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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최초의 만평에 실린 이완용의 '불륜설'

“李■를 잡고 조개(趙개)를 구어라. 고걸(高乞)을 쳐서 모(모)로 박(朴)어도 윷에는 죽는다.”

1910년 2월 15일 <대한민보>에 통감부에 의해 부분 삭제된 만평이 실린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일을 윷놀이에 비유한 풍자만평이었다.

이도영의 만평인 '자부상피. 당대 이완용과 이완용 며느리간 파다하게 돌았던 망측스러운 불륜설을 풍자했다.(위 사진)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 직후 이토 히로부미와 친일파 일파의 처단을 윷놀이로 풍자한 이도영의 만평(가운데 사진) 1909년 6월2일 <대한민보> 1면에 게재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사만화.(아래 사진)

삭제된 ‘이■’는 누가봐도 ‘이도(토)’를 가리킨 것이었다. 만평은 이토 뿐 아니라 대표적인 친일파인 조(조중응 혹은 조민희), 고(고영희), 박(박제순 혹은 박중양)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풍자였다.
1909년 7월 25일자 만평은 더 지독했다. 만평은 도끼로 나무를 내리치는 남자와 함께 ‘임이완용(任爾頑傭) 자부상피(自斧傷皮)’, 즉 ‘솜씨없는 일꾼에게 도끼질을 맡기니 제 살에 상처낸다’는 글을 남겼다.

한자의 음을 읽으면 이완용이 첫째 며느리(子婦)인 임(任)씨와 근친상간(相避) 했다는 것이다.

하기야 황현의 <매천야록>은 “이완용은 아들이 일본유학을 떠난 사이에

며느리와 간통했고, 후에 귀국한 아들이 간통장면을 목격하고 자살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만평은 당대에 파다했던 소문, 즉 이완용과 며느리의 부적절한 관계설을 노골적으로 풍자한 것이다. 당대의 명창이 판소리 ‘사랑가’에 나오는 ‘뻐꾹 뻐꾹’을 ‘복국(復國) 복국 복복국’으로 부르는 장면도 비감하다.(1910년 4월10일) 기울어진 나라를 세우자는 피를 토하는 외침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시사만화를 통해 친일파를 고발하고 항일의식을 고

취시킨 이들이 바로 <대한민보> 사장인 오세창과 정통화가 출신인 이도영이었다.

당시 오세창은 계몽운동을 표방하며 창간한 <대한민보>에 일본 언론의 만평기법을 도입했다. 오세창이 시사만화가로 낙점한 이는 대표적인 화가인 안중식의 수제자인 이도영(1884~1933)이었다.

그것은 신의 한수였다. 이도영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대한제국 시절의 사회·정치상을 날카로운 필치로 그려냈다. 오세창은 이도영의 그림에 걸맞은 촌철살인의 문구로 야유와 풍자, 비판의 맛을 더했다. 창간호인 1909년 6월2일부터 시작된 최초의 신문만화는 한일강제합병 때까지 348편이 실렸다.
때마침 서울 종로구가 <대한민보> 옛 터에 한국만화 탄생공간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참에 1910년 8월31일 <대한민보> 폐간호에 실린 만화의 제목을 떠올려본다. ‘천리견추호(千里見秋毫)’ 즉 천리밖의 작은 터럭까지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이토록 무시무시한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 자문해본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