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건….” 2016년 미국 뉴욕 자연사박물관 연구원 등 6개국 공동연구진은 칠레의 라스 캄파나스 천문대에서 전갈자리의 한 별을 둘러싼 가스 구름을 관측하다가 깜짝 놀랐다.
이 별의 움직인 방향과 속도를 계산하다가 지구 반대편, 그것도 579년 전인 조선의 <세종실록> 1437년(세종 19) 2월 5일(음력) 기록을 떠올린 것이다.
■네이처가 주목한 세종의 ‘객성’ 관측
“객성(客星·신성)이 미성(尾星·전갈자리)의 둘째 별과 셋째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셋째 별에 가깝기가 반 자 간격쯤 되었다.”(<세종실록>)
<세종실록>은 “특히 객성이 14일간이나 나타났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579년 후인 2016년 칠레 천문대에서 6개국 연구진이 관측한 별이 바로 조선의 천문관이 1437년 묘사한 바로 그 객성과 동일한 별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 별의 가스구름은 1437년 폭발한 신성(객성)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세종 시대의 관측기록이 579년 후 현대천문학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된 셈이다. 2017년 8월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지금도 매우 드물게 관측되는 신성 관측 시점을 역사서에서 명시했다는 것을 평가해서 이 논문을 별도의 뉴스로 뽑아 소개했다.
그렇다면 세종 시대의 ‘신성(객성)’ 관측은 우연이었을까. 아니었다.
세종은 즉위 직후인 1420년(세종 2년) 첨성대(훗날 간의대)를 세워 별자리를 관측하도록 했다. 또 천문·지리·역법·측후·옥루(물시계) 등 사무를 관장하는 서운관(훗날 관상감)을 설립했다.
서운관의 총책임자는 영의정이었고, 2인의 장관급 관리가 보좌했으며 65명의 관리가 배속됐다. 지금으로치면 국무총리가 천문대장과 기상청장을 겸한 것이다. 천문관측은 정교했다.
일·월식, 지진, 혜성, 신성 등의 천문 이변이 일어나면 출현시각, 모양과 정도, 위치, 변화 등을 매뉴얼에 따라 기록한 보고서(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를 4부씩 작성해서 올렸다. 서운관 관리들을 하루 밤낮을 5교대로 입직해서 관측해야 했다. 덕분에 1437년 ‘객성(신성)’을 관측할 수 있었다.
■왕위를 내걸고 천문학에 ‘올인’
궁금증이 든다. 세종이 그렇게 하늘의 변화에 예민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단순히 천문학 발전을 위해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세종은 1420년(세종 2) 지진이 일어나고 혜성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 직접 첨성대에 올라가 관측한 다음 정사를 긴급 중단했다.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중지했으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지진과 혜성을 하늘의 꾸지람으로 여긴 것이다.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세종이 공구수성(恐懼修省·두려워하고 삼가 반성함)함으로써 일주일만에 혜성이 없어졌다”고 썼다. 물론 세종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하늘의 움직임이 심상치않고 기상 이변이 생길 때마다 임금들이 반성문을 쓰고 “내 잘못을 낱낱이 고하라”는 명을 내리는 기사가 줄을 잇는다.
아니 하늘의 변화가 대체 임금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다.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을 소통시키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다. 오죽하면 고대 부여에서는 기상이변으로 농사를 망치면 군주를 죽이거나 쫓아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세종을 비롯한 임금들이 천문학에 ‘왕위를 내걸고’ 올인할 수밖에 었었던 이유이다.
■“황제의 천문역법을 극복하자”
여기에 ‘애민정신의 끝판왕’인 세종 대왕이라면 어찌했겠는가. 세종에게 ‘만고의 성군’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는게 아니다. ‘오로지 백성을 위해’라는 슬로건을 내건 세종은 두가지의 금기를 깼다.
우선 예부터 천문과 역법은 중국 황제의 전유물이었다. 황제국이 하늘을 관찰해서 만든 역법을 제후는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관측자의 입장에서 볼 때 명나라의 하늘과 조선의 하늘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천문관측이 틀릴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가만 있지 않았다. 조선의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 현상과 북극고도 관측 등을 연구해서 조선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했다. 세종은 1430년(세종 12) 8월 3일 “천문 계산에 있어…일월식과 별의 움직임 등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인데 당나라의 역법을 써서 착오가 많이 있었다”고 <칠정산> 편찬의 의미를 전했다. 세종은 간의대(천문대) 조성을 명하면서(1432년) “바다 밖에 있는 조선이 모든 (천문)시설을 중국의 제도에 따랐지만 자체로 하늘을 관찰하는 그릇에는 빠짐이 있다”고 지적했다.
■천재 임금에, 천재 세자, 천재 과학자들
그러나 과제가 생긴다. 하늘을 관측하는 도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가뜩이나 중국 황제의 눈을 피해 천문 역법을 자체적으로 연구해야 하는데…. 세종은 다소 무식한 방법을 쓴다. 동래 관노 출신인 장영실 등을 국비로 중국에 보낸다. 공식유학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귀띔한다.
“너희는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중국이 가르쳐 줄 리 만무하니 장영실 등에게 ‘눈대중으로 몰래 배워오라’는 특명을 내린 것이다. 임금의 이런 ‘무리한 명’을 받잡고 다녀와 각종 과학기구를 만든 과학자들도 참 인물은 인물이다.
세종은 장영실 등이 눈으로 배워온 실력으로 마침내 자격루를 제작하자 “원나라가 만든 자격루보다 훨씬 정교한 물시계를 만들었다”고 감탄했단다.
장영실은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한 이순지(?~1465), 간의 등 숱한 천문과학기구와 금속활자(갑인자)를 제작 지휘한 이천(1376~1451), 간의대·보루각 조성에 공이 큰 김돈(1385~1440),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1434) 등 손꼽을 수 없을 정도이다. 정초와 함께 각종 천문의기 설계에 간여한 정인지(1396~1478)도 빼놓을 수 없다.
거론한 인물들 중 정인지 등 상당수 인물은 순수 과학자라기보다는 문·무관 출신이다. 하기야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1450~1452)이 세자 시절 측우기를 제작했다는 <세종실록> 기록(1441년)도 있다.
그러고보면 과연 세종 연간에는 아들인 세자는 당연하고, 문·무신 등의 신료, 그리고 관노비까지 임금을 닮아 문과와 이과에 두루 능통한 천재들이 넘쳐났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런 분들이 의기투합한 결과물이 바로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과학가구들이다.
측우기와 혼천의(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 자격루(자동 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일정정시의(해·별시계 복합기능), 간의(천체 위치 측정), 규표(방위·절기·시각의 측정) 등 헤아릴 수 없다.
일본에서 간행된 과학사기술사사전을 토대로 집계한 ‘1400~1450년 사이 세계를 선도한 과학기술’은 조선이 29개였다. 반면 중국은 5개, 일본은 0개였다. 다른 지역을 다 합해봐야 28개였으니 참 대단한 일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결합한 자동물시계
‘오로지 백성!’을 슬로건으로 건 세종이 깬 또하나의 금기가 ‘천문기구 발명’에 담겨있다.
무슨 말인가. ‘왕(王)’이라는 상형문자를 보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독점적인 존재(│)가 바로 임금이었다. <서경> ‘요전편’은 “임금 만이 하늘 땅과 소통한 뒤에 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시간과 절기를 나누어 준다”고 했다. 거꾸로 말하면 천기는 군주의 몫이니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누구인가. 세종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民惟邦本)이며,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食爲民天) 존재”라고 여겼다. 그런 세종이기에 1438년(세종 20) 간의대 등의 기구를 서운관에게 맡기면서 ‘오로지 천기를 살펴 백성에게 절후(절기), 즉 농사 시기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 언급했다.
때마다 절기를 제 때 파악해야 했고, 하루에도 낮이나 밤이나 오차없이 시간을 측정해야 했다.
그래서 제작한 것이 자동물시계인 자격루(1434년)다. 이전까지는 시간을 사람이 알리다보니 번번이 착오가 생겼다. 농번기에 시각을 잘못 알려주면 어찌 되는가. 농사도 뒤죽박죽 되고, 시간을 잘못 알려준 자는 처벌을 받기 마련이었다. 세종은 두가지를 한번에 해결할 계책을 찾았다.
“시각을 알리는 자가 자주 착오가 일으킬 것을 걱정했다…시각을 알릴 목각인형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세종실록>)
사람의 잘못을 원천적으로 피하면 되지 않은가. 세종이 생각해낸 ‘신의 한수’가 바로 ‘사람 대신 목각인형’이었다. 목각인형이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였던 것이다. 장영실 등이 제작한 자격루는 바로 물시계와 시보장치가 결합되어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자동 물시계’였다.
동아시아의 유압식 물시계와 아라비아식 자격장치를 조합시켜 스스로(自) 시간을 알려주는(擊) 최첨단 물시계(漏)였다. 물시계(아날로그)의 물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다시 일정한 시차로 구슬과 인형을 건드려 자격장치(디지털)를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자동제어시스템에 의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변환기로 접속되는 디지털 시계를 발명한 것이다. 한마디로 백성의 수고없이 자동으로 작동되는 시계를 만든 것이다. 자격루는 조선의 국가표준시계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거창한 장치가 궁중에만 있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격루가 일러주는 시간을 널리 알리는데 한계가 있지 않은가.
■한자 대신 동물 그림으로
여기서 세종이 ‘천기를 누설’한다. 1434년(세종 16) 10월2일 “백성들을 위해 인적이 많은 대로변에 해시계(앙부일구·仰釜日晷)를 설치한다”고 선포했다. 설치장소는 혜정교(종로 1가 광화문우체국 부근)와 종묘 앞 등 두 곳이었다. ‘앙부일구’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시각을 재는 시계’라는 뜻이다. 18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설치한 빅벤보다 415년이나 빠른 공중시계탑이다.
1434년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이었다. 아무리 공중시계를 설치해놓았다 해도 한자로 표시한 시각을 어찌 읽는단 말인가. 세종이 또한번 ‘신의 한수’를 쓴다.
바로 시각을 글자(한자)가 아닌 동물 그림(12지신)으로 표현한다는 것이었다. ‘자(子)·축(丑)·인(寅)·묘(卯)’ 대신 ‘쥐와 소, 호랑이, 토끼’ 등의 동물을 그리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세종은 “시각에 12지신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서 “해에 비쳐 세부시각이 뚜렷하게 보이고,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천기 누설 차원을 넘어 천기를 공유한 셈이다.
■별의 움직임으로 물시계 오차 조정
‘오로지 백성!’을 외친 세종의 열정은 한이 없었다. 해시계(앙부일구)는 낮에만 소용되었다. 또 밤에는 물시계인 자격루가 있었지만 중력 등의 요소 탓인지 물의 흐름이 일정치 않았다. 때문에 오차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완벽주의자’ 세종이 또하나의 발명품을 선보였는데, 그것이 ‘일성정시의’(1437년)이다,
‘일정정시의(日星定時儀)’는 말 그대로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으로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다. 이 시계는 낮에 태양 뿐만 아니라 밤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항성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조선의 발명품이다.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는 세종의 노심초사가 묻어나는 독창적인 창조품이다.
또 있다. 1437~38년 사이 물의 부력으로 자격장치를 작동하는 자격루의 기법에서 한발 더 나아간 옥루를 개발했다. 옥루는 물의 부력만이 아니라 물레방아 모양의 수차를 돌리고, 수차가 기륜(기어장치)을 돌려 선녀와 무사, 12지신 등의 인형이 움직이는 방식을 쓴다. 여기에 태양의 모형까지 덧붙여 천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까지 구비됐고, 동지, 춘분, 하지, 추분까지 알려 주는 자동 종합물시계다.
■과문한 기자의 직무유기
지난 6월말 서울 도심 한복판인 공평동에서 획기적인 발굴성과가 쏟아져나왔다.
세종 연간에 주조된 ‘갑인자’를 포함해서 1600여점의 금속활자가 출토된 것이 첫번째이고, 세종 시대에 발명한 옥루(혹은 자격루)와 일성정시의의 부품 등 천문 과학기구가 확인된게 두번째였다.
그런데 활자쪽에 좀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세종이 계획한 국가적인 프로젝트에 따라 개발된 갑인자 등 금속활자들 모두 국보급이라 할 수 있다. 그때 제작된 활자들이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확인된 옥루(혹은 자격루)와 일성정시의의 부품들 역시 한 점 한 점이 국보급이다. 왜냐면 15세기 세계 과학기술계를 선도했던 분이 다름아닌 세종대왕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때 발명한 천문 과학기구는 단 한 점, 아니 부품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랬으니 천문 분야에 과문한 필자도 공평동 출토 천문기구의 부품을 실견하자마자 ‘이건 보나마나 국보야!’ 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출토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먼저 여러 개의 원형 구멍을 뚫은 동판과, 원통형 동제품의 양쪽에 걸쇠와 갈고리가 결합된 구슬방출기구가 눈에 띈다. 이것이 <세종실록> 등이 설명한 ‘주전(籌箭)’, 즉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가 방출하는 자동물시계의 시보장치를 작동시키는 부품’이라는 내용과 부합된다.
자격루(혹은 옥루)는 물의 양이나 유속 등을 조절하는 ‘수량 제어 장치’와 이를 바탕으로 시간을 자동으로 알리는 ‘시보 장치’로 구성된다. 이번에 확인된 ‘주전’은 신호발생장치이자 동력전달장치라 할 수 있다. 결국 출토품은 자격루(옥루)의 부품인 ‘주전(籌箭)’이 확실하다.
따라서 이번에 확인된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 어느 것이 맞든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의 부품(‘주전’)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확인된 국보급 유물 중에는 ‘일성정시의’ 부품들도 있다. 주천도분환(원을 나누는 각도·365.25도로 등분), 일구백각환(하루를 100각으로 나눠 태양 관측 후 낮시간 측정), 성구백각환(하루를 100각으로 나눠 별 관측 후 밤시간 측정) 등 3개의 고리(環)가 확인됐다.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관측하여 시간을 가늠한 천문시계였다. 국가표준시계인 자격루(옥루)의 오차를 보완했기 때문에 엄청 중요시됐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7년(세종 19년) 4개를 제작해서 내정(궁궐 안)과 서운관, 함경도·평안도에 1개씩 설치했다. 그런 뒤에는 다시 제작했다는 기록이 없다.
확인된 ‘일성정시의’ 부품들은 세종 연간에 제작된 4개 중 한 개가 분명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필자는 공평동 유적을 취재하면서 “금속활자도 중요하지만 천문기구도 그에 못지않다”는 이야기를 꽤나 들었다. 하지만 필자는 천문 분야에 문외한이다. 그러다보니 출토된 천문기구와 관련된 깊이있는 기사를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이용삼 충북대 명예교수와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의 도움말로 ‘초치기’ 공부까지 했다. 그러나 여전히 역부족이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천문기구의 원리와 하늘 관측은 필자에게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임금의 글을 토씨 하나 바꿀 수 없었다”
세종은 승지 김돈(1385~1440)에게 ‘일성정시의’ 발명의 내력을 글로 남기라는 명을 내렸다. 그래서 <세종실록> 1437년(세종 19) 4월15일자에 일성정시의의 원리와 제작 방법을 아주 상세하게 기술해놓았다.
하지만 솔직히 필자와 같은 과문한 자는 도통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하다.
그런데 이 글을 지은 김돈이 실록에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해놓았다.
“일성정시의의 제작 원리를 주상(세종)께서 직접 지어 나(김돈)에게 주면서 ‘내 글을 토대로 해서 경들이 다듬고 보태라’고 하셨다. 그런데 임금이 직접 설명한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도 쉽고 상세해서 내(김돈)가 단 한 자도 고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글 머리와 끝만 살짝 보태 그대로 지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아니 대체 얼마나 공부를 하셨기에 우주의 원리까지 꿰뚫어 해시계와 물시계를 결합한 ‘일성정시의’의 제작 원리까지 글로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너무도 쉽고 상세하게 쓴’ 세종의 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 어리석은 자의 아둔함이여!
이렇게 580여 년 만에 도심 한복판에서 현현한 천문기구에는 백성을 위해 천기를 누설, 아니 공유하고자 한 천재이면서 성군인 세종의 따뜻한 체온이 녹아있다. 어찌 한 점 한 점이 국보가 아니겠는가.(이 기사를 쓰는데 윤용현 박사와 이용삼 교수 등의 도움말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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