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하시중 이성계(守門下侍中 李成桂)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
1932년 10월 금강산 월출봉에서 우연히 이성계 사리함에서 보이는 명문 내용이다.
이성계와 이성계의 부인인 강씨가 사리장엄구 봉안 불사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두 사람이 사리함을 봉안했던 1391년 5월이면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인 한씨(신의왕후)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때였다.
그렇다면 조강지처인 한씨는 팽개치고 두번째 부인인 강씨(신덕왕후)만 명문에 새긴 이유는 뭘까.
■경처와 향처
이 대목에서 당대의 혼인제도를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고려 말에는 예법이 문란해지고 기강이 무너졌다. 대소관리들이 서울과 지방에 각각 처(아내)를 두고 마음대로 거느렸다. 이로 인해 남편이 죽은 뒤에 두 처의 자식들이 서로 적자임을 다퉈 원수가 됐다.”(<태조실록>)
요컨대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두는 게 고려말의 풍습이라는 것.
그렇다면 이성계의 경우도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가 처와 첩의 신분이 아니라 향처(한씨)와 경처(강씨)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성계에게 특히 영향을 끼친 부인은 경처, 즉 강씨였다.
함경도 출신인 이성계에게 권문세족 출신인 강(康)씨는 출세의 디딤돌이었다. 강씨의 아버지 강윤성과 작은 아버지 강윤충·강윤휘 형제는 충혜왕 공민왕 때 재상권문가로 세도를 떨쳤다.
이성계는 이미 한씨와의 사이에 장성한 6남 2녀를 두고 있었다.
그 가운데 둘째 방과(정종)와 다섯째 방원(태종)이 있었다. 첫째 부인 한씨와는 약 5살, 남편 이성계와는 약 20년 차이인 강씨는 2남1녀(방번·방석·경순공주)를 두었다.
■강씨는 여걸
그런데 서울 부인인 강씨는 여걸이었다. 남편을 도와 새왕조를 개창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씨의 소생인 이방원도 중요한 대소사를 강씨에게 보고했다. 예컨대 위화도 회군 때도 그랬다.
“위화도 회군 때 남은이 태조(이성계)를 추대할 것을 비밀리에 의논하고 이를 태종(이방원)에게 알렸다. 그러자 태종은 ‘이런 큰 일을 가벼이 말해서는 안된다’면서 강씨에게 아뢰어 전달했다.”(<연려실기술>)
조선을 세울 때까지는 이방원과 강씨가 동지적 관계였던 것이다.
또한 이성계는 자신의 가문을 격상시키려는 생각으로 강씨의 소생인 방번(무안대군)을 고려 왕족인 정양대군 왕우의 딸과 정략결혼을 시킨다.
한씨의 소생 6명을 제쳐두고 굳이 강씨의 소생을 왕족의 딸과 혼인시켰다는 것은 강씨의 위상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남자가 소심하기는…’
신덕왕후 강씨의 역할이 특히 눈에 띄는 사료가 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참살하자 이성계는 분기탱천한다.
이방원이 “정몽주가 우리 집을 몰락시키려 하는데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이성계의 노기는 걷히지 않았다.
"우리 가문은 충효로 알려져 있는데 함부로 대신을 죽였다니…. 용서할 수 없다.”
이때 신덕왕후 강씨가 나서 정색하면서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
“공(이성계)이 항상 대장군으로 자처하셨으면서…. 어찌 이렇게까지 놀라고 두려워하십니까.”
우유부단한 남편의 흔들리는 마음을 강씨가 확 휘어잡은 것이다.
■‘아이고 아이고….’
조선개국 후 세자책봉 과정에서 강씨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 배극렴·조준 등을 불러 세자 책봉 문제를 의논했다.
그 때 배극렴이 “시국이 평온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고 고했다.
강씨의 소생 둘은 적장자(신의왕후의 둘째아들 방과)도, 공있는 자(다섯째 방원)도 아니었다.
이를 몰래 듣고 있던 신덕왕후 강씨가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기가 질린 배극렴은 더는 말하지 못했다. 결국 강씨의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세웠다.
강씨의 강단과 위세가 엄청났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신덕왕후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1396년) 불과 2년만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세자로 책봉된 방석과 첫째 아들인 방번이 비명횡사한다.
태종 이방원과 한때는 동지적 관계였지만 왕위를 두고는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강씨는 한때 이방원이 책읽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아. 저 방원이가 내 아들이어야 하는데….”
신덕왕후 강씨는 사후 186년이 지난 뒤에야 재평가된다. 1582년(선조 15년)의 일이었다.
“신의왕후 한씨가 돌아가신 것이 고려말이며, 그 이후 태조를 내조한 이는 신덕왕후 뿐인데…. 태조가 이미 신덕왕후를 높여서 정식 배우자로 삼았고 태종 역시 모후로 삼았으니 누가 우리 신덕왕후를 국모로 보지 않겠습니까.”(<연려실기술> ‘정릉정사’)
■그래도 조강지처를 무시한 것은…
이러한 사료를 종합하면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이성계 사리함에 ‘신덕왕후 강씨’의 이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해도 조강지처인 신의왕후 한씨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는 없다. 신의왕후는 이때, 즉 1391년 5월 병석에 누워있었다.
그리곤 4개월 후인 9월 55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남편이 새로 얻은 부인(강씨)이 금강산에 사리함을 봉안하고 이름을 새겨넣을 때 신의왕후 한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병이 더 도지지 않았을까. 오죽했으면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 시대에 경처와 향처 등 2처제도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다.
“고려말엽 부부의 도리가 무너져 경·대부·사(士)가 욕망을 좇고 정애에 미혹되어 처가 있는데도 처를 얻고. 첩으로서 처를 삼는 자가 또한 있으니 적은 손실이 아니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태종실록>)
가만 보면 이성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이성계의 사리기에 담긴 스토리는 이렇듯 무궁무진하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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