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를 소개합니다.
‘조선시대라면 얼마나 좋을까. 처첩을 마음대로 들이고 내칠 수 있는 시대였으니….’
그럴 리 없겠지만 혹 이렇게 상상하는 남자들이 있다면 한마디 하겠습니다. “꿈깨세요. 잘못하면 패가망신할 터이니…”
조강지처를 버릴 수 있는 7가지 죄악, 즉 칠거지악으로 걸어 쫓아냈다는데 무슨 걸림돌이 있었겠느냐고 항변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칠거지악을 무색케 만드는 삼불거(三不去), 즉 아내를 쫓아낼 수 없는 3가지 조건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지요. ‘삼불거’란 ‘돌아갈 곳이 없는 아내는 쫓아내지 못하고,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지냈다면 역시 쫓아내지 못하며, 처음에 가난하게 지냈다가 후에 부자가 됐을 경우에도 쫓아내지 못한다’는 조항입니다. 한마디로 어려움을 함께 한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고 못박은 것입니다.
게다가 조선의 법률에는 제대로된 이혼법이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멋대로 이혼하고 재혼하는 법을 만들어 놓으면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는 신분질서가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으니 양반가에서 이혼소송이 일어나면 조정의 공론까지 일고, 임금이 나서 최종판결까지 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가끔씩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에 있는 ‘지아비가 이혼을 원하면 들어준다’는 조항을 들고나와 이혼을 원하는 사대부가 있었는데요. 그러나 <대명률>의 해당 조항은 ‘아내가 남편을 구타했을 때’라는 조건이 달려있었습니다. 그러니 이혼소송은 번번이 남편 측의 패소로 끝나고 맙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현장의 증거가 없으면 간통죄가 성립될 수 없다’는 판결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겁니다. ‘간통하는 현장을 잡지 못하면 죄를 묻지 않는다(非奸所捕獲 勿論)’는 실록의 언급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정처가 있는데 또 처첩을 얻거나, 혹은 ‘혼테크’로 재산을 축재하는 경우 패가망신하기 일쑤였습니다. 폭력남편의 말로는 더욱 비참했구요.
남의 집 이혼소송에 신료들은 물론 국왕까지 나서 ‘감놔라배놔라’ 하고, 심지어는 ‘강제이혼명령’을 내리기도, 거꾸로 ‘이혼불가판결’도 내리기도 하고…. 알고보니 혼인도, 이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사회가 바로 조선사회였던 겁니다.
<관련기사>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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