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나이 66세이고, 지병이 있는데다, 코에 혹이 생겨 모양이 보기 흉한데, 세월이 갈수록 더하니….”
<선조실록> 1606년(선조 39) 9월1일자 기사이다. 당흥부원군 홍진(1541~1616)이 지병 때문에 선조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는 내용이다. 실록의 기자가 홍진 스스로 밝힌 사직 이유를 기술하면서 달아놓은 각주가 ‘TMI’ 그 자체다,
“홍진은 키가 다섯자(150㎝)도 안되는데, 코는 주먹만큼 커서 당시 보는 사람마다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마침내 콧병이 나서 출입하지 못하고 폐인이 되었다.”
실록의 기자가 좀 심했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홍진의 용모에 ‘팩폭’을 가하면서까지 소개했을까. 굳이? 지금 같으면 남의 신체적 약점을 드러내며 저격한 ‘기레기’ 소리를 들을 법하다.
■놀림감이 된 주먹코 공신
홍진이 누구인가. 한성판윤과 대사헌, 이조·예조·형조판서, 판의금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길을 끝까지 수행한 공로로 호성공신에 올랐다.
그런 분이 말년에 예사롭지않은 지병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홍진은 “코 끝에 구멍이 나서 곪지도, 아물지도 않고, 열과 오한이 번갈아 와서 머리가 아프고 먹는 것이 역하다”면서 사직을 청했다.
대체 어떤 병이기에 코주부처럼 코가 커졌고, 구멍까지 뚫려서 보는 사람들이 수근댔다는 걸까.
마침 그 당시 홍진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이 있다. 그것이 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홍진의 초상화다.
초상화를 보면 정말로 유난히 코가 커서 금방 눈에 띈다.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변 연구’로 박사학위(2014·명지대)를 받은 이성낙 박사(가천대 명예총장)는 “홍진의 병명을 임상학적으로 ‘비류(鼻瘤·Rhinophyma)’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쉬운말로 ‘딸기코’인데, 음주가 주원인으로 알려져서 ‘주사비(酒사鼻)’로도 일컬어진다. 하지만 오해다.
음주가 증상을 악화시킬 수는 있지만 기름샘(피지선)의 비대증이 주원인이다. 그냥 딸기코로 끝날 수도 있지만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염증이 생기면 홍진처럼 증세가 악화한다.
이성낙 박사는 “요즘은 항생제가 있어서 치료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랬으니 홍진의 괴로움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초상화를 사진이라 한 이유
의문이 생긴다. 관복을 곱게 차려입고, 소위 말해서 ‘때빼고 광낸 뒤’ 그리는 초상화가 아닌가.
그런 초상화에 남들이 손뼉을 치고 흉을 볼 정도로 딸기코에 주먹코가 된 얼굴을 곧이곧대로 표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실록의 기자를 욕했지만, 초상화를 그린 화가 역시 ‘홍진’을 시쳇말로 ‘멕이려고’ 그렇게 그린 것일까.
그러나 그 분들을 탓할 수 없다. 조선시대 사관만 해도 ‘목이 달아나도 사필은 꺾을 수 없다(頭可斷 必不可斷)’고 고개를 뻣뻣이 세운 이들이었다. 화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송의 유학자 정이(1033~1107)의 언급대로 ‘터럭 한오라기가 달라도 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이라는 원칙에 따라 초상화를 그렸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표암 강세황(1713~1791)은 영락없는 ‘잔나비 모양’의 자화상(평론가 오주석의 표현)을 그려놓았다. 그러면서 그림의 한편에 “내가 몸집도 작고 얼굴도 잘생긴 편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종종 날 얕잡아 본다”고 인정했다.
표암이 ‘그 초상화는 내가 그리고 그 찬문도 내가 썼다(기진자사 기찬자작·其眞自寫 其贊自作)’고 남긴 글의 말미가 함축적이다. 여기서 표암은 ‘초상(肖像)’, 즉 ‘닮을 초(肖)’에 ‘본뜬 상(像)’이라 하지않고 ‘사진(寫眞)’이라 했다.
왜 ‘참 진(眞)’자를 썼을까. ‘참(眞)’의 어원은 ‘차다’는 동사에서 비롯됐다.
‘초상화 내면에서 차오르는, 내면의 것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 한다.
1713년(숙종 39) 5월6일 숙종의 초상화 제작을 총괄한 이이명(1658~1722)은 “전신(傳神·그리는 대상의 내면세계까지 표현)을 ‘사진(寫眞)’이라 하니 임금의 초상화 역시 ‘어진’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승정원일기>)고 설명했다.
■“주상, 내 초상화 불태우세요.”
이렇게 터럭 한 올도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사진 정신으로 초상화를 그렸으니 어땠을까.
자타공인의 무결점 미남이 아니고서야 자기 사진에 만족하는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다. 더욱이 만백성의 어버지이자 지존인 임금은 더했다. 단적인 예로 효성이 지극한 세종(1418~1450)은 상왕 태종(1400~1418)의 어진을 그려주었다.
그런데 완성된 어진을 본 주인공 태종은 “당장 불살라버리라”고 명했다.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다면 내 자신이 아니다(若有一毫未盡 卽非吾親)’라는 말이 있어요. 주상! 이 초상화는 불태우는게 좋을 것 같아요.”
필시 태종은 너무도 극사실주의로 그려진 당신의 얼굴이 꼴보기 싫었을 것이다. 하기야 자기 사진을 보고 ‘잘 나왔다’고 여기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세종실록> 1444년 10월22일)
■사마귀까지 그린 태조 이성계의 어진
그래도 지존의 얼굴인데, 요즘처럼 어진에 ‘뽀샵 처리’는 하지 않았을까.
끝까지 이런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주 경기전에 모셔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라.
이 어진은 태조 재위(1392~1398) 당시 제작→1409년(태종 9) 모사→1763년(영조 39) 수리→1872년(고종 9) 화가 조중묵(생몰년 미상) 재모사 등을 거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어진의 오른쪽 눈썹 위를 자세히 보라. 지름 약 0.7~0.8㎝ 가량의 사마귀 같은 점이 달려있다.
이성낙 박사는 전문용어로 ‘모반세포성모반’이라 했다. 태어날 때부터 난 점(작은 혹)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다른 이도 아니고, 조선의 창업주인 태조가 아니던가. 그런데 후대 임금들의 게다가 세 번이나 모사 및 수리를 거쳤지만 그 작디작은 사마귀 하나 ‘뽀샵’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것이야말로 터럭 한 올 고치지 않고 그린 초상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여드름 자국에서 딸기코까지
이런 ‘극사실주의 초상화 기법’ 덕분에 이성낙 박사(피부과 전문의)의 박사 학위(명지대) 논문이 나올 수 있었다.
조선시대 초상화 519점 주인공의 얼굴에 나타난 병변(병으로 일어나는 생체 변화)을 해석한 흥미로운 연구였다.(이성낙 박사는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눌와, 2018’를 펴냈다.)
분석결과 ‘후천적으로 얼굴에 난 점(멜라닌 세포 모반·113점·21.77%)은 아무 것도 아니다. 천연두 흉터가 역력한 것은 73점(14%)에 달했다. 검버섯의 일종인 ‘노인성 흑자’(85점·16.37%)’와 ‘지루각화증’(37점·7.12%)도 여럿 보였다. 앞서 언급한 홍진의 주먹코·딸기코 증상인 ‘주사(酒사)’의 경우도 13점(2.5%)에 달했다. 이밖에 무모증, 다모증, 백반증, 오타 모반(갈색 또는 흑청색의 넓은 반점), 피부 홍반 루푸스, 칼자국 모양의 국소경피증 등 희귀질환이 포착되었다. 또 간경화 말기 임을 웅변해주는 ‘흑색황달’(9명)이나 ‘사시(斜視·3명)’는 물론 실명(失明·4명)의 케이스도 보였다.
■모공에 난 털 3올까지
예컨대 문신 신홍주(1752~1829)의 초상화는 사진을 능가하는 극사실주의를 보여준다.
왼쪽 코입술주름에서 보이는 작은 혹은 아무 것도 아니다. 빼곡한 수염 속에 숨어있던 더 작은 혹이 보인다. 화가가 주인공의 코 앞에서 확대경을 들이대고 관찰해가며 그린 것 같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초상화는 어떤가. 뺨과 코에 천연두가 살짝 스치고 지나간 흔적까지 그렸다.
서직수(1735~1811)의 얼굴을 보라. 당대의 최고화가인 단원 김홍도(1745~?)가 몸을, 초상화의 대가인 이명기(1756~?)가 얼굴을 분담해서 그렸다. 그런데 초상화에 피부 노화에 따른 검버섯을 옅은 색으로 10여개 표현했다.
그러나 이건 양념에 불과하다. 이성낙 박사는 이 대목에서 서직수의 왼쪽 뺨을 자세히 보라고 한다. 과연 그곳에 색소모반(멜라닌 세포가 증식해서 발생된 점) 3개를 표현했다. 그런데 글쎄 그 중 하나에 털오라기가 3개 나있다. 한 모공에서 나온 털 세개를 이렇게 정확하게 포착했다니…. 주인공(서직수) 코 앞에서 “터럭 한 올이라도 놓치면 안된다”고 눈을 부릅뜨며 초상화를 그렸을 화가 이명기가 떠오른다.
■여드름 자국에서 간경변증의 흔적까지
희귀병의 사례도 여럿 포착된다. 초대 규장각 제학을 지낸 서명응(1716~1787)의 초상화를 보라.
오른쪽 눈가에 이른바 오타 모반이, 왼쪽 턱관절 부위와 귀에는 털모반이 보인다. 오타 모반은 아시아인에게 나타나는 몽골 반점의 한 유형이다. 일본 의사인 오타 마사오(太田正雄·1885~1945)가 1939년 최초로 학계에 보고한 질환이다. 그러나 그보다 150년 가까이 앞선 1781년에 그려진 조선의 초상화에 이미 ‘오타 모반’이 표현되어 있었다.
또한 문신 송창명(1689~1769)의 초상화에서는 ‘백반증’을 앓고 있었다는 증거가 포착됐다. 정상피부가 색소 침윤(번짐)과 흰색피부가 되기를 반복하면서 커지는 병변을 아주 자세하게 표현했다.
이성낙 박사는 ‘송창명 초상화’의 백반증을 다룬 논문을 1982년 독일 피부과학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데어 하우트아르츠트>)에 발표했다. 이 초상화는 백반증에 관현 세계 최초의 그림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청춘의 상징’이라는 여드름 자국도 몇몇 초상화에서 보인다.
영의정을 지낸 서매수(1731~1818)의 초상화는 마치 천연두 자국같은 흉터가 남아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심한 여드름 자국임을 알 수 있다. 흉터가 코를 중심으로 마름모꼴 안에 모여있다. 여드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피부의 기름샘(피지선)이 코와 입 주변에 몰려있기 때문에 이것은 여드름 병변의 교과서적인 분포라 할 수 있다.
표암 강세황의 맏아들인 강인(1729~1791)의 초상화에도 심한 여드름 자국이 목격된다. 극심한 여드름에 시달렸을 서매수와 강인, 두 분의 ‘젊은 날의 초상’을 짐작케 한다.
선조의 의주몽진길을 수행한 공로로 호성공신이 된 내시 김새신(1555~1633)의 초상화(추정)도 눈길을 끈다.
수염이 표현되지 않아 내시로 여겨지며, 그중에서도 공신작위를 받은 김새신으로 추정된다. 반대로 유복명(1685~1760)의 초상화에는 얼굴 전체를 뒤덮은 털이 보인다. 희귀피부질환인 다모증을 앓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영조 때의 공신인 오명항(1673~1728)처럼 극적인 초상화도 없을 것 같다.
오명항은 이조·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이인좌의 난(1728)을 진압한 공로로 분무공신이 되어 우의정에 오른 뒤 곧바로 사망한 인물이다. 그런 오명항을 그린 초상화가 일본 뎬리대 도서관과 경기도 박물관에 1점씩 소장되어 있다.
이 두 초상화는 같은 해(1728년) 그려졌다. 경기도박물관 소장품은 이인좌의 난 진압으로 분무공신이 되면서 그린 공신상이다. 뎬리대도서관 소장품은 6개월 뒤 사망하기 직전에 그린 초상화다.
그런데 같은 해, 같은 인물을 그린 이 두 초상화를 보면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공신작위를 받고 그린 경기도박물관 소장품은 안색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얼굴 전체에 천연두 자국과 황달끼가 보이기는 하지만 얼굴색이 검게 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뎬리대도서관 소장품은 얼굴이 완전히 흑색으로 변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분무공신상을 그린 뒤 간경변이 급속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초상화를 한번 더 그린 뒤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흑색황달 때문에 검게 변한 얼굴에 더욱 도드라지게 표현된 천연두 자국….
1등 공신이 되었지만 그 영광도 잠시, 병세가 급격히 악화하고, 6개월만에 세상을 떠난 한 인물의 ‘극적인 1728년 한해’가이 두 초상화에 기록되었다.
■뽀샵 처리는 꿈도 꾸지 않았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홍직필(1778~1852)의 초상화에는 피부홍반루푸스 때문에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병은 현대의학에서도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분류된다. 안면 피부에 재발되는 만성 염증은 임상적으로 전형적인 나비양상발진을 남긴다. 게다가 오른쪽 눈이 실명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형조·호조·공조판서를 지낸 이시방(1594~1660)의 초상화는 6점이나 남아있다.
그러나 그 6점 모두 이마 부위에 ‘칼에 베인 것 같은 흉터’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을 의학용어로 ‘칼자국 모양 국소경피증’이라 한다. 피하의 섬유조직이 신축성을 잃어가는 증세이다. 피부가 가죽처럼 된다고 해서 공피증이라고도 한다.
이런 상처 쯤은 그냥 지우고 그려도, 시쳇말로 ‘뽀샵 처리’하고 그려도 될 것 같은데 화가는 6번 모두 가차없었다.
이괄의 난(1624년) 진압으로 진무공신(1등)이 된 무신 장만(1566~1629)의 초상화는 어떨까.
장만은 이괄의 난 진압 과정에서 군중에서 눈병을 앓아 실명했다. 그런 장만이 공신책록 후 그 기념으로 공신상을 그렸으니 어떻게 되었을까. 검은 안대를 한 모습으로 공신상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초상화의 대가인 이명기는 명재상인 채제공(1720~1799)의 사시(Strabismus)까지 정확하게 묘사했다.
경술국치 후 순국한 우국지사 황현(1855~1910) 역시 사시로 묘사되었다. 이 초상화는 구한말 어진화가였던 채용신(1850~1941)이 황현의 생전 사진을 보고 그렸다.
500년동안 이어온 ‘극사실주의 기법’을 끝까지 지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 수원화성박물관 소속 김세영 학예사가 국립중앙박물관이 공개한 이건희 컬렉션에서 수원화성 축성의 주역인 조심테(1740~1799)의 초상화를 발견했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그 분의 얼굴을 보니 역시 천연두 자국이 얼굴 전체에 가득했다.
‘터럭 한올’이라는 초상화 정신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보면 요즘과 같은 ‘뽀샵 사진’은 진정한 의미의 사진은 아니다. 조선시대 초상화야 말로 사진이라 할 수 있다.(이 기사를 위해 도서출판 눌와가 이성낙 박사의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에 실린 이미지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성낙 박사는 초상화와 피부 병변 관련 도움말과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이성낙,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눌와, 2018
이성낙,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변에 대한 연구>, 명지대 박사논문, 2014
조선미, <왕의 얼굴-한중일 군주의 초상을 말하다>, 사회평론, 2012
<한국의 초상화 형과 영의 예술>, 돌베개, 2009
오주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솔, 2003
이태호,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2008, 생각의 나무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도록>, 국립고궁박물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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