯스비가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그동안 수집한 최고급 명품 청자 20점을 모조리 간송에게 팔았습니다. 이 중 7점이 해방 이후에 국보와 보물이 되었습니다. 


<문=어떻게 도쿄에 있던 개스비의 유물이 조선의 간송한테 팔게된거죠?>

답=1937년 일제는 중국에서 노구교 사건 일으켜서 중국하고 전면전 벌이는데요. 중일전쟁이죠. 일본에 체류하던 외국인들은 아 이제 일제가 중국 대륙 뿐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겠구나 하고 우려하죠. 그래서 ‘엑소더스’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도쿄로 가서 흥정했죠. 처음에는 쉽지 않았어요. 개스비는 점당 2만5000원씩 55만원을 제시. 전형필은 1만5000원씩 33만원을 제시했는데요.


<문=갭이 만만치 않았네요?>

답=그렇습니다. 일괄구입이므로 할인이 필요하다는 게 전형필의 생각이었고, 개스비는 하나하나가 명품이니 제값을 다 받아야 한다는 거였죠,  사흘간의 협상 끝에 38만원(전형필), 50만원(개스비)으로 조정됐지만 결렬됐습니다.


<문=문화재 매매 협상은 치열한 심리싸움이네요?>

답=그렇습니다. 전형필은 귀국했고 개스비는 영국박물관과 접촉했습니다. 그러나 영국박물관은 1차대전 이후 떠돌고 있었던 명화 수집이 우선순위였지 조선의 유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개스비는 결국 전형필을 다시 찾았죠, 서울을 방문해서 전형필과 다시 접촉했습니다.

27일 서울 강남구 케이옥션에서 열린 5월 경매에 나온 간송미술관 소장 보물 285호 금동보살입상이 시작가 15억 원에 경매에 부쳐졌지만 유찰됐다. |연합뉴스

<문=그렇다면 간송 측이 이니셔티브를 쥐게 됐네요?>


답=뭐 그래도 갑은 개스비였겠죠. 그래서 간송은 짓고 있던 박물관(당시 보화각, 간송미술관)을 구경시켰습니다. 당시 개인박물관은 당시 일본에서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개스비씨, 귀하가 수집한 고려청자를 이곳에 전시하면서 조선에도 이같은 찬란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라 했어요. 그러자 개스비가 부끄러움을 느꼈답니다.


<문=왜요?>

답=개스비가 서울에 오면서 생각했던 가격은 45만원이었답니다. ‘내가 45만원은 받아야지’했는데 간송이 보여준 공사중 박물관을 보고는 부끄러움을 느꼈다는거죠. ‘아 나는 이 유물을 영국박물관에 돈 받고 팔려고 있는데, 전형필은 단순한 수집욕이 아니라 조상들이 만든 청자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 청자들을 다시 되찾아가겠다는 거구나. 내가 졌다’하고….


<문=결국 얼마에 산 겁니까?>

답=결국 5만원을 깎아 40만원에 하겠다고 수정제의했답니다. 당시 간송에게는 현금이 없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팔았는데, 5000석논이랍니다. 80㎏ 쌀 1만가마니를 수확하는 논인데, 노모가 와서 아니 사금파리 사려고 논을 파는 게 말이 되냐고 했답니다.


<문=그러게요. 아무리 문화유산을 지키는게 중요하다지만 그렇게까지 하신 이유가 뭘까요?>

답=당시 간송 나이가 32살인데, 아무리 부자고 재벌이라도 문화유물을 구입하는데 몇 천억원대의 재산을 내던질 이가 지금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닌말로 사금파리 사는데 조상이 내려준 기름진 땅을 그렇게 팔 수가 있을까요. 게다가 그렇게 청자 20점을 포장한 오동나무 상자를 비행기 화물칸 아닌 좌석에 고이 모셔왔다고 합니다. 


<문=참으로 대단한 분이네요>

답=화물칸이 아니라 좌석에 올려놓고 기체가 흔들려도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간 밧줄로 튼튼히 묶었답니다. 32살 청년의 수집이었다 개스비는 “귀하는 아직 연부역강하니 모쪼록 훌륭한 미술품을 많이 수집해서 세상에 소개하라”고 했답니다. 그런 분이 수집한 유물이니 미술관이니 사정이 어렵다고 해서 그 중 몇 점이나마 판다니까, 그리고 앞으로 더 팔 계획이 있다니까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거죠.

혜원 신윤복의 '이부탐춘'. 소복을 입은 여인이 여자종과 함께 개의 교미장면을 지켜보고 있다.|간송미술관 소장


<문=그러나 미술관 운영하기가 그렇게 힘드니 고민은 되겠네요.> 

답=그렇습니다. 뭐 문화재 매매는 누구나 할 수 있는거지만 간송 전형필 선생하고 간송미술관이 문화유산 수호와 보존 측면의 상징성이 워낙 크다보니 관심을 받는 겁니다. 


<문=국립박물관을 비롯한 국립기관이 구입하면 되지 않을까요?>

답=물론 그러는게 가장 좋죠. 그러나 국립박물관의 유물구입비는 전체 16개 국립박물관을 통틀어서 40억원 정도랍니다. 여력이 많지 않아요. 지금 보물 2건이 경매에 나왔는데 시작가가 15억원이라니까 이걸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문=고민스러운 부분이네요?>

답=그렇습니다. 간송미술관측도 그동안의 폐쇄성에서 탈피해서 보다 효과적인 박물관 운영을 위해 노력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너무 폐쇄적이라 문화재청에서도 간송미술관 사정을 잘 모릅니다. 국보 보물이 46건이나 되는데 아주 곤란한 문제죠. 중앙박물관 측도 간송미술관 문제 고민해보고 있다니까 좋은 대책이 나오기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간송의 문화재수집을 두고 월탄 박종화의 언급이 떠오르네요. “간송은 막대한 돈을 들여 민족의 얼을 사들였다‘고 했거든요. 간송의 뜻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27일 열린 경매에서 간송측이 내놓은 보물 두 건은 유찰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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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duhan 2020.05.28 15: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에도 일본인은 조선의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거액의 비용으로 수집, 보존 활동하네.일본인이 없었다면 조선의 문화재의 대부분은 거의 소실했을 것이다.

    • leeseongsoon 2020.05.29 0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나의 사례만 갖고 일반화하면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가정법으로 슬쩍 정당화시키려는 더러운 말버릇 또 나왔네.
      괜시리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을 일본에 가져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잃어버린 사례도 있으니까 헛소리 작작하길.

    • ddedoqg 2020.05.29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존은 무슨. 돈에 눈멀어서 나중에 팔려고 사모은거지. 당신이 일본인이라면 여기서 이상한 글 쓰지말고,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부끄러운줄 알길

    • kimduhan 2020.05.29 1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돈 벌이 때문이 아닌데요.당시 조선인들이 보존 가치도 인식하지 않던 구시대의 문화를 인류적 관점에서 저장한 것.

    • Abe 2020.05.30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의 극우 혐한주의자... kimduhan....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며 군국주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미화하는 천박한 아베 신조의 하수인. 시궁창 냄새 풍기며 또 음습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구만.

      사기치다 걸려 잠수타더니 또 기어나와 협잡 왜곡질 하는구먼... 입만열면 거짓말...ㅋㅋㅋ

      페스트는 어찌되었는데?? 일본에 발생한 사실은 숨기고 조선에서 창궐했다고 사기 쳤잖아 ???
      조선 인구가 일조 일천억 이래매??

    • kimduhan 2020.05.31 1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에서는 현대에서도 한인이 고분 등 문화재를 도굴하고 해외에 전매하고 있군요아쉽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11753.html

      일본에 원정하고 일본의 문화재를 강탈하는 한국인이 현대에도 많군요.

      빗나간 애국심(?) 일본 원정, 문화재 절도
      https://news.mt.co.kr/mtview.php?no=2004101217241097821

    • Abe 2020.05.31 1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제국주의의 마수들이 강탈해간 우리의 문화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와야하고...

      조작, 왜곡의 달인인 왜구들은 자기네 역사와 유물까지도 허위로 파묻고 출토한 것처럼 사기질을 쳐왔지요... 역시 그 종자들은 역사왜곡이 종특이지..

    • Abe 2020.05.31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열도는 후지무라 신이치의 유물 발굴 알고보니 조작이라는 충격적인 보도 내용을 접하고 패닉 상태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정밀 조사가 벌어져, 후지무라 신이치가 70년대 이후 발굴의 관여한 유적 180곳 중 162곳에서 조작 흔적이 발견됨에 따라 가짜 유물에 대한 문화재 지정 취소는 물론이고 교과서에서 후지무라에 대한 내용 삭제와 더불어 본인도 고고학계에서 영구제명 당했으며 후지무라의 책 또한 출판사에서 모조리 다 거두어가고 애지중지하던 그 모든 석기 유물은 죄다 폐기처분하거나 증거품으로 보관되는 신세가 된다. 당연히 각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ㅋㅋㅋ...

    • kimduhan 2020.05.31 1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기환기자님의 칼럼은 공부가 됩니다.

      '영구결번' 국보 보물, 그 파란만장 사연들
      https://leekihwan.khan.kr/entry/%EC%98%81%EA%B5%AC%EA%B2%B0%EB%B2%88%EB%90%9C-%EA%B5%AD%EB%B3%B4-%EB%B3%B4%EB%AC%BC%EC%9D%98-%EC%82%AC%EC%97%B0

    • Abe 2020.05.31 2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흠 그렇군.. 역시 공부가 되는 좋은 비교네...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고 바로잡는데 대한민국은
      3년 8개월 일본 조작대국은 20년 넘게 걸리는구만..

    • kimduhan 2020.05.31 2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필트다운인 조작한 영국은 40년 속이고 있었기에 조작 대국 첫째위?

    • Abe 2020.06.01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 이 견딜수 없는 존재의 경망함....

      그러면 딱 일본인 수준에 맞는 답변...
      영국 필트다운인 사건은 1912년 즈음에 딱 두번 시도가 있었고 꾸준한 반론이 학계에서 제기 되었으며 1940~50년대에 새로운 연도측정 기법이 개발되며
      바로 진실 복구됨.

      일본 사기꾼들은 검증가능한 기술 과학적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62회에 걸쳐 사기행각을 묵인하며 교과서에 싣고....

      범죄도 습관성 누범이 크게 처벌받는 법...

  2. Favicon of http://lth22551@naver.com lth2255 2020.05.29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집트 사랍들은 자기 문화재를 약탈해간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자들에게 감사해야할 것 같네요.

    • kimduhan 2020.05.30 14: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네요.당시 이집트인은 자신들의 과거 유산의 가치를 모르고 도굴하고 유럽에 팔고 있었다.

    • Abe 2020.05.30 2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kimduhan 이자야 말로 후안무치한 일본인의
      전형이구만... 제국주의자들은 다 같은편이라 옹호하는거지? 인류에게 천인공노할 죄악을 지은
      731 부대도 옹호해보렴..... 추악한 일본인 !!!

    • kimduhan 2020.06.02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신이 낡고 깨지어 버린 접시를 쓰레기 통에 버리고 있었다고 한다.그것을 주운 사람이 소중히 보관하고 연구하고 가치를 인정했다.주운 사람을 단순한 약탈자라고 한다면 버린 당신은 단순한 무지입니다.

    • Abe 2020.06.04 05: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가정법 글쓰기 연습?
      버려진 것을 주은 사람을 약탈자라고 ?

      도둑놈 강도들이 꼭 버려진거 주웠다, 임자 없는거 같아 가져왔다.... 이딴식으로 말하지...
      그래서 왜인들이 간교하다고 하는거지... 천박한...

    • kimduhan 2020.06.04 1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인이 관심도 갖지 못한 과거의 조선 문화재.그것을 문화재로 취급하는 보호 저장하던 것은 일본인입니다.그러나 일본 통치가 시작된 일본의 근대교육을 받은 조선인도 늘어나고 그 가운데 전형필처럼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찾는 사람도 태어났다.
      "문화재 보호"라는 개념 자체가 일본이 서양에서 배운 개념으로 그동안 동양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그것을 빨리 문명 개화된 일본인이 조선인에 전수한 것입니다.
      조선 왕조가 석굴암을 보호하고 있었습니까?

    • Abe 2020.06.09 1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군국주의 살인마 왜구들이
      도굴, 파괴, 강탈해간 문화재가 얼마인데 문화재 보호를 운운하다니 참으로 낯짝 두껍게 사기치는 왜구일세 그려...

      왜구들이 석굴암 보수한다며 어줍잖은 기술로 손댔다가 망친 사실은 딱 숨기고 싶겠지.... 아니면 그게
      최선 이었다고 또 거짓말 치던지...

  3. haha 2020.05.29 2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존 가치를 인식하지 않았다면 간송 같은 사람이 왜 나왔겠습니까? 이상한 어거지를 부리시네.... 더구나 일본이 우리 문화재를 가져갈 때 제대로 된 가치를 매겨 가져간 것도 아니거 거의 강탈수준으로 가져간데다 도대체 뭘, 얼마나 가져갔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더 큰 맹점입니다. 일본왕궁에 보존돼 있다는 우리의 문화재는 전혀 가늠도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 야마나카상회에서 보존 중인 유물... 우리가 보고 싶다고 맘대로 볼수나 있나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전시한 걸까요? 당신의 생각은 일본인들 때문에 조선근대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개소리와 뿌리가 같습니다.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면만 극확대해서 해석하는.. 일본 때문에 조선의 역사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고대사의 뿌리가 사라졌으며 남북은 갈라져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우리 경제와 미래세대의 아킬레스건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일본 때문에 좋아진거죠?

    • kimduhan 2020.05.30 14: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형필은 도쿄의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였으니 일본의 문화재 보호를 공부해서 자신들의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의 의의를 알고 있군요.

    • kimduhan 2020.05.30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통치 시대 말기까지 막대한 재산을 보유하고 방대한 미술품을 수집할 수 있는 대부호는 조선 총독부 당국과 우호적이지 않으면 절대로 유지될 수 없다.실제로 전형필는 경성 보호단 등에 거액의 기부를 하는 등 일본의 조선 통치 행정에 적극 협력하고 있었다.

    • Abe 2020.05.30 2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천박한 역사인식의 모범 답안 이구만...
      총칼과 고문으로 유지된 일제 강점기...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륙과 악마적 범행을 일삼은 야만의
      일본 군국주의 정권을 찬미하는 kimduhan....

      일본인의 혈관에는 피에 굶주린 악마의 잔인함이 흐르는 건가? 위안부는 물론 난징대학살 도 부정하는
      저 비겁한 국가의 국민들의 궤변....

      당신들 일본 극우주의 혐한 종족들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는다... 카악 퉷!

  4. 노형 2020.05.31 2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의 구석기 문화를 60만 년 전으로 끌어올릴 목적으로
    야간에 몰래 유적지에 숨어들어 땅파고 유물을 묻다가 들킨
    나름 일본에서 유명한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역사를 사기치는 DNA를 가진 일본과 무슨 역사를 논하리.

  5. kimduhan 2020.06.01 1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양반 생각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고 있네.조선인 징병 제도 도입에 “감격”해서 일부러 훈련소 소장(일본인)을 방문하고, 재산에서 기부하고 있어.

    여기까지 하고 있다면 훌륭한 친일파 아닙니까?

    志願兵에 "簡保"
    全鎣弼氏五千圓寄附

    경성부종로(鐘路)四정목백十二번지 전형필(全鎣弼)씨는 현재 보성 중학교(普成中學校)의 경영자로서전부터 사회 공々사업에 공헌 이만흔 독지가인데 전번 발표된 쇼와 十九년도 징병제 실시에 감격하여 이성은에 만분지일라도보답하려는 ?아래 징병제의 모체인지원병들로하여 금후고의염려가업게하고 아울러이조안으로 지원병 입소자전원들을 간이 보험에 가입식히위하야 이지음 훈련소로 우미다(海田)훈련 소장을 방문하고 신민 지원병전원의 간이보험금에 충당할기금五천원을히사하엿다 훈련소에서는 이?의 에기피감사하고곳 광화문 우편국알선아래 지원병 전원 에 대한 간이 보험의 소식을마첫는데 동씨의 미거에대하야 일반은 찬사를마지안는다고한다 화회를하기시작하야동세시경에페회하엿다 
     그러나 이간화회는 이번종회를최후로하야 일본 문학 보국회(日本文學報國會)에합류되어새로운활약을기약하고새출발을하기로되엇다


    https://nl.go.kr/newspaper/detail.do?id=CNTS-00095152875

    • kimduhan 2020.06.01 2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칼럼에서는 '문화재 독립 운동가'라고 찬양하고 있지만 그는 일본 통치 시대에 총독부 당국에 적극 협력하고 그 통치를 찬양하고 재산을 늘린 친일파야.그리고 소유한 800만 평의 광활한 토지에서
      1년에 2만석 이상의 수확이 있었다고 한다.조선인 소작인에서 착취한 재산을 자신의 취미의 미술 수집에 썼다는 것이다.그것을 '독립 운동가'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다른 친일파가 울겠네.

    • Abs 2020.06.02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덜 떨어진 인간 가르치는 일, 그리고 멍청한 일본인 깨우치는 거.....

      군국주의라는 마약에 취해 살상을 일삼는, 광견병 걸린 미친 개 처럼 날뛰는 일본 제국주의자를 피하고 이기는 방법은.... 일단 맞추어 주며 시간을 벌면서 내 할일 하거나, 아니면 몽둥이 준비해서 오뉴월 행사처럼 패 죽이던가.....

      어리석음이 종특인 왜구들이 어찌 이해할까 ?

      쯧쯧쯧....

      문화유적 프로 사기 꾼 일본인 들은 어떤 사기, 협잡질을 꿈꾸고 있을까 ????

    • kimduhan 2020.06.03 0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송 미술 문화 재단은 철면피야."일본이 사병 입대를 강요하는 강압 정치에 간송은 대항한 "이라는 사실과 정반대의 왜곡 미화가 버젓이 게재되고 있다.사실은 제가 지적했듯이"간송은 일본이 징병 제도를 조선인에게 적용 결정한 것에 감격해서 지원병 제도를 지원한 "이다.이처럼 후안무치한 사례는 별로 없지 않을까.

      “그런데 일본은 중국침공을 본격화하면서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고 조선인을 전선에 투입시키기 위해 1938년 2월에는 조선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창설하여 젊은이들의 지원입대를 강요하고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 공포해 중등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지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우리 문화를 말살하는 강압정치를 진행해 가자 간송은 이에 맞설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http://kansong.org/kansong/biography_4/

    • Abe 2020.06.04 0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거짓말쟁이 왜구 말을 누가 믿을까??

      간송 미술 문화재단은 당연히 왜구들이 싫어하겠지.. 모함하고 협잡질로 폄하하고 싶겠지... BTS도 미워하잖아..... 극우 군국주의에 영혼을 팔아버린 왜구들이 어떻게 그 높은 뜻을 알겠나?

      그런데 아베신조는 왜 공문서를 없애고, 수상한 꽃놀이 다니고, 코로나 은폐해도 별로 욕을 안먹지?

      참 왜구들은 기괴해....

    • kimduhan 2020.06.04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 말이 아니라 1942년 9월 13일 당시 한국 신문에 게재된 정보입니다.즉 일차 사료다.현대에 누군가가 평론에서 쓴 자료가 아니라 전형필가 살던 시대의 동 시대 사료다.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https://nl.go.kr/newspaper/detail.do?id=CNTS-00095152875

    • Abe 2020.06.09 1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Kimduhan은 인용하며 왜곡해서 해석하거나,
      수 많은 견해중에 혐한용도에 좋은것만 고르고,
      종종 거짓을 진실인양 침소봉대, 카더라 전술로
      본질 회피하는 왜구의 전형인데 어떻게 믿나?

      똥으로 메주 쓴다는 말을 믿는게 낫지... 암만 !

  6. kimduhan 2020.06.02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읽어도,"악랄한 일제는 조선의 문화재를 강탈하고 조선인을 노예로 재산을 빼앗고 착취한 "이라는 한국의 일반적인 인식이 얼마나 틀렸는지 알겠네요.
    "일본은 조선의 문화를 사랑하는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고"구입" 하고 있었고 조선인도 평등하게 경매 참여할 수 있었고, 재산은 빼앗기지 않고 더욱 늘어났다.또 골동품 업계 제일인자의일본 60대 노인이 20대 한인에 대해서"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존중하고 있었다"라는 것이 현실이다.

    • Abe 2020.06.04 0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놀고있네...ㅋㅋㅋ
      그러니 왜구들이 욕먹는것이여... 실체적 진실과 증거들은 다 외면하고 궤변 왜곡질만 해대니...

      광범위한 수탈과 폭력적 행위들의 증거는 우리국토 곳곳에 산재하고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증인들이 있다.... 하기야 위안부 할머니의 존재도 부정하는 간악한 종자들이니...

      60대 노인의 " 선생님 "?
      왜구들의 인면수심과 혼네를 모를줄알아?
      무고한 양민들 베어 죽인 피묻은 손으로 고상한척
      개폼 잡는게 왜구의 종특이잖아.

      왜구 60대는 조선인 20대를 당연히 존대해야지. 암 !
      살리에르와 모짜르트 이야기를 왜구들은 알까?

  7. han 2020.06.15 0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Kimduhan. 여기 상주하면서 역사왜곡 하네. 간송 전형필이 보여주잖아. 조선인이 조선인 유물과 역사에 관심있었다고. 전재산을 내던질만큼. 니들은 뭔데? 남의 나라 침략해서 유물유적 도굴하고 도자기 훔쳐가서 도둑넘처럼 되팔고. 하긴 참기름 병으로 쓸만큼 도기가 흔했지만..조선 주막에서 쓰는 막사발을 찻잔으로 숭배하며 쓸만큼 문화적 근간이라고는 없으니.. 훔치는데 독기가 오를만큼 올랐겠지.
    일본의 도자기 역사도 결국 왜란이후 조선도공부터 였으니..그 근간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실존유물의 관찰연구가 필요했을테니 보이는 족족 훔쳐가고 집어가고 약탈하고. ㅉㅉㅉ

    • kimduhan 2020.06.15 1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네요그리고 그 조선인은 일본의 조선 통치의 협력자라서 재산을 유지하고, 더 늘릴 수 있었다.조선인 지원병 제도 도입에 "감격하고"재산을 총독부 당국에 기부한.그리고 그는 그것까지 조선인이 돌아다보지도 않고 버려지고 있던 과거 조선 유산으로 가치를 찾아낸 희귀한 조선인이었다.일본의 대학에서 교육 받은 사람이니까 그런 인식을 가졌다라는 것이다.도자기 얘기하자 당시 일본 귀족은 호화로운 것에는 질려서, 예를 들면 화려한 고려 청자가 아니라 농민이 막걸리 마시는 데 이용한 더러운 공기에 가치를 찾았다.조선인이 그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 Abe 2020.06.17 2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구들의 수준이 그정도였다는 거지...
      일본 J리그 수준의 축구가 세계 최강이라고 믿는..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역겨운 축구를 펼치고 최선이라고 주장하던 그 천박함의 결정체...

    • kimduhan 2020.06.17 2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2019.10.27 09:46

      형식과 화려한 연회 등을 강조한 일본의 차문화가 내용과 정신에 치중한 차문화로 탈바꿈한 것이다. 다도를 통해 불교에서 선(禪)의 경지에 이른다는 이른바 ‘와비차(わび茶)’을 완성시킨 것은 센리큐였다. 와비차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고요하고 쓸쓸하면서 뭔가 부족하지만 그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불완전한 미를 더욱 숭고한 것으로 추앙하는 차문화를 일컫는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수하고 소박한 다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 차문화가 화려함에서 소박함으로 바뀌면서 찻사발의 유행 또한 화려한 중국제보다는 투박하지만 소박한 조선제로 선회했다.

      일본인들이 ‘바로 이거야!’하고 무릎을 친 투박하지만 소박한 말차 전용 조선제 막사발은 이도다완(井戶茶碗)
      https://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0270946001&code=960100

    • Abe 2020.06.18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 이기환 기자의 그 많은 글들을 왜곡해서 해석하더니,,, 이글은 그렇게 신봉했나 ? ㅋㅋ 답은 뻔하지... 유리하니까...

      han님의 논점은 조선도공의 납치, 조선 유물 약탈 그리고 도굴등 왜구들의우리 문물에 저지른 패악질이지...

      유행이야 늘 변화하는거고 왜국 차문화의 변하지않는 진실은 피뭇은 칼 휘두르고 고상한 척 개폼 잡는다는거... 그리고 그런 놀이에 무슨 고매한 철학이나 있는것처럼 가식 떠는거...

      이기환 기자님도 인간인지라 실수로 글쓰셨네...

  8. han 2020.06.15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kimduhan 그리고 무슨 일본은 되게 문명화해서 일본인들은 유적과 유물에 엄청난 소양 있는 줄아는데. 그때도 그런 일본인은 소수의 지식인이었단다. 알고 좀 남보고 미개하다 마라 해라. 군국주의를 지향하던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나서 가장 우선적으로 했던일이 토지조사해서 양민의 토지를 빼앗은 이유가 뭔지아니? 일본에서 굶어죽을 만큼 힘들던 소작인과 농민들을 이주시킨거야. 조선도 교육못받은 사람들이 즐비했지만, 일본도 마찬가지였어. 일본이 전쟁준비로 경제가 점점 마비되고 그에 따른 불만이 열도에서 폭발하자 일본에서도 가난한 농민들 이주시키고 자국민 보호 명분아래 니들이 무사라 부르는 깡패들도 이주시킨거야. 좀 남의 나라 역사에 아는척 참견하려면 니네 나라역사도 좀 공부하고와. 일본이라고 엄청 문명화? 개화? ㅋㅋㅋㅋㅋㅋ 도쿄와 몇몇 대도시 제외 시골바닥은 여자애들을 창에 팔아넘길 정도로 가난하고 힘들었어. 식모라는 제도가 일본에서 나온거야. 어린 애들을 거두기 힘드니 남의 집에 종으로 팔아넘기는거. 적어도 조선은 신분제여서 종은 종, 양반은 양반, 양민은 양민이어서. 양반이나 양민을 함부로 종으로 부리지도 못했어.
    그러니. 니가 말하는 개화가. 니 시각에서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거야.
    과거의 신분제라도 그게 그 나라 문화에서는 양민을 보호하는 구실을 했던거야.
    모든 역사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지못해. 일본의 사관으로 조선의 역사를 평가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한국의 사관으로 일본의 역사를 모두 야만하다 할 수 없는거지.
    그건 전세계 모든 민족, 모든 국가에 통용되는거야.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도 우월한 역사시기도 없어.
    그저 우월하다고 착각하고 남의 민족을 짓밟은 야만의 역사가 있을뿐이야.
    니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숭배하는 유럽과 서구 열강이 이미 20세기 들어와서 이러한 역사관을 탑재하고 자신들의 역사와 문명을 짓밟고 훼손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은 아직도 멀었네..여적 19세기 패망한 2차대전 망국에서 사네.

    • kimduhan 2020.06.15 1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토지 조사 사업이 땅을 빼앗았다는 것은 신화요.그래서 이 전형필처럼 조선인 대지주는 존재했다.그의 수입원은 조선 빈농이 거둔 연공요.

    • Abe 2020.06.17 2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왜구들이 간교하다는 거지....
      그 엄청난 도륙과 수탈을 해놓고 극극소수의 경우를
      일반화 시켜왔지...

    • kimduhan 2020.06.17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대이다.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학대, 때로는 학살도 했지만 독립 운동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독립 운동가는 극히 소수이니 독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대부분이 순종적인 국민이고, 일부( 그래도 독립 운동가 수백배도 있었다)친일파의 부유층이 있었다.

    • Abe 2020.06.18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또 거짓말을 태연하게 하고있네...

      조선인구 1조1천억명중에 독립운동한 사람들의 숫자는 미미하다고 사기치더니....

      구글에 항일운동 쳐봐라... 얼마나 많은 자료가 나오는지.... 친일분자들을 국민 평균으로 치환하여 궤변잡설을 늘어놓는 왜구들의 근성...

    • kimduhan 2020.06.18 1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대 한국에서는 당시 항일 운동이 대단한 것처럼 글을 많이 만들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 국내에서 3.1이후 큰 사건은 아무것도 없다.실제로는 일본 통치에 순응했다.북한에서 반정부 폭동이 없는 것은 김정은이 반정부 운동가들을 죽이고 있어서가 아니다.나름대로 국민은(외부를 모르니까)북한 정권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 Abe 2020.07.09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신의 짧은 지식이 전부인 줄 아는 우물안 개구리 이거나, 의도적으로 진실을 은폐하려는 왜구 군국주의의 잔당.... 구글에 항일운동 쳐보아라 이 천박한
      왜구야 !!

  9. 신드롬 2020.06.23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세계에 사는 한국인들은 간송 선생과 그 후손들에게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 kimduhan 2020.06.23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송선생님은 조선 총독부가 조선인 징병 제도를 도입한 것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