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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류, 조선통신사의 영욕

 “임금(영조)께서 통신사로 떠나는 세 사신을 불러 친히 ‘이릉송백(二陵松柏)’의 글귀를 외웠다. 임금은 목이 메고 눈물을 머금은 듯 했다. 그러면서 친히 ‘호왕호래(好往好來)’, 즉 ‘잘 다녀오라’는 네 글자를 직접 써서 사신들에게 나눠주었다.”(조엄의 <해사일기>)
 “임금이 사신들을 불렀다. ‘그대들에게 시 짓는 능력이 있는지 먼저 시험해보고자 하니 글을 짓고 차례로 제출토록 하여라.’”(원중거의 <승사록>)
 계미년인 1763년 7~8월, 영조는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단에게 두가지 사항을 신신당부했다. 첫번째는 ‘이릉송백’의 치욕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릉’이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도굴되어 시신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을 뜻한다. 왜란 이후 조선의 사절로 일본을 방문한 윤안성은 ‘이릉의 송백은 가지가 자라지 않는다(二陵松柏不生枝)’는 회한에 가득찬 시를 남겼다.  

<조선통신사래조도>. 1848년 아네가와 도에이의 그림이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환영열기를 그렸다. 가히 18세기 한류열풍이라 할 수 있다.|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영조는 150여 년 전의 ‘이릉의 치욕’을 절대 잊지말라고 당부한 것이다. 또 하나 시문을 통해 조선의 우월성을 일본인들에게 한껏 과시하라고 주문했다. 그것이 임금이 직접 나서 시문 시험까지 본 까닭이었다.
 이는 ‘정주(程朱·성리학)의 존재를 모르는 오랑캐(일본인)들에게 충신독경(忠信篤敬)을 가르치라’는 임금의 뜻이었다. 사신단의 서기로 참여한 원중거는 떠나기 직전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예의의 나라인 조선이 스스로 장엄하고 공경함을 지녀 관복을 단정하게 하고 행동과 위엄있는 법칙을 잃지 않고 ‘정주’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경서(經書)가 아니면 인용하지 않겠습니다.”(<승사록>)
 이 때 떠난 사절단을 역사는 ‘계미통신사행’이라 일컫는다. 사람들은 이 ‘계미사행’을 사절단 정사인 조엄(1719~1777)이 고구마를 처음 들여와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했던 ‘특별한 사행’으로 기억하지만…. 

 

  ■18세기 인기절정의 ‘한류’
 아무튼 임금의 신신당부에 부응하듯 사절단의 몸가짐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경건했고, 깨끗했다. 사실 통신사 일행은 일본열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큰 고을에 도착하면 통신사절단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시를 가지고 온 자, 필담을 나누려 온 자, 구경하러 온 자 등 수백명이 몰려들었다. 요즘의 ‘한류열풍’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심지어 조선사신들의 글을 받기 위해 ‘새치기’하는 자들도 나왔다. 그 때마다 사절단은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정중하게 타일렀다.
 “그대에게 부끄러운 낯이 있으니 이것은 덕으로 나가는 기본입니다.”
 조선 사절단은 일본인들이 건네는 선물도 일절 받지 않았다.     
 “(우리가 하도 건네주는 폐물을 받지 않으니 일본인의 무리가) 벼루 두 개씩 선물하면서 ‘이것은 손님을 위한 사람의 정이니 받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나(원중거)는 이렇게 말하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군자는 사람을 덕으로 아낍니다. 우리가 돌아갈 때 짐이 깨끗하여 물건이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들의 마음 또한 상쾌하지 않습니까.’”(<승사록>)
 그러나 ‘계미사행’의 여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조선은 여전히 일본을 깔보고 있었지만, 일본 역시 조선을 낮춰보려는 속셈을 노골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천황’을 청나라 천자와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고 막부의 장군을 ‘일본국왕’이라 하여 조선국왕과 맞먹는 관계로 만들려 했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은 여러 문서에 조선국왕을 ‘황제 폐하’로 칭했다. 사실 황제의 나라인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불경스러운 호칭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조선은 굳이 일본의 ‘황제폐하’ 호칭을 거부하지 않았다. 김성일의 문집인 <학봉집>에 사연이 나와있다.
 “일본이 주상(조선국왕)을 ‘황제폐하’로 한 것은 ‘거짓황제(일왕)’가 주상(조선국왕)과 대등한 지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이 굳이 황제의 호칭을 거부하지 않은 이유는…. 조선이 스스로를 ‘조선국왕’이라 낮출 경우, 일본이 ‘일본국왕’이라 칭하는 ‘관백(關白)’, 즉 ‘막부의 최고지도자’와 대등한 관계로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방문하는 조선통신사 일행들은 일본인들을 ‘왜놈들(倭漢子)’이라 불렀다. 조선인의 ‘왜놈 폄훼 관행’을 두고 이런 일화가 있었다.
 “1682년(숙종 8년),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절단장인 윤지완은 사절단의 하급관리들이 ‘왜놈들’ ‘왜놈들’이라고 하자 “왜놈을 일본인으로 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에 일본인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올려 감사의 뜻을 전했다.“(<승사록>)

 

 ■막부의 무례
 그런데 일본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1711년의 8차 사행에서 일본은 성명도, 도장도 찍지않은 ‘관백(막부의 최고지도자)’의 답서를 전달하더니, 심지어는 중종(中宗)의 이름자까지 범하는 무례를 저질렀다. 유교문화권에서는 ‘기휘(忌諱)’, 즉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도발했던 것이다.
 그후 52년이 흐른 ‘계미사행’ 때에도 그 같은 외교적인 무례가 자행됐다. 사행단이 두 개의 판자 문짝인 상근관(箱根關)을 넘을 때 까닭없이 말에서 내려 걷도록 한 것이다. 옛 관례보다 한 문씩 더 물러나 말에서 내리게 한 것이다. 더욱이 사행단이 내린 땅은 진창길이었다. 신발이 젖고 옷이 더러워졌다. 사행단의 담뱃대를 들고 있던 하인(下輩)들을 제지하는 무례를 저질렀다. 그 뿐이 아니었다.  
 사행단은 ‘전명연(傳命宴)’에서 폭발하고 만다. 통신사들이 막부의 관백에게 무릎을 꿇고 4번이나 절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각 태수들도 관백을 맞을 때 두 번 절하는데 유독 통신사만 4번이나 절을 올린 것이다. 이 때의 치욕을 제술관 남옥은 이렇게 회고한다.(남옥의 <일관기>)
 “이른바 위제(僞帝·가짜 황제)라는 자가 있는 데도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한 추장(관백)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치욕스러움을 직접 목도한 뒤에는 갑절이나 원통해서 곧장 머리카락이 갓을 뚫고 나오려 했다.”
 통신사들을 더욱 ‘열받게’ 만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일본의 역사왜곡이었다.
 남옥의 <일관기>와 원중거의 <승사록>은 “사행단을 방문한 시방언(柴邦彦)이라는 자가 전한 시(詩)의 경우 인용한 두 나라의 역사가 ‘극히 놀랍고도 망령된 것’이어서 보낸 그대로 봉해서 돌려주었다”고 기록했다. 고대사와 임진왜란을 얼마나 왜곡했는지 시문의 문답행사와 필담이 중단되고, 보낸 시를 다시 밀봉해서 되돌려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당시 중국 진시황 때의 방사 서불(徐市)의 일본도래설과, 임나일본부설의 기초가 된 진구(신공) 황후의 삼한정벌 등을 사실(史實)로 왜곡하고 있었다. 

 

1763년 에도 막부를 방문중인 조선통신사 일행의 행렬도이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환영인파가 시문을 나누고, 필담을 나누려 몰려들었다고 한다.  

 ■충격의 외교관 살인사건
 불미스런 사건사고도 빈발했다. 특히 귀국길 오사카에서 일어난 최천종 살해사건은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1764년 4월7일)
 외교사절이 공식방문 중에 피살됐다? 아마도 한·일 외교사에 길이 남을 불상사일 것이다. 쓰시마의 소통사 스즈키 덴죠라는 인물이 7일 새벽 최천종의 숙소에 들어와 살해했는데, 사소한 말다툼에서 비롯된 살인사건이라 한다. 이 충격적인 살인사건으로 통신사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또 무슨 변고가 있을까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세우는가 하면, 바람소리에 장막이라도 움직이면 자객이 침입한 것이 아니냐며 부들부들 떨었다. 사행단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한달동안 오사카에 머물었다. 사건은 도주한 스즈키 덴죠가 사건발생 11일 만인 4월18일 검거되어 5월 2일 참수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사실 이 충격적인 사건이 그저 사소한 다툼에 의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치부될 것인가.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일본 정부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 사이 조선통신사들은 속절없이 애만 태울 뿐이었다는 것이다.
 “4월8일, 현장조사가 없었다. 안과 밖의 소식이 통하지 않아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다.” “4월14일, 쓰시마 도주의 답장이 7일만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사건의 진상을 속이고 은폐하며 모호하게 하려는 계책으로….”(남옥의 <일관기>) 

 계미사행사절단 일행과 필담을 나눈 일본 승려 다이텐. 조선인 사절단과의 필담을 <평우록>이란 저작으로 남긴 다이텐은 훗날 대조선 외교전문가로 활약했다. 

■일본인의 ‘혼네’와 ‘다테마에’
 최근, 계미사행통신사절이 겪은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한 달’을 기록한 자료가 번역됐다.(다이텐의 <18세기 일본지식인 조선을 엿보다>, 진재교·김문경 외 옮김, 성균관대 출판부)
 사행을 다녀온 조선인들의 기록은 많았다. 조엄의 <해사일기>, 남옥의 <일관기>, 성대중의 <일본록>, 원중거의 <승사록>,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등이다.
 그러나 이번에 번역된 자료는 조선사절단과 나눈 필담과 시문·서간을 정리한 일본인 승려 다이텐(大典)의 <평우록>이다. 역자들의 말마따나 <평우록>은 시문이나 문학을 두고 벌인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실질의 화제를 구체적인 문답으로 펼쳤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것도 ‘우리’가 아닌 ‘상대’의 시각에서 정리한 자료니만큼…. 
 이들이 나눈 필담을 보면 ‘정주의 논리’로 무장한 조선 사행단의 결기를 엿볼 수 있다. 예컨대 다이텐이 김인겸의 연엽관(상투를 틀고 쓰는 연잎 모양의 관)을 보면서 “아주 좋다. 중국 옛 제도에도 이런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성대중이 “모두 대머리인 중국인들이 어찌 관을 쓰겠느냐”고 답한다. 청나라 오랑캐의 변발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다이텐은 중국의 옛 제도를 물은 것일 뿐이다. ‘소중화’를 자부하려던 김인겸의 ‘동문서답’이었던 것이다. 다이텐은 그런 성대중에게 “주나라가 동천(東遷)했듯이 중화문명이 조선으로 갔다”고 맞장구를 친다.
 ‘예(禮)’의 원조격인 주나라가 동쪽, 즉 조선으로 옮겼다는 절묘한 외교적 발언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이텐은 훗날 그 필담 대목에 각주를 달아 ‘이것은 성대중이 잘못 알아들은 것’이라고 기록해 두었다. <해제>를 쓴 김문경 교수의 말마따나 본문과 주석에 곁 대응과 속마음을 구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인의 ‘혼네(本音)과 다테마에(建前)’인가.      
 또한 다이텐 등은 통신사들에게 집요할 정도로 조선의 과거제도를 묻는다. 의아하게 여긴 통신사들이 “스님이 왜 그런 것을 묻느냐”고 묻자 다이텐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과거가 오직 우리나라(일본)에서만 실시되지 않으니…. 선비를 양성하는 것은 제왕을 일으키는 중요한 일이니….”
 그러자 통신사들은 “그렇다면 스님이 왕자의 스승이 되려 하느냐”고 슬쩍 비꼬기까지 한다. 통신사들은 그러면서도 조선의 과거제도를 아주 상세히 일러준다. 김문경 교수(일본 교토대)는 “다이텐이 언급한 ‘왕자의 일어남’은 곧 천황의 친정을 뜻하며, 다이텐과 조선통신사들 간 필담은 20여 년 뒤에 시행된 시험제도에 참고가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소설로 마감한 진상
 <평우록>을 보면 최천종 피살사건 이후 조선통신사들이 다이텐에게 ‘사건의 전말’을 문장으로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래도 믿을만한’ 다이텐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부탁이었다. 다이텐이 초고를 보여줬음에도 통신사들은 몇 번이나 ‘수정’과 ‘가필’을 요청했다. 그러나 다이텐이 작성한 ‘스즈키 사건의 진상’, 즉 ‘서영목전장사(書鈴木傳藏事)’에는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들어있지 않다. 다만 이 글에는 스즈키의 체포과정에서 극장 연예인을 관할하는 ‘가이토(垣外)’와 극장에서 문지기를 하는 ‘기도(木戶)’ 등 천민들이 활약했다는 것과, 체포영장이 나왔다는 술집주인의 말을 들은 범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는 내용 등 생생한 묘사가 나온다.
 조선의 사행사들이 다이텐의 이 글을 ‘사료’에 필적할만한 명문이라고 칭찬했다. 그들은 사료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이텐은 이 글은 그저 ‘소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일본인으로서 사건의 진상을 알릴 수 없는 다이텐으로서는 조선인의 구미에 맞는 픽션을 살짝 가미한 ‘소설’을 쓴 것이다. 

최근 다이텐의 <평우록>을 번역한 책이 나왔다. 일본인의 시각에서 본 <계미통신사절>의 이야기이다.|성균관대 출판부

■사절단의 ‘그 후’
 ‘해제’를 쓴 김문경 교수가 말미에 붙여놓은 강조점이 있다. ‘계미사행통신사절’의 ‘그 후’ 이야기이다.
 다이텐은 “갈대 같은 작은 배로도 소화(小華·조선)의 아름다운 문물을 보고 싶다”고 누누이 조선에 가고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조선의 성대중은 “말은 좋지만 성사될 수 없는 장담일 뿐”이라고 고개를 내젓었다. 하지만 다이텐은 훗날 막부의 외교사무를 일임받은 쓰시마의 윤번승으로 활약했다. 조선과의 외교전선에서 일하며 쓰시마 역지빙례를 성사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역지빙례(易地聘禮)’는 일본 본토나 서울이 아니라 쓰시마나 동래 같은 가까운 곳으로 방문지를 바꾸며 치르는 외교행위를 뜻한다. 조선과 일본은 이 ‘계미사행’을 끝으로 본국을 오가는 사행을 끝냈고, 1811년 마지막 12차 사행은 쓰시마에서 이뤄졌다. 반면 당대 최고의 지일파로 발돋움 한 ‘계미사행’의 조선외교관들은 ‘그 후’는 어땠을까.
 그 누구도 대일정책에 참여한 인사가 없었다.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얻은 생생한 지식은 일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에 그쳤다. 원중거가 조선의 과거제도를 기꺼이 가르쳐주면서 “일본이 인의예악으로 제도를 만들어 정치를 하면 동쪽의 근심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 했단다. 다산 정약용도 “일본은 이제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니…. 그런데 그로부터 100년 후 어찌되었는가.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