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히 놓인 말머리뼈, 사람 손과 너무 닮은 발톱 잘린 곰발바닥뼈의 정체는 무얼까.
1983~89년 조사된 몽촌토성의 미정리유물 일부가 40년 만에 공개됐다.
서울대박물관은 ‘왕도한성:몽촌토성 1983~2023’ 특별전(5월23~8월31일)에서 나무상자 속에 보관해왔던 동물유체 등 유물 일부를 꺼내 정리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 최초로 정리·공개되는 제사의 흔적 유구와 유물이 특히 눈길을 끈다.
특히 40년 동안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동·식물유체 400여점을 분석한 결과가 흥미롭다. 즉 소·사슴과·멧돼지·말·곰·개·꿩 등 포유류 및 조류와 대구, 숭어·백합 등의 어·패류 등으로 분류됐다.
■사람 손뼈와 똑같은 곰발바닥뼈
이중 순서대로 가지런히 놓인 치아가 보이는 말의 머리뼈가 도드라진다. 대략 8~9년 가량 된 성숙한 말로 판단된다.
인근 풍납토성 발굴에서도 제사용으로 묻은 말머리뼈가 확인된 바 있으니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라 할 수 있다.
필자의 시선을 확 잡아끈 뼈는 곰의 오른쪽 앞발이었다. 영락없는 사람의 손뼈로 보여 잠깐 흥분했지만, 분명 곰의 발뼈가 맞았다. 분석을 담당한 고은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사과정도 “곰의 발뼈와 사람의 손뼈는 얼핏보기에 흡사해서 헷갈릴 수 있다”고 웃었다. 권오영 서울대박물관장도 “엄청 비슷하다”고 했으니 필자만 무식한 것은 아닌듯 싶었다.
그러고보니 이 곰 앞발뼈가 수상하다. 완벽한듯 싶은데, 유독 발톱이 달린 뼈끝마디가 모두 잘려있다.
사람이 날카로운 부위인 발톱부분만 의도적으로 제거한 것이 분명하다.
■‘곰발바닥 요리만 먹고 죽을게’
곰발바닥 요리는 중국의 8대 진미 중 하나다. 오죽하면 맹자가 “내가 좋아하는 물고기와 곰발바닥 중 하나만 고르라면 곰발바닥을 택하겠다”(<맹자> ‘고자’)고 했을까. 또 <사기> ‘초세가’에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춘추시대 초나라 성왕(기원전 671~626)이 태자 책봉 문제로 다른 아들(목왕·기원전 625~614)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이때 성왕이 “곰발바닥 요리를 먹고 죽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유가 있었다.
딱딱한 곰발바닥이 완전히 익는 데는 최대 10일 정도가 걸린다. 성왕은 시간을 벌어 구원병을 기다리려고 한 것이다.
그런 얕은 수가 통할 리 없었다. 단칼에 거절당한 성왕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몽촌토성의 저장구덩이 속의 ‘발톱 잘린 곰발바닥’은 무엇일까.
만약 식용이었다면 몽촌토성에 곰발바닥 요리를 즐길만큼 지체높은 분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특수 부위’였던 것을 감안하면 하늘 제사 혹은 조상 제사에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확인된 동물 뼈 중 멧돼지와 노루, 꿩 등에서는 한가지 흥미로운 양상을 보인다.
야생 멧돼지의 경우 성숙한 수컷과 암컷 각 1개체씩, 생후 14~17개월 정도의 미성숙한 암컷 1개체로 추정된다.
사슴과의 경우 27~42개월(1개체), 42개월 이상(1개체), 20~23개월 미만(1개체)가 고루 출토됐다. 꿩 역시도 수컷(1개체), 암컷(1개체), 새끼(1개체) 등이 고루 확인됐다.
만약 단순한 식용이었다면 이렇게 정연하게 암컷과 수컷, 성숙한 개체와 미성숙한 개체 등을 세트로 묻었을까.
일정기간 가둬놓고 사육했다가 제사의식에 제물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스토리없는 밋밋한 발굴
이번 ‘몽촌토성 특별전’을 취재하면서 느낀 바가 하나 있었다. ‘제목’이 ‘왕도한성=몽촌토성’이지 않은가.
그런데 발굴보고서를 비롯해 어떤 지면에서도 그 흔한 발굴기조차 정리되지 않았다.
무령왕릉(1971)·천마총(1973)·전곡리(1979~1993)·금동대향로(1993)·풍납토성(1997~) 같은 대형발굴을 떠올려보라.
기막힌 발견 및 발굴 사연부터 뼈저린 반성문 등을 포함해서 학계는 물론이고 대중에게까지 미주알고주알 알려졌다.
웬만한 유적조사의 발굴기는 ‘인디애나 존스의 낭만’을 자극하는 멋진 스토리텔링이 아닌가.
그렇다면 몽촌토성의 경우 왜 발굴기가 없을까. 연구자들에게 물어봤더니 몇가지로 이유를 풀어주었다.
우선 무령왕릉·전곡리·금동대향로·풍납토성처럼 드라마틱한 발견에 이은 발굴도 아니요, 천마총·황남대총처럼 학술조사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몽촌토성 발굴은 88서울올림픽 개최의 산물이었다.
몽촌토성 일원이 올림픽경기장 건립지로 선정됨에 따라 시작된 발굴조사였다.
그랬으니 매우 극적이거나 심금을 울릴만한 발견·발굴기가 나오기 어려웠다.
■애매한 발굴성과
또한 1989년까지 총 6차례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또한 애매했다.
물론 구릉이라는 자연지형을 이용하면서 구간별로 단단한 판축기법으로 쌓은 몽촌토성벽의 위상은 예사롭지 않았다.
많은 노동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 토목공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물 가운데는 ‘동전무늬 도기편’(서진·265~317)과 ‘금동제 허리띠 꾸미개’(동진·317~420)가 의미심장했다.
이 중국제 유물들로 몽촌토성의 축조시점을 3세기 후반까지 올려보는 견해도 나왔다.
1989년 발굴에서 적심석(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을 갖춘 건물터가 확인됐다. 여기에 조경의 의미가 큰 연못지의 흔적도 보였다. 그래서 1989년판 <몽촌토성 보고서>는 ‘몽촌토성=한성백제 시대의 도성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성백제 시대의 도성이라면 무엇인가. 바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왕성인 ‘하남위례성’이다.
비록 축조시기가 <삼국사기> ‘온조왕’조의 기록처럼 ‘기원전 6년’은 아니지만 3세기 중후반에 성을 쌓았다면 어떨까.
백제가 관등제 설치와 공복 제정, 율령 반포를 통해 고대국가로 발돋움했다는 고이왕(재위 234~284)의 치세와 얼추 맞아 떨어진다.
■통설이 된 몽촌토성=위례성설
그러나 여전히 석연치않은 구석이 있었다. 서울대박물관이 펴낸 1987년·89년 발굴보고서에 그러한 고민이 읽힌다.
‘아직 핵심세력집단이 거주한 기와건물이 나오지 않았다’(1987), ‘도성임을 뒷받침할만한 궁궐터나 관청터 같은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다’(1989)는 등의 서술이 그렇다. 아닌게 아니라 1989년 확인된 ‘적심 건물터’에서도 기와가 출토되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탓이었을까. ‘몽촌토성=왕성(하남위례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통설로 굳어졌다.
하지만 1997년부터 몽촌토성과 750m 떨어진 풍납토성에서 경천동지할 유구와 유물이 쏟아지자 급반전이 이뤄졌다.
풍납토성 발굴결과 지하 2.5~4m에 걸쳐 유물포함층이 광범위하게 보였다. 특히 왕궁터로 추정된 경당연립주택 지구에서 집자리와 제사 관련 대형 건물터가 확인됐다. 이곳에서는 전돌·와당·초대형 항아리·중국제 도자기·오수전(중국 동전)·‘대부(大夫)’명 항아리 등 500상자 분량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판축기법으로 쌓은 성벽은 폭 43m 이상에 현존 높이만 11m에 이르는 대규모 토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위험한 쾌도난마
‘하남위례성=풍납토성’ 견해가 급부상하자 이른바 ‘몽촌토성 통설파’가 한때 거센 반격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특히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풍납토성 서벽 및 해자 흔적을 발굴하면서 자연제방을 성벽으로 둔갑시켰다”고 폄훼했다. ‘인공적으로 쌓거나 만든 성벽이 아니라 홍수와 같은 자연현상으로 저절로 형성된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풍납토성의 발굴성과에 급격하게 힘을 잃었다.
필자는 2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때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고고학 분야에서 ‘쾌도난마’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어찌 살아보지도 않은 1000년, 2000년 전의 역사를 두고 ‘내 말 만이 옳다’는 딱 잘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한산, 별궁, 남성=몽촌토성’
아무튼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발견·발굴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왕성이라는 데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때 ‘하남위례성’으로 대접받았던 몽촌토성과의 관계는 어떨까.
일단 축조시기는 ‘풍납토성 먼저(2세기~4세기 중후반)’, ‘몽촌토성 나중(3세기 중후반~4세기 후반)’이라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두 성의 관계를 두고도 다양한 견해가 등장했다.
우선 <삼국사기> ‘근초고왕’조에 “371년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는 기사가 보인다. 이 기사에 주목해서 근초고왕이 원래의 도성(풍납토성)에서 한산(몽촌토성)으로 옮겨갔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 <삼국사기> ‘아신왕’조는 “392년 아신왕이 한성의 별궁(몽촌토성)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아신왕이 태어난 별궁이 바로 ‘몽촌토성’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이어 <삼국사기> ‘개로왕’조에 “475년 고구려군이 ‘북성(北城)’을 빼앗고 (개로왕이 몸을 피한) ‘남성(南城)’을 공격해서…”라는 표현이 있다. 이에 따라 ‘풍납토성=북성’, ‘몽촌토성=남성’이라는 해석이 있다.
<삼국사기> 기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초고왕 재위(346~375) 시절부터 두 궁궐을 경영했다는 것이다.
근초고왕은 삼국 중 가장 먼저 최전성기를 이룬 군주다. 369년 고국원왕(331~371)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무찌른 뒤 한강 남쪽에서 대대적인 열병식을 벌였다. <삼국사기>는 “근초고왕이 군대 사열 때 (황제의 색깔인) 황색의 깃발을 사용했다”고 했다. 근초고왕은 ‘백제=황제국’임을 뽐낸 것이다.
2년 뒤(371년) 평양성을 공격한 근초고왕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고 한반도의 패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뒤 곧바로 도읍을 한산(몽촌토성)으로 옮겼다.
■한성백제판 비버리힐스 구축?
근초고왕은 왜 ‘풍납토성·몽촌토성’이라는 ‘2성 체제’를 구축했을까.
당시 한성백제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자 위례성(풍납토성)에는 수많은 인구가 몰려들었다.
풍납토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유구의 밀집도가 매우 높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성 내부는 점차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도성민들의 공간이 성바깥으로 계속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최근들어 천호동과 풍납동, 방이동, 신천동 등 풍납토성 외곽지역에서 4~5세기 여러차례 대규모 재개발·재건축이 이뤄진 명백한 흔적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렇게 기존의 왕성(풍납토성) 내외가 폭발적으로 확대되자 왕과 왕·귀족들은 제2의 공간을 찾게 된다.
그곳이 바로 ‘한산’, ‘별궁’ ‘남성’으로 일컬어진 몽촌토성이었을 것이다.
■한강뷰, 북·남한산뷰, 평지뷰
몽촌산은 남한산(해발 480m)에서 뻗어 내려온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최고봉인 망월봉의 해발고도는 44.8m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발 40~20m 정도의 구릉부에 서면 사방이 탁 트인 ‘한강뷰’와 ‘북한산 및 남한산뷰’, ‘평지뷰’를 만끽할 수 있다. 만약 371년 무렵 근초고왕을 비롯한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비록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대승을 거두었지만, 고구려의 반격에 대비해야 했다.
그렇다면 한강 북쪽과 도성(풍납토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몽촌산에 방어성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또 왕과 왕·귀족 입장에서는 인구 포화를 이룬 도성보다는 도성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몽촌산 쪽에 ‘배타적인 그들만의 공간’을 마련한 것일 수도 있다. 한성백제판 강남개발일까, 혹은 ‘비버리힐스’ 조성일까.
그렇다면 기와를 얹은 궁궐터나 관청터가 아직 보이지 않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연구자는 “애초부터 몽촌토성에서는 기와 궁궐 및 관청을 짓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일본 아스카(飛鳥·538~710) 시대의 일왕 거처인 이타부키궁(板蓋宮)처럼 나무 지붕을 이은 ‘특별한 별궁’을 건설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몽촌토성 내부를 전면 발굴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속단하기는 어렵다.
추후 발굴에서 기와를 얹은 궁궐이나 건물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지 않을까….
2016년 풍납토성과 4㎞, 몽촌토성에서 2.5㎞ 정도 떨어진 경기 하남 감일동에서 의미심장한 고분군이 발견됐다.
한성백제 시대의 굴식돌방무덤 52기였다. 새롭게 확인된 감일동 고분군은 한성백제 귀족의 공동묘지로 해석됐다.
■땅따먹기, 제기차기의 흔적
2013년 이후 몽촌토성에서는 북문터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우선 한성백제인들의 유물 중에는 몽촌토성 얼굴무늬 도기 두 점이 눈길을 끈다.
당시 도기를 만든 장인의 자화상을 새겨 놓은 것인지, 혹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새겨 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떤 경우든 1600~1700년전 한성백제인의 얼굴인 것은 분명하다.
또하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출토 유물 중 마치 원반처럼 생긴 흙제품이 흥미롭다. 최근 사방치기(땅따먹기)와 제기차기의 도구(심)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475년 한성 함락 이후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점유했음을 알려주는 유물도 다수 출토됐다. 고구려가 백제가 조성한 도로와 건물 등을 개보수해서 사용한 흔적을 확인한 것이다. 특히 백제가 조성한 회전교차로와, 그 안의 집수정(우물 혹은 연못)에서 고구려계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가장 오래된 명문목간(5~6세기)과 추정 자(尺·30.1㎝)가 출토됐다.
■1600~1700년전 한성시의 모습은?
이번 서울대박물관의 특별전을 맞고보니 1600~1700년전의 백제의 도읍인 ‘한성시’가 한눈에 펼쳐진다.
근초고왕 시대, 즉 371년 무렵 한강을 중심으로 물류가 넘쳐나고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래서 인구 폭발로 도심(풍납토성)이 확장되던 그 시대, 제2의 왕성을 ‘뷰 값’하는 곳(몽촌산)에 쌓았던…. 그것이 도성(풍납토성)에서 750m 떨어진 몽촌토성이다. 그 사이 공간엔 도로와 민가, 경작지, 공방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을 것이다.
또 왕성 외곽으로 석촌동 고분군과 같은 왕릉과 감일동 고분군 같은 귀족 및 관료의 묘역이 신분에 따라 입지를 달리하여 형성되었을 것이고….(이 기사는 권오영 서울대 박물관장과 고은별 서울대학원 박사과정, 이정은 서울대박물관 학예연구사, 홍승연 전 서울대박물관 연구원,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한성백제박물관의 최진석·최충기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권오영·고은별·이정은·홍승연, <몽촌토성, 새롭게 다시 보고하다>(서울대 박물관 학술총서 21). 2023
한성백제박물관, <왕도 한성-풍납토성과 몽촌토성>(개관 10주년기념 특별전시), 2022
이형구, ‘몽촌산성에서 발굴된 백제 유적과 통일신라 유적의 역사적 의의’, <신라사학보> 34, 2015
몽촌토성발굴조사단, <몽촌토성발굴보고>, 1985
서울대박물관, <몽촌토성 동북지구 발굴보고>, 1987
서울대박물관, <몽촌토성 동남지구 발굴보고>, 1988
서울대박물관, <몽촌토성 서남지구 발굴보고>,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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