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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세종도 '비서실'의 손을 들어주다.

  사정당국(사헌부)과 국왕 비서실간(승정원) 자존심 싸움을 벌이면 국왕은 누구의 편을 들었을까. 

  그것도 여느 임금도 아니고 세종대왕이라면? 아닌게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권부의 핵심끼리 미묘한 힘겨루기가 있었다.. 
 1424년(세종 6년) 8월26일의 일이다. 사헌부가 좌부대언(좌부승지) 이대를 탄핵했다. 무슨 일이었을까.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이날 지신사(도승지) 곽존중을 비롯한 승정원 관리들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청와대 비서실장이 수석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사헌부 소속 장령(掌令·정4품) 양활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계본)을 들고 대궐 뜰에 섰다. 평소대로라면 이 상소문은 승정원이 받아 임금에게 올려야 했다. 그런데 밥을 먹고 있던 승지가 별감을 시켜 “지금 식사 중이니 기다리라”고 전했다. 

임금이 임명한 관리는 사간원과 사헌부 등의 '서경', 즉 일종의 임명동의를 통과해야 했다. 사진은 선조 때 청난 및 호성공신이 된  신경행(1559~1623년)은 사후 200여 년 뒤 ‘충익공’으로 추증될 때 사간원의 승인을 받은 <시호서경>(보물 1380호).|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사정기관과 비서실의 힘겨루기
 그래놓고는 술판을 벌이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면 일부러 몽니를 부리려고 그랬는지도 모를 터. 날이 저물 때가 돼서야 승정원의 좌부승지 이대가 나와 상소문을 받았다. 일언반구 인사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양활은 본부에 즉각 보고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헌부는 즉시 “기다리라”는 말을 전한 승정원 별감을 잡아 엄히 취조했다. 사헌부는 별감을 취조한 내용을 바탕으로 승정원을 탄핵한 것이다. 그런데 <세종실록>을 보면 두 권력기관 간 미묘한 힘겨루기는 이후에도 이어진다.
 ‘이대 탄핵사건’이 벌어진지 한 달 여가 지난 10월4일, 오랜만에 대궐 밖에서 사냥에 나섰던 세종이 대신들에게 술상을 내려준 뒤 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형방대언(승지) 김자가 슬쩍 나섰다,
 “자 상(세종)께서 대취하라고 했으니까 마음껏 취해봅시다.”
 김자가 노린 것은 한 달 여 전 승정원을 탄핵한 사헌부 장령 양활이었다. 김자를 비롯한 승정원의 6대언(6명의 승지)은 양활을 집중공격했다. 6명이 큰 그릇으로 한잔씩 술을 돌린 것이다.
 양활은 승정원의 십자포화 술공격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만 모두 토하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술자리에서 쓰러져버렸다. 급기야 아전이 부축하고 나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세종실록>은 사헌부 소속 양활과, 또 그에게 술로 복수한 김자를 싸잡아 꼬집는다.
 “승지 김자는 사헌부에게 탄핵받은 것 때문에 임금의 명령을 빙자하여 동료들과 계획적으로 큰 술잔을 골라서 양활에게 술을 권해 실수하게 했다. 그 마음씨가 좋지 못하다. 물론 양활도 풍헌(風憲·사헌부)의 체통을 잃었다. 모든 이가 우러러보는 직책인데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마구 마셔대 실수를 했으니 그 또한 절조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헌부와 승정원의 미묘한 힘겨루기를 다룬 <세종실록>. 세종은 승정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파국맞은 싸움의 결말
 사헌부와 승정원의 해묵은 감정싸움은 결국 3년 뒤 파국을 맞았다. 이 때도 사헌부 양활과 승정원 김자가 관여됐다.
 1427년(세종 9년) 5월 그믐날, 사헌부 지평(정5품) 배권이 대언사(승정원)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임금의 부름을 받았는데도….
 한참 후에야 승지가 나오지도 않고 아전을 사령을 시켜 ‘들어오라’는 말을 전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배권은 대궐 뜰에 서서 승정원 승지들과 힘겨루기를 벌인 뒤 끝내 임금을 배알하지 않고 돌아서버렸다. 그 사이 ‘들어오라고 여쭤라’는 승정원의 말과 “안간다고 어쭤라‘는 배권의 말을 핑퐁식으로 전달해야 했던 아전의 고초를 잠작할 수 있다, 배권은 “승지가 직접 나오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버틴 것이다.
 부하인 배권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장령 양활이 폭발했다. 3년 전 자신이 당한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양활은 세종 임금에게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상소를 올리려고 득달같이 대궐로 달려가 승정원 앞 뜰에 섰다. 이번에도 역시 양활과 악연인 승정원 우부승지 김자가 나서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김자는 “아무리 사헌부 대간의 상소라도 단신으로 와서 올리려면 승정원 청내에 직접 들어와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활은 “대간이 임금에게 직접 올릴 터이니 승정원 청사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팽팽히 맞선 것이다. 그러자 사헌부 수장인 최사강은 “승정원이 임금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있다”며 6명의 승지 모두를 탄핵하는 초유의 사태로 비화됐다.

 

 ■세종대왕의 손은?
 결국 의금부가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됐고, 의금부는 승정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가의 대사는 사실을 봉(封)해서 상소하되, 나머지 일들은 승정원을 통해 상주하면 될 일인데, 사헌부가 망령되게 승정원을 탄핵했다”는 것이었다. 세종 임금도 역시 승정원 편이었다.   
 “대간은 말 하나, 행동 하나 경솔하게 해서는 안된다. 사헌부가 일개 지평(배권)의 말 때문에 6승지를 몰아부쳐 ‘임금의 총명을 속였다’는 둥 하며 갑자기 탄핵했는데 이처럼 경솔한 일이 있는가.”
 결국 배권과 양활 등은 파직되고 나머지 사헌부 관리들은 모두 좌천되고 말았다. 권력의 두 핵심이 벌인 힘겨루기는 결국 승정원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제아무리 세종임금이라도 입바른 소리만 해대는 사헌부보다는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모시는 승정원(대통령 비서실)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던 것이 아닐까.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