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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왕조실록이 센가, 승정원일기가 최고인가…난형난제의 경쟁

 (이 기사는 문화유산채널에서 다룬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비교 영상을 첨부하면서 다시 올린 것입니다.) 


“(영조)임금이 어용(御容·임금의 초상화) 2폭을 내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은 나의 40살 때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임금이 우의정(조현명) 및 예조판서(이종성)와 상의해서 어용의 봉안처를 정했다.”

영조 20년(1744년) 8월20일 <영조실록>의 기사이다. 영조가 40살 때 제작한 자신의 초상화 2폭의 봉안처를 정했다는 다소 무미건조한 내용이다.
이번에는 같은 날짜 <승정원일기>를 보자.
만 50살이 된 영조가 10년 전인 40살 때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가져와 신하들과 품평회를 열었다.   
“백낙천의 시에 ‘나이 많은 형이 어린 아우를 마주 대하듯 한다’고 했는데 그 표현이 맞습니다.”(조현명)
“10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졌으니…. 그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구나. 지금 보니 이 때만 해도 젊었구나!”(영조) 

51세에 그린 어진을 바탕으로 1900년(광무 4년) 모사한 영조의 어진

 

■“전하 폭삭 늙으셨습니다.”
임금은 대신들을 보고 “가까이 와서 과인의 어진을 상세히 보라”면서, 특히 시력이 좋지않은 화가 장득만에게 “안경을 쓰고 보라”고 권한다.
임금의 10년 전 어진을 자세히 살펴본 장득만이 ‘돌직구’를 던진다.
“지금의 용안이 옛날 모습과 다릅니다.”
임금이 “진짜 그러하냐”고 되묻자 조현명이 ‘확인사살’까지 한다.
“크게 다르고 말고요. 수염과 머리카락은 물론 성상의 안색도 옛날 어진의 모습과 다릅니다.”
임금이 웃으면서도 볼멘소리를 던진다.
“경들은 항상 날 두고 늙지 않았다고 하더니…. 지금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러나 ‘진격의 장득만’이 그치지 않고 사정없이 매조지한다.
“지금 임금의 용안은 수염이 세어 하얗게 변했고, 인색도 많이 좋지않습니다. 전에는 홍조를 띠고 윤기가 있었는데….”
보다 못한 임금도 돌직구로 응수한다.
“저기도 흰수염이 있구먼. 뭘.(彼猶有鬚白處矣)”
임금 체면도 있지. 웬만하면 “하나도 늙지 않으셨다”고 덕담을 해도 시원치않을 신하들이…. 임금의 면전에서 “참 많이도 늙으셨습니다” 했으니 참…. 

1714년(숙종 40년)에 그린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감정조절 좀 하십시오.”
1738년(영조 14년) 1월21일의 일을 기록한 <영조실록>을 보자.
“임금이 창덕궁 양정합에 나아가 영의정 이광좌 등을 맞이했는데, 동궁(사도세자)도 있었다. 임금이 동궁에게 글자를 써서 스승들(이광좌 등)에게 주라고 하자 동궁은 큰 글씨를 써서 주었다.”
이번에는 같은 날짜 <승정원 일기>를 통해 이 때의 장면을 살펴보자. 참고로 당시 사도세자의 나이는 겨우 4살이었다.
영조는 “오늘 동궁이 책을 읽고 싶어한다”고 운을 떼면서 “네가 먼저 읽겠느냐”고 사도세자에게 물었다. 사도세자가 수줍은 듯 대답을 하지 못하자 영조는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럼 글씨를 쓰겠느냐.”
내시가 종이 2장과 함께 붓과 벼루를 가져왔다. 사도세자가 붓을 잡고 글씨를 썼다.
“(웃음을 지으며) 글자 쓰는 것은 어려워 하지 않는데 글 읽는 건 몹시 싫증을 낸단 말이야. 글씨 쓴 종이를 네 스승(이광좌)에게 갖다주어라.”(영조)
신하들의 덕담이 이어졌다. 이광좌는 “동궁이 온화한 모습과 슬기로운 지혜를 갖췄다”면서 “어린 동궁에게 올바름을 길러줄 때는 솔선해서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판중추부사 서명균이 매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진다.
“전하(영조)의 솔선수범만이 동궁을 인도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한데 전하께서는 평소 감정조절을 잘 못하시는 점이 많으니…. 우선 성상께서 더욱 힘써 돌이켜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때만 해도 자애롭기 그지 없는 여느 아버지의 모습이었던 영조였다. 그런데 서명균은 죽 끓는듯한 영조의 변덕, 즉 분노조절장애를 우려하고 있다. 서명균은 혹 24년 뒤인 1762년 일어난 비극을 예고한 것일까.

 

■동영상과 편집본
필자는 <승정원일기>의 가치를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해서 설명하기 위해 두 사례를 들었다.
앞의 두 사례에서 보듯 <승정원일기>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 어전의 모습을 생중계 동영상 같은 느낌을 준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현장생중계의 편집본 같다. 여기에 전문가의 의견과 연출자, 편집자의 견해를 담아 하나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과 같은…. 기사로 치면 기자가 현장상황을 그대로 메모한 전문이 <승정원 일기>라면, 현장메모가 데스킹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스트레이트 및 기획기사로 정리될 수 있겠다. <승정원일기>가 날 것의 1차 사료라면, <조선왕조실록>은 사가의 포폄을 더한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도 든다. 이 땅의 백성들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뭐 그런 생각….
그도 그럴 것이 888책 5400만자의 <조선왕조실록>에다 3245책 2억4300만자의 <승정원일기>까지 있는 나라에 살고 있으니까…. 중국이 자랑하는 <이십오사>(3996만자)와 <명실록>(1600만자)도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에 견주면 세발의 피가 아닌가. 특히 <승정원일기>를 보면 7급공무원인 주서의 분투가 눈에 선하다. 자신만의 노트인 초책과 붓을 들고 임금과 신하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주알고주알 기록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장책한 승정원 일기. 지금까지 남아있는 <승정원 일기>는 모두 3245책 2억4300만자의 방대한 분량이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꼬리가 너무 길다
<승정원일기>는 그야말로 개인의 비밀일기처럼 사소한 것까지 기록해놓았다.
예컨대 1736년(영조 12년) 12월25일, 승정원 가주서(假注書·7급 임시직 기록관) 남덕로는 물론 협시내관이 징계를 당했는데, 그 이유는 ‘꼬리가 너무 길었다’는 것이었다.
즉 영조 임금이 창덕궁 희정당에서 남덕로에게 “(합문 밖에서 기다리던) 지평 송창명을 불러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남덕로는 그 명에 따라 밖에 나갔다가 송창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한데 남덕로가 문을 닫지않고 나갔다 온 것이 문제였다. 때는 바야흐로 칼바람이 불던 한겨울 오전. 결국 지존(임금)을 춥게 만든 남덕로는 물론 문이 열려 있는 데도 끝까지 닫지 않고 있던 협시내관까지 조사를 받았다.  

 

■아무리 볼일이 급해도
1727년(영조 3년) 12월1일 살인사건 심리를 위해 임금과 신료 30여 명이 참석했다. 그런데 회의 도중 영의정 이광좌가 벌컥 화를 내면서 임금에게 고했다.
“지엄한 연석자리에는 연로중신이나 재상들까지도 대소변이 아무리 급해도(急於便旋)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오라는 하교가 있어야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줄줄이 출입하고 있습니다. 볼 일이 급한 연로대신이야(老臣之內急者) 그렇다치지만 반열 뒤의 당하관들까지 동시에 일어나 나가버려 텅비었으니 어찌 이런 법도가 있겠습니까. 추고(진상조사)를 해야 합니다.”
영조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사정이 있다면 혹 출입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동시에 많이 나가버려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었네.”

 

조선왕조실록. 888책 5400만자이다. 조정이 여러 1차사료들을 정리해서 만든 정사이다.

 

■지방방송은 꺼라
1741년(영조 17년) 11월28일, 창덕궁 희정당에 신료들이 입시했다. 한림후보에게 보인 소시(召試·예문관 검열을 뽑기 위해 치르는 시험) 성적을 매기기 위한 자리였다.
영조는 대독관에게 “큰소리로 응시자들이 제출한 시권(답안지)을 읽으라”고 지시했다. 영조가 첫번째 시권을 듣고 나름대로 평을 내렸다.
“주제에는 벗어났지만 그래도 괜찮네.”
이 때였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번겸춘추 유정무가 잡담을 하다가 딱 걸린 것이었다. 도승지 원경하는 격례(格禮)를 어긴 유정무를 “추고할 것”을 청했고, 영조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채점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이번에는 연석 한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임금이 관원선발을 위한 답안지 채점을 하고 있는데, 웃고 떠든다? 도승지는 다시 한번 “저들을 추고해야 한다”고 청했지만, 영조는 “이번에는 내가 듣지 못했다”면서 그냥 넘어가주었다.
이밖에도 입시 자리에서 느린 걸음으로 신료들의 반열을 뚫고 들어온 내시이야기, 입시 때마다 자주 졸아서 꾸지람을 들은 신료, 경연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참석한 승지, 주강(晝講) 때 임금이 앉아있는 어탑(御榻) 앞에서 코를 곤 내시 등 요절복통의 사건 X파일이 <승정원일기>에 담겨있다. 


■어전에서 죽을 먹은 원로대신
<승정원일기>에는 <실록>에는 실지않은 임금과 신하 간 솔직하고, 또 인간미 넘치는 독대의 내용도 담겨있다.
예컨대 1631년(인조 9년) 4월4일, 인조는 85살의 노신 이원익을 흥정당에서 인견했다. 이날자 <인조실록>에는 민심안정책과 인재천거 등을 두고 벌인 사뭇 일상적인 대화내용이 담겨있다. 그런데 같은 날 <승정원일기>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이원익은 “지금도 임진왜란 때의 울분을 참을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격정을 토로한다.
“당시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에 천거했는데, 비변사는 원균을 천거했사옵니다. 신은 또 이순신을 해임시키고 원균을 등용하면 일을 그르칠 것이라 급히 아룄는데 비변사는 이순신 해임시켰습니다. 원균이 패한 뒤에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울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원익은 “충훈부 도사로 있는 이순신의 아들 이예가 얻기 힘든 인물”이라면서 “이예는 아버지의 죽음을 일부러 알리지 않고 전투를 독려했다”고 천거한다.   
<승정원일기>에는 또, 이날 독대 중이던 이원익이 내시가 가져다 준 죽(粥)을 먹었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이날 인조는 이원익에게 새 집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원익이 “마음이 편치않다”고 사양하자, 임금은 “절대 사양하지 말라”고 권했다.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임금의 실수를 사정없이 지적하자, 임금이 변명하기 급급한 장면도 나온다.
1728년(영조 4년) 10월3일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사경(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6품 관직) 이종성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종성은 며칠 전(9월27일) 한여름철에도 보기드문 천둥·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내렸는 데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넘어간 일을 거론한 것이다. 원래 천재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은 비망기를 내려 반성하고 널리 직언을 구하는 게 관례였다. 영조 임금은 이종성의 지적에 “깜빡 잠 들었나보다”라며 실수를 인정하고 구구절절 변명에 나선다.
“나는 본래 천(天)자가 적힌 종이쪽이라도 감히 함부로 밟지 않는 사람이다. 27일 밤에도 난 폭우 때문에 속으로 몹시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바로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청사를 배회하며 한밤중까지 잠들지 못했다. 유신(이종성)은 천둥소리를 들었는가. 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잠든 사이 천둥이 쳤던 모양이지. 유신이 아뢴 말이 이토록 절실하니 내 마땅히 유의하겠다.” 

도세자가 8살에 쓴 글씨를 모아 엮은 필첩 <동궁보목>에 있는 '유의' 글씨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글씨를 보고 무척 흐믓한 펴정을 지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선시대의 생중계 영상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 격인 조선시대 승정원을 ‘후설(喉舌)’이라 했단다.
<시경> ‘증민(蒸民)’에 나온 “왕의 명령을 출납하니, 왕의 후설이다(出納王命 王之喉舌)”라는 고사에서 딴 표현이란다. 그러나 단순히 왕의 명령만 출납하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실학자 안정복이 말했듯이 ‘승정원은 왕의 출납을 맡아 옳은 것은 아뢰고, 부당한 것은 거부했으니’ 그 임무는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불후의 사료인 <승정원일기>를 남겼다는 것 하나만 보더라도,  ‘신선처럼 우러러 봐야 할 사람들’(안정복의 표현)인 것이다. 임진왜란(1592년)과 이괄의 난(1744년), 화재(1888년) 때문에 상당부분 소실되고, 288년(1623년 인조 1년~1910년 융희 4년)의 기록만 남은 게 안타깝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번역된 <승정원일기>의 책 수는 500권에 이른다. 많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승정원일기>의 교감·표점본과 번역서를 합치면 총 책수는 5000여 책이 될 것이다. 현재 해마다 50책 정도를 교감·표점하고 번역하고 있으니 1년 평균 전체 책 수의 1%만 번역하고 있는 셈이다. 전체를 번역하려면 100년 가까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승정원일기>는 방대한 문화콘텐츠이다. 어전회의에서 나눈 임금과 신하들의 대화를 옮긴다면 완벽한 시나리오나 극본이 된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팩트가 살아숨쉬는데 공연히 역사를 왜곡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필자와 같은 스토리텔러에게도 흥분되는 콘텐츠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