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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소나무 양병설'의 현장

 연미정(燕尾亭).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서 한 줄기는 서해로, 다른 한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 모습이 ‘제비꼬리’ 같다 해서 ‘연미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삼포왜란 때 전공을 세운 황형 장군(1459~1520년)에게 하사한 정자이다. 황형 장군의 전설은 신비롭기만 하다. 낙향 후 연미정에서 바둑으로 소일하던 장군은 동네 아이들에게 볶은 콩을 나눠 주면서 소나무 묘목을 옮겨오라고 시켰다. 아이들이 싫증을 느끼면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하면서 소나무를 계속 심었다. 동네사람들이 물으면 ‘그저 나랏일에 쓰일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강화 3경인 연미정의 절경. 제비꼬리 처럼 닮은 지형에 놓인 정자라 해서 이름붙었다. 황형 장군의 ‘소나무 양병설’과 ‘정묘조약 체결’, ‘유도 송아지 구출작전’ 등 갖가지 사연들을 안고 있는 정자이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황장군이 죽은 지 72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다. 의병장 김천일이 강화도로 넘어와 병선(兵船)을 만들려고 하다가 황장군이 조성해놓은 엄청난 규모의 아름드리 솔밭을 발견했다. 이것이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수십년이나 앞서는 ‘소나무 양병설’이다. 치욕의 장소이기도 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맹약을 체결했던 곳이었으니까….
 1678년(숙종 4년)에는 연미정이 방어시설인 월곶진으로 바뀐다. 조정은 토지수용을 하면서 ‘손사래를 치는’ 황형의 후손에게 ‘대토 형식’의 보상을 해줬다. 

 “진 설치 후 황형의 후손(황감)에게 보상하려 했지만 힘껏 사양했습니다. 이제 황감의 아들(황익)이 너무 가난하다고 합니다. 간척지라도 대토해주면 거저 빼앗았다는 기롱은 듣지 않을 겁니다.”(<숙종실록>)
 지난 1996년 7월에는 연미정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유도’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집중호우로 떠내려온 두살배기 송아지가 유도에 표류한 것이다.
 비무장지대로 인식돼있는 곳이라 누구도 손 쓸 수 없었다. 송아지는 굶주림 속에 갈수록 여위어 갔다. 보다 못한 우리 군이 북한군과 협의 끝에 이 섬에 들어가 송아지를 구출했다. 송아지는 1998년 제주도 출신 암소와 혼인해 7마리의 새끼를 낳은 뒤 2006년 자연사 했단다. 분단의 아픔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의 불씨는 남아있음을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