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본 문화재 발굴 현장 중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곳이 있는데요. 2007년 10월 24일 부여 왕흥사터 발굴유물을 실견했을 때입니다. 절정기 백제예술의 정수를 보면서 넋을 잃었답니다. 과연 어떤 발굴이었는지 시간을 15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발표 2주 전인 10월10일이었습니다. 왕흥사 목탑터를 조사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단원들의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습니다.
목탑터 초석의 사리구멍을 막은 돌뚜껑(25㎝×15㎝×7㎝)이 노출되었는데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자 흙탕물이 가득했답니다. 대나무칼로 조심스레 흙을 제거하자 글자들이 한자 한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백, 제, 왕, 창’
‘정(丁), 유(酉), 년(年), 2월(二月), 25일(十五日)’. 이 목탑의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명문이 분명했습니다.
그 다음 글자에서 조사단원들의 숨이 탁 막혔습니다. ‘백(百), 제(濟), 왕(王), 창(昌)…’.
‘백제왕 창’이라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위덕왕조’는 “(25대) 위덕왕(재위 554~598년)의 이름이 창(昌)이고, 성왕(523~554)의 맏아들”이라 했습니다. 줄줄이 이어진 명문을 종합하면 ‘丁酉年 二月 十五日 百濟王昌 爲亡王子立刹本舍利 二枚葬時神化爲三’이었습니다. 즉 ‘정유년(577년) 2월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고, 본래는 사리 2매를 묻었는데, 신의 조화로 셋으로 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명문을 읽은 연구자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면 왕흥사의 조성시기(577년)가 역사기록(<삼국사기> ‘백제 본기·법왕조’)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는 “600년(법왕 2)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건했고, 634년(무왕 35) 봄 2월 준공됐다. 절은 물가에 닿아있어 무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후대(고려 시대)의 기록이 아닙니까. 아무래도 당대(577년)에 쓰여진 사리기 명문이 더 정확하겠죠. 그렇다면 왕흥사는 역사기록(600년)보다 23년 빠른 577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게 맞겠죠.
그래도 그렇지 <삼국사기>가 1~2년도 아니고 23년이나 틀렸다면 신뢰성에 큰 상처가 생기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틀리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답니다. 연구자들은 왕흥사 명문 가운데 ‘찰(刹)’이라는 글자에 주목합니다.
‘찰’은 ‘절(寺)’일 수도 있지만, ‘장대와 기둥’을 뜻하는 ‘탑(塔)’을 뜻하기도 합니다. <설문해자>는 “석가의 무덤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가운데 사리를 안장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왕흥사 명문에 나온 ‘입찰(立刹)’ 연대는 곧 탑을 세운 577년을 뜻하고, 그로부터 23년 후인 600년 건물(寺)이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그 건물은 634년에 완공된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사찰(寺刹), 즉 탑(刹)’을 세우고 ‘절(寺)’을 완공할 때까지 57년이 걸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좌태자 말고 죽은 왕자는 누구?
또하나의 궁금증이 있죠. ‘창왕(위덕왕)이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세웠다(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고 했는데요. 창왕의 아들이 누굴까요. 창왕의 아들이라고 역사서에 기록된 이는 아좌(阿佐)태자 한 사람 뿐입니다.
“597년 백제왕(위덕왕)이 왕좌 아좌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일본서기>)는 겁니다.
아좌태자는 일본 쇼토쿠(聖德·?~622)태자의 스승이 됐다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왕흥사 명문을 보면 위덕왕(창왕)은 577년 무렵에 죽은 아들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위덕왕이 서거했을 때(598년) 일본에 체류중이던 아좌태자 대신에 동생(혜왕·598~599)에게 왕위가 돌아갔습니다. 왜 아들 대신 동생이었는지는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혜왕은 2년만에 서거하고 그 아들인 법왕(599~600)이 뒤를 이었는데요. 그 분 역시 짧은 재위(2년)에 그쳤는데, 그때(600년) 일단 왕흥사의 창건을 선언한 것이 되죠.
■8000여 점이나 쏟아진 국보급 유물
사리기 명문도 그랬지만,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사리기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이었습니다.
우선 명문 사리함 안에는 은제사리병(외병ㆍ6.8×4.4㎝)이 있었고, 다시 그 안에 금제사리병(내병ㆍ4.6×1.5㎝)이 들어있었는데요. 둘 다 순금(98% 이상)과 순은(99%)이었습니다. 사리함-외함(은제)-내함(금제) 등 3중 세트로 이뤄졌고, 연대와 내용이 분명한 삼국시대 최고(最古)의 사리기인 셈입니다. 당연히 국보로 지정됐죠.
사리공 주변에서 확인된 8150여 점의 공양품들은 또 어떻습니까. 하나하나가 국보ㆍ보물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유물이 발굴된 곳에서 불과 5㎝ 옆에 근래에 묻은 것으로 보이는 PVC 파이프가 있었는데요. 매설공사 중에 훼손될 뻔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아슬아슬 피했던 겁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금목걸이와 금귀고리는 일품의 솜씨라 할 수 있습니다.
굽은옥(곡옥)의 머리를 씌운 모자형 장식(금모장식)과 작은 고리를 연접하여 만든 공모양 장식, 탄목(탄화된 나무)을 장기알처럼 깎고 가장자리에 금판을 덧씌운 장식 등은 세밀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특히 ‘공모양 장식’의 중간 중간 연결된 접점에 1㎜ 정도에 불과한 금속 알갱이(金粒)들을 붙이는 마감 방식까지 사용했습니다. 가락지와 구슬, 허리띠 장식 등 각종 은제품과 젓가락, 팔찌, 동전 등 동제품도 정교한 솜씨를 자랑했는데요.
그중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 2점과 오수전 1점 등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한 무제 때(기원전 118년) 처음 유통된 오수전은 640여 년 뒤인 523년(양 무제 4) 다시 제작된 동전이구요. 오수전은 북제시대(550~577년)에 제작됐다가 유통이 중단된 화폐입니다. 백제가 당시 중국의 남북조와 동시에 활발한 교역을 했다는 증거가 돼죠.
공양품 가운데는 굽은옥과 대추옥, 비녀, 진묘수형 패식 등이 출토됐습니다. 쌀알보다 훨씬 작은 구슬에 샤프심보다 약간 작은 구멍을 뚫은 초절정 정밀극세공을 자랑하는 것도 있습니다.
연꽃 모양의 백운모판도 눈길을 끌었는데요. 가히 백제 예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잎 사이에 마름모꼴 금박을 넣어 장식했는데요. 각각의 연잎을 따로 만들고, 중심은 둥근 원형판인 겹친 형태였습니다. 운모판의 두께는 0.008㎝에 불과합니다.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부서질세’라 얇디얇은 판이었습니다.
연꽃모양의 운모판은 관모 장식 테 중앙부에 얹혀진 상태였습니다. 원형의 운모판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구요. 이 구멍에 끈을 연결해서 관모에 장식했던 게 분명합니다. 운모는 도교신앙에서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신선의 약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무령왕릉 출토품과 쌍둥이
이한상 대전대 교수에 따르면 이 왕흥사 사리용기 및 유물과 무령왕릉 출토품 사이에 강한 친연관계가 있답니다.
무령왕릉(525~529년)과 왕흥사 탑(577년) 사이에는 50년의 시간차가 있잖습니까. 그런데 왕흥사탑의 모자형 장식과 탄화된 나무를 깎아 금판을 두른 장식 등은 무령왕릉 출토 금속공예품과 쌍둥이라 할만큼 유사합니다. 또 왕흥사 사리용기의 꼭지도 무령왕릉 동탁은잔과 연속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령왕릉 공예품이나 왕흥사 공예품은 모두 왕실물품을 제작하던 공방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 것이 아닐까요.
한가지 여담이 있는데요. 사리기 명문에는 “…원래 사리 2매를 봉안했는데, 나중에 신의 조화(신령스럽게)로 3매로 변했다(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금제 사리병 안에 사리 3매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병 안에는 2매나 3매는커녕 단 1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빼간 흔적도 없었습니다.
대신 물만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년수’도 아닌 ‘천사백년수’라 해서 관심도 끌었는데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혹시 사리가 녹았을 수도 있는 이 사리병 속 물을 분석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결로현상 때문에 생긴 물(HO2)이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사리를 넣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래놓고 ‘신의 조화로 둘에서 셋으로 변했다’는 등의 신이(神異)를 강조한 정치적 이벤트를 벌인 걸까요.
물론 모든 것을 과학과 논리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10세기 편찬설)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있는데요.
즉 “백제 무왕 때(639년) 불에 탄 제석사지 탑 아래 초석에서 수정병이 확인됐는데, 아무리 겉과 속을 살펴보아도 사리가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임금이 불공을 드리고 참회한 뒤 병을 열자 불사리 6과가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또 442년 중국 송나라 서춘이라는 인물이 사리 2과를 얻어 항아리에 넣었는데, 나중에 20과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훗날 그가 타락하자 사리는 온 데 간 데 없어졌답니다. 그렇다면 사리의 감응을 본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공경하는 이는 얻고 업신여기는 이는 잃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왕흥사 사리기에 3과가 남아있어야 할 사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이 서춘처럼 타락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나 때문에 죽은 아버지를 위해”
또 하나의 궁금증이 있죠. 위덕왕은 왕흥사 뿐 아니라 왕들의 무덤을 조성한 능산리에 또하나의 절을 세웠는데요.
그 증거가 1995년 능산리 절터에서 확인된 ‘창왕명’ 사리감입니다. 사리감에는 ‘백제 창왕 13년(567년) 왕의 누이동생(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학계에서는 창왕이 죽은 아버지(성왕)를 기리기 위해 능산리에 절을 세운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 위덕왕이 10년 뒤(577년)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건립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창왕은 왜 그같은 불사를 감행했을까요. 여기에는 창왕과 아버지 성왕, 그리고 한성백제 멸망이후 기울어져간 국세를 만회하려다 실패한 백제의 아픈 역사가 녹아있습니다.
3국 중 맨먼저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413~491)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475년)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죠. 그러다 다시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찾아 사비(부여)로 옮겨 중흥을 꾀합니다.(538년)
재위 중 사비시대를 연 중흥군주가 바로 성왕(재위 523~554년)인데요.
성왕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과 손잡고 북벌을 단행했고, 한강하류 6개군을 점령하죠. 그러나 553년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이룬 고토수복의 꿈은 산산조각나죠.
이때 성왕의 아들인 창(위덕왕)이 복수의 칼을 가는데요. 부득이 <일본서기>를 인용하자면 “태자인 여창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을 고집했다”고 했답니다. 이때 원로대신들이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만류했지만 여창은 “늙었구려. 어찌 겁을 내시오”라 하면서 출전을 고집했답니다.
급기야 554년 12월 태자(창)가 대가야 연합군까지 동원하여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는데요. 그러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지키던 신주 주둔의 군대까지 빼돌려 관산성 포위에 나섰는데요. 전황이 심각해졌다는 사실을 알게된 아버지(성왕)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서는데요. 그러나 성왕은 관산성 근처 구천(狗川)에 이르렀을 때 신라 매복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맙니다. 이 대목부터는 <삼국사기> 기록만 볼까요. <삼국사기>는 “554년 가을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다시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태자 창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 사람이 바로 창왕, 즉 위덕왕이었습니다.
패전을 자책하던 위덕왕은 555년 8월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출가하고 싶다”고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려면 종묘·사직을 지켜야 한다”면서 “차라리 백성들 100명을 출가시키고, 갖가지 불법의 덕을 쌓으라”고 권유했답니다. 출가의 뜻을 접은 위덕왕은 44년 재위 기간 내내 은인자중하면서 내치를 다졌는데요.
그렇다면 이해가 됩니다. ‘불덕을 쌓아 잘못을 뉘우치라’는 신하들의 권유에 따라 능사(능산리절)와 왕흥사를 잇달아 세운 것이겠죠.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불사이기도 했구요. 그렇게 보면 위덕왕은 평생 죄책감으로 살면서 왕실과 나라의 중흥을 불교에 맡긴 임금이었던 겁니다.
■성왕, 위덕왕의 무덤은 어디?
며칠전 사비백제 왕과 왕족의 무덤인 부여 왕릉원(능산리고분군)의 동고분군에서 새로운 고분이 확인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로써 동고분군에서 확인된 무덤은 6기로 늘었는데요.
중앙과 동·서로 나뉜 부여 왕릉원에는 적어도 20여기의 왕과 왕족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이번에 확인된 고분을 포함한 동·서고분군은 왕은 아니고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답니다.
이미 복원 정비된 중앙고분군 7기의 무덤이 사비백제 시대의 왕릉으로 보인답니다.
사비 천도(538년) 이후 백제를 다스린 임금은 여섯분입니다. 성왕과 위덕왕, 혜왕, 법왕과 무왕(600~641), 의자왕(641~660) 등이 있죠. 그러나 익산 쌍릉에 부부묘를 조성한 무왕과,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 등 두 분을 빼면 네 분의 임금이 7기 중 4기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무덤 주인공을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중 중하총을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법 있습니다. 무령왕릉의 무덤 형식인 아치형을 따르고 있는 점이 심상치 않다는 건데요. 그래서 무령왕(501~523)의 아들인 성왕이 주인공으로 꼽히는 겁니다.
왕흥사를 조성한 창왕, 즉 위덕왕은 ‘동하총’이나 ‘동삼총’으로 추정된답니다. 위덕왕과 비슷한 시기에 죽은 혜왕(598~599)과 법왕(599~600)은 ‘서하총’, ‘서상총’, ‘중상총’ 등에 묻혔을 것이구요. 물론 모든 것은 추정일 뿐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삼국사기>가 묘사한 7세기 전반의 왕흥사는 대단했습니다.
“절은 (백마)강가에 있는데,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했다. 왕(무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향로를 들고 불교법회가 열리는 주위를 도는 불교의식)을 펼쳤다”고 했습니다. 무왕 역시 성왕, 위덕왕처럼 불교의 힘을 빌려 나라의 중흥을 빌며 백마강을 건너지 않았을까요. 백마강 하면 우리는 낙화암과 함께 삼천궁녀를 떠올리죠.
그러나 백제의 찬란한 678년 역사를 삼천궁녀의 안타까운 설화로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어쩐지 서글픈 것 같습니다.(이 기사를 위해 도의철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 학예연구사와 이성준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 이한상 대전대 교수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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