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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이순신 최후' 메모한 류성룡 다이어리서 세종의 '불멸 업적' 찾았다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 중인 유물 하나가 눈에 띈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지니고 다녔다는 ‘경자년 대통력’이다. 요즘으로 치면 ‘1600년판 다이어리’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전에도 ‘류성룡 대통력’은 8권이나 남아있었다. 안동 하회 풍산류씨 충효당(류성룡의 종택)에 1594·1596·1597·1598·1604·1605·1606·1607년판 대통력이 소장되어 있었다. 지난해 일본 소장자로부터 구입한 ‘1600년 대통력’은 류성룡의 9번째 다이어리라 할 수 있다.

1442년 세종이 한양의 하늘을 관측하여 일출몰과 밤낮길이 등을 계산한 결과를 정리한 <칠정산>(내편). 류성룡이 지니고 다닌 1600년 다이어리(대통력)에도 <칠정산>이 계산한 하짓날 일출몰 시각과 밤낮길이가 정확하게 적혀있다.

■“대장은 몸을 가벼이 해서는 안됩니다.”
이번 9번째 ‘류성룡 다이어리’에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의미가 첫장부터 담겨 있었다. 
임시로 철해 놓은 표지에 빼곡한 글씨 덕분에 단박에 유명세를 탔다.
“전투(노량해전·1598년 11월 19일) 하는 날에 직접 시석(화살과 돌)을 무릅쓰자, 부장들이 간언하여 만류하며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듣지 않고 직접 출전해 전쟁을 독려하다가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아아!(戰日 親當矢石 편裨諫止曰 大將不宜自輕 …(不)聽 親出督戰 旣而爲飛丸所中而死 嗚呼)”
‘절친’ 류성룡이 직접 쓴 이순신 장군(1545~1598)의 최후 모습이다. 
사실 장군의 최후는 여러 사료에 등장한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27일자 기자는 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전한다. 
“몸소 활을 쏘다 왜적의 탄환을 맞고 쓰러지니…옷으로 시신을 가리고 북을 치며 진격했다. 군사들이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했다. 왜적이 대패하니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死舜臣破生倭)고 했다.” 이항복(1556~1618)의 <백사집> 역시 인구에 회자되는 장군의 최후를 기록했다.

1600년판 류성룡 다이어리에 인쇄된 하짓날(5월12일)의 한양 일출·일몰 시각과 밤낮 길이는 140년전 세종이 편찬한 <칠정산>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장군이 배 위에 꿇어앉아 ‘오늘 결사항전에 나서니, 하느님께서 반드시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願天必殲此賊 祝罷)’라 기도했다…장군이 운명하기 전 주변을 돌아보며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諱言我死 勿令驚軍)’고 했다.”
류성룡의 <서애집> 역시 “날아오는 탄환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부하들에게는 ‘싸움이 급하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고 했다”고 전했다. 
언급한 이순신 장군의 최후는 한결같이 읽는 이의 가슴을 격동시키는 감동을 전해준다.
이번에 확인된 메모 역시 서애가 육필로 ‘장군의 최후’를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무엇보다 부장들이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된다(大將不宜自輕)’고 만류했고, 장군이 직접 출전해 전투를 독려했다(親出督戰)’는 내용은 <징비록>에는 보이지 않는 구절이다.(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경자년(1600년) 다이어리’에는 귀에 익은 이름들도 간간이 보인다. “1600년 6월5일 임진왜란 도중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1567~1618)이 귀국했고”, “6월7일…허준이 약품과 당선(중국 부채)를 보내줬다”는 구절이 보인다. 
또 3월25일 퇴계 이황(1501~1570) 연보(연대기)의 초안을 잡았고, 한달여 지난 4월29일 마무리지었다고 메모했다. 이밖에 지진이 일어난 사실(10월15·11월15일)에서부터 술을 담그는 방법을 여러차례 기록한 것도 눈에 띈다. 

■‘천기누설’은 황제의 전유물
그런데 필자는 서애의 초서 메모와 함께 활자로 인쇄된 조선시대 다이어리, 즉 달력(대통력)에 시쳇말로 ‘꽂혔다.’
‘대통력(大統曆)’이 무엇인가. 1370년(고려 공민왕 19) 수입된 명나라 달력이다. 
1653년(효종 4) 서양의 역법을 가미한 시헌력을 도입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조선에서 사용됐다.
어째 좀 기분이 싸하다. 왜 조선에서 명나라 달력인 ‘대통력’을 썼다는 얘기가 아닌가.
뭐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라 할 수 있다. 왜 ‘천기(天機)’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예부터 ‘천문 기상의 관측’은 천자(황제)의 고유권한이었다. 3300년전 무렵 중국 상나라 때 만들어진 상형문자 ‘왕(王)’을 보라.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시람(†)’이 바로 군주(천자·황제)였다. <서경> ‘요전’편은 “하늘의 뜻을 읽는 군주만이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필요한 ‘시간과 절기’를 베풀어 줄 수 있다(欽若昊天 敬授人時)”고 했다. 
생각해보라. 누구나 천체의 운행을 읽어(천기를 누설해서) 시간과 절기를 멋대로 정하면 어찌 되겠는가. 세상이 뒤죽박죽될 것이다. 따라서 천자(황제) 만이 제후국(신하)에게 달력을 만들어 배포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은 ‘원칙적으로’ 명나라 황제가 해마다 동짓날에 제작·반포한 ‘이듬해 대통력(달력)’을 받아왔다. 
그 때 중국에 보내는 사절단의 이름을, ‘동짓날 즈음’에 보낸다 해서 ‘동지사(冬至使)’라 했다.

류성룡의 1600년 다이어리(대통력)에는 그 날 그 날의 운세가 빼곡히 정리되어 있다. 류성룡이 메모해둔 것이 아니다. 달력 전문가가 천문관측의 결과와 인간의 길흉을 연구·해석해서 기록해두었다.

■명나라 달력 기다리다가는…
그러나 ‘원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일단 동지사의 중국 체류 기간이 너무 길었다. 
동짓날 즈음에 출발한 동지사는 40~60일 정도 연경에 머문 뒤 이듬해 3월 말이나 4월 초 귀국하는게 통례였다. 
그때면 이미 백성들이 농사짓느라 한창일텐데, 그 무슨 철 지난 달력이란 말인가. 
예컨대 1599년(선조 32) 12월 16일 선조가 “중국이 달력을 반포하기 전에 우리나라 역서를 배포하는 것이 꺼림칙하다”고 걱정했다. 그러자 승정원·예조·관상감이 일제히 나섰다.
“중국에서는 해마다 10월1일 달력을 나눠주는데…우린 동지사가 귀국하기를 기다리면 설이 지난 뒤가 될 것이고…백성들은 절기를 알지못해 농사 때를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빨리 달력을 배포해야…”(<선조실록>)
그래서 ‘원칙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물론 중국 황제가 제작한 대통력을 받아와 인쇄·반포하는 것이 당대의 법도였다. 
그러나 실상은 동짓날에 맞춰 조선 나름대로 ‘새해의 달력’을 제작·배포했음을 알 수 있다.
동지사가 받아오는 대통력은 그저 외교적인 요식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연경(베이징)과는 14분 차이…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중국의 달력, 즉 대통력은 조선의 ‘시간과 절기’와는 애초부터 맞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연경(북경)과 서울의 위도와 경도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달력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세종대왕은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사기> ‘열전·역이기전’)는 고사를 누누이 강조한 분이다. 
그런 마당에 ‘시간과 절기’가 다르면 백성들이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세종은 서울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 현상을 연구해서 조선 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내·외편)을 편찬(1442년)했다. 
특히 서울(한양)을 기준으로 일출·일몰 시각과 주야 시간을 계산하여 정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칠정산>(내편)으로 구한 서울의 동짓날 낮의 길이(39.12각)는 중국 연경(베이징·38.14각)보다 0.98각(1각=14분24초)이 길었다. 즉 서울의 동짓날 낮 길이는 위도가 높은 베이징에 비해 현대 시간으로 14분 이상 긴 것을 밝혀냈다. 
심수경(1516~1599)의 <견한잡록>에 잘 나와있다.
“중국은 낮의 길이가 가장 길 때가 60각,조선은 61각…조선의 일출이 가까우므로 1각의 차이가 있는 것…. 역서(달력)를 항상 활자로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했다.”

중국 황제가 내려주는 대통력(달력)을 받아오는 사절단(동지사)의 임무는 요식행위였다. 해마다 동짓날 즈음에 달력을 받으려고 파견되는 동지사는 이듬해 3~4월에 귀국하기 일쑤였다. 농사철을 위해 새해 달력을 배포하야 하는 조선으로서는 중국달력을 기다릴 수 없었다. 미리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제작·배포했다. 중국달력은 외교용·참고용이었다.

■류성룡 다이어리에 숨겨진 세종의 흔적
바로 이거다. 이것으로 이번에 구입 환수된 ‘류성룡 다이어리’가 ‘무늬만’ 중국 달력(대통력)인 것이 밝혀졌다.
‘류성룡 다이어리’ 중 하짓날인 1600년 5월12일자를 보자.(최고은 충북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원의 해석·검토) 
거기에는 ‘일출=인정 2각’ 및 ‘일몰=술초 1각’ 시간과 함께 ‘낮=61각’과 ‘밤=39각’의 길이가 인쇄되어 있다.
‘인정(寅正)’은 ‘새벽 4시’를, ‘2각’은 28분48초(1각=14분24초)를 각각 가리킨다. 따라서 1600년 5월12일(하지)의 일출시각은 새벽 4시28분48초라는 이야기다. 
일몰 시각인 ‘술초(戌初) 1각’은 몇시인가. ‘술초’는 오후 7시를, ‘1각’은 14분24초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날의 일몰시각은 ‘오후 7시14분24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류성룡 다이어리’는 하짓날인 이날(5월12일)의 낮(주·晝)길이를 61각(14시간38분24초), 밤(夜)길이를 39각(9시간21분36초)로 표시해놓았다.
이 대목에서 의심이 생긴다. 이것이 당시 한양(서울)의 일출·일몰 시각과 낮·밤길이가 맞는 것일까. 그냥 당시 명나라 연경(북경)의 낮·밤 길이와 일출·몰 시각이 아닌가. 그랬더니 최고은 연구원은 ‘증거자료’를 내 밀었다.


■세종실록에 정답에 나와있다
그것이 바로 <세종실록>의 ‘칠정산(내편)’ 기록이다. 
거기에는 서울기준으로 각 날짜별 일출·몰 시각과 주야(낮밤) 길이를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짓날의 일몰·일출 시각에 ‘인정 2각’(일출), ‘술초 1각’(일몰)이라고 분명히 적혀있지 않은가. 또한 주야간 길이에도 ‘낮 61각’과 ‘밤 39각’이라 또렷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이 158년 후인 1600년 ‘류성룡 다이어리’ 하짓날(5월12일)에도 한치의 틀림없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혹여 시니컬한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다른 나라보다 뒤늦게 해놓고 지나친 호들갑을 떠는게 아니냐”고…. 
그러나 1440년대에 이 정도로 천문학을 발전시킨 나라는 중국과 아라비아 외에는 조선밖에 없었다.

■무늬만 명나라 달력
물론 ‘류성룡 다이어리’를 포함한 달력(대통력)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달력 체제에 따라 편찬·배포되었다. 
그러나 누누이 강조했지만 중국 역법을 그대로 따랐다가는 시간과 절기가 맞지않았다. 농사를 망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세종 때 계산한 조선(서울) 하늘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즉 <칠정산>에 따라 달력을 수정해서 반포했다.
그 증거가 ‘1600년 류성룡 다이어리’에 보석처럼 박혀있었다. 그래서 ‘대통력’은 ‘무늬만 중국달력’일 뿐, 세종의 애민정신과 당대 최고 수준의 천문실력이 담겨있는 조선의 독자달력이라는 것이다. 
‘이듬해 달력’은 매년 10월15일 즈음에 4000부 정도 발행해서 중앙 및 지방의 각 관아와 종친, 문무당상관(3품 이상) 관리들에게 배포했다.(<경국대전> <서운관지>) 

■‘매미가 운다’ ‘
지금의 달력에는 달 이름과 양력 날짜, 그 날짜에 해당되는 음력 날짜, 요일 공휴일 표시, 24절기 등이 표시되어 있다. 
물론 ‘류성룡 다이어리’에서 보듯 조선시대 달력의 기본틀도 다르지 않았다.
음력 달력인만큼 큰달(30일)인지 작은달(29일)인지 대소(大小)를 표시하고 그 날짜가 배열된 칸에는 그 달에 들어있는 절기를 해당날짜에 적어놓았다.
그런데 ‘류성룡 다이어리’ 등 조선시대 달력에는 당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다. 
즉 반드시 60갑자로 순환하는 일진과, 그날의 기운을 지배하는 오행, 그날의 운세를 지배하는 별자리(28개 중), 12가지로 순환하는 운세가 적혀있다. 그중 24절기를 다시 3등분으로 세분화해서 각 절기의 특징을 설명해놓은 대목이 이채롭다.
단적인 예로 ‘류성룡 다이어리’의 ‘5월(음력) 세부 절기’를 설명한 내용을 보자.
‘당랑생(螳螂生·버마제비가 나온다), 격시명(貝+鳥)始鳴·때까치 비로소 운다), 반설무성(反舌無聲·개똥지빠귀가 울음을 멈춘다), 녹각해(鹿角解·사슴뿔이 빠진다), 조시명(조始鳴·매미가 비로소 운다), 반하생(半夏生·한약재인 반하가 난다)’

또 해당 날짜의 길흉(吉凶)을 알려주고, 그에따라 ‘해야 할 일(宜)’과 ‘해서는 안될 일(不宜)’까지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다. ‘류성룡 다이어리의 5월 12일(하지)’을 보자. 
이날에 ‘해야 좋은 일’(의·宜)은 ‘혼인맺기(結婚姻), 친구모임(會親友), 외출(出行), 입학, 문서작성(立券), 교역, 병치료(療病), 집수리(修造)와 흙을 나르는 일(動土)’이라 표기했다. 
또 ‘진시(辰時·아침 7~9시)에 하면 좋은 일’은 ‘산실 마련, 방아와 맷돌 놓기, 씨 뿌리기, 가축 기르기, 흙 파기, 발인 때 관을 둔 곳을 열기, 문 만들기, 부엌 만들기’라 했다. 이밖에 ‘집에 사람 들이기’, ‘병충해 잡기’, ‘바느질과 수놓기’, ‘재물 들이기’, ‘옷 만들기’, ‘목욕’, ‘담장 허물기’ 등 길흉을 세세하게 기록해놓았다. 
그 날 그 날의 운세가 어떤 지도 전통시대 사람들이 달력을 보는 중요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달력 대로만 했어도… 
그날의 길흉 운세가 실생활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문헌자료가 제법 있다.
<세종실록> 1446년(세종 28) 7월17일자는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것이 불길하다’는 달력의 운세에 따라 승하한 소헌왕후(세종 어머니)의 관이 출발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또 1557년(명종 12) 4월 25일 명종이 군사를 사열하기 위해 거둥할 날짜를 28일로 잡았다. 그러나 달력에 ‘28일 외출이 불길하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러자 명종은 “하필 불길하다는 날에 거둥할 일이 있느냐”면서 출행일을 29일 해뜰녘으로 바꿨다.(<명종실록>)
1403년(태종 3) 5월5일 경상도 조운선(세금 현물 운반선) 34척이 침몰해서 선원 등 1000여명과 쌀 1만여석이 수장되는 참극이 빚어졌다. 이때 태종은 “출항날(5월5일)은 수사일(受死日·대흉일)이라 배를 띄우면 안되었다”면서 “바람까지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모두 과인이 책임”이라고 자책했다.
물론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비과학적인 미신이라 손가락질 할 법 하다. 그러나 하늘의 조화를 두려워하고 늘 언행을 삼가며 살았던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었으니 어느 누가 비아냥 댈 수 있단 말인가.
‘류성룡 다이어리’에는 이렇게 이순신 장군의 충심 뿐 아니라 백성들을 긍휼히 여긴 세종의 애민정신까지 녹아있다. 당대 사람들의 깨알같은 하루하루의 삶까지도….(이 기사는 최고은 충북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원의 자문과 도움에 힘입어 작성되었습니다. 김종태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과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정성희 실학박물관장, 양홍진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센터장,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김충배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도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종태, ‘경진년 대통력 소고’, <생활문물연구> 7권, 국립민속박물관, 2002
신기철, ‘조선 후기 작력식과 역서의 역주 연구’, 충북대 석사논문, 2017 
이은희, 한영호, ‘조선초 간행의 교식가령(交食假令) 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4권 제1호, 한국과학사학회, 2012
정성희, <조선시대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5
최고은·이기원·민병희·리량(李亮)·류윤현·안영숙 (2018), ‘대통력의 일출과 일몰시간 계산을 위한 중국 수학적 기법 연구’, <천문회보(Astronomische Nachrichten)> 339권 6호,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