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차가운데 병사들은 홑겹의 옷만 입고 있습니다. 환자가 늘고 있습니다. 적군 항공기의 폭격으로 교량이 끊겨 도로가 붕괴됐고, 물자도, 식량도 바닥났습니다.”
1951년 10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총사령 펑더화이(彭德懷)가 녜룽전(섭榮臻)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대리에게 급보를 보낸다.
적(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작전’ 때문에 큰일났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수는 1951년 6월 들어 77만명으로 급증했다. 1950년 10월 첫 참전 때 30만명이었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늘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군을 잠못들게 하는 고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보급물자의 원활한 공급이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유엔군측에 장악당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물자 소모량은 엄청난데 운송수단은 기차나 자동차 뿐이었다. 제공권이 없으므로 수송과정에서 미군기 폭격으로 손실규모는 30~40%에 이르렀다. 탄약은 주요 거점에만 공급됐고, 특히 4~5차 전역(중국군의 1951년 춘계공세) 때는 수요량의 50% 정도만 만족시켰다.”
■목졸라 죽이기
중국 군사과학원이 펴낸 <중국군의 한국전쟁사(3)>는 당시의 어려웠던 보급상황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한반도는 폭이 좁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북으로 길고 좁은 지형이라 중국 내 전장에서처럼 광범위한 기동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한반도의 지형상 후방에 게릴라를 투입하기도 어렵고, 측방에서 해상작전을 펼치기도 힘든 상황임을 복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은 휴전회담과 제한적인 (고지)전투를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4월에는 군복을 가득 실은 80여량의 화물열차가 폭격당하는 일도 생겼다. 그 바람에 5차 전역에 참전한 1개군 병력이 군복도 입지 못한채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1951년 8월, 유엔군은 새로운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이름하여 ‘교살작전(Strangle)’이었다. 말 그대로 ‘목졸라 죽이기’. 즉 공산측 보급로의 숨통을 끊는다는 작전이었다.
이미 제2차대전 때 연합군 공군이 한반도와 비슷한 이탈리아 아펜니노 반도에서 사용해서 큰 효과를 보았던 대규모 공중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한반도에 적용해본 것이었다.
주 공격타깃은 북한의 동서·남북 철도와 도로가 모이는 청천강 이남과 평양이북 지역이었다. 마치 삼각형처럼 보인다 해서 ‘삼각지대’라 했다. 이 무렵 한반도는 40년 만의 홍수로 큰 난리를 겪고 있었다. 상당수의 철도와 도로가 이미 파괴되어 있었다. 공산측의 입장에서는 눈 온 뒤에 서리내리는 격이었다. 9월에는 총 3027대의 전·폭격기가 출격, 철도 648곳, 교량 57개를 파괴시켰고, 10월에는 4128대가 출격, 철도 1336곳과 교량 53개를 무력화시켰다. 51년 8월18일부터 12월까지 신안주·개천·서포 등의 삼각지구에 투하된 폭탄수는 6만3515개(3만1755t)에 이르렀다. 도로길이 1㎞ 당 평균 532개, 170t의 폭탄이 투하된 꼴이니 그야말로 융탄폭격이었다. 그 기간동안 약 80%의 시간동안 차량이 통과할 수 없었다. 공산측의 보급물자는 궤멸수준이 됐다. 8월말·9월초 공산측 전방부대는 식량두절현상이 발생했다. 일부 부대는 들판의 야체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솜옷은 도착할 기미가 없었다. 펑더화이의 긴급편지는 바로 이 때의 괴로움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무승부로 끝난 보급싸움
보급로 확보 여부는 한국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최대 변수였다.
공산측은 ‘보급선 복구’에 전쟁의 명운을 걸었다. 중국군 전사는 병사들의 ‘영웅적인 복구담’을 대대적으로 전하고 있다.
“미군은 500파운드에서 1t에 이르는 중형폭탄을 요소요소에 터뜨려 깊이 8m, 지름 1m의 구덩이를 만들었다. 흙이나 돌로 메우기는 무척 힘들었다. 마치 부교를 설치하듯 포탄구덩이에 통나무를 박아 두 줄로 세운 뒤 통나무 말뚝 위에 아치형 다리를 건설했다. 공습이 끝나 구덩이가 생기면 복구반이 미리 준비해놓은 통나무와 다리판으로 잽싸게 복구했다.”
“‘22시 작전’이라는 게 있었다. 미군의 전·폭격기 공격이 22시~24시 사이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알고 22시 이전에 최대한 공습지역을 벗어나자는 작전이었다. 예컨대 1952년 6월 하순엔 4일간 야음을 틈타 화물기관차 36대 506량을 이동시키는 등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공산 측의 복구작업은 미군측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잽쌌다. 미공군측은 “중국의 복구부대가 포탄구멍을 복구하는 속도는 F86전투기가 폭격하는 속도와 필적할만 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예컨대 1952년 3월25~26일 사이 470여 대의 전투ㆍ전폭기와 B-26 8대가 동원되어 파괴시킨 정주~신안주간 철로는 단 6일 만에 복구됐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폭파된 철도가 24시간 만에 복구된 모습이 항공촬영으로 확인됐다. 우리측 전사인 <한국전쟁(하)>도 “폭파철도는 불과 24시간도 안돼 복구됐다”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유엔군측의 교살작전은 적의 보급량을 제한하고 보급속도를 지연함으로써 적 공격의 빈도와 규모를 줄이는데는 성공했지만 전쟁 그 자체를 종결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수단은 될 수 없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의 사력을 다한 ‘보급로’ 싸움의 결과는 한국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음을 인정한 양측은 결국 승패없이 무승부로 끝났으니 말이다.
■청야전술의 원조
그런데 이 한국전쟁의 양상을 살펴보면 시공을 초월한 기시감(데자부)을 느낄 수 있다. 시계를 1900여년 전으로 돌려놓자.
“지금 한나라 군사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성 주위에 해자(垓子·도랑)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판의 곡식을 비워 대비하면(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그들은 반드시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굶주려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 틈에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서기 172년 11월, 중국 한나라 군대가 침공하자 고구려 신대왕이 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한다. 이 회의에서 국상(국무총리)인 명림답부가 역사에 길이 남을 전략·전술을 제안한다. 이것이 바로 ‘청야(淸野)전술’이다. 국상의 전법은 신묘했다. 맞대응을 피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자 한나라 군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철수하기 시작했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마병을 이끌고 철수하는 적군을 좌원(坐原)에서 맹공했다. 전의를 상실한 한나라군은 대패했다. <삼국사기>는 “한나라는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漢軍大敗 匹馬不反)”고 기록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좌원대첩’이다.
■고조선에 혼쭐난 한나라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청야전술’의 개념을 처음 쓴 것은 고조선이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323년, 중국 중원에서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다. 천자국인 주나라가 완전히 힘을 잃자 중원의 제후국인 제·조·위·중산국이 저마다 왕국을 칭한 것이다. 이는 주나라를 더이상 천자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조선도 이 ‘왕’의 대열에 합류한다.
“주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동쪽 땅을 다스리려 하자 조선후(朝鮮侯)도 왕을 칭했다. 그런 뒤 병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왕실을 지키려 했다.”(<삼국지> ‘위서·동이전’)
이 역사서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보인다. 연나라가 왕을 칭한 뒤 조선의 땅을 넘보자 조선 역시 왕을 칭했다는 것. 그런데 조선은 한술 더떠 “주나라 왕실을 지킨다”는 구실로 연나라 타도를 외쳤다는 것이다. 조선이 얼마나 강성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랬다. 당시의 조선은 우거왕(?~기원전 108년) 대에 절정의 국세를 과시했다.
한나라 백성들이 대거 조선으로 귀화했고, 우거왕은 한나라 조정에 입조도 하지 않았다. 요즘의 속된 말로 한나라 황제와 맞장을 뜨겠다는 것이었다. 우거왕은 한반도 남부 진번의 많은 나라들이 한나라와 직접 교섭하는 것까지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이는 한반도 남부의 여러나라가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했다는 뜻이다. 그러자 한나라의 정복군주 무제가 조선정벌의 기치를 올린다. 그 때가 기원전 109년이었다. 우거왕은 왕검성의 험난한 지세에 의지하는 수성전으로 한나라군과 대항했다.
“한나라의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이 성을 포위했으나 우거왕이 성을 굳게 지켜 몇 달이 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한나라는 해를 넘기도록(기원전 108년)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다 조선 조정의 내분 덕분에 겨우 멸망시켰다. 기원전 108년 여름이었다. 승리한 한나라의 후유증도 컸다. 섭하와 누선, 순체, 공손수 등 한나라의 내로라하는 장수들이 죄를 얻어 줄줄이 극형을 당했거나 평민이 됐다.(<사기> ‘조선열전’)
조선이 한나라 군을 1년 가까이 괴롭힌 작전이 바로 들판을 비어두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채 장기전을 벌인 바로 ‘청야의 전술’이었다. 이 전술의 전통이 고구려로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청야전술의 요체는 바로 보급로 차단이다. 고조선이나 고구려가 중원의 강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선전을 펼친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대군을 맞받아쳐서는 승리할 수 없는 것. 길 수밖에 없는 보급로를 끊고 전쟁을 질질 끈다면 상대는 굶주림과 추위, 혹은 홍수 등에 녹아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중원을 떠나 요하(遼河)와, 그 유역의 광활한 습지인 ‘요택’을 지나야 하는 원정길이었으므로 보급로는 길 수밖에 없었다.
■수나라 113만 대군의 오산
그 뿐인가. 598년 6월, 수나라 문제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 영양왕이 요서를 참략하자 대대적인 보복작전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수문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했다. 출정 도중에 홍수를 만나 보급로가 끊어졌던 것이다.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져 굶주렸으며, 전염병에 시달렸다. 또 수군마저 평양성으로 쳐들어 오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가라앉거나 표류했다. 수나라군은 3개월동안 전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채 9월 퇴각했다. 30만 대군 중 열에 여덟, 아홉이 죽었다.
수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도 고구려 정복의 야욕을 불태웠다. 양제는 무려 113만3800명의 정벌군을 동원했다. 612년 양제가 출정 했을 때 유질(庾質)과 단문진(段文振)이 잇달아 신신당부한다.
“간악한 저들의 항복작전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또한 정예군으로 저들(고구려)을 신속하게 공격하면 분명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원정의 핵심은 신속한 행동입니다. 지체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양제는 이들의 충고를 무시했다. 113만 대군은 하루에 1군씩 40리 간격으로 떠났다. 113만 대군이 완전히 출병하는 데만 무려 40일이 걸렸다. 선두에서 후미까지의 거리가 960리나 됐고, 황제의 어영만 해도 80리였다. 과연 유질과 단문진의 충고가 옳았다. 고구려는 역시 청야의 전술을 썼다. 민·관·군이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는 작전이었다.
4월부터 시작된 요동성 전투는 6월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다른 여러 성들도 성문을 굳게 잠그고 버텼다. 그러는 사이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계책에 말려 참패했다.
위기감을 느낀 수나라군은 압록강 서쪽 지역에 집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병사와 군마가 각자 100일동안 먹을 식량과 무기, 갑옷, 전투장비, 천막 등을 한꺼번에 지급받았다. 1인당 3섬(石) 이상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수나라 장수들은 “식량을 버리면 참수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군사들은 막사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렸다. 수나라 군은 행군 도중에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은 7번 싸움에서 모두 패주하는 척 하며 굶주린 수나라군을 유인했다. 수나라 군은 살수(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까지 진출했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진영에 “만약 수나라가 군대를 철수시키면 고구려왕을 모시고 황제(양제)의 행재소(머무는 곳)에 가서 알현할 것”이라고 권했다. 수나라군에게 철수할 명분을 준 것이다. 수나라군이 철군을 개시했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사기가 떨어진 수나라군을 뒤쫒아 살수에서 궤멸시켰다. 440년 전 명림답부가 말했던, 즉 ‘굶주려 철수하는 적을 뒤쫓아 치명타를 가하는’ 청야전술의 백미였다. 살수를 건넌 30만5000명의 대군 가운데 돌아간 병력은 불과 2700여 명이었다.
■“요동의 길은 멀고 험합니다”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뤘다는 당 태종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645년 ‘타도! 고구려’를 외친 것이다.
“온 천하가 평정됐는데, 오직 이 지역만이 아직 평정되지 못했구나. 짐이 늙지 않았을 때에~ 취하려는 것이다.”
역시 수나라 때의 유질과 단문진 처럼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수량(저遂良)과 정원숙(鄭元璹)이 극구 만류했다.
“단 시일 내에 승리를 거둔다면 괜찮지만 차질이 생기면 위엄과 덕망이 떨어집니다. 요동은 길이 멀고 식량을 수송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고구려는 성을 잘 수비하니 공격하더라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태종은 “지금은 수나라 때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과연 당 태종의 장담대로 그는 수 양제와 달랐다. 요동성과 백암성, 개모성 등을 잇달아 함락시켰다. 그러나 안시성은 호락호락한 성이 아니었다.
“내가 듣기로 안시성은 지형이 험하고 군사들도 정예군이다. 그 성주도 지혜와 용기를 갖춘 인물이라서….”(당태종)
역시 그랬다. 당나라군은 군·관·민이 합심해서 지킨 안시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으로 흐르자 당나라군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요동의 겨울이 빨리 찾아온 것이다.
“황제는 요동이 일찍 추워져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양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 태종은 결국 철군을 결정했다. ~안시성의 성주는 성 위에 올라서서 태종에게 절을 하고 송별의 뜻을 전했다. 태종도 성을 잘 지킨 성주를 치하하고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삼국사기> ‘보장왕조’)
이처럼 한나라와 수나라, 그리고 당나라가 고조선·고구려에 고전했거나 대패한 원인은 한가지였다. 청야작전에 번번이 말려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홍수나 혹한을 맞은 게 치명타였던 것이다.
중국군 전사(戰史)의 솔직한 고백처럼 아무리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어도, 좁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를 공략하려면 보급로의 확보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적인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요하와 압록강, 청천강은 ‘한반도의 목구멍’에 해당됐으니 예나 지금이나 피어린 싸움터가 된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국방부 전사편찬위, <중공군의 한국전쟁>, 1989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중국군의 한국전쟁사 3>, 오규열 역,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2
국방군사연구소, <유엔군 지원사>, 1999
국방군사연구소, <한민족전쟁통사 제1집-고대편>, 1993
국방부 전사편찬위, <민족전란사(8)-고구려 대 수·당 전쟁사>, 1991
국방군사연구소, <군사문헌집(14)-역대병요(Ⅲ)>, 1992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하)>, 1997
국방부 전사편찬위, <한국전쟁사 제10권-유엔군 참전편>, 1979
국방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연구(3)>, 1999
해방군화보사, <그들이 본 한국전쟁1>, 눈빛출판사, 2005
이기환, <분단의 섬 민통선>, 책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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