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92회 대본입니다.)
최근 문화유산 분야에서 핫뉴스가 터졌는데요. 간송미술관이 자기들이 소장 중인 보물 불상 2건을 경매에 내놨다는 소식입니다. 국보 보물을 그렇게 시장에 내놔도 되는 건지도 궁금하고, 한 미술관이 소장한 유물을 내다 파는 것이 그렇게 뉴스가 되는 것지도 궁금합니다. 오늘은 보물을 매물로 내놓은 간송미술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봅니다.
일제 강점기에 전 재산을 털어 문화재를 수집한 간송 전형필 선생
<문=우선 궁금한 것은 국보 보물로 지정된 유물을 사고 팔 수도 있나요?>
답=당연히 있습니다. 매매할 수 없게 만들면 누가 국보·보물을 소유하며, 또 누가 지정하려고 애쓰겠습니까. 지금까지 매매된 지정문화재를 보면 보물인 월인석보와 경국대전 등 보물 문화재들이 개인에서 개인, 개인에서 국립박물관 등으로 팔렸습니다. 지정문화재의 경우는 보통 경매를 통해 공개적으로 매매됩니다. 그리고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소유자가 바뀌면 문화재청에 반드시 신고해야 합니다. 해외반출을 걱정하실텐데 국가지정문화재 및 일반동산문화재의 수출 등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금지됩니다.
<문=이번에 간송미술관이 경매 출품한 보물 2건은 어떤건가요?>
답=보물 제284호 금동여래입상하고, 285호 금동보살입상입니다. 하나는 통일신라, 하나는 삼국시대 불상으로 알려져있는데요, 이중 한 건은 위작설이 제기된 바 있어서 검토해봐야 합니다.
<문=국보 보물도 신고만 하면 매매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간송미술관이 보물 2건을 파는거죠?>
답=지금 간송미술관에는 국보 12건, 보물 32건, 시도문화재 4건 등 모두 48건의 지정문화재가 있구요, 비지정문화재가 4000여 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전성우 간송미술관 이사장이 별세하면서 소장문화재 중 지정문화재는 가족에게, 나머지 비지정문화재는 간송미술관 재단에 출연했답니다. 뭐 보도를 보면 이 과정에서 상속세 부담 때문에 할 수 없이 소장 문화재 2건을 경매에 출품한다고 하는 거죠.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중 '연소답청'. 기생의 마부가 되겠다며 말을 몰아주는 양반과, 기생에게 담뱃불을 븥여주는 양반, 그리고 그 모습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마부 등을 그렸다. 양반사회를 향한 통쾌한 풍자그림이다.|간송미술관 소장
<문=문화재 상속세가 얼마나 되기에 소장 문화재를 팔아서 상속세를 낸다는 겁니까?>
답=그런데 이 부분에서 오해가 있는 데요. 제가 문화재청에 물어봤는데요. 기본적으로 국보 보물 시도지정문화재 48건은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12조 제2호에 따르면 모든 지정문화재는 비과세되는 상속재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만약 간송미술관 재단이 ‘성실한 공익법인’으로 국세청이 인정한 법인이라면 증여세 및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 또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48호 49호)에 나와 있습니다. 상속세 및 증여세를 낼 필요가 없는 법조항은 또 있습니다. 바로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박미법)인데요. 74조 ②항을 보면 ‘박미법’에 따라 등록된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경우 전시중이거나 보존중인 문화재에 대해서는 상속세가 유예됩니다. 이런 법들이 있기 때문에 간송측은 지정문화재든 비지정 문화재든 문화재에 관한 한 단 한푼의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간송미술관이 보물 2건을 시장에 내놓는 것은 단순히 문화재에 붙는 상속세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재단이 어려워지면 문화재 관리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니까 고육책으로 파는 거다 뭐 이렇게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유곽쟁웅’. 기방 앞에서 벌어진 난투극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기방을 관리하는 붉은 옷의 기부(기둥서방)은 하급공무원이다. 무예청 별감일 것이다. 기부는 분에 못이겨 씩씩대는 젊은 사내를 다른 선비와 함께 뜯어말리고 있다. 가운데 사내는 갓이 망가졌음에도 ‘어디 한번 더 덤벼보라는 듯’ 웃통을 벗어제친채 호기를 부린다. 오른쪽에 앉은 술에 취한 선비도 얻어맞은 듯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
<문=간송미술관 측의 입장이 있을텐데요?>
답=입장문을 내놨는데요. 뭐 문화재 상속세 때문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2013년 재단 설립 이후 대중전시와 문화사업 병행하면서 많인 비용이 발생했고, 이런 가운데 전성우 이사장의 별세로 추가 비용이 발생해서 불가피하게 소장한 불교 관련 문화재를 매각하고 지금까지 간송을 상징해온 서화와 도자, 전적 위주로 소장한다고 했습니다.
<문=앞으로 불교 관련 유물들은 더 매각할 수도 있다는 얘기로 들리네요?>
답=그렇습니다.
<문=그런데 아까 국보 보물도 합법적으로 매매할 수 있다고 했는데요. 왜 유독 간송미술관이 유물을 경매에 내놨다니까 핫뉴스가 되는거죠?>
답=간송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 아시죠?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재산을 털어 문화유산을 수집해서 ‘문화재 독립운동가’로 칭송받는 분이죠. 그 분이 수집한 유명한 문화유산이 있죠?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책인데요. 일제 말까지 원본이 발견되지 않아서 뭐 화장실에 앉아 새 문자 창제를 고심하던 세종대왕이 화장실 창살 모양을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설까지 나왔죠.
간송이 구입한 문화유산중 백미는 역시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문=우리 어렸을 때도 화장실 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답=맞습니다. 그런데 전형필 선생이 경북 안동에서 이 해례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시 기와집 10채값인 1만원에 중간에서 매매를 알선한 거간에게 수고비라며 1000원을 더 얹어주고 사왔다잖아요. 귀한 문화유산은 귀한만큼 대접 받아야 한다면서 더 줬다는거죠, 이것이 무가지보라는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문=훈민정음 해례본 한 권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간송의 업적은 대단하죠?>
답=그렇습니다. 당시 경성제대 우리말글 연구 교수인 고노 로쿠로(河野六郞·1912~1998)가 해방 후(194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1940년 당시 경성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원본을 볼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거든요. 만약 해례본이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모골이 송연하죠.
<문=훈민정음 해례본 말고도 간송이 확보한 국보 보물이 엄청나죠?>
답=그렇습니다. 조선에서 알아주는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평생을 우리 문화유산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죠, 그중 당대 일본의 세계적인 고미술 무역상인 야마나카(山中) 상회와의 문화재 수집 전쟁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됩니다. 야마나카 상회는 뉴욕 보스턴, 시카고, 런던, 파리, 베이징에 지사를 둘만큼 세계적인 골동품 거상으로 급성장한 문화재 거래업체인데 그 회사와 4번에 걸쳐 수집전쟁을 겨룬 거죠?
처음엔 참기름병이 되어 나타난 조선백자. 18세기 작품이다. 원래 조선백자의 특징은 단순 절제미로 축약되지만 이 백자는 다양한 색채를 자랑한다. 돋을 무늬로 난초는 청화, 국화는 진사, 국화줄기와 잎은 철사, 벌과 나비는 철사 또는 진사로 칠했다.|간공미술관 소장
출처: https://leekihwan.khan.kr/entry/간송-전형필과-야마나카의-문화재-전쟁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문=뭐 그렇다면 골리앗과 다윗 싸움 아니었을까요?>
답=그러게요, 1933년 벌어진 1차전에서는 졌어요. 당시 야마나카 상회가 손애 넣고 있던 조선의 석조문화재를 걸고 일본 오사카에서 야외 경매를 실시했는데 간송이 이곳에서 통일신라 3층 석탑과 고려 3층 석탑. 석조사자탑, 조선 석등 등 4점에 총 1만2700원을 주고 낙찰받았는데요, 기와집 13채값과 맞먹었죠. 그런데 잘 사들인 것 같았은데 나중에 보니까 불국사에 서있던 통일신라시대 탑으로 알고 샀던 3층석탑이 알고보니 고려시대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그래서 이 탑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에 만족했죠.
<문=한마디로 바가지 쓴 거네요?>
답=이를테면 그렇죠. 그러나 1년 뒤에 벌어진 2차전에서는 통쾌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것이 바로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인 ‘혜원 전신첩(국보 135호)인데요.
<문=그 유명한 작품을 어떻게 손에 넣은거죠?>
답=1934년 간송은 일본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조선의 건축과 예술>이라는 책에 실린 흑백도판을 보면서 특히나 신윤복의 풍속화 2점을 뚫어지고 쳐다보고 있었는데요. 그 두 점이 나중에 ‘주유청강(舟遊淸江)’과 ‘상춘야흥(賞春野興)’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었습니다. ‘주유청강’은 양반들이 기생들과 한강에서 뱃놀이 하는 모습을 그렸고, ‘상춘야흥’은 화사한 봄날에 고관대작들이 기생들을 데리고 야외에 나와 봄놀이하는 모습을 그렸는데요. 이 그림 뿐 아니고 총 30여 점을 지금은 야마나카 상회가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혜원 신윤복의 '월야밀회'. 우리나라 최초의 키스신이라는 주장이 있다. 몰래 지켜보는 여인의 시선이 남다르다. 간송 전형필은 야마나카 상회가 갖고있던 혜원의 풍속도첩을 2만5000원에 구입했다. |간송미술관 소장
<문=야마나카 상회라면 너무 강한 상대 아니었나요?>
답=그러나 간송은 “혜원 그림 만큼은 확보하자”고 마음 먹고, 야마나카 상회에 연락했더니 30장에 5만원 달라고 했습니다. 5만원이면 기와집 10채 가격이 너무 비싸잖아요. 그래서 간송은 ‘인연이 없나보다’하고 포기했는데 야마나카 상회에서 ‘가격조정 좀 해보자‘고 연락이 왔다랍니다.
<문=가격조정이라면 흥정하자는 말이잖아요?>
답=그렇습니다. 그래서 간송이 중개인하고 당장 오사카로 날아갔답니다. 간송 앞에는 당시 야마나카 상회의 대표인 야마나카 사다지로가 나타났는데요. 간송이 일단 작품을 확인했는데 참으로 대단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당시 양반사회를 풍자한 풍속도가 어디 있는가. 한량과 기녀들의 일탈한 사랑을 은밀하면서 애로틱하게 표현한 작품들이 보였다는 거죠. 남녀의 야밤 자유연애를 그린 ‘월하정인’과, 첫 키스신의 장면인 ‘월야밀회’ 등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단오풍정’은 조선 최초의 누드화로 꼽힙니다. 무엇보다 혜원의 풍속도에는 여성(기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요. 여인들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이토록 잘 표현한 작품이 없다는 평을 듣죠. 담 안에 갇혀있던 여성들을 울타리 밖으로 해방시켰다는 겁니다.
<문=반면 작품 속 남자들은 좀 시시껄렁하죠?>
답=남성들을 ‘찌질이’로 표현했죠. 여자종의 손목을 잡아끄는 젊은 선비를 그린 ‘소년전홍’과, 성매매 현장을 표현한 ‘삼추가연’, 질탕한 스킨십을 그린 ‘청금상련’, 선비의 눈빛이 음흉한 ‘정변야화’ 등에 한심한 남자들로 나옵니다. 이 중에는 ‘당신의 마부가 되겠다’면서 기생이 탄 말을 모는 양반과, 기생의 담배불을 붙여주는 남자, 그리고 황당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진짜 마부를 그린 ‘연소답청’이 압권이죠. 또 기생집에서 술에 취해 난투극을 벌이는 ‘유곽쟁웅(기방난투)’도 당대 양반사회의 일면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대의 금기를 깬 것입니다.
세계적인 골동품 무역상이었던 야마나카 상회의 주인 야마나카 사다지로.
<문=간송이 혜원 신윤복 그림에 푹 빠졌네요?>
답=그렇습니다. 간송으로서는 절대 놓쳐서는 안될 작품들이어서 야마나카 대표하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죠. 야마나카가 “멀리서 왔으니 4만원까지는 내려드린다. 그 이하는 절대 안된다”고 했어요. 그러자 간송은 “2만원 이상은 절대 안된다”고 응수했답니다. 야마나카가 거절하자 간송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서 “인연이 없나 보네요. 섭섭하지만 제가 직접 그림을 보았으니 눈이 호강한 것으로 만족하렵니다”라 했대요.
<문=엄청난 신경전인데요?>
답=그렇습니다. 간송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작별인사를 고하고 떠나려 하자 야마나카가 그러더랍니다. “(간송) 선생. 제가 장삿속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닌데…. 이 화첩은 선생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라고 다시 흥정이 시작되고 지루한 싸움 끝에 2만5000원 현금으로 낙착되었답니다. 68살의 일본 골동품상이 28살의 젊은 조선인 수장가의 승리를 인정한거죠. 기와집 25채값이죠.
<문=지금 기와집 25채면 얼마 정도 될까요?>
답=글쎄요, 2만5000원이면 당시 서울의 8칸짜리 고급 한옥집 25채 가격이라는데 한 채 10억원짜리 아파트라도 250억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액수라 할 수 있죠, 20억원짜리면 500억원. 그런데 간송하고 야마나카 상회하고는 또한번 경매 드라마를 벌이는데요. 바로 참기름병을 두고 전쟁을 벌이죠.
<문=참기름병이라구요?>
답=그렇습니다. 경매전쟁은 1936년 벌어지는데 싸움이 시작은 1920년대 초로 올라갑니다. 즉 1920년대 초 어느 날 참기름을 팔던 행상이 서울 황금정(을지로 1가)에 사는 단골 일본인 여성을 찾아서 참기름을 팔았는데요. 기름을 담은 병을 유심히 본 일본인 여성이 “기름병도 참 예쁘네요. 저 병도 주세요.”하면서 1원을 더 얹어 5원에 참기름을 가득 담은 병을 샀답니다. 그런데 이 일본인 여성의 남편은 골동품상이었답니다.
고려 3층석탑. 야마나카 상회가 주최한 경매에서 한옥 6채 값인 6000원에 구입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석탑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되는데 그쳤다.|간송미술관 소장
<문=남편이 골동품상이라구요? ‘서당개 3년’ 속담이 떠오르네요?>
답=그러게요. 골동품상 남편은 병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대요. 병 표면에 붉은색, 검은색, 푸른 색 안료로 국화와 난초, 벌과 나비를 새겨넣었답니다. 남편은 부인의 안목을 극찬했답니다.
<문=그렇게 예쁜 백자가 어떻게 기름병이 된거죠?>
답=18세기 전반 왕실의 도자기를 굽던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는데. 그 마을 주민이 가마터에 묻혀있던 백자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냥 참기름을 넣어 내다팔았던거죠. 단돈 1원이었던 백자는 다른 골동품상에 60원에 팔렸고, 한단계 거쳐서 600원으로, 1932년 경매에서는 3000원으로 뛰었답니다.
<문=그럼 10년만에 3000배가 뛴 거네요?>
답=그렇습니다. 그런데 소장자가 죽으면서 유품 200점이 경매에 나왔는데, 경매 도록을 본 간송과 야마나카 상회, 그리고 또 한사람의 일본인 수집가가 이 백자에 꽂힌겁니다. 경매 예상가는 6000원으로 추정됐는데 더 올라갈 것 같았답니다.
<문=그러니까 간송, 야마나카, 그리고 또다른 일본인 수집가가 다투었다면 3파전이 된거네요?>
답=그렇습니다. 원래 간송은 경매장에는 대리인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본인이 직접 참석했답니다. 처음엔 3000원으로 시작했는데, 일본인 수집가가 5000원을 부르면서 그때부터 본격 경쟁이 시작되었답니다. 6000-7000으로 뛰고 간송측이 8000원 부르자 일본인 수잡기는 포기를 선언했는데요. 그래서 간송이 이겼다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9000원 부르더랍니다.
<문=야마나카 상회 측이었나요?>
답=그러자 간송 측이 ‘1만!’을 불렀고, 그때부터는 500원 단위 사움이 벌어졌대요. ‘1만500원!’ ‘1만1000원!’ ‘1만1500원!….’ 순식간에 ‘1만4500’이 되었답니다. 그런 다음엔 호가가 10원 단위로 세분화되고…..
야마나카 상회가 1934년 됴코에서 개최한 지나조선고미술전관에서 전시된 도자기류. 이중 12번(백자 주병)은 아카보시 고로라는 유명한 한국도자기 수집가가 구입해 1965년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이같은 목록을 통해 이런 저런 이유로 야마나카 상회를 통해 반출되고 판매된 한국문화재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 |주홍규의 논문 ‘야마나카 상회와 일본으로 유출된 한국문화재’에서
출처: https://leekihwan.khan.kr/entry/간송-전형필과-야마나카의-문화재-전쟁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문=이쯤되면 해보자는 거네요. 자존심 싸움이었네요?>
답=그렇습니다. 1만4510, 1만4520, 1만4530…. 간송측이 ‘1만4580!’을 부르자 그제서야 야마나카 상회측이 포기를 선언했답니다. 간송과 야마나카 사이에 펼쳐진 조선백자 경매사상 최고의 명승부는 이렇게 간송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낙찰받은 조선백자는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라는 긴 이름이 붙었고 국보(제29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문=정말 간송이 아니었다면 다 일본인 손에 넘어갔겠네요?>
답=그렇습니다. 국보 보물급 유물 중에는 일본 도쿄에 살던 영국인 변호가 존 갯스비가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그동안 수집한 최고급 명품 청자 20점을 모조리 간송에게 팔았습니다. 이 중 7점이 해방 이후에 국보와 보물이 되었습니다.
<문=어떻게 도쿄에 있던 개스비의 유물이 조선의 간송한테 팔게된거죠?>
답=1937년 일제는 중국에서 노구교 사건 일으켜서 중국하고 전면전 벌이는데요. 중일전쟁이죠. 일본에 체류하던 외국인들은 아 이제 일제가 중국 대륙 뿐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겠구나 하고 우려하죠. 그래서 ‘엑소더스’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도쿄로 가서 흥정했죠. 처음에는 쉽지 않았어요. 개스비는 점당 2만5000원씩 55만원을 제시. 전형필은 1만5000원씩 33만원을 제시했는데요.
<문=갭이 만만치 않았네요?>
답=그렇습니다. 일괄구입이므로 할인이 필요하다는 게 전형필의 생각이었고, 개스비는 하나하나가 명품이니 제값을 다 받아야 한다는 거였죠, 사흘간의 협상 끝에 38만원(전형필), 50만원(개스비)으로 조정됐지만 결렬됐습니다.
<문=문화재 매매 협상은 치열한 심리싸움이네요?>
답=그렇습니다. 전형필은 귀국했고 개스비는 영국박물관과 접촉했습니다. 그러나 영국박물관은 1차대전 이후 떠돌고 있었던 명화 수집이 우선순위였지 조선의 유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개스비는 결국 전형필을 다시 찾았죠, 서울을 방문해서 전형필과 다시 접촉했습니다.
27일 서울 강남구 케이옥션에서 열린 5월 경매에 나온 간송미술관 소장 보물 285호 금동보살입상이 시작가 15억 원에 경매에 부쳐졌지만 유찰됐다. |연합뉴스
<문=그렇다면 간송 측이 이니셔티브를 쥐게 됐네요?>
답=뭐 그래도 갑은 개스비였겠죠. 그래서 간송은 짓고 있던 박물관(당시 보화각, 간송미술관)을 구경시켰습니다. 당시 개인박물관은 당시 일본에서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개스비씨, 귀하가 수집한 고려청자를 이곳에 전시하면서 조선에도 이같은 찬란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라 했어요. 그러자 개스비가 부끄러움을 느꼈답니다.
<문=왜요?>
답=개스비가 서울에 오면서 생각했던 가격은 45만원이었답니다. ‘내가 45만원은 받아야지’했는데 간송이 보여준 공사중 박물관을 보고는 부끄러움을 느꼈다는거죠. ‘아 나는 이 유물을 영국박물관에 돈 받고 팔려고 있는데, 전형필은 단순한 수집욕이 아니라 조상들이 만든 청자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 청자들을 다시 되찾아가겠다는 거구나. 내가 졌다’하고….
<문=결국 얼마에 산 겁니까?>
답=결국 5만원을 깎아 40만원에 하겠다고 수정제의했답니다. 당시 간송에게는 현금이 없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팔았는데, 5000석논이랍니다. 80㎏ 쌀 1만가마니를 수확하는 논인데, 노모가 와서 아니 사금파리 사려고 논을 파는 게 말이 되냐고 했답니다.
<문=그러게요. 아무리 문화유산을 지키는게 중요하다지만 그렇게까지 하신 이유가 뭘까요?>
답=당시 간송 나이가 32살인데, 아무리 부자고 재벌이라도 문화유물을 구입하는데 몇 천억원대의 재산을 내던질 이가 지금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닌말로 사금파리 사는데 조상이 내려준 기름진 땅을 그렇게 팔 수가 있을까요. 게다가 그렇게 청자 20점을 포장한 오동나무 상자를 비행기 화물칸 아닌 좌석에 고이 모셔왔다고 합니다.
<문=참으로 대단한 분이네요>
답=화물칸이 아니라 좌석에 올려놓고 기체가 흔들려도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간 밧줄로 튼튼히 묶었답니다. 32살 청년의 수집이었다 개스비는 “귀하는 아직 연부역강하니 모쪼록 훌륭한 미술품을 많이 수집해서 세상에 소개하라”고 했답니다. 그런 분이 수집한 유물이니 미술관이니 사정이 어렵다고 해서 그 중 몇 점이나마 판다니까, 그리고 앞으로 더 팔 계획이 있다니까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거죠.
혜원 신윤복의 '이부탐춘'. 소복을 입은 여인이 여자종과 함께 개의 교미장면을 지켜보고 있다.|간송미술관 소장
<문=그러나 미술관 운영하기가 그렇게 힘드니 고민은 되겠네요.>
답=그렇습니다. 뭐 문화재 매매는 누구나 할 수 있는거지만 간송 전형필 선생하고 간송미술관이 문화유산 수호와 보존 측면의 상징성이 워낙 크다보니 관심을 받는 겁니다.
<문=국립박물관을 비롯한 국립기관이 구입하면 되지 않을까요?>
답=물론 그러는게 가장 좋죠. 그러나 국립박물관의 유물구입비는 전체 16개 국립박물관을 통틀어서 40억원 정도랍니다. 여력이 많지 않아요. 지금 보물 2건이 경매에 나왔는데 시작가가 15억원이라니까 이걸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문=고민스러운 부분이네요?>
답=그렇습니다. 간송미술관측도 그동안의 폐쇄성에서 탈피해서 보다 효과적인 박물관 운영을 위해 노력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너무 폐쇄적이라 문화재청에서도 간송미술관 사정을 잘 모릅니다. 국보 보물이 46건이나 되는데 아주 곤란한 문제죠. 중앙박물관 측도 간송미술관 문제 고민해보고 있다니까 좋은 대책이 나오기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간송의 문화재수집을 두고 월탄 박종화의 언급이 떠오르네요. “간송은 막대한 돈을 들여 민족의 얼을 사들였다‘고 했거든요. 간송의 뜻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27일 열린 경매에서 간송측이 내놓은 보물 두 건은 유찰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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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을 칼로 쪼개는 아픔"…전염병의 참상에 맞선 조선의 분투 (23) | 2020.05.15 |
고려 금속활자, 구텐베르크에 뒤처진 5가지 이유…발명 했지만 혁명 없었다 (27) | 2020.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