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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침묵의 절규', 1.12사태 무장공비 무덤

 

 경기 파주 적성면 답곡리 37번 국도변에 조성돼 있는 ‘북한군/중공군 묘지’. 이곳에는 1·21사태 때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남파됐던 124군 특수부대원들이 묻혀 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명인 유해 8구와 ‘북한군 중위 나정길’ ‘상위 김시웅’ ‘소위 김수윤’ ‘상위 김춘식’ ‘중위 김길수’ ‘중위 임용택’ ‘소위 조명환’ ‘소위 현수제’ ‘소위 박양조’ ‘소위 방양진’ ‘소위 최준일’ ‘소위 김달신’ ‘소위 김창국’ ‘소위 박기철’ ‘소위 김순국’ ‘소위 권호신’ ‘소위 김일태’ ‘소위 김을식’ ‘소위 한수군’ ‘소위 유형호’ 등 사살자와 자폭자 이름이 보인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따따따따~”
 1968년 1월10일 새벽, 황해남도 사리원의 인민위원회 건물에 정체불명의 괴한 31명이 출현했다.
 괴한들은 건물 주변을 막아선 노농적위대와 사회안전원들을 향해 AK 소총을 무차별 난사했다. 1~2층을 오가며 총격을 가한 괴한들은 임무를 마친 뒤 전속력으로 시내를 빠져 나갔다. 습격으로 12명이 사망했고, 40여 명이 부상했다. 괴한들의 인명피해는 없었다. 북한에서 이 사건은 남조선이 밀파한 무장공비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니었다. ‘괴한들’은 1967년 창설된 북한 124군 부대 6기지 소속 특수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서울 침투’, 그것도 ‘청와대 습격’이었다. 이들은 청와대 건물과 흡사한 사리원 인민위 건물을 실제로 습격함으로써 마지막 실전훈련을 치른 것이다. 15일 저녁 ‘장도’를 축하하는 환송회에서 유격대원들은 건배를 외쳤다.
 “수령동지와 당을 위해 목숨을 바치갰습니다.”
 124군 부대장 이재형이 입을 뗐다.
 “동무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면 당은 특진과 영웅칭호를 수여할 것이오.”
 원래는 76명의 공작원이 청와대(1조), 미 대사관(2조), 육군본부(3조), 서울교도소(4조), 서빙고 간첩수용소(5조) 등을 타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소수정예(31명)로 핵심만 찌른다는 민족보위성의 방침으로 ‘청와대’로 목표가 축소 수정됐다.

 

  ■남파길에 조우한 나무꾼 형제
 18일 새벽, 유격대원들은 ‘김일성 수령께 보내는 맹세문’에 혈서를 쓴 뒤 연천의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그들은 꽁꽁 언 임진강을 건너 야음을 이용, 파평산(해발 496m)에 오른 뒤 파주 법원리 초릿골 뒷산인 삼봉산에서 숙영지를 차렸다.(19일 새벽) 이곳에서 낮을 보낸 뒤 다시 야간행군을 해야 했다. 이날 ‘작전’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터진다.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온 우씨 형제(우희제·우경제·우철제)와 마주친 것이다. 이때 결정적인 ‘실착’을 저지른다. 형제들에게 “검문소가 몇 개냐.” “쌀밥은 1년에 몇 번 먹느냐.” “입고 있는 옷이 미제냐”는 등 수상한 질문을 해댄 것이다. 유격대원들은 “소작농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는 형제들의 말을 곧이듣고, 엿이며, 오징어며 각기 지니고 있던 비상식량을 나눠주었다.
 날이 저물자 형제들의 처리를 두고 즉석 당 세포회의가 열렸다. 두고 볼 것도 없이 죽여야 했다. 하지만 낮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약해졌던 탓일까.
 “혁명은 바로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우리 편으로 만들자”는 동정론이 나왔다. “죽일 경우 꽁꽁 언 땅을 언제 파서 묻느냐”는 현실론까지 제기됐다. 즉석에서 투표가 이뤄졌다. ‘살리자’는 측이 절대다수였다. 즉석에서 충성서약서와 공산당 입당원서를 받았다. 손도장까지 찍게 했다. 그러면서….
 “동무(큰 형)는 경기도지사로, 동무(둘째)는 파주군수로 임명한다. 곧 남조선은 세상이 뒤집힐 것이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만약 신고하면 가족들까지 모두 죽일 것이다.”  

북한은 청와대를 습격한 124군 부대원들의 시신송환을 거부했다. 남파사실 자체를 부인하려던 것이었다.

|정지윤 기자

■사복에 버버리코트 입고 청와대 돌진
 ‘공수표’를 남발했지만 불길했다. 나무꾼 형제들이 신고할 수도 있었으니까…. 유격대원들은 산악지형을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험준한 산악지형을 시속 12㎞로 돌파하는 ‘인간병기’로 양성된 이들이 아닌가. 남한 군인들은 우씨 형제들의 신고를 받았지만 바람처럼 내달린 북한 유격대의 행방을 쫓지 못했다.
 불과 8시간 만에 북한산 비봉(560m)의 북방에 다다랐다.(20일 새벽) 그날 밤 비봉~북악산~청와대 루트로 돌진할 참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났다. 막판에 길을 잃은 것이다.
 밤새도록 행군했지만 21일 새벽녘에 비봉 남쪽에 다다랐다. 겨우 산봉우리 하나를 돌아왔으니 귀중한 하루를 허비한 것이다. 할 수 없이 ‘청와대 직공 노선’을 선택했다.
 유격대가 예정한 ‘D데이 H아워’는 21일 밤 10시30분이었다. 대통령이 ‘반드시’ 관저에 있을 일요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낮을 비봉 남쪽에서 보낸 뒤 사복으로 갈아입고 버버리코트를 덧입었다. CIC(특무대) 요원으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밤 8시 무렵 세검정길 양편에 종대로 갈라서서 청와대를 향해 줄지어 나갔다. 세검정 삼거리~자하문 고개를 지나는 동안 종로경찰서 소속 순경 둘이 검문에 나섰다.
 그러나 그냥 무시하고 달려갔다. 경복고 후문까지 내달렸다. 청와대와 직선거리로 100m가량 떨어진 ‘코앞’이었다. 그때서야 지프 한 대가 가로막았다. 최규식 종로경찰서장과 정종수 순경 등이 제지했다.
 말다툼을 벌이던 중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병력이 이동하는 소리였다. 다급해진 유격대가 총질을 하기 시작했다. 최규식 서장과 정종수 순경이 쓰러졌다. 그때부터 ‘우왕좌왕’이었다.
 유격대 총조장이 “청와대로 돌격 앞으로!”를 외쳤지만 공허한 외침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병기’가 아니었다. 북악산 쪽으로, 자하문 고개 쪽으로, 인왕산 쪽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청와대 까러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유격대원들은 “붙잡히면 자폭하라”는 명을 받고 있었다.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는 상명여대와 문화촌 사이 세검정 계곡 바위 틈에서 ‘투항’했다.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소리가 들렸다. 자폭하라는 지도원의 말이 떠올랐다. 수류탄 안전핀을 만졌다. 그러나 마음 저 밑바닥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치켜들고 나갔다.”(김신조)
 반면 부상당한 채 체포된 정치부조장 김춘식이 치안국에서 자폭하는 등 3명은 상부의 명에 따라 자폭하고 말았다. 뿔뿔이 흩어진 유격대원들의 최후도 비참했다. 예컨대 파주 법원리에서 사살된 무장공비는 도피 중 총상을 입어 손가락 3개가 절단돼 있었으며, 동상 걸린 발가락은 문드러져 있었다. 배를 곯아 뱃가죽은 붙어있었다. 공비들은 주로 자신들의 침투로를 도주로로 삼았다가 사살당했다.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가 당시 ‘도끼눈을 뜬 채’ 기자회견장에 나와 쏘아붙인 한마디….
 “청와대 까러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무장공비 묘지에서…
 지금 경기 파주 적성을 지나는 37번 국도변에 신경쓰고 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제네바 협정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조성했다’는 적군 묘지, 즉 ‘북한군/중국군 묘지’이다. 한국전쟁 때 희생된 북한·중국군과 함께, 전쟁 후 남파된 무장공비 유해들이 묻혀있다.
 이 가운데 1·21사태 때 사살되거나 자폭한 무장공비 무덤이라 해서 28기가 늘어서 있다. 산산이 흩어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어 ‘무명인’이라 새긴 비석도 8기나 된다.
 옛날 신문을 살펴보면 “경기 양주에서 (28번째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됨으로써 잔당 2명만 남았다”는 기사(경향신문 68년 2월16일)를 끝으로 더 이상의 공비 사살 소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신문(2월5일자)에 27번째 사살자로 보도된 김하설(당시 25세)의 이름은 지금 이 순간 무장공비 묘지에서 찾을 수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북한은 이들의 시신인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시신을 인도받으면 남파사실을 시인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었다. 떠나올 때의 다짐처럼 ‘당과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28명은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림받았다. 성공하면 받을 것이라던 ‘공화국 영웅’의 훈장 대신, ‘1·21사태 무장공비’라는 딱지만이 붙은 채…. 그나마 함께 묻혀있던 중국군 유해 425구는 발굴돼 고향으로 돌아간다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약속한 사항이라는데…. 하기야 묻힐 땅이라도 있고, 게다가 고향 땅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