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하늘을 보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 말이 절로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하늘이 높고(천고) 말이 살찌는(마비)’ 계절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천고마비’라는 성어는 원래 족보에는 없는 말입니다.
중국 검색엔진인 ‘바이두(百度)’에서 ‘천고마비’를 치면 ‘한국 성어’ 혹은 ‘일본 속담’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천고마비’라는 말의 출전이 <한서> ‘흉노열전’이라는 설명이 있던데요.
그러나 아무리 <한서>나 혹은 <사기>의 흉노열전을 찾아봐도 그 인용문은 보이지 않더군요. 두 사서의 ‘흉노열전’에는 “흉노는 가을에 말이 살찌면(秋馬肥)…사람과 가축의 수를 헤아린다”는 내용만이 나옵니다.
다만 전한의 장수인 조충국(기원전 137~52)이 기원전 62년 한 선제(기원전 73~48)에게 올린 상소문에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찌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난다(到秋馬肥 變必起矣)”(<한서> ‘조충국 신경기전’)고 경고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백거이(772~846)의 시(‘강남우천보악수·江南遇天寶樂수)’에 “활 굳세고 말이 살쪄서 오랑캐 말소리가 시끄럽다(弓勁馬肥胡語喧)”라는 표현도 보입니다. ‘천고마비’는 없지만 ‘추고마비’는 북송 이강(1083~1140)이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찌면 오랑캐가 반드시 쳐들어온다(秋高馬肥 虜必再至)”(<정강전신록>)고 언급한 데서 등장합니다.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한 추고마비의 계절
약간 이상하죠. ‘추마비’ 혹은 ‘추고마비’는 지금의 ‘천고마비’처럼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성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외려 중국 역사에서 가장 공포스럽고 치욕적인 성어였답니다.
단적인 예를 봅시다. 중국인으로서 흉노국에 망명한 중항열(생몰년 미상)이 찾아온 한나라 사신을 겁박한 내용이 <사기> ‘흉노열전’에 나옵니다.
중항열이 “너희 한나라는 조공이나 바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흉노)는 곡식이 익는 가을을 기다렸다가 기마병을 출동시켜 너희 농작물을 확 짓밟아 놓을 것(候秋孰 以騎馳蹂乃稼穡也)”이라고 위협했다는 겁니다.
흉노족은 유목민족입니다. 그들은 봄·여름에 유목으로 말을 살찌운 뒤에 추수철인 가을에 국경을 넘어 막 수확한 한나라의 농작물을 약탈했습니다. 때문에 중국인들에게는 말이 살찌는 가을이 다가오는게 공포 그 자체였던거죠. 그래서 예부터 ‘가을을 방어한다’는 뜻의 ‘방추(防秋)’ 성어는 흉노족 같은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막으려고 요새를 튼튼히 한다는 뜻으로 쓰였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중국 황후에게 성희롱편지 보낸 흉노 임금
한나라라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 사상에 젖어 이민족을 오랑캐로 천시한 ‘중국’이 아닙니까.
그런 중국이 왜 ‘추마비’니 ‘방추’니 하면서 가을만 되면 공포에 떨었다니 참….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기원전 195년 창업군주인 한고조 유방(재위 기원전 202~195)이 서거하자 부인인 여태후(?~기원전 180)가 사실상 한나라를 통치합니다. 어린 아들(효혜제·기원전 195~188)을 대신해 황제 노릇을 했죠. 그런데 그 무렵 흉노의 묵돌선우(왕·재위 기원전 209~174)가 여태후에게 망측한 편지를 보냅니다.
“당신도 나도 홀로 되었고…. 둘 다 즐거운 일도 없고…. 어떤가요. 있는 걸로 없는 것을 바꿔보심이….”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요. “당신은 과부, 나는 홀아비이니 함께 만나 즐겨보자”는 성희롱 편지가 아닌가요.
여태후가 누굽니까. 남편(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여걸이었습니다. 역사가 사마천도 바로 이 점을 높이 사 역대 황제의 전기인 <사기> ‘본기’에 ‘여태후’를 올려놓았구요. 그런 여인한테 성희롱편지라니….
여태후는 ‘묵돌이 나에게 모욕감을 줬다’고 부들부들 떨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엽니다. 몇몇 장수는 당장 본때를 보여주자고 앙앙불락합니다. 그러나 중랑장 계포 등이 “흉노와의 전쟁은 절대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진나라가 누구 때문에 망했습니까. 흉노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조(유방)께서도 40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평성(平城)의 치(恥)’를 당했는데 어떻게 흉노를 정벌한다는 말입니까.”
계포의 주장에 회의장은 ‘갑분싸’로 돌변합니다. 여태후도 결국 흉노정벌의 꿈을 접었습니다. 당대 흉노가 한나라를 능가하는 대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계포가 “진나라가 흉노 때문에 망했다”는 말은 무엇이고, “창업군주이신 고조가 40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평성의 치욕’을 당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평성의 치욕’
외몽골에서 떠돌던 유목부족이던 흉노는 기원전 7세기부터 세력을 키운 스키타이의 기마전법을 습득합니다. 이 흉노의 기마전법은 중원의 진·조·연나라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세 나라는 변방에 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입을 막으려 하지만 역부족이었죠.
진시황(재위 기원전 246~210)이 6국을 통일했지만(기원전 221) 흉노는 두고두고 골칫거리였습니다. 시황제는 대대적인 흉노정벌에 나서는가 하면 만리장성 수축과 변방수비에 수십만명을 동원합니다. 민심이 시황제를 떠났고, 결국 국경수비대로 끌려가던 진섭(?~209년)과 오광(?~208)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진나라는 천하통일 15년 만에 망합니다.(기원전 206)
“진나라가 흉노정벌에 힘쓰는 바람에 나라가 망했다”는 계포의 언급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평성의 치’란 무엇일까요. 항우(기원전 232~202)와의 건곤일척에서 승리를 거둔 유방은 한나라를 세우죠.(기원전 202)
그러나 그 사이 흉노의 영웅인 묵돌 선우가 한나라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힘을 키웠습니다.
흉노는 이제 막 건국한 신생국인 한나라를 압박합니다. 그러자 한고조 유방이 32만명을 동원, 친정에 나섭니다.(기원전 200) 그러나 고조와 한나라군을 유인한 묵돌은 평성(산서성 대동시·山西省 大同市)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합니다.
한겨울 강추위에 백등산이라는 곳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된 고조와 한나라군은 절망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때 묵돌 선우의 부인(연지·閼氏)에게 밀사를 보내, 두둑한 뇌물과 함께 “만약 남편(묵돌)이 한나라를 정복하면 한나라 미인들한테 흠뻑 빠질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 말에 위기감을 느낀 연지가 “이만큼 괴롭혔으면 됐다”고 남편(묵돌)을 설득했습니다.
마음이 약해진 묵돌은 포위망 일부를 풀었고, 한 고조는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역사가 ‘평성의 치’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더 엄청난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흉노족에 공주 보내고 조공까지 바친 중국
흉노의 공세에 속수무책이던 한나라가 불평등 조약을 맺었습니다. 굴욕적인 3가지 조항을 봅시다.
“한나라 공주를 선우의 연지로 보내고, 해마다 일정량의 무명과 비단, 술, 쌀 등을 바치며, 형제의 맹약을 맺어 화친한다.”
중화사상을 확립했다는 한나라가 오랑캐(흉노)에게 종실여인과 조공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형제의 연, 아니 사실상 동생이 되기를 약속한 겁니다. 언젠가 한나라 사신이 흉노족의 풍습을 오랑캐라고 비아냥 댄적이 있었습니다.
“흉노족은 노인을 천대한다죠? 형이 죽으면 동생이 죽은 형의 아내를 취한다지요? 조정에 예절도 없다지요?”
앞서 언급했듯이 흉노 조정에는 중국 연나라의 환관 출신으로 망명한 중항열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중항열은 중국 역사에서 최초의 한간(漢奸·매국노)으로 매도되지만 흉노의 입장에서는 천군만마의 충신이었습니다.
그런 중항열은 흉노의 풍습을 ‘오랑캐 운운’하며 문제삼는 한나라 사신을 깔아뭉갭니다.
“되지도 않는 소리! 흉노는 전투로 나라를 보전하기 때문에 건장한 이들을 우대하는 거다. 또 부자형제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대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중항열은 ‘너희나 잘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쏘아붙입니다.
“중국은 충성이나 믿음없이 예의를 강요한다. 그러니 위아래가 원한으로 맺혀있다. 겉만 화려하고 실속도 없는데 무슨 말라 비틀어진 예의냐.”
중항열은 한나라 사신이 이런저런 토를 달 때마다 “잔말말고 조공이나 제때 바치라. 그렇지 않으면 가을철에 기마병을 동원해서 확 쓸어버린다”고 겁박해버린겁니다.
이후 흉노는 누란과 오손, 호게 등 26개 인접국까지 모조리 병합하면서 더욱 기세를 떨쳤습니다. 한나라는 이미 흉노의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흉노가 한나라에 보내는 편지는 하늘을 찌를듯한 흉노의 위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나는 하늘이 세운 흉노 대선우다. 천지가 생겨난 곳, 해와 달이 머무는 곳의 흉노 대선우가 한나라 황제에게 묻노니….”
■흉노족은 훈족?
그러나 욱일승천하던 흉노의 기세는 한나라 무제(기원전 141~87)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꺾입니다.
한나라는 기원전 115~73년 사이 무위, 장액, 주천, 돈황에 이르는 이른바 하서 4군을 획득합니다. 흉노는 고비사막 북쪽으로 후퇴합니다. 흉노인들은 요충지인 기련산과 연지산(감숙성 하서주랑·甘肅省 河西走廊)을 잃은 슬픔을 노래합니다.
“우린 기련산을 잃었네. 이제 가축을 먹일 수 없네. 우린 연지산을 잃었네. 여인들의 얼굴을 화장할 수 없네.(失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失我燕支山 使我嫁婦無顔色)”(<사기 색은>)
흉노는 한나라 무제의 대대적인 반격과 천재지변, 그리고 내분이 이어지면서 쇠퇴합니다.
일각에서는 흉노를 4~5세기 동유럽 석권한 훈족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훈족은 375년 발라미르의 지휘 아래 동유럽으로 침입했던 유목민인데요. 이것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야기시켰고, 로마제국을 뒤흔들었죠. 볼가강과 판노니아 평원에서 발견되는 흉노식 유물들이 증거자료로 거론된다. 특히 삶고 끓이는 조리용기인 동복(구리로 만든 솥)은 대표적인 흉노식 유물이거든요.
■신라 김씨의 조상은 흉노족인가
또하나, 우리가 흉노족을 한때 중국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 유목 민족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1954년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곽자탄(郭家灘) 마을에서 흥미로운 비석하나가 발굴됐습니다. 864년 32살로 사망한 당나라 거주 신라인인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의 묘지명이었는데요.
“김일제가 흉노의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한나라에 투항해서…투정후(제후)의 관작을 받았다. 이후 김일제의 후손이…한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멀리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됐다.”
재당 신라인, 즉 김씨의 선조가 흉노족(김일제)이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뜬금없는 얘기가 아닙니다.
동강난 채 발견된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비문도 “문무왕의 선조는 15대조가 성한왕(星漢王)인데. 투후(투<禾+宅>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투후 제천지윤’은 바로 <한서> ‘열전’에 나오는 김일제(기원전 134~86)를 가리킵니다. 재당 김씨부인의 묘지명에도 나오는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거든요. 김일제는 무제 때 한나라에 투항했는데요.(기원전 102) 한무제는 휴도왕을 ‘금인(金人)의 제천주’로 대접하고 김일제에게 김씨성을 하사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문무왕릉비의 ‘투후’와, 재당 김씨부인묘의 ‘투정후’와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정말로 문무왕의 신라(경주) 김씨와 재당 김씨부인의 조상은 흉노족이라는 소리일까요. 알 수 없죠. 다만 신라가 특정 종족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예부터 조선의 유민들이나, 중국 진나라의 난리를 피한 망명객들이나,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내려온 낙랑인들이 신라땅에 와서 살았다”는 기사가 줄을 잇습니다.
어떻습니까. 2000년 전 중원의 강대국인 한나라를 동생으로 삼아 조공까지 받았던 흉노족은 참 매력적인 탐구대상이죠.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홀연히 사라진 바로 그 흉노가 뭔가 한국 역사와 인연의 끈을 맺고 있다니 참 흥미로운 일이죠.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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