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은 끔찍했다.
미증유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이틀 후(1월23일)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됐다.
미국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원산만 근처에 급파하고 핵폭탄 사용까지 불사하겠다고 압박했다. 구정인 1월30일에는 북베트남 게릴라들의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가 펼쳐졌다. 그해 10월30일부터는 울진·삼척에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120여명이 연속침투했다. 이들은 15명씩 모두 8개조로 산간농촌마을에 나타나 위조지폐를 나눠주고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가 전쟁의 공포에서 떨었던 한 해였다. 이 세 사건은 톱니바퀴처럼 물렸다. 일련의 사건은 1966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북한 김일성은 제2차 조선로동당 대표자 회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원과 조속한 남조선 혁명 및 조국통일’을 강조했다. 이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남한과 미국의 발목을 잡고, 울진·삼척 사건으로 한반도에서 남조선 혁명을 일으켜 적화통일을 완성하려 했던 것’이다. 푸에블로호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일전불사를 외쳤다. 그러나 금방 한계에 부딪혔다. 베트남전에서도 고전 중인데, 한반도까지 확전된다면 감당할 수 없었다. 미국은 11개월간의 협상 끝에 영해 침범 사실을 시인·사과하고 승무원 석방문서에 서명했다. 미 해군 106년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오죽했으면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가 “그 빌어먹을 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벌컥 화를 냈을까.
또 베트남에서는 남베트남(월남) 경찰간부가 게릴라 혐의자를 권총으로 즉결처분하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반전시위가 격화됐다.
결국 5월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종결을 위한 평화협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청와대 코앞’까지 유린당한 박정희 대통령이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또한 중앙정보부 주도로 청와대를 습격한 북한 124군 부대원과 똑같은 31명의 부대원들로 특수부대를 구성했다. 피의 복수극을 준비한 것이다. 이들이 바로 공군 소속의 684특공대(실미도 부대)였다. 1968년은 야만의 1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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