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년), 임금이 사냥 나갔다가 길가에 주저앉아 우는 자를 보고 연유를 물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날품팔이로 어머니를 공양해왔는데, 올해 흉년이 들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합니다.’ 임금이 한탄했다.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닌가. 백성들을 이렇게 굶기다니….”(<삼국사기> ‘고국천왕조’)
고국천왕은 그 사람에게 옷과 음식을 주었다. 그런데 만약 그것으로 끝났다면…. 어느 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군주의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임시방편의 빈민구제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담당관청에 일러 홀아비와 과부, 고아,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구휼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해마다 3월부터 7월에 이르기 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의 가구수에 따라 ‘차등있게 진휼대여’(賑貸有差)하라. 그리고 겨울 10월에 갚도록 하는 것을 정례(恒例)로 삼아라.”
■고국천왕·문무왕 vs 동성왕
이것이 ‘1회용’이 아닌, 제도적인 빈민구제정책의 효시가 된 ‘진대법’이었다. 또 하나 의미심장한 정책은 신라 문무왕이 폈다.
“668년 고구려를 멸한 뒤 가난해서 남의 미곡을 빌린 자는 풍년 때 상환하되(대곡환상·貸穀還償) 흉년피해가 심한 자는 이자와 원금을 모두 면제(자모구면법·子母俱免法)시켰다.”(<증보문헌비고>)
일제 때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국학자였던 최익한(1897~?)은 고국천왕의 ‘진대항식(賑貸恒式)’과 문무왕의 ‘대곡환상 및 자모구면법’을 두고 ‘사회복지정책의 신기원’이라고 평가했다.(‘최익한의 <조선사회정책사>, 송찬섭 엮음, 서해문집’에서. 최익한이 1947년 펴낸 책을 최근 ‘최익한 전집’ 두번째 책으로 다시 냈다.)
이후 고려와 조선은 ‘진대법’을 발전시킨 의창(義倉)·환곡(還穀)·사창(社倉)제도를 시행하는 등 빈민구제정책을 국정의 핵심 사안으로 삼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이아(爾雅)>는 “곡물이 익지않음을 ‘기(飢)’, 채소가 익지 않음을 ‘근(饉)’”이라 했다. 동양의 지도자는 바로 ‘백성들이 먹고 살 곡식과 채소’를 만드는 구제행사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됐다. 가뭄이나 홍수 등 흉황(凶荒)을 잘 다스리면 인정(仁政)이 되고 성군 혹은 현군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폭정이 되고, 폭군 혹은 혼군이 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 나오는 단적인 예가 있다.
“백제 동성왕 21년(499년)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다.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할 것을 청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고구려로 도망간 한산(漢山) 사람이 2000명이나 됐다.”
■무료급식소의 죽(粥)을 손수 맛본 임금
이는 구제책을 외면하자 돌아선 민심이 대규모 망명의 길을 택한 사례다. 조선의 성군인 세종의 언급은 모든 상황을 정리해준다.(1419년)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처럼 우러러 보는 사람들이다.(民惟邦本 食爲民天) 만일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에게 그 죄를 물을 것이다.”(<세종실록>)
46년 간이나 백성을 다스린 숙종도 만만치 않았다. 예컨대 1696년, 숙종 임금이 ‘버럭’하면서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린다.
“과인이 “설죽소(設粥所)에 별감을 몰래 보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죽을 가져오게 했다네. 그런데 그 때는 제법 죽의 양이 넉넉하고 쌀알도 많았다네. 평소에도 그런가 하고 다시 가져오게 했네. 그랬더니 양이나 질 모두 형편 없었네. 이래 가지고서야 굶주린 백성들이 살 수가 있겠는가.”
고려·조선 때는 국가가 직접 요즘의 노숙자 무료급식소 같은 시설을 운영했다. 숙종은 빈민들에게 주는 관립 무료급식소, 즉 설죽소의 죽이 제대로 배급되고 있는 지를 두 번이나 꼼꼼하게 체크했던 것이다. 1704년(숙종 30년)의 비망기에는 ‘굶주림에 사달리는 백성들’ 생각에 전전반측하고 있다.
“아! 불쌍한 백성들이 장차 죽게 됐는데…. 축적된 곡식은 하나도 없고…. 한 밤 중에도 애를 태우며 걱정하니 뾰족한 계책이 생각나지 않는구나.”
최익한은 그런 숙종을 두고 “재위 46년간 백성을 구휼하는 선정이 두드러졌으며, 시절이 화평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숙종의 시대라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먼저 지원하고 나중에 보고하라
‘선지원 후보고’의 원칙도 중요한 화두였다. 예컨대 태종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구휼인만큼 왕명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처리한 뒤에 나중에 보고하라”고 신신당부했다.(<태종실록> 1416년)
최익한은 ‘선지원 후보고’의 모범사례로 ‘세종 연간의 김숙자라는 수령’을 꼽는다. 김숙자는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생하자 왕명도 받들지 않고 군수물자(군량미)를 풀어 구휼에 나섰다.
대역죄가 될 수도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쓰러져도 문책이 두려워 왕명을 기다리던 다른 고을 수령이라면 더욱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김숙자는 “백성에 마음을 두었는데, 어찌 법에 저촉될 것을 두려워 하겠느냐”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전에 한소(후한 때의 관리)는 흉년을 만나자 상부에 보고할 여유도 없이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했다. 그러면서 ‘죄를 받는다면 난 웃음을 머금고 땅에 묻힐 것(含笑入地)’이라고 했다. 급암(전한 때의 관료)는 거짓으로 왕명을 칭해 하남의 창고를 털어 빈민을 구하고 죄를 사양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백성들은 의연한 태도로 빈민구제에 나선 김숙자의 은혜에 깊이 감동했다. 백성들은 추수 때가 되자 관의 독촉을 기다리지 않고 자진해서 빌린 곡식을 앞다퉈 갚았다고 한다.
최익한의 표현대로 굶주린 백성들을 향한 지도자의 ‘애절측달(哀切惻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임금의 개인금고인 내탕고의 은(銀)과 쌀을 하사해서 구휼비용에 보충하고(선조·숙종), 제문을 지어 굼어죽은 백성을 제사 지내도록 하고(숙종), 걸식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죽을 나눠주고(영조), 쌀을 내려주고(정조)….
■가렴주구의 온상이 된 환곡제도
그러나 사력을 다해 구축한 조선판 ‘그물망 복지서비스’가 갈수록 가렴주구의 온상이 될 줄이야. 예를 들어 최익한은 고구려의 진대법과 고려의 의창을 계승한 조선의 환곡을 자연경제 시대 ‘진대’의 가장 합리적인 형태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관청 창고에 저장해놓은 묵은 곡식을 새 것으로 교체하기 위한 방책이 됐고, 국고와 탐관오리의 이자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원래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걷고(春貸秋斂)’, ‘절반은 창고에 남겨두는(折半留庫)’ 것이 환곡의 중요규정이었다. 즉 한편으로는 일반 농민의 구제책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각 창고에 둔 곡식을 새 것으로 교채하는 대책도 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가을에 10분의 1을 취모(取耗)한다는 규정이 생긴 것이다. 취모란 무엇인가. 곡물이 ‘쥐와 참새’ 등의 피해 때문에 줄어든 것을 ‘모조(耗條)’라 한다. 만약 관청에서 봄에 곡식을 백성들에게 10석을 빌려주었다 치자. 그러면 가을에 돌려받을 때 관청은 ‘쥐와 참새 때문에 줄어든 양’을 10분의 1로 계산해서 11석을 받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계속 빌리고, 또 이자를 내야 한다면 백성들의 이자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취조’의 폐해를 개탄한다.
“이른바 모(耗)는 모가 아니라 이익을 더하는 것이다. 10분의 1의 수가 7년이 지나면 본 곡(원 곡식량)의 수와 대등해진다. 7년 중에 황렴한 것이 거의 억만석인데 이것이 과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봄에 15두를 받는다 해도 실상은 13두에 불과하고….”
■“환곡이 백성을 죽였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필요하지도 않는 곡식을 강제로 백성들에게 빌려준다는 것이다. ‘절반은 창고에 남겨둔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이자 부담은 늘고, 봄에 묵은 쌀을 받아 가을에 새 쌀로 갚아야 하는 이중삼중의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그러니 ‘가을에 환곡을 거둬들이면 마을이 텅 빌 정도’(<성호사설>)라는 것이다. 1779년(정조 13년) 병조참지 박효삼은 환곡제의 폐단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상소를 올린다.
“화곡을 설치한 것은 빈민구제와 군량저축인데…. 곡식 환모(이자로 받는 곡식)이 점점 불어나 속이 찬 곡식으로는 다 받을 수 없고 반도 받지 못한 해가 많아 백성들이 대부분 도망해 달아납니다. 그 때는 이웃사람과 친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게 되는데…. 고을을 두루 수색하여 항아리에 간직한 곡식도 바닥내 버리니 굶주린 사내와 헐벗은 계집이 ‘환곡이 우리를 죽이는구나’라고 울부짖고….”
그러고보니 고국천왕 이후 기나긴 세월동안 이어진 합리적인 사회정책은 결국 ‘쥐와 참새’의 창궐로 망국의 원흉으로 변질되고 만 것인가. 이기환 선임기자
'책으로 역사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정놈의 '춘추필법' (1) | 2014.02.14 |
---|---|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죄상이 아니다. (2) | 2013.12.23 |
조선의 어느 재야사학자 '분투기' (2) | 2013.11.26 |
국민과 인민, 그리고 황국신민 (2) | 2013.11.07 |
18세기 한류, 조선통신사의 영욕 (0) | 2013.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