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고려 금속활자 관련 공부를 하다가 한가지 흥미로운 자료를 입수했습니다.
2016~2018년 사이에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된 고려금속활자와 관련해서 북한학계가 낸 공식자료와, 그것을 보도한 기사 등이었는데요. 그중 청자접시에 박힌 금속활자가 특히 눈에 띄는데요. 이 활자의 발굴기사는 제가 최초로 다룬 적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번에 활자를 찾아낸 북한측의 상세 자료를 보게되니까 더 감회가 새롭더라구요.
그 자료를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 중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있죠. ‘고려=금속활자의 최초발명국’이라는 소리죠.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죠. 자료를 들춰보면 지금까지 남은 고려금속활자가 10점 미만이라는겁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북한 자료를 입수한 김에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배우기로는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1234~1241년 사이에 출간된 <고금상정예문>과 1239년 나온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등이라 했죠. 아닌게 아니라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1234~1241년 사이)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찍었다”(동국이상국집)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금상정예문>은 기록만 존재할 뿐이죠.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어떨까요. 책의 발문에 당대 무인정권의 실세인 최이(?~1249)가 “이 책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으니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판각한다. 기해년(1239년)”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목판본만 전해지고 있다고 했는데요.
최근에 “공인박물관이 소장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하 남명증도가)이 목판본이 아니라 금속활자본”이라는 획기적인 연구성과가 발표됐는데요. 그렇다면 1239년 간행된 <남명증도가>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겠네요.
<남명증도가>가 아니더라도 1377년(공민왕 13)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이야기에는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겠죠. 서양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7~1468)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이 기껏해야 1450년 전후라니까요.
■남북이 찾아낸 금속활자
그런데요. 이렇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이라고 자타가 공인했다 해도 한가지 찜찜한 구석이 있습니다. 최초 발명 시기인 고려시대에 주조된 금속활자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다.
몇 점 남아있냐구요. 학계의 공인을 받은 것은 단 8점입니다. 그것도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2점 뿐이었답니다.
남측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복’자와, 북측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이 갖고 있는 ‘전’자였는데요. 남한의 ‘복’자는 1913년 덕수궁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인 수집가(아카보시·赤星佐七)에게 구입한거구요. 북한의 ‘전’ 자는 1956년 개성 만월대 회경전 서쪽 300m 지점(신봉문 터 인근)에서 수집됐답니다.
그런데요. 2015년 남북한 학자들의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에서 또 한 점의 금속활자를 찾아냈답니다.
만월대 신봉문터 서쪽 255m 지점에서 찾았는데요. 찾아낸 금속활자가 ‘한결같은 단(전·혹은 아름다운 전)’자 였다는데요. 글자의 뜻 그대로 남북한이 발굴해낸 ‘한결같이 아름다운 금속활자’였던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때까지 남북간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남북한 공동조사단은 2007~2015년 7차례에 걸쳐 총 400일 동안 만월대의 건물터 40여동과 유물 1만6500여점을 발굴했으니까요.
■북한이 더 찾아낸 4자의 금속활자
그러나 2016년 새해벽두부터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남한의 개성공단 가동 무기한 연기 결정 등으로 남북관계가 급냉합니다. 만월대 공동조사 역시 중단됐죠.
그 사이 남측 학자들을 안타깝게 만든 일들이 생겼는데요.
2016~17년 만월대를 단독 발굴하던 북한 조사단이 4점의 금속활자를 더 찾아냈다는 겁니다. ‘물흐르는 모양의 칙(水변에 仄)’, ‘지게미 조(糟)’, ‘이름 명(名)’, ‘눈밝을 명(明)’자였답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답니다. 북한의 단독조사에서 이 4점 외에도 ‘성할 선(人변에 扇)’자가 새겨진 금속활자를 한 점 더 찾아냈다는 소식이 뒤늦게(2019년) 남측에 알려졌습니다. 이로써 고려시대 공인 금속활자는 남북한 통틀어 8점이 되었는데요.
그런데 이 ‘선’자는 다른 7점보다 가치가 월등한 유물이었습니다. 발굴 당시 흙속 30㎝에 묻힌 꽃모양 청자 접시 안에 박혀있었는데요. 이 청자접시는 13세기 유물로 평가됩니다. 그렇다면 청자접시에 박힌 ‘선’자 역시도 그 시대 금속활자일 가능성이 높은 거죠.. 13세기라면 <남명상송증도가>와 <고금상정예문> 등이 간행된 1234~1241년 무렵이 되겠네요. 제가 이번에 입수해서 알려드리는 북한측 자료에 나온 겁니다.
그러나저러나 이렇게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의 출토지와 연대가 확인된 유물이니 그 가치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거지요.
흥미로운 착안점이 더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외에 지금까지 확인됐거나 수습된 금속활자 7점이 모두 비슷한 지점(신봉문터 서쪽)에서 출토되었다는 겁니다. 또한 지금까지 발견된 금속활자들의 생김새나 크기, 재질 등이 모두 같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만월대 신봉문터 인근 지역에서 금속활자와 관련된 관청이 존재했다는 얘기일까요.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1123년 편찬)은 고려 궁성의 정전인 회경전, 신봉문 근처에 문서저장고인 ‘임천각’과 왕실 보물창고인 ‘장화전’ 등이 존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부근에서 확인된 일련의 금속활자는 이들 관청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또 모르죠.
고려 조정이 <남명상송증도가> 혹은 <고금상정예문> 등의 편찬을 앞둔 1230년대에 마련한 주자소가 있었을 수도 있죠. 1230년대라면 서긍이 다녀간 뒤니까요.
■활자혁명 이룬 서양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기겠네요. 명색이 금속활자 발명국이라면서 남아있는 금속활자가 남북한 통틀어 단 8점밖에 없습니다.
이게 웬말입니까. 이유가 있었답니다. 분명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명한 것은 고려 왕조입니다. 그뿐입니까.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조 태종과 세종은 각고의 노력 끝에 계미자(1403년)와 정해자(1407년), 경자자(1420년)에 이어 가장 아름다운 활자라는 갑인자(1434년)를 창조해냅니다.
반면 구텐베르크는 1450년 무렵 라틴어 표준문법인 <도나투스>를 간행하고, 4년 정도 뒤인 1454년이 되어서야 <구텐베르크 성서>(일명 <42줄 성서>) 180부를 찍어냅니다. 그러나 시작은 늦었지만 구텐베르크가 시위를 당긴 서양의 활판인쇄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합니다. 불과 50여 년 만에 유럽 전역 350개 도시에 1000개 이상의 인쇄소가 생겼습니다.
그 사이 대략 3만종 900만부의 서적이 출간되었습니다. 지금의 인터넷 혁명을 방불케 하는 정보혁명이었습니다. 유럽은 금속활자가 이룬 혁명으로 책이 대량 보급되었고,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문예부흥시대가 이어집니다.
반면 고려·조선의 인쇄술은 지식의 창제와 복제라는 측면에서 뒤쳐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따지고보면 고려·조선의 금속활자는 주조에도, 인쇄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모래주형으로 활자를 주조하다 보니 모래알갱이 때문에 활자가 깔끔하지 않고, 네모 반듯 하지도 않았습니다. 주조 때 쇳물찌꺼기도 생겼습니다. 활자들을 배열·조판할 때나 인쇄할 때 활자들을 고정시키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자칫 인쇄 때 배열·조판한 활자들이 밀리거나 쏠릴 수밖에 없었답니다. 1434년(세종 16) 배열·조판 때 대나무 조각을 끼워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하루 40장씩 인쇄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서양에서는 이미 존재했던 동전 주조법과 포도주 압축기 등의 원리를 활용한 주조·인쇄법으로 깔끔한 인쇄물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맨땅에서 헤딩’한 고려·조선의 기술자와 달리 기존의 기술법을 활용한 서양의 주조·인쇄업자들의 입장은 그렇게 천양지차였습니다.
■목판인쇄의 보완재였던 고려·조선
우선 금속활자의 최초발명국인 고려와 그 뒤를 이은 조선에서 서적은 대중용이 아니었습니다. 왕실과 사대부 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몇 부 찍어서 4~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는데 그쳤죠. 그러니 지식의 확대재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던겁니다.
서양은 어땠을까요. 중세 후기 교양운동과 그에 따른 학문의 번영으로 대학이 속속 생겨났고, 대중성서의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그렇지만 구텐베르크 이전의 유럽에서는 수도사가 한 자 한 자 필사해서 10~15일에 겨우 한권의 성경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인쇄술이 발명되자 같은 책을 수십권 수백권 찍어냈습니다. 만약 이런 인쇄술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1517년)도 없었을 겁니다.
구텐베르크의 후예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문을 비롯한 연설문과 논문, 반박문, 그리고 신구약성서를 대량으로 찍어댔습니다. 루터는 “인쇄술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도와주신 하느님이 주신 가장 고귀하고 무한한 자비의 선물”이라고 밝혔습니다. 종교개혁 뿐이 아니었습니다.
또다른 이유가 있었죠. 고려·조선에게는 금속활자 말고도 또 하나의 인쇄술이 있었습니다. 바로 목판인쇄였는데요.
아시다시피 불교경전과 그 경전을 필사하는 것을 수행과 공덕을 쌓는 행위로 여긴 선조들은 목판인쇄술을 발명해냈죠.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42년)을 시작으로 초조대장경(1011~1087)과, 고려대장경(1233~1248) 등을 찍어냈잖습니까. 하지만 목판인쇄의 단점도 많았죠. 목판을 새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한번 삐끗해서 글자를 잘못 새기기라도 하면 어떻습니까. 그 목판은 버려야 했죠. 그래서 활자 1개를 주조하면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발명했는데요.
하지만 금속활자 인쇄는 이미 고도로 발달된 목판인쇄를 보완하는 정도로 쓰였답니다.
급히 전국적으로 알려야 했던 국왕의 윤음(임금이 백성들에게 내리는 훈유의 문서) 같은 문서 등은 중앙에서 일단 금속활자본으로 소량 인쇄해서 각 도의 감사(도지사)에 내려보냈습니다. 그러면 각 감사들은 그것을 다시 목판으로 새기거나 베껴서 예하 각 수령에게 배포하는 그런 식이었죠.
다른 이유로는 구리와 같은 금속은 아무래도 구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꼽을 수 있겠네요. 각종 문헌을 읽어보면 태·세종 등이 금속활자 주조를 위해 내부(內府·왕실의 재정이나 물품을 맡아보던 관청)의 구리를 재료로 썼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래도 부족한 비용은 대소 신료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네요. 그러니 아무래도 구하기 쉬운 나무를 주로 썼겠죠.
■26자 알파벳과 5만자 한자의 차이
또하나, 지적할 사항은 인쇄의 지향점이었겠네요. 조선에서 서적은 기본적으로 대중용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왕실과 사대부용이었죠. 조선왕조실록처럼 몇 부 찍어서 4~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는데 그쳤습니다. 가령 1577년(선조 10년) 의정부·사헌부의 승인 아래 조보(조선시대 관보)를 상업용으로 인쇄해서 팔았던 업자 30여명이 사경을 헤맬 정도의 고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죄명은 ‘국가기밀누설죄’였습니다. 그러니 지식의 확대재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심지어 천국행 면죄부까지 대량으로 찍어 내는 등 상업용 출판으로 시작했던 서양인쇄술과는 지향점이 달랐던 겁니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서양에서는 26자 알파벳으로 모든 글자를 표현할 수 있잖습니까.
그러니 서양의 활판인쇄는 52개의 활자(대문자·소문자) 주형만 만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동양은 어떻습니까. 한자의 경우 1000자, 3000자는 기본이고, 무려 5만자가 넘지않습니까.
물론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한글은 한자보다는 낫지만 만만치 않습니다. 현대국어에서 표현될 수 있는 글자는 최소 2350자에서 최대 1만1172자라 하니까요. 게다가 복잡한 고어(古語)는 물론이고 한자까지 섞는다면 어떻습니까. 책 한 권을 찍을 때 주조해야 할 활자의 수가 어땠을까요. 가늠하기가 어렵죠. 세종이 갑인자를 개발하면서 20만자를 주조했다는 기록은 있더라구요.
어떻습니까. 안타깝기는 하죠. 금속활자 발명국인 고려·조선이 왜 뒤늦게 출발한 서양(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과 같은 사회변화를 이끌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보시다시피 이런저런 사정과 이유를 따져보면 마냥 자조섞인 푸념만 할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바라건대 다시 문이 닫혀버린 남북한의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조사사업이 재개되었으면 합니다. 남북관계가 아무리 냉탕·온탕을 오가는 변수가 춤을 춘다해도 이러한 학술조사 및 연구는 변함없는 ‘상수’로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남북한 학자들이 고려 금속활자의 주자소터를 찾는 그날을 기다려봅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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