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첩'이라는 보물이 있습니다. 지난 2004년 폐지 할머니의 수레에서 우연히 발견된 유물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편지입니다. 유배생활중인 다산은 아내 홍씨가 보내온 다홍치마를 재단해서 두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 4책과 외동딸에게 주는 매조도 그림을 그려 보냈습니다. 딸에게 준 매조도(매화병제도)는 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지만 아둘 둘에게 보냈다는 편지 4첩은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폐지 할머니의 수레에서 4책 중 3책이 극적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다산은 이 책을 <하피첩>이라 했습니다. 붉은 다홍치마에 쓴 편지라는 뜻입니다. 다산이 이 편지 글에서 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책에서는 그래도 정제된 말씨를 쓰지만 다른 편지글에서는 두 아들을 사정없이 꾸짖는 내용도 심심찮게 있습니다. 다산은 왜 그렇게 두 아들을 심하게 야단쳤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02회에서 전해드립니다.
2004년 어느 날 경기 수원의 아파트 공사장에 페지를 줍는 할머니가 나타났다.
폐지를 담은 수레(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할머니는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파트 공사 현장소장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 못쓰는 박스 좀 가져가면 안될까요.”
할머니는 공사장 한편에 모아둔 박스더미를 좀 가져가면 어떻겠냐고 부탁한 것이다.
“그렇게 하세요. 할머니.”
졸다가 깬 현장소장은 무심코 할머니가 끌고 온 수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뭐지.’
순간 현장소장의 눈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수레 안에 뭔가 책 같은 것이 보였다. 뭔지는 몰라도 왠지 범상치않은 헌 책이 3권 있었다.
“할머니, 잠깐만요. 제가 이 책은 가져도 될까요.”
“그렇게 해요.”
현장소장은 그렇게 헌 책들을 입수했지만 도통 무슨 책인지 알 수 없었다. 왠지 중요한 책인 것 같기는 한데 일단 해석이 안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소장은 결국 2년 뒤인 2006년 5월 ‘TV쇼 진품명품’에 감정을 의뢰했다. 이 글의 앞머리는 1995년부터 12년간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왕종근 아나운서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당시 책 3권을 감정한 김영복 감정위원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 책을 소개한 내용이 <다산시문집>과 <매화병제도>(고려대박물관 소장) 등에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전하지 않았던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이었던 것이다.
■‘진품명품 쇼’에 출연한 다산
<다산시문집>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을 적에 병이 든 아내가 헌 치마 다섯 폭(<매화병제도>엔 6폭으로 기술)을 보내왔다. 그것은 시집올 적에 가져온 훈염(시집갈 때 입는 예복)으로서 붉은빛이 담황색으로 바래서 서본(書本)으로 쓰기에 알맞았다. 이것을 잘라 조그만 첩(帖)을 만들어 손이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전해 준다. 다음 날에 이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하피첩’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곧 홍군(紅裙·다홍치마)의 전용된 말이다. 가경(嘉慶) 경오년(1810·순조 10년) 초가을에 다산(茶山)의 동암(東菴)에서 쓰다.”
다산이 1810년(순조 10년) 부인이 보내온 다홍치마에 아들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산의 글, 즉 하피첩은 200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도 다산 가문의 가보로 전해였을 터인데, 한국전쟁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렇게 기록으로만 남았던 유물이 폐지 할머니의 수레에서 확인된 것이다. 그랬으니 감정 전문가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다. 그렇게 200년 만에 현현한 다산의 ‘하피첩’에 1억원의 감정가를 매겼다.
기자가 ‘진품명품’을 진행했던 왕종근씨와 통화했더니 “사실 웬만하면 제가 그 유물을 구입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원래 다산을 존경했던 터에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나왔으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고 갖고 싶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왜 사냐”는 담당 PD의 만류로 포기했단다.
“하하. 지금도 너무 후회가 됩니다. 그때 구입했을 걸 하는 생각이….”
이후 몇몇 소장가의 손을 거치는 사이 문화재청에 의해 보물 1683-2호로 지정됐다. 다산의 유물은 예금보험공사가 파산한 부산저축은행의 전 대표로부터 압류했으며, 2015년 9월 서울 옥션 경매에 출품됐다. 파란만장한 운명 속에 이사람 저사람의 손때가 묻었던 ‘하피첩’은 그때 국립민속박물관의 품에 안겼다.
권선영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경매가는 민속박물관 1년 유물구입비(28억원)의 1/4이 넘는 7억5000만원으로 낙찰됐다”고 전했다. 개인보다는 그래도 국립기관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 손 저 손으로 떠다니는 처량한 신세는 모면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외동딸에게도 전한 마음
다산은 사실 부인 홍씨가 보내온 치마를 잘라 ‘하피첩’만 만든 것은 아니었다.
하피첩을 만들어 두 아들(학연·학유)에게 보낸 지 3년 뒤(1813년) 시집 가는 외동딸을 위해 남는 치마폭을 썼다. 시집가는 딸을 위한 아빠의 선물이었다.
다산은 치마폭으로 가리개를 만들어 그 가리개에 행복한 혼인생활을 축원하는 매조도를 그렸다. 두마리 새가 앉아 한 곳을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그러면서 부부가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아빠의 마음을 담은 시와, 가리개를 만든 사연을 적었다. 이것이 <매화병제도(梅花倂題圖)>이다.
“훨훨 나는 새 한마리 날아와.(翩翩飛鳥) 우리 뜰 매화나무에서 쉬네.(息我庭梅) 그윽한 그 매화향기에 끌려(有烈其芳) 반갑게 찾아왔네.(惠然其來) 이곳에 머물고 둥지 틀어(爰止爰棲)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樂爾家室). 꽃이 이미 활짝 피었으니(華之旣榮) 토실한 열매가 맺겠네.(有賁其實).”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 잘 살라는 아빠의 심정이 담겨있는 시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모습을 그리면서….
■낭만이 부족한 다산?
그런데 병에 걸린 부인 홍씨가 10년째 귀양살이 중인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를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르긴몰라도 죽도록 보고픈 남편에게 병든 아내가 보낸 ‘사랑의 징표’이었을 것이다. ‘부디 날 잊지 말아달라’는 뜻의…. 그런데 조선시대 ‘기러기’ 남편에게는 낭만이 좀 부족했던 모양이다.
아내가 그리울 때마다 꺼내봐야 할 치마를 보면서 고작 무엇을 떠올린 것일까. ‘세월이 흘러 담황색으로 바랜 다홍치마를 보니 글을 써서 서책으로 남기기에 꼭 알맞았다’는 것이다. 얼마나 멋없는 조선의 남자인가. 요즘 세상의 부인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남편이 보내온 하피첩과 매조도를 본 부인 홍씨의 가슴이 더 촉촉해졌을 지도 모르겠다. 다산은 부인의 체취가 풍기는 치마에 ‘기러기’ 아빠의 애틋한 정을 담아 아들(<하피첩>)과 딸(<매조도>)에게 보낸 것이니 말이다. 남편과 아빠의 마음을 치마폭에 모두 담아 보낸 것이니….
■‘홍군’ 보다는 이왕이면 ‘하피’
각설하고…. 할머니의 폐지 수레에서 발견된 <하피첩>과 고려대발굴관이 소장한 <매화병제도>의 재질을 비교해보니 똑같았다.
200년 만에 확인된 <하피첩>은 다산 정약용의 작품이 분명해졌다. <하피첩>이라 이름 붙인 것을 두고 다산은 “곧 홍군(紅裙·다홍치마)의 전용된 말”이라 부연설명했다.
원래 ‘홍군’, 즉 ‘다홍치마’는 다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처녀와 미인이라는 말도 있지만 기생이라는 말도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기왕이면 처녀가 좋다’는 성희롱의 의미도 담겨있다. 그래서 다산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홍군’보다는 ‘하피’라 표현했을 것이다.
게다가 하피는 중국 당·송 시대 신부가 입은 혼례복이었다. 다산은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색의 치마를 ‘하피’라 한 것이다.
하피첩은 본래 4첩이었지만 할머니의 수레에서는 3첩만 발견됐다. 1첩은 어디에 있을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나마 3첩이라도 건졌으니 불행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피첩을 구입한 국립민속박물관이 유물분석을 해보니 두 첩에서 ‘을(乙)’과 ‘정(丁)’의 글자를 발견했다. ‘甲 乙 丙 丁’의 순서로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유배생활의 시작
다산이 하피첩을 쓸 때의 상황은 어땠을까.
다산은 20대 초반 한때 심취했던 천주교 때문에 두고두고 곤욕을 치렀다. 그래도 다산을 그토록 아꼈던 정조 임금이 재위했을 때는 괜찮았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면서(1800년) 위기에 빠졌다. 신유박해(1801년)에 연루된 다산은 장기(경북 포항)로 유배형을 떠났다. 사형당하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해(1801년) 10월 이른바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졌다. 황사영이 청나라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편지는 놀라웠다. 신앙의 자유와 천주교 보호를 위해 외국 군대를 개입시키자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모반 대역죄에 해당됐다.
이 사건의 불똥은 다산에게 튀었다. 장기에서 유배중이던 다산은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됐다. 이 때부터 다산의 18년 유배생활이 시작됐다.
■‘너희는 폐족의 자손이다.’
<하피첩>은 유배 10년째인 1810년 제작됐다. 1801년 40살의 나이로 유배를 시작했을 때 19살과 16살이던 아들 둘은 어느 덧 28살(학연)과 25살(학유)이 됐다.
다산에게는 언제 석방될 지 모르는 절망의 나날이었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유독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폐족(廢族·망한 가문)’이라는 말이다. 다산은 아들 둘에게 보낸 편지에게 이 ‘폐족’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쓴다. 마치 ‘폐족’을 와신상담의 단어로 생각하는 듯 하다.
“이제 너희는 망한 가문의 자손이다.…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가지 밖에는 없다.”
“누누이 말했듯 청족(淸族)은 독서를 안해도 존중받지만 폐족이 되어 세련된 교양이 없으면 더욱 가증스러운 일이 된다. 너희 스스로 천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면 스스로 비참해진다.”
“평민이 배우지 않으면 못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폐족이 배우지 않으면 도리에 어긋나고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게 된다. 아무도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는데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되고 혼인길마저 막혀 천한 집안과 결혼하게 된다.”(<다산시문집>)
그랬으니 다산은 <하피첩>에서 이른바 폐족의 자손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몸가짐을 어찌 해야 할지, 친척끼리는 어찌 지내야 할 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 지 구구절절이 타이르고 있다.
■“재물은 메기와 같다. 잡으려면 빠져나간다.”
다산이 <하피첩>에서 두 아들에게 남긴 성어가 있었으니 ‘경직의방(敬直義方)’이다.
공경하는 마음을 다잡고. 의리로 자신의 행동을 반듯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산은 특히 천주교 때문에 가문이 폐족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한 일들이 가슴이 아팠나 보다.
“우리 가문은 선대부터 붕당에 관계하지 않았다. 더구나 곤경에 처하여 오래 사귄 벗들이 연못에 밀어넣고 그 위에 돌까지 던지는 짓까지 당했다.”
다산은 “그럼에도 너희는 당파적 사심을 철저하게 씻어버려라”고 신신당부한다.
다산이 또 강조하고 싶은 두 가지가 있었다. “근면은 부를 생산하고, 검소는 가난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난 벼슬이 없으니 농장을 물려줄 수 없다. 오로지 두 글자의 신령한 부적이 너희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기에 남긴다. 야박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나는 근면이요, 다른 하나는 검소이다. 두가지는 좋은 전답보다 낫다. 한평생 쓰고도 남는다.…요컨대 놀고 먹는 식구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근면이다.”
다산은 ‘검소’를 설명하면서 “의복은 몸만 가리면, 음식은 생명만 연장하면 된다”고 단언한다.
“두꺼운 베로 만든 옷은 볼품은 없어도 오래 입는다. 음식은 어떤가. 맛있는 횟감이나 생선도 입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물건이 된다.”(<하피첩> ‘2첩’)
나눔의 미학도 강조한다. 재물을 무작정 쌓아 놓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의 의복과 음식, 재물은 모두 망상에 불과하다. 입으면 해지고 먹으면 썩고 자손에서 물려주면 흩어지고 없어지기 마련이다.”
다산은 그러면서 “차라리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낫다”면서 메기론을 주장한다.
“재물을 저장하는 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 못하다.…단단히 잡으려 할 수록 더욱 미끄럽게 빠져나가니 재물이란 메기와 같은 것이다.”(<하피첩> ‘3첩’)
■“애가 타 견딜 수 없구나”
<하피첩>엔 유배중이던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26편이 실려있다.
그러나 <하피첩>은 두 아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붉은 비단에 쓴’ 글이어서 그런지 매우 정제된 내용을 담고 있다.
<하피첩>에 실리지 않는 다른 편지들을 보면 더욱 더 짙은 다산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경상도 장기(포항)로 유배를 떠나는 와중에 쓴 편지를 보라.
“네 어머니(다산의 부인)가 병이 난 것도 그렇고, 큰며느리까지 학질을 앓았다니…애가 타 견딜 수 없다. 섬에서 귀양살이하는 형님(정약전)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내가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오직 학유(장남)가 열심히 독서하는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어깨가 저려서 다 쓰지 못하고 이만 줄인다.”(<다산시문집>)
■두 아들을 비교한 다산
다산의 편지를 보면 자신과 두 아들, 즉 학연(1783~1859)·학유(1786~1855)의 자질을 비교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때로는 형제, 즉 학연과 학유를 비교하기도 했다.
예컨대 “내(다산) 재주가 너희보다 조금 나을 지 모르지만…” “학연의 재주와 기억력이 나 젊었을 때보다 부족하기는 하지만…” “학유의 재주와 역량이 큰 애(학연)보다 주판 한 알 쯤 부족한 듯 하지만…”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렇게 비교는 했지만 학연이나 학유가 열심히 한 덕분에 ‘더러 나(다산)보다 낳은 글이 제법 있고’(학연) ‘성품이 자상하고 무엇이든 생각해보려는 사고력이 있다’(학유)고 칭찬해주고 있다.(<다산시문집>)
아마도 ‘폐족, 즉 망한 자문의 자손으로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된다’는 자극을 주고 격려하는 아버지 다산 만의 방식이리라.
■깨알 가르침과 깨알 꾸지람
머나먼 유배지였건만 두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깨알 가르침’과 ‘깨알 꾸지람’은 이어진다.
두 아들이 큰 아버지(정약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을 꾸짖는 내용이 편지에 들어있다.
“큰아버지가 팔이 아팠을때…극진한 마음으로 봉양해본 적이 있느냐.…그러지 못한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느냐.…큰 아버지 섬기는 일은 오직 자기 아버지 섬기듯 하면 된다. 진실한 마음이라면 한달이 못가서 큰아버님의 마음이 풀릴 것이다.”
다산은 또 “니네 형제들, 제발 네 어머니한테 잘 하라”면서 시시콜콜 당부한다.
“요즘 세상에 사대부 집안에서 부녀자들이 오래 전부터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예사다. 연기 좀 쏘이면 어떠냐. 너희 형제는 새벽이나 늦은 밤에 방이 찬가 따뜻한가 늘 점검하고 요 밑에 손을 넣어보고 늘 따뜻하게 몸소 불을 때드리되 이런 일은 종을 시키지 않도록 해라.…두 아들이 효자가 되고 두 며느리가 효부가 된다면 나는 유배지(강진)에서 그냥 늙어죽어도 여한이 없다.”(<다산시문집>)
■“보고배운게 없어서인가.” “정말 한심하구나”
다산은 “제발 공부 좀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수없이 썼는데도 공부에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는 두 아들를 매섭게 질타한다.
“어찌된 셈이냐. 너희는 내 이야기를 이다지도 무시한단 말이냐. 도회지에서 자란 너희가 어릴 때 보고 배운 것이 문전의 잡객이나 시증 드는 하인 혹은 아전들 뿐이어서 그런 것인가. 이런 못된 병이 골수에 박혀…. 너희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 어째서 스스로 포기하려 하느냐.… 내가 유배생활에서 풀려 몇 년간이라도 너희와 생활 할 수만 있다면….”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로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것을 속상해 하며 사정없이 꾸짖고 있다.
어느 날 맏아들 학연이 유배중인 아버지를 찾아와 며칠 밤을 함께 지냈다. 그러나 다산의 심정은 찢어졌다. 옛날 가르쳐주었던 경전의 이론을 하나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우물 댔다는 것이다.
다산은 둘째아들 학유에게 전후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전하며 “정말 한심하다”며 한숨짓는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어린 날에 화를 만나 혈기를 빼앗기고, 정신을 지키지 않고 놓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럽고 한스럽다. 네 형이 이러니 너야 오죽하겠느냐. 문학이나 사학에 꽤나 취미를 가지고 있던 네 형이 이 지경이면 전혀 손도 못댄 너야 알만 하겠구나.”
이 편지를 받는 둘째아들 학유의 안색이 어땠을까. 형 때문에 동생인 자신도 얼결에 야단 맞은 셈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을 것이다.
■“술버릇이 그게 뭐냐. 왕년에 난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 다산의 질타는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다.
두 아들의 ‘술버릇’도 도마 위에 올린다. 둘째인 학유는 아버지를 찾아간 형(학연) 때문에 ‘의문의 1패, 2패’를 계속당하고 있다.
“네 형이 왔을 때 시험삼아 술 한잔을 마시게했더니 취하지 않더구나. 그래서 동생인 너의 주량은 어느 정도냐 물었더니 너는 형보다 2배도 넘는다 하더구나. 어찌 글공부는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훨씬 아비를 넘어서는 거야?”
이 대목에서 다산은 “왕년에 나는…”하면서 자신의 ‘리즈 시절’을 떠올린다.
“나도 내 주량을 알지 못한다. 예전에 상감(정조)께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히 부어서 하사하신 일이 있었다. ‘오늘 죽었구나’ 하고 할 수 없이 마셨는데 취하지 않았다. 한번은 술을 큰 사발로 하사받았는데 다른 학사들은 모두 인사불성이 됐다. 그러나 난 끄떡없었다. 그렇지만 너는 내가 술을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그러니까 ‘왕년에 나(다산)는’ 주량은 엄청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산은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데 있다”면서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소가 물마시듯 목구멍으로 들이붓는다면 어찌 술마시는 정취를 알겠느냐”고 질타한다.
요즘으로 치면 ‘원샷’을 경계한 것이다. 다산은 과도한 음주로 발생할 지도 모를 갖가지 병을 열거하면서 “제발 술을 입에서 끊고 마시지 마라”고 신신당부한다.
“술로 인한 병은 등창이 되기도 하며, 뇌저(腦疽)·치루(痔漏)·황달(黃疸) 등 별 기괴한 병에 걸리게 되는데, 이럴 경우 백약(百藥)이 무효가 된다.”(<다산시문집>)
■“내 책을 읽어주는게 효도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특히 신신당부한 말이 있었다.
“아비의 책을 읽고 한부분이라도 베껴두는 것이 나를 위한 효도”라는 것이다. 다산은 “아비 곁에 없어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 습성을 갖게 된 너희 형제 때문에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겠다”고 한탄한다.
“나 죽은 후에 아무리 깨끗한 희생과 풍성한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준다 해도 다 소용없다. 내 책 한 편 읽어주고 내 책 한 부분이라도 베껴두는 것이 훨씬 기쁠 것이다. 이 점 꼭 새겨두기 바란다.”(<여유당전서>)
아버지의 저작물을 읽지 않은 자식들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다시는 말도 하기 싫다.”
한번은 맏아들 학연이 의원 행세를 하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있다는 소문이 유배지 강진까지 들려왔다. 참으로 대단한 정보력이다.
다산이 즉각 질타의 편지를 보낸다.
“네가 갑자기 의원이 되었다고? 무슨 의도며 무슨 이익이 있어서 그랬느냐. 의술을 빙자해서 벼슬아치와 사귀면서 아버지의 석방을 도모하고 싶어서 그러느냐. 아서라. 그런 일은 해서도 안되지만 그럴 수도 없다.…이 뒤로도 너 하는 일을 모두 들을 것이다. 네가 그 일을 그만 두지 않으면 살아서는 연락도 안할 것이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하여라. 다시 말도 하기 싫다.”
화가 단단히 났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근본도 내력도 모르는 사람들과 사귀면서 혹여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벌인다면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을 뿐이라고 우려한 것이다.
■빵점 아버지인가, 전형적인 꼰대인가
자식교육에 무관심해야 훌륭한 아버지라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다산은 ‘빵점’짜리 아버지이자 전형적인 꼰대라 할 수 있다.
머나먼 유배지에서 두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시시콜콜 간섭하고 앙앙불락하며 꾸짖고 구체적인 지시까지 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숨막히는 아버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18년 귀양살이가 어디 다산의 자의에서 비롯된 것인가. 자신의 귀양으로 폐족이 된 가문을 일으켜야 했지만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다산의 처지를 생각해보라.
가족을 향한 다산의 애틋함은 다른 편지에도 고스란히 배어난다.
“큰 애(학연)가 4월 열흘께 말을 사서 꼭 온다고 했는데…. 벌써 이별할 생각에 괴로움이 앞서는구나.”(<다산시문집>)
1802년 유배 초기에 막내아들 농장(4)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산은 오열했다.
“우리 농아가 죽었다니 비참하구나 비참하구나. 가련한 애. 서럽고 슬프구나. 어리광 부리던 말 한마디 한마디, 귀엽던 행동 하나하나가 기특하고 어여쁘게만 생각되어 귓가에 쟁쟁하고 눈앞에 삼삼할 것이다.”(다산시문집>)
다산은 남은 자식들에게 “너무도 슬퍼할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고 신신당부한다. 막내아들은 홍역-천연두-종기의 과정을 겪으며 끝내 죽었다.
■궁핍했던 다산의 집
그렇다. 다산이 유배를 떠났을 때 아들들의 나이는 19살, 16살, 3살이었다. 외동 딸은 8살이었다.
남편없는 집안을 끌고 오롯이 가야 할 부인을 남겨두고 기약없는 유배길에 나서야 했던 다산의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귀양살이 1년 만에 막내아들이 죽는 일도 생겼다.
6남 3녀 중 이제 달랑 셋만 남은 것이다. 사실 다산의 집안은 풍족하지 않았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종 아이가 옆집 호박을 훔쳐다 죽을 쑨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홍씨 부인은 종을 크게 혼냈고, 다산은 민망한 마음을 ‘호박넋두리(南瓜歎)’라는 시에 담기도 했다.(<다산시문집>)
“계집종 남몰래 호박 훔쳐 가져와(小婢潛窺行鼠竊) 충성을 바쳤으나 도리어 맞는 야단(歸來效忠反逢怒)…어허 죄 없는 아이 그만 화를 푸소(嗚呼無罪且莫嗔)…나도 장차 때 만나면 청운에 오르겠지만(會有長風吹羽핵) 그게 되지 않으면 금광 찾아 나서야지(不然去鑿生金穴)…밭 두 뙈기만 있어도 계집종 죄 안 지었으리(有田二頃婢乃潔)”
이 판국에 가족들을 두고 귀양살이를 떠나야했던 아버지의 심정이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200년만에 홀연히 나타난 <하피첩>을 비롯해 다산 선생이 남긴 편지에는 부인과 자식을 향한 남편과 아버지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미안함과 애틋함이 때로는 꾸짖음의 형태로, 안타까움의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고….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2004
국립민속박물관, <하피첩-부모의 향기로운 은택>, 국립민속박물관, 2015
홍현순, '다산 정약용의 서예연구-하피첩을 중심으로', 대전대 석사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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