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관원들의 공무수행 공간이었던 창덕궁 궐내각사에는 약간 특별한 ‘현판’이 걸려있었습니다.
1725년 대은원이라는 전각을 수리한 내역을 새긴 건데요. 그런데 수리공사를 지휘한 것도 내시이요, 현판의 글을 지은 것도 내시이고, 글씨를 쓴 것도 내시였습니다. 아마 내시들이 머물렀던 건물이니 내시들이 수리공사의 모든 책임을 진 거죠. 그러나 내시가 궁궐 전각의 현판을 썼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였죠.
■“초심을 잃으면 안됩니다”
현판은 왕조의 상징물이고, 그 상징물의 간판이죠. 국왕의 글씨 혹은 당대 최고 명필들의 글씨를 받아 장인들이 정교하게 새겼고, 화려한 문양과 조각으로 장식했습니다. 이중 왕과 왕세자의 글과 글씨가 상당수 남아있는데요. 현판에는 특별히 작은 글씨로 어필(御筆·임금의 글씨), 예필(睿筆·세자의 글씨)이라고 새겼고, 각종 장식을 더했습니다. 지극히 존귀한 글씨임을 나타낸거죠.
궁궐의 현판을 왕이나 세자가 썼다는 것은 상식 같죠. 왜냐면 조선시대 임금들은 거의 대부분이 명필이었거든요.
조선 국왕들은 3살 때부터 성군이 되기 위한 조기교육을 받았고, 그 중에서도 서예는 기본과목이었죠.
그래서 조선 임금들은 한결같이 명필 소리를 들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현판 중 임금의 글씨가 120여 점 정도 남아있다고 했죠.
여기에는 반전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남아있는 어필·예필 현판이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죠. 선조의 글씨를 새긴 현판도 당시의 것이 아닙니다. 훗날 어필첩에 있는 선조의 글씨를 본떠서 새긴 겁니다. 물론 분명한 이유가 있죠. 어필·예필 현판은 물론이고, 조선 전기의 현판 자체가 임진왜란 같은 병란과 크고작은 화재 때문에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또하나 놓치기 쉬운 포인트가 있습니다. 조선조 초기에는 제아무리 명필 임금이었다 해도 궁궐의 현판 글씨를 쓰지 않았다는 원칙을 지켰다는 겁니다. 임금이 임명한 서사관이 썼습니다.
왜 임금이 직접 붓을 들고 현판을 쓰지 않았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린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조선전기 인물 중에 강희안(1417~1464)은 글씨는 물론 그림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요. 그러나 강희안의 작품들은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평소 “글씨와 그림은 천한 재주일 뿐, 이것이 후세에 전해진다면 내 이름만 욕되게 한다”(<해동잡록>)는 지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이 즐겨 인용했던 성현이 있었는데요. 바로 북송의 정이(1033~1107)였습니다.
정이는 시·서·화를 두고 “오로지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배우(俳優)와 다를바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정이가 인용한 성어가 바로 <서경>의 ‘완물상지(玩物喪志)’였는데요. ‘완물상지’는 “어떤 것에 지나치게 탐닉하면(완물·玩物) 본래의 뜻을 상하게 한다(상지·喪志)”는 뜻입니다.
■‘못난 임금의 전형’
강희안이 그랬는데 임금은 어땠겠습니까. 임금이 서예나 그림 솜씨를 자랑하면 ‘못난 임금’이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예컨대 성종(1469~1494)은 평소 “전하(성종)가 글씨를 쓰면 저절로 난새(鸞·전설상의 새)가 놀라고 봉황이 되돌아올 정도”라는 극찬을 들었는데요. 손이 근질근질했나봐요.
1484년(성종 15) 6월28일 “(막 창건한) 창경궁 내간(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의 전각 현판은 과인이 직접 쓰고 싶다”고 운을 뗍니다. 어떤 이들은 “좋다”고 찬성했지만, 다른 이들은 쌍심지를 켜고 “어필로 할 필요가 없다”고 달려듭니다. <성종실록> 사관의 평가가 촌철살인입니다. “몇몇 신하가 하찮은 기예를 좋아하는 임금의 뜻에 부응했다”는 겁니다.
세자 시절 ‘경회루’ 현판을 썼을 정도로 명필로 알려진 양녕대군(1394~1462)의 일화도 의미심장합니다.
세자가 12살 때(1405년 8월19일) 40여자의 글씨를 써서 스승(성석린·1338~1423)에게 보여주었는데요.
이때 성석린이 “아주 잘 쓴 글씨”라고 칭찬해주었죠. 의기양양해진 세자가 “예전의 국왕 중에는 누가 글씨를 잘 썼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성석린은 “당 태종(626~649)과 송 휘종(1100~1125)이 잘 썼다”고 하면서도 일침을 놓습니다. “두 사람 다 글씨를 잘 썼지만 당태종은 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제가 된 허물이 있고, 송휘종은 망국의 군주였다”고 한 겁니다.
한마디로 “서예에 능하다고 다 옳은 군주는 아니다”라고 어린 세자를 가르친겁니다.
양녕대군은 훗날 조카인 세조(1455~1468)가 “나도 마음만 먹으면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 은근슬쩍 자랑하자 “군주는 재주를 자랑해서는 안됩니다”(1459년 5월10일)라고 일침을 놓았는데요. 임금이 한마디 한 것 갖고 그렇게 정색을 했으니 그 분위기가 얼마나 썰렁해졌겠습니까. 이런 정도였으니 임진왜란이나 화재 때문이 아니었어도 임금이 직접 쓴 궁궐 현판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발 그 재능을 비밀로 하세요.”
그렇다면 대체 남아있는 120여 점의 어필·예필 현판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왜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죠.
신하들로부터 ‘자뻑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임금이지만 그 넘치는 재능과 끼를 어찌 숨기겠습니까. 틈만 나면 시·서·화를 남겼겠죠. 예컨대 성종의 그림과 글씨가 시중에 떠돌아서 당대에 큰 물의를 빚었습니다.
1492년(성종 23) 12월 25일 대사헌 이세좌(1445~1504)는 “시중에 어찰(임금의 편지)를 얻어 한껏 치장해서 병풍이나 족자를 만드는 풍조가 일고 있다”고 개탄합니다.
“임금이 고작 문장의 수식에 정신이 팔리고, 서예와 그림 같은 서생의 하찮은 기예를 자랑하니 이게 될 말입니까. 제방 전하께서는 재능과 기예가 많다는 사실을 감추고 제발 비밀로 하십시요.”
성종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는 본래 그림은 잘 그리지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고는 “그런데 대체 경들은 어디서 보았다는 거냐”고 발뺌합니다. 그래도 이세좌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임금이 그린 서화는 신(이세좌) 등이 누구 누구네 집에서 똑똑히 보았다”고 밝힙니다.
성종은 그제서야 ‘범행(?) 일체를 자백’하며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죠.
“실은 서화를 영돈녕(장인)에게 내려준 것인데, 아마 여기서 유출되었을 것이다. 또 내가 서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우연히 했을 뿐이다.”(<성종실록>)
실제로 성종의 서화는 시중에 널리 퍼졌던 것 같습니다. 중종~인종 때의 권세가인 김안로(1481~1537)는 “민간에서 성종의 필적을 얻은 이는 그것을 완상하고 신줏단지 모시듯 보관해두었다”(<희락당고>)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신권보다 왕권이 강화되는 조선 후기들어 분위기가 바뀌죠.
감히 군주의 서예·그림 솜씨에 지적질을 하는 신하들이 적어졌죠. 임금이 승하한 뒤 선왕을 추숭하는 여러 조치가 취해집니다. 선왕의 글과 글씨, 그림을 수집·정리해서 전각에 봉안하는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선왕의 위업을 기리며 동시에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죠. 그러다보니 ‘잗단 기예에 빠져 정사에 초심을 잃는다’면서 금기시됐던 임금의 현판이 자주 걸리기 시작합니다. 조선 후기 임금·세자들의 어필·예필이 남은 이유입니다. 그러나 ‘완물상지’의 경각심만큼은 잊지 않았던 것이 바로 조선시대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천덕꾸러기가 유네스코 유산으로
이렇게 왕조의 통치이념과 철학을 담은 현판은 파란만장한 조선의 역사를 온몸으로 증거했습니다.
임진왜란 같은 전란과 잦은 화재 등으로 불에 타거나 훼손된 뒤 다시 걸리기를 반복했습니다. 경복궁 중건(1865~68) 등으로 겨우 제자리를 찾게 됐지만, 그것도 잠시였죠. 고종이 을미사변(1895년) 후 자리를 비운 경복궁은 급격하게 원형을 잃게돼죠. 1907년 창경궁에 동·식물원과 박물관이 조성, 1910년 강제합병 직전에는 궁궐 불용건물의 자재가 매각돼죠.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1917년 창덕궁 내전 일곽 화재 등 갖가지 이유로 조선의 궁궐 건물은 무자비하게 철거돼죠.
이때 현판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창경궁의 각 전각의 각 칸마다 매달리게 됐구요. 천덕꾸러기가 된 현판들은 해방 이후에도 경복궁 근정전 회랑과 사정전, 천추전 등의 전각에서 보관됐습니다. 그러다 이런저런 이유로 창경궁 장서각(1981년)-창덕궁 인정전 서행각(1986년)-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1992년)-국립고궁박물관(2005년) 등을 전전했구요.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국립고궁박물관에 안착하게 된 현판은 770점에 이릅니다. 110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습니다.
그렇게 떠돌던 현판 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770점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올랐습니다. 건축과 서예, 공예가 접목된 기록물이자 종합예술품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은거죠.
■왕비의 침전이 교태전인 이유
국립고궁박물관이 18일부터 기획전시실에서 조선시대 궁중현판을 다룬 특별전(‘조선의 이상을 날다-궁중현판’)을 열고 있는데요. 8월15일까지라죠. 특별전에는 ‘2018 유네스코 지역목록’에 등재된 궁중 현판 중 81점과 <기사계첩>(국보) 등 관련 유물 등 총 100여점이 선을 보이는 데요.
이중 특별전이 밀고 있는 현판이 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가장 큰(124×374cm) ‘대안문(大安門)’인데요. ‘대안문’ 현판은 근대사의 상징적인 공간이었던 경운궁(현 덕수궁)의 정문에 걸렸던 거죠.
‘대안’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얻어서 유지한다면 나라가 크게 편안해질 것(得道以持之 則大安也)”는 <순자> ‘왕패’의 구절에서 땄습니다. ‘대안문’ 현판은 당시 의정부 참정 민병석(1858~1940)이 썼다고 합니다.
그러다 1906년(광무 10) 문을 수리하면서 이름도 ‘대안문’에서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는데요. 이 이유를 기록한 <경운궁(덕수궁)중건도감의궤> 중 ‘대한문상량문’을 볼까요.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해질 것이고 한양이 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했다…‘대한(大漢)’이라는 정문을 세운다…소한(宵漢·하늘)과 운한(雲漢·은하)의 뜻을 취했으니 덕이 하늘에 합치된다.”
한마디로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으로 ‘대한(大漢)’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겁니다. 훗날 이를 두고 말들이 많았죠. 굳이 ‘클 대(大)’에 중국을 의미하는 한나라 ‘한(漢)’자를 쓸게 무엇이냐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또 이 한(漢)자에는 ‘놈’이라는 욕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일제 밀정이었던 매국노 배정자(1870~1952)가 갓을 쓰고 궁중을 출입하고 있는 것이 꼴보기 싫어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까지 돌왔죠. ‘편안할 안(安)’자는 ‘갓쓴 여자(女)’의 형상이잖습니까.
또 특별전에서는 왕부터 당대 명필, 내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이 참여한 현판 글씨도 소개하는데요. 이중 당대 명필인 석봉 한호(1543~1605)가 쓴 ‘의열사기(義烈祠記)’ 현판(1582년)도 선보이는데요. 이 작품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현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랍니다.
생각해보면 임금이 정사를 펼치는 전각 이름을 왜 ‘근정전(勤政殿)’이나 ‘사정전(思政殿)’이라 했겠습니까. ‘임금은 아침 저녁 식사할 겨를도 없이 근면한 태도로 백성을 화락하게 만들어야 하며’(근정전), ‘깊이 생각한 연후에 비로소 정사를 펼쳐야 한다’(사정전)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은거죠.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은 어떻습니까. 남편(임금)의 사랑을 얻으려는 왕비가 교태(嬌態)를 부리는 침실이 아니죠. <주역>에서 교태는 하늘과 땅의 사귐, 즉 양과 음의 조화를 상징합니다. 임금과 왕비가 후사를 생산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교태전이라 한 거죠. 그렇게 지은 궁궐·전각·문의 이름을 현판에 담은 겁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의 마음씨가 그 현판 속에 녹아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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