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특사 다나카 자작(궁내대신)의 흉계로…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해서 탑을 해체하여 실어갔다고 한다.…”
1907년 3월7일 <대한매일신보>가 해괴망측한 단독보도를 씁니다.
1907년 1월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궁내대신(장관)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가 경천사 10층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해서 일본으로 반출했다는 충격적인 기사였습니다.
이 대리석 탑은 높이만 13m에 이르는 섬세한 부조의 걸작 석조유물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탑을 송두리째 해체한 뒤 무단반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날의 1보를 시작으로 6월까지 3개월 동안 끈질기게 이 야만적인 약탈행위를 연속 보도했습니다. 이 약탈사건은 지각있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손가락질 받았고, 결국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됩니다.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까지 나서 ‘탑을 현장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경천사 10층 석탑은 11년 9개월 만인 1918년 11월 15일 반환됩니다. 다나카가 반출할 당시의 모습 그대로, 즉 포장도 풀지 않은 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탑부재의 상태는 끔찍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와 일본 신문인 <이륙신문>,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영자지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 <코리아리뷰>, <저팬 크로니컬>, 프랑스어 신문인 <쿠리에 드 라 콩페랑스> 등에 실린 기사를 토대로 경천사 10층 석탑 약탈사건의 전모를 밝혀봅니다.
■원나라 황실에 바친 경천사탑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50리 쯤 떨어진 부소산 기슭의 옛 절터에는 특이한 탑 하나가 서 있었다.
얼핏보면 13층이지만 기단부(3층)를 빼면 10층인 대리석 탑이었다. 옛 절터의 이름이 경천사였으니 절터에 세워진 탑은 경천사 10층 석탑으로 일컬어졌다.
경천사 탑의 1층 옥개석 밑에는 탑의 조성경위와 연대를 알려주는 발원문이 있다. 그에 따르면 탑의 제작연대는 원나라 간섭기인 1348년이다.
그런데 발원문을 보면 탑을 조성한 주체자는 원나라 황실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린 강융과 고용보 등이었다. 경천사 탑의 내력을 기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탑의 조성 주체자 명단에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1314~1355)도 등장한다.
강융과 고용보는 원나라 황실을 등에 업고 한창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강융(?~1349)의 신분은 미천했다. 진주 관노의 손자였다. 그러나 강융의 딸이 원나라 승상 탈탈의 첩이 되면서 일약 권세를 얻었다.
역시 탑의 주체자로 기록된 고용보(?~1362)는 고려출신으로 원나라 환관이 된 인물이다.
고용보는 14살 때 공녀로 끌려왔다가 훗날 원나라 황제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의 후원에 힘입어 고려왕실을 쥐고 흔들었다.
이들이 세운 경천사 탑은 고려왕실이 아니라 순전히 원나라 황실을 위해 조성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황제폐하와 황후, 황태자를 위해 조성한 탑’이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당시 황제는 원나라 순제, 황후는 기황후, 황태자는 순제와 기황후가 낳은 아요르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훗날 북원의 황제)였다.
■“갈아마시면 만병통치약 된다”
게다가 탑의 조성에 원나라 기술자들을 대거 동원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 때문에 원나라에서 크게 유행한 라마교 형식이 경천사탑에 반영돼있다. 기단부(3층)과 탑신부 1~3층은 亞자형인데, 이것이 바로 라마교 형식이다. 탑의 기단부에는 사자 같은 동물과 꽃, 현장법사와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의 내용, 그리고 나한상이 조각돼있다.
탑신부 1~4층은 각종 불회도와 여래상, 호법신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또 각 면마다 불회(佛會)의 장면이 새겨져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를 두고 “인물이 살아있는 듯 형용이 또렷하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 천하에 둘도 없다”고 기록했다. 대대로 이 경천사탑은 약옥탑(藥玉塔)으로 일컬어졌다.
“주민들은 옥 같기도 하면서 옥이 아니고 돌 같으면서도 돌이 아니라고 했다.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단단한 돌은 연한 푸른색을 띤다. 탑을 갈아 먹으면 만병을 다스린다는 믿음이 퍼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탑의 아래층에 조각된 인물상들이 훼손되었다고 한다.”(<대한매일신보>)
■300년이나 눈독 들인 조선의 문화재
1900년대 초까지 경천사 절터엔 이 탑만 덩그러니 서있었다. 절간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1902년 일본의 미술사학자(도쿄대 교수)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7~1935)가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디딘다.
일본정부의 명을 받아 7월5일부터 62일간 조선 전역을 돌며 문화재를 조사했다.
세키노는 조선의 고분, 왕궁, 사찰, 능묘, 상곽, 문루, 미술, 공예 등 조선의 문화사적인 유적·유물 전반을 조사했다. 세키노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1904년 ‘조선의 건축과 예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조선건축조사보고서>로 정리되었다. 문화재 조사는 제국주의자들이 식민통치를 위해 흔히 썼던 사전작업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세키노의 논문이 발표된지 불과 1년만에 을사늑약을 맺었음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논문 중에 실린 탑 두 곳에 눈독을 들인 자가 있었다. 바로 일본의 궁내대신(장관)인 다나카 미쓰야키였다. 당시 도쿄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은 궁내대신의 관할이었다. 다나카는 당연히 세키노 등의 논문과 보고서를 관심있게 읽어보았을 것이다.
1907년 4월 23일 일본의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 朝日新聞)>을 보면 저간의 사정을 읽을 수 있다.
“예부터 조선에 유명한 탑이 둘 있었다. 하나는 서울 종로의 원각사 터에, 나머지 하나는 개성 풍덕군의 경천사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그 탑들을 일본에 가져오고 싶었다’는 설이 다나카 궁내대신에게 들어가…. 그 중 하나를 일본으로 옮겨오면 비할 데 없는 진귀품이 될 것으로 여겨….”
■일본인은 왜 탑과 불상을 약탈했을까
아마 다나카는 세키노의 논문과 보고서에 실린 원각사 10층 석탑과 경천사 10층 석탑의 글과 사진을 보고 군침을 흘렸음이 틀림없다.
그 이유 또한 어이없다. 다나카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눈독을 들인 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군침을 흘렸다는 것이니까….
이 기사가 맞다면 일본인들은 장장 300년 이상 경천사탑과 원각사 탑에 욕심을 부렸다는 것이다.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일본인들은 왜 그토록 부피가 크고 무겁고, 옮기기에도 번거로운 조선의 탑과 불상까지 죄다 뜯어갔을까.
물론 일본인들이 가장 애호하는 한국문화재는 고려자기였다. 식민지 조선을 방문하고 돌아온 일본 식자층의 손에는 고려인삼과 함께 고려자기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정원을 꾸미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조선의 폐사지에 덩그러니 서있는 탑과 불상에 군침을 흘렸다. 오죽하면 1911년 조선총독부가 개인간 석조물 매매를 금하는 문건을 각 지방에 내려보냈을까.
문건의 내용은 “조선 각지의 석조물들은 일반 백성의 사유물이 아니므로 사적으로 팔거나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건은 법령이 아니었으므로 탑과 불상의 유출은 계속되었다.
경천사 탑이나 원각사 탑을 향한 다나카의 탐욕에는 이같은 배경이 있었다.
■“고종 황제가 허락했다”는 새빨간 거짓말
1907년 1월 다나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순종 황제의 결혼 가례에 궁내대신인 다나카가 일본 정부의 특사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다나카가 약탈하기로 최종 낙점한 탑은 경천사탑이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서있는 원각사 탑을 반출하기는 무리였다.
조선땅을 밟은 다나카는 “일본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고종 황제를 만나 ‘양국의 우의를 위해 경천사탑을 기증해달라’고 간청했다”고 주장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이러한 일본 정부의 뜻을 이해했고, 이에따라 조선 국왕이 (경천사탑을) 기증했다”는 것이었다.(<오사카 아사히신문>)
하지만 다나카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같은 일본 신문인 <이륙신문>조차 다나카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 백옥탑(경천사탑)을 다나카 대신에게 기증했는지, 혹은 억지로 일본황실에 기증했는지 의문스럽다. 일본과 한국의 친교를 위한 기념물로 한국 황제가 일본황실에 기증했다면 상당한 예절의 격식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기증문서 하나 없고, 공식사절 한 명도 없었으며 서울에서 고물상을 하고 있는 일본인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졌다는 것은 더욱 의문스러운 일이다.”(<이륙신문> 1907년 6월4일)
백번 지당한 기사였다. 만약 고종 황제의 허락을 받은 정식기증이었다면 일본인들이 총칼로 주민들을 위협하며 그 엄청난 탑을 무단으로 해체하고 반출했을까.
■무자비한 경천사탑 약탈전모
다나카는 서울에서 고물상(골동품상)을 운영하던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에게 경천사탑의 무단반출을 지시했다.
그 때가 1907년 2월 4일이었다. 이미 3~4일 전부터 무기를 든 일본인 120~130명이 탑 주변으로 몰려왔다. 이들은 천막을 치고 장목과 볏짚을 실어다 놓고는 탑을 헐고 있었다. 주민들이 만류했지만, 이들은 “고
종이 허락한 일”이라 거짓말했다.
풍덕군수가 “절대 안된다”고 나섰고, 내부(內部)의 경무 통역관인 와타나베 다가지로(渡邊鷹次郞)까지 나서 석탑의 해체와 운송을 막아섰다.
그러나 골동품상인 곤도가 지휘하는 일본인들과 인부들이 다짜고짜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탑을 헐어버렸다. 그런 뒤 10여 대의 달구지로 실어갔다. 하루 낮 밤 사이에 탑을 다 헐어버렸다.
<대한매일신보>는 그날의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일본인들이 새벽에 몰래 남아있던 탑재석을 수십대에 싣고 급하게 떠났다. 주민 20여 명이 일제히 달려들어 막으려 했지만 일본인 40~50명이 총검을 들고 시위하며 달구지를 좌우에서 호송했다.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대한매일신보> 3월7일, 3월12일, 3월21일, 6월4~6일 등)
망연자실한 풍덕군수가 달구지 바퀴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바퀴자국은 이미 개성의 기차 정거장까지 나 있었다. 포장된 덩어리마다 ‘궁내성으로 보내는 물건’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풍덕군수가 와타나베와 현지 일본 경찰인 하기노(萩野直十郞)에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어디 있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이들도 “총칼로 협박하는데 어쩔거냐”면서 “이미 기차는 떠났으니 책임을 따진들 무슨 소용이냐”는 말만 되풀이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코 베어 가는 식으로 엄청난 경천사 10층 석탑을 약탈당한 것이다.
■‘일국의 장관이…. 일본의 수치다’
그러나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대한매일신보의 비판기사가 줄을 이었다.
“다나카 자작은 우리 국민을 만만하게 본 것이다. 한국 인민이 그 만행과 모욕에 능히 항거할 것이다.”(3월7일자)
“고종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꾸며낸 말이다. 황제가 600년 된 고적을 가져가라고 허락했을 리 없고, 설령 주었더라도 본심은 아니었을 것이다.”(4월13일)
“보탑을 빨리 되돌려보내 잘못을 사죄하라. 상응한 가치의 물품으로 보상하라. 일본으로선 역사의 무한한 수치가 될 것이다. 일본 당국자는 반성하라.”(6월5일)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일본 언론조차 다나카의 만행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이륙신문>은 “만약 탑을 가져온 절차가 잘못됐다면 다나카 대신이 불가불 책임을 지어 두 나라 황실에 누를 끼쳐서는 안된다”고 비판했다.
오죽했으면 일제 통감부가 발행하는 영자지 <서울프레스>조차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를 인용하면서 다나카를 비판했을까.
“<서울프레스>가 경쟁지인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받아쓴 것은 처음이다. (경천사탑의 약탈과 관련) 기자의 비탄과 그 논조가 자못 솔직했다.”(<대한매일신보>)
특히 다나카는 경천사탑 약탈사건의 책임을 골동품상인 곤도에게 돌리면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는 기사도 실렸다.
그 때문인지 <대한매일신보>가 마지막에 인용한 <서울프레스> 기사의 결론이 쓴웃음을 자아낸다.
“만약 이토(히로부미) 후작이 한국에 있었던들 이런(경천사 약탈사건 같은) 못된 짓은 반드시 없었을 것이다.”(<대한매일신보> 4월13일)
<서울프레스>는 ‘그래도 이토라면 다나카 같은 무지막지한 약탈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누구인가. 그 역시 1000점이 넘는 고려청자를 일본으로 운반한 인물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오십보백보의 인물들이다.
■국제문제로 비화한 약탈사건
그런데 <이륙신문> 기사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최근의 외신을 보면 미국에서도 ‘경천사탑 사건’이 떠들썩한 논평을 불어일으켰다. 현재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구로키(黑木) 대장은 몰려드는 신문기자들의 접근을 일절 사절했다고 한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 문제가 되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경천사탑 약탈사건이 미국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다는 소리다. 그래서 때마침 미국을 방문중이던 구로키 다메모토(黑木爲楨)에게 미국의 신문기자들이 몰려가 논평을 요구했고, 곤란해진 구로키는 일절 신문기자의 접근을 막았다는 것이다.
그랬다. 믿거나말거나식의 해외토픽 기사에 등장할 법한 경천사 10층 석탑 약탈사건은 국제이슈로 부각됐다.
영국인 어네스트 베셀(1872~1909)과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의 공이 컸다.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뉴스>의 발행인을 겸한 베셀은 석탑 약탈의 부당성을 최초로 보도했다.
또 서울의 월간지 <코리아 리뷰> 발행인인 헐버트는 불법반출 소식을 듣지마자 현장을 방문했다.
목격자들의 증언과 현장사진을 확보한 헐버트는 <서울 리뷰>에 약탈사건을 폭로했다. 헐버트의 활약은 해외에서 더 빛났다.
일본 영자신문인 <저팬 크로니컬>에 폭로기사를 실어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또 일본의 <저팬 메일>과 미국의 <뉴욕 포스트>에도 불법약탈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저팬 메일>이 “불법 약탈했다는데 그것은 새빨간 거짓”이라는 반박기사를 냈다.
그러자 헐버트는 현장 사진과 함께 현장 상황을 정확히 전달함으로써 <저팬 메일>측을 굴복시켰다. 헐버트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황제의 밀사로 파견됐을 때도 프랑스어 신문 <쿠리에 드 라 콩페랑스>에 “경천사 10층석탑 사건은 일본이 조선의 문화를 파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데라우치 총독마저 반환을 요구했다
이와같은 국내외의 비판여론에 가세한 것은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이었다.
데라우치는 “다나카가 실어간 석탑은 원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반출이었다”고 다나카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데라우치는 1910년대 무단통치의 원흉으로 꼽히지만 문화재와 관련해서는 몇가지 가상한 일화를 남겼다. 경천사 10층석탑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데라우치의 행태에 마냥 감격할 필요는 없다. 일제의 입장에서 당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영영 남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니 문화재가 일본에 있든, 조선에 있든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의 입장에서 보면 경천사탑은 원래의 자리, 즉 조선 개풍군으로 돌아오는게 좋았다.
원활한 식민지 통치를 위해서도 조선에 시혜를 베풀 필요가 있었다.
물론 본국의 장관이었던 다나카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1915년 데라우치가 일본 본국의 총리가 되자 다나카의 입지는 더욱 약해졌다.
여기에 조선의 제2대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계속된 반환 요구에 두 손 들고 말았다.
1918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소속이던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하세가와 총독에게 올린 조사보고서의 내용은 분명했다.
“경천사탑은 1907년 궁내대신 다나카 백작이 나이치(일본 본토)로 옮겨 물의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포장도 뜯지 않은채 현재의 장소(다나카의 집)에 보관돼있다. 다나카는 하등의 수속도 없이 거침없이 운반해갔다. 어떤 구실로도 그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조선의 관습에 따르면 절이 문을 닫으면(폐사) 절에 부속된 탑은 나라의 소유로 귀속된다. 따라서 경천사 탑은 국유재산으로 총독부 소관에 속한다.”
오다의 조사보고서로 분명해진 사실이 있다. 고종이 일본 정부에 경천사 석탑을 하사했다는 다나카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포장도 뜯지 않은채 11년만에 반환된 탑
급기야 1918년 11월 15일 경천사 탑은 1907년 2월 4일 쯤 무자비하게 해체되어 포장된 바로 그 상태 그대로 반환된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탑재의 포장을 뜯어본 이들은 그 참담한 몰골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 해체된 탑부재는 당대의 기술로는 복원조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가 심했다.
결국 경천사탑의 부재는 경복궁 회랑에서 40여 년 간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1960년 국립박물관 학예관이었던 임천(1908~1965)이 2년 여에 걸친 수리복원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경복궁 전통공예관 앞에 세워진 복원 탑은 1962년 국보(86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경천사탑은 원래 관리하기 매우 힘든 탑이다. 대리석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대리석은 조각하기 쉽지만 풍화와 산성비에 취약해서 마모가 심하다.
경복궁에 복원한 경천사탑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도심 한복판에 있었던 터여서 환경오염에 더욱 노출되었다. 비둘기 배설물의 공격은 대리석 탑을 더욱 훼손시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복원한지 35년만인 1995년 재복원 처리가 결정됐다. 탑은 다시 145점의 부재로 해체·포장되었고, 2004년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처리실로 옮겨졌다.
2005년 두번째로 복원된 경천사 10층 석탑은 지금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전시되어 있다. 풍화작용이나 환경오염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지만 실내라는 것이 영 마뜩치 않다.
■경천사탑의 기구한 팔자
고려땅에 세워졌지만 원나라 황실의 안녕을 기원했던 탑이 아닌가.
그러나 또 그 속에는 궁녀로 끌려갔다가 원나라 황제의 부인이 된 기황후의 사연이 녹아있다. 그러다 일본인, 그것도 일본 정부의 장관이라는 자에 의해 140여 점의 조각으로 뜯겨 무단반출됐고….
그후 10여 년을 포장도 뜯지 않은채 방치됐다가 반환됐고…. 다시 40여 년 그 상태로 보관됐다가 복원-재복원되었고…. 이제는 비둘기 배설물 같은 환경오염과 산성비가 무서워 실내인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서있는….
경천사탑의 기구한 팔자가 가슴을 후벼판다.
“층층의 보탑 하늘 높이 치솟았어라(層層寶塔揷雲소) 깎아논 옥 모양 들쭉날쭉 높이가 백척이네.(玉削參差百尺高) 풍경 소리는 바람을 받아 골짝을 들레고(鈴鐸受風喧洞壑) 구불구불 나무의 그림자는 수풀 언덕에 떨어지네(龍蛇倒影落林皐) 후세 사람들은 다 규모의 정교함을 사랑하거니와(後人共愛規模巧)/큰 불도 견고한 집은 불태우기 어려웠구려.(劫火難燒結구牢) 길손이 와서 중을 찾아 세월을 추심하면서(客至訪僧尋歲月) 부질없이 먹 찍어 흰 종이에 시구만 쓰네.(만將鴉墨染霜毫)”(<허백당시집>)
조선 전기의 시인 성현(1439~1504)이 읊은 시(‘경천사’)에서 경천사 탑의 위용을 짐작해볼 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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