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고구려비를 말할 때 절대 잊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예성동호회’라는 향토연구회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그 중요한 국보(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와 보물(봉황리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 뿐인가. 예성동호회는 고려 광종이 954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를 기려 지은 숭선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도 확인했다.
예성동호회는 1978년 당시 충주지청 유창종 검사와 장준식 현 충청대 교수 등이 만들었다.
■ 예성동호회의 개가
당시에는 문화재 축에도 끼지 못했던 기와를 주우러 다녔고, 모임의 이름도 없었다.
그러나 답사팀은 어느 식당의 디딤돌에서 연꽃무늬를 발견했다.
답사팀은 “고려 충렬왕 3년 충주성을 개축하면서 성벽에 이 연꽃을 조각했다 해서 꽃술 예(蘂)자를 써서 충주를 예성(蘂城)으로 일컬었다”는 고려사 기록을 떠올렸다.
이 돌은 충렬왕 당시 성을 쌓을 때 사용한 신방석(信防石·일종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마침 지역 언론에서 ‘도대체 모임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볼 때 이 디딤돌 발견을 떠올려 '예성동호회'로 이름 붙인 것이다.
1979년 2월24일 예성동호회는 ‘아주 특별한’ 답사길에 올랐다. 동호회 창립의 산파역을 맡은 유창종 검사가 의정부지청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십 수 차례 답사를 다녔어도 회원들끼리 사진 한 장 찍지 못했어요. 유물, 유적 사진찍기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기회에 기념사진이라도 찍자고 해서 모였습니다."(장준식 충청대 교수)
우선 중앙탑(국보 6호) 부근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러나 내친김에 중원 가금면 하구암리 묘곡에 있는 석불입상과 석재부재를 조사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답사단이 중앙탑을 지나 입석(立石)마을을 지나는 순간, 당시 충북도청 소속 공무원이었던 김예식씨(작고)가 자동차를 세웠다.
“잠깐만요. 저기 (입석마을의) 저 돌 보이시죠. 저 돌 때문에 입석마을이라 하는데 한번 보고 가시죠. 일전에 제가 보았을 때는 백비(白碑·비문의 내용을 새기지 않은 비석) 같았는데….”
일행이 우르르 내려 비석을 살펴보았다. 눈을 비벼가며 비석을 살펴보는 순간 “아!”하는 감탄사가 일제히 터졌다. 눈에 불을 켜고 손으로 더듬어보니 삼면에 글자가 빽빽이 새겨지 있었다.
분명 國, 守, 土, 大자 같은 글자는 읽을 수 있었다. 안성(安城)이라는 글자도 있었다. 그러나 답사단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충북에 무슨 경기도 안성? 그런데 이 ‘안성(安城)’은 고모루성(古牟婁城·고구려성)이었는데, 당시엔 안성으로 읽었던 것이다.
■ 칠전팔기의 상징?
동호회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사실 마을에서도 이 비석에 대한 두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즉, 먼저 조선 숙종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에 사는 전의(全義) 이씨 문중에게 두 개의 돌기둥(石柱)을 기준으로 그 안쪽의 산과 밭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 마을 사람의 18대 조상(15세기)이 경상감사를 하다가 순직해서 유해를 남한강으로 운구하는 도중에 이곳 부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하구암리 통점산에 산소를 정하고 그 분의 공적을 기려 땅을 하사하면서 문제의 입석을 포함해서 3개의 돌기둥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이다.
1972년 대홍수 때는 입석마을이 온통 물에 잠겼고 이 비석도 쓰러졌다.
그러나 마을청년들이 ‘칠전팔기(七顚八起)의 마을’이라는 구호비를 세우고는 바로 그 옆에 쓰러졌던 비석을 다시 세워 마을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러니 비석은 그저 토지경계비일 뿐이고, 아무리 잘 봐줘도 조선시대 비석인데,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었다.
과연 그럴까. 김예식 등 일부 회원들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혹시 진흥왕순수비류의 중요한 비석일 수도 있다는….
김예식은 그 해(1979년) <예성문화> 창간호에 ‘중원고구려비 발견경위’를 생생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중원고구려비 발견과 관련해서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일 수밖에 없다.
“(2년 전인) 1977년 동국대 황수영 박사가 충주를 방문했다. 황 박사는 ‘충주에서 진흥왕순수비류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만약 고비(古碑)가 발견되면 꼭 연락해달라’고 말했다.”
당시 황 교수는 충주 일대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지역에서 진흥왕순수비 같은 비석이 나올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역시 그의 예견대로 1년 뒤인 1978년 단양에서 진흥왕대에 세워진 신라 적성비가 발견된다.
중원 고구려비가 발견되기 1년 전의 일이다. 어떻든 김예식은 황 교수의 이야기가 늘 귓전을 맴돌았다. 그랬기에 입석마을 비문을 예사롭게 보지 않은 것이다.
“삼국시대 고비(古碑)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 지식을 토대로 이 비석이 고식(古式)의 풍취를 안고 있었다. 또 조선시대 것이면 어떠랴. 비문을 읽을 수 있다면 당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달이 지난 3월말. 황수영 교수가 일본학자들과 함께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역시 1978년 예성동호회가 찾아냈다)을 답사하러 온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문화재관리국이 중원군 문화공보실장이던 김예식에게 안내를 부탁한 것이다.
“정말 잘된 일이네. 이 참에 문제의 비석을 한번 보여드려야지.”
예성동호회 차원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미칠 것 같은 궁금증을 풀 절호의 기회였으니…. 약속날짜는 4월5일 식목일이었다.
■진흥대왕의 현신?
4월5일 낮 12시. 황수영 교수는 일본인 학자 2명, 그리고 정영호 단국대 교수와 동행했다.
황 교수가 석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제자인 정영호 교수에게 연락하여 “함께 가보자”고 한 것이다.
황수영 교수의 원래 방문 목적은 일본인 학자와 봉황리 마애불상군을 답사하는 것. 하지만 김예식은 마음이 급했다.
“황 박사님을 우선 가금면 입석마을로 모시고 갔다. 비석을 한바퀴 돌아보시는 그 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친견이 끝나자 김예식은 황수영 교수와 일인 학자들을 안내, 원래의 목적지인 마애불상군이 있는 봉황리로 떠났다. 문제의 비석은 정영호 교수와 예성동호회의 이노영 회원 등이 남아 탁본하기로 했다.
김예식이 봉황리 답사 도중에 황수영 교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 선생님, 석비 어떻게 보셨나요.”
“글쎄요. 진흥왕순수비류의 고비(古碑) 같은데…. 아무튼 내 마음은 온통 그 편에 가 있군요.”
황수영 교수 역시 일본인 학자와의 봉황리 답사는 뒷전이고, 온통 그 비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따라 일본학자들이 얼마나 세밀하게 봉황리 마애불상을 조사하던지…. 마음은 콩밭에 가있고…. 안절부절 못했습니다.”(김예식)
그날 오후, 예성동호회는 황수영 교수 일행에게 차 한잔을 대접하기 위해 충주의 ‘山다실’에 들렀다.
“우리는 다방에서 정영호 교수가 입석리 비석에서 해온 탁본 1장을 펴서 다방 실내 장식용 병풍에 걸었습니다. 정영호 교수는 탁본 1장을 일행에게 주고는 친지를 만난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 글쎄,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대왕(大王), 국(國), 태자(太子) 같은 글자가 읽히지 않는가.
황수영 교수와 일인학자 둘, 예성동호회 김풍식, 장기덕, 최영익, 이노영, 허인욱과 김예식 등 9명은 흥분감에 몸을 떨었다.
“어! 진흥대왕(眞興大王)?”
석비 전면 맨 앞줄에 “○○大王”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왕”을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오독한 것이다.
이해가 갔다.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모두들 선입견을 갖고 있었으니 진흥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떻든 당시 황수영 교수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아! 나는 혈압이 높아 흥분하면 안되는데….”
황 교수는 거듭 차를 청했다.
“이 석비는 분명 진흥왕순수비의 유(類)가 틀림없다!”
일행이 나름대로의 식견으로 석비를 읽고 있는데, 친지를 만나러 간 정영호 교수가 다방에 들어섰다. 그날 석비를 탁본한 정 교수는 이미 이 석비의 글자와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정 선생(정영호 교수), 바로 조사에 착수해야지.”(황수영 교수)
“아니 선생님께서….”(정영호 교수)
“아니야. 충청북도는 정 선생(단국대)이 계속 조사했으니까. 정 선생이 해!”
“예, 그럼 선생님 하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스승은 제자가 충청북도 조사를 전담하다시피한 것을 알고 단국대가 조사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이다.
■ “웬 고구려 지명·관직?”
그 때가 1979년 4월5일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조사는 시급을 다퉜다. 7일,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석비의 이끼를 걷어냈다.
이윽고 이튿날인 8일 아침, 정식조사를 위한 고유제가 끝날 무렵 한 여인이 달려와 “예배를 해야 한다”고 거듭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정순택(당시 57)이라는 여인이었다. 시할아버지부터 3대째 이 석비에 기도해왔는데, 그 여인도 여기서 기도한 뒤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이 당시 영남대 졸업반이었다.
“바로 이렇게 이 석비가 마을의 표상으로 치성을 드리는 대상이었으니 온전하게 남아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모두 입석마을 사람들의 공이다.”(정영호 교수)
본격적인 석문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몇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前部大使者’ ‘諸位’ ‘下部’ ‘使者’ 등 고구려 관직명이 주로 보이는 게 아닌가.
특히 처음에 안성(安城)으로 오독했던 글자가 자세히 보니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분명했다. 고모루성이면 바로 광개토대왕비문에 보이는 바로 그 성의 이름이 아닌가.
고구려 관직명과 고구려성 이름이 보이는데 고구려라는 명문은 보이지 않고….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때 서울에서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김광수 당시 건국대 교수가 탁본을 보더니 대번에 말했다.
“이건 고려(高麗)네.”
선입견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진흥왕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읽었던 것이었는데…. 선입견이 없던 김 교수가 그걸 고려(高麗)로 바로잡은 것이다.
■"대박사는 없고 소박사만 왔나보네"
1979년 중원고구려비 발견 직후 단국대가 만든 학술지(‘사학지 제13집’)를 보면 흥미진진한 내용이 많다.
당대를 풍미했던 학계원로들의 발표논문이 수록돼 있다.
30년 남짓 지난 지금, 당시의 논문들을 능가할 만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기자의 눈에 띈 것은 1979년 6월9일 7시간 동안 펼쳐진 중원고구려비 학술좌담회 내용이다.
이병도·이기백·변태섭·임창순·김철준·김광수·진홍섭·최영희·황수영·정영호 등 학자들이 막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문을 해독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와, 잘 연결되지 않은 문장을 두고 고뇌에 찬 해석을 하고, 또 다른 이와 열띤 논쟁을 벌여 붉어진 학자들의 얼굴이 빛 바랜 책갈피에 그대로 투영된다.
그래도 바로 전 해(1978년) 발견한 단양 적성비의 경우 해석은 어려웠다지만 새겨진 글자들을 읽기는 쉬웠다. 그런데 중원 고구려 비문의 경우 워낙 마모가 심해 비석 정면 부분은 50%만 확실했다. 문맥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은 25% 뿐이었다.
1979년 당시 좌담회 사회를 본 차문섭 교수(단국대)의 재미나는 ‘소박사·대박사’ 발언.
“현장에서 저희(조사단)의 해석이 워낙 설왕설래하니까 마을사람들이 그럽디다. ‘아직까지 대박사(大博士)님들이 안왔나보다. 이 소박사(小博士)들은 (해석이) 잘 안되나보다’하고…. 우리가 대박사(大博士) 못 되어서 완전히 해독할 수 없나봅니다.”
참석자들이 이 대목에서 논쟁의 열기를 식히고는 박장대소했다. 이번엔 두계 이병도 박사가 ‘꿈의 계시론’을 개진한다.
“내가 우스운 얘기를 할게요. 비문 첫 꼭대기에 액전(제목)이 있는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꿈에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단 말이야. 아! 그래 눈이 번쩍 띄어가지고 전등불을 켜고 옆에 있던 (중원 고구려비문) 탁본과 사진을 보니까 그 글자가 나온다 말씀이에요. ‘建興’ 두글자는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가 틀림없어요.”
또 이번에는 조사단을 이끈 정영호 교수(단국대)의 ‘플래시와 햇빛’ 발언.
“두계 선생님 말씀대로 탁본을 보니 정말 건흥사년(建興四年)인 것 같아요. (현장에서) 새벽 4시, 5시면 일어나 비문을 플래시로 비추어보면 그것이 그럴 듯하면서도 그렇지도 않고요. (나중에) 또 창고문을 열고 햇빛을 비추어가면서 보면 글자가 또 달라져요. 광선에 따라서…. 하루에 두 자, 석 자 읽어내는 것이 어떻게 힘이 드는지….”
그랬다. 우연히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이렇듯 여전히 숱한 숙제를 안긴 채 지금도 오롯이 그 현장에 서있다. 비문의 내용과 관련, 백인백색의 주장들이 난무하니 완벽한 해석은 역불급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비문을 작성할 무렵의 고구려·신라의 주종관계다. 이기백 당시 서강대 교수의 해석을 보자.
■“고려왕은 신라왕과 형제의 관계를 맺는다”
‘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라는 대목이 이를 웅변해준다. 즉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니 말이다.
또 하나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이것은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폄훼한 것이다.
‘동이매금지의복(東夷寐錦之衣服)’과 ‘상하의복(上下衣服)’, ‘대위제위상하의복(大位諸位上下衣服)’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대목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고구려군의 신라주둔과 관련된 대목이다. 즉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신라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고구려 군부대의 지휘관)’라는 뜻이다.
자, 이쯤해서 비문이 세워질 무렵의 그 뜨겁고, 폭발적이었던 한반도로 돌아가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와 신라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신라 자비왕) 때 이미 친선(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는 신라가 왕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예속관계가 이어졌다.
즉 광개토대왕 2년(내물왕 37년·392년) 신라 왕족 실성(훗날 실성왕으로 등극)이 고구려 인질로 떠났다. 401년 귀국한 뒤 내물왕의 후계자가 된 신라 실성왕은 412년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인질로 보낸다.
또한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10년(400년)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는 5만 보기병을 파견, 왜병을 쫓아낸 적도 있다.
하지만 424년 장수왕 12년(눌지왕 8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交聘)의 예를 닦았다”(삼국사기)는 기록을 끝으로 고구려·신라의 우호관계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신라가 고구려의 예속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는 대신 백제의 손짓에 눈길을 준다. 433~434년 사이인 백제 비유왕(신라 눌지왕) 때 백제와 신라가 화친한다. 장수왕의 끊임없는 남침야욕에 백제와 신라가 연합전선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강대국(고구려)의 등쌀에서 벗어나고픈 신라가 기어이 일(?)을 저지른다.
450년(장수왕 38년·눌지왕 34년) 신라 하슬라(강릉) 성주가 실직(삼척)에서 사냥하던 고구려 변장(邊將)을 습살(襲殺)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맞대매 하기는 역불급.
장수왕이 “대왕과 우호를 닦아 매우 기뻤는데 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질타하고 공격해오자 눌지왕은 머리 숙여 사과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앙금은 본격적인 반목으로 바뀐다.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했고(454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자 신라가 백제를 돕는 일(455년)이 이어진다. 급기야 신라가 자국 내에 있던 고구려인을 살해한다.(464년·일본서기)
마침내 고구려가 백제 개로왕(재위 455~475년)을 죽이자(475년), 신라가 1만의 구원병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미 한성은 함락됐고, 고구려군은 물러간 뒤였다. 고구려는 481년(신라 소지왕 3년) 7개성을 빼앗고 다시 미질부(경북 흥해)로 진격했다.
정리하자면 381년 무렵부터 백제·신라가 손을 잡는 433년 전후까지 예속관계를 유지하다가 450년부터 극심한 반목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와 신라가 종주국-속국의 사이이던 450년 이전에는 건립된 것이 아닐까.
■개로왕의 ‘생뚱맞은’ 출현
하지만 연대확정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변태섭 당시 서울대 교수는 비문에 나온 ‘오월중(五月中)’, ‘12월23일 갑인(十二月二十三日 甲寅)’, ‘신유년(辛酉年)’ 등을 주목했다.
우선 ‘신유년’의 간지는 420년(장수왕 9년)과 481년(장수왕 69년)에 해당됐다. 그런 다음 ‘12월23일 갑인’의 간지(干支)를 보자 449년(장수왕 37년)과 480년(장수왕 68년)이 나왔다.
변 교수는 바로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그러니까 비문의 내용 가운데 신라왕이 우벌성에 이르러 신라영토 내에 있는 중인(衆人)을 환급받은 날짜가 480년(갑인년) 12월23일의 일이고, 비문을 세운 것은 이듬해인 481년(신유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그러나 이 설(說) 또한 허점이 남아있다. 480~481년이면 고구려와 신라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지내는데 ‘영원토록 형제처럼 지낸다는 내용’은 무엇인가.
또하나 해석에 발목을 붙잡은 것은 비문 전면 말미에 나오는 ‘개로(盖盧)’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개로’를 백제 개로(盖鹵)왕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신라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원래는 백제인이지만 고구려로 망명했던 자)가 백제왕 개로와 서로 공모하여 신라영토 내에서 사람들을 모집 동원했다(이병도 박사)”는 내용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다.
455년 왕위에 오른 백제 개로왕은 475년 장수왕의 공격에 그만 패사하고 만 인물이다. 그런데 만약 비문의 개로왕이 바로 그 백제 개로왕이라면 건립연대가 더욱 헷갈리는 것이다.
중국학자 겅톄화(耿鐵華·퉁화 사범대교수)가 이를 토대로 상상력을 펼친다.
“개로왕이 신라 영토 내에서 공모하여 사람을 모집하려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475년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 목이 잘린 것이 아닐까요.”
지난 2000년, 고구려연구회는 4박5일 동안 55명의 학자들을 동원, 중원고구려비문을 다시 석문했다.
그 결과 모두 19자의 새 글자를 확인하는 성과를 얻었다. 두 번의 국제학술대회를 거쳐 12편의 논문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역불급인 듯싶다.
‘개로’가 백제왕의 이름이 아니라 고구려 관직이라는 설(이호영), 비문 중 ‘신라매금기~(新羅寐錦忌~)’에서 ‘기(忌)’자는 “신라왕이 고구려왕과의 만남을 기피(忌)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라왕, 즉 눌지왕의 이름(忌)라는 설(김창호), 그리고 처음에는 지명 혹은 군영으로 인식됐던 ‘궤영(궤營)’을 광개토대왕비문에 보이는 궤왕(궤王), 즉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표현이라는 주장(임기환) 등….
비문 내용을 두고 이렇게 갖가지 설들이 난무하는 형편이다.
건립연대도 마찬가지다. 비문의 간지를 통해 추정한 변태섭 교수의 481년설(장수왕 69년)이 그럴 듯해보이지만 421년설(장수왕 9년)과 449년 즈음설, 광개토대왕설(403·408년설), 문자왕 초기설(492년?) 등….
■풍납토성이 고구려 것?
1979년 전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좌담회 회의록에서 읽어낸 대목 하나.
즉, 어느 학자가 “경기도 일대는 이미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면서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흙을 쪄서 성을 만든 판축토성을 쌓았다는데 바로 풍납리토성이 그렇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두계가 일축한다.
“그게 아니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항복을 받고 그냥 철수했어요. 당시 경기도 일대가 고구려 소유였다면 어떻게 백제의 수도가 한성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해석에 따라 우리네 고대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음을 경고해주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40년이 지나가도록 어느 향토답사모임에 의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중원 고구려비의 전모를 밝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대의 금석학자 임창순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비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해도 그 가치는 지대하다. 왜냐. 고구려의 금석이 신라 영역에서 확인됐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니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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