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입맛이 개운치 않은 소식이 하나 떴더라구요. 한국은행 본점 화폐박물관(옛 조선은행 본점)에 머릿돌(정초석)이 있는데요. 눈썰미가 있는 분들이라면 본 기억이 나시죠. 그런데 이 머릿돌 글씨가 초대 한국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친필로 확인되었습니다. 지난 10월 26일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지 111주년이 되던 날이었는데요.
이토 히로부미가 일왕에게 상납한 고려자기 중 97점이 1965년 한·일 협정 체결에 따라 반환됐다. 그중 ‘청자 구룡형 주전자’는 보물(제425호)로 지정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알려지지 않은 이토의 죄악
그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의 흔적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있었던 것도, 그 머릿돌 글씨가 다름아닌 이토였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요.
그런데 안중근 의사 시대에는 부각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이후에도 잘 몰랐거나, 아니면 잊었거나, 혹은 간과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처단한 뒤 법정에서 ‘이토의 15가지 죄악’을 들며 처단의 정당성을 당당히 밝히죠. ‘명성황후 시해한 죄와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를 한 죄’ 등을 거론하셨죠.
안중근 의사가 거론하지 않은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한가지가 더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토 히로부미의 16번째 죄악은 바로 ‘고려자기 싹쓸이 쇼핑으로 조선땅을 도굴 천지로 만든 죄’일 것입니다. 아마 안중근 의사의 처단 당시에는 부각되지 않았던 죄악이었을 겁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한국은행 머릿돌에서 확인된 이토의 흔적을 계기로 다시 취재·공부해서 알려드릴게요.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당당하게 밝힌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악. |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고종과 이토의 웃지못할 대화록
우선 먼저 한 가지 웃지못할 일화를 소개해봅니다.
어느날 고종이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과 함께 이왕가박물관을 처음 방문해서 고려청자를 보고 신기한 듯 물었답니다. “대체 이 자기는 어디서 만든 거”냐고요. 그러니까 이토가 “이것은 이 나라 고려시대의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대요.
그러자 고종의 반응이 이상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 그래요?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 모습을 본 이토 히로부미는 아차 싶었는지 더 이상의 대답을 하지 않았답니다. 거짓말 같죠?
1909년 11월18일 대한매일신보. 고려 왕족과 귀족무덤이 많은 개성과 장단군 부근에서 도굴범들이 무덤을 마구 파헤치고 있다고 고발한 기사다.
하지만 이 일화는 1913년 식민지 조선으로 건너와 한국도자기를 연구했던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가 당시 이왕가박물관장이던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態彦)에게 분명히 들었다(아사카와의 <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 1945년>는 기록이니 믿을 만 합니다.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의 대화가 좀 이상하죠? 뭐 주객이 전도된 느낌 아닙니까. 조선의 임금이었던 고종이 고려청자를 모르는 것도 이상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된 것도 이상하고….
그런데 내막을 알고 보면 고종의 반응은 이해가 갑니다. 아마 고종은 무덤에 안장돼있던 고려자기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을 겁니다. 왜냐면 박물관에 전시된 고려청자는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무덤을 파서 꺼낸 도굴품(고려청자)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이토 히로부미가 “이 도자기는 도굴품”이라고 이실직고 할 수 없었겠죠.
■도굴천지로 변한 한반도
사실 고종으로서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조선에서 남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왜 지난 주 방송에서 ‘금관기생 사건’을 일으킨 자가 있죠?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입니다.
그런 자도 “특히 조선 민족은 죽은 뒤에 모욕당하는 행위를 싫어하기 때문에 감히 도굴은 하고 따라서 지금까지 조선의 고분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었다”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일본 무뢰배들의 무자비한 도굴을 인정합니다.
고려시대 왕비릉으로 짐작되는 강화도 능내리 고려석실분. 1910년을 전후로 싹쓸이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고분 도굴의 참상은 병합(1910년) 전후부터 내지인(일본)들이 조선의 촌(村)까지 파고들었다…일확천금을 꿈꾸고 한국에 온 일본인들이…무덤 속에서 금닭이 운다든가 하는 헛소문을 믿고 금광이라도 파낸 것처럼 파돌아다니고 있다.”(<조선> ‘205호’·1932년)
갈수록 대범해진 일본인들은 백주에 총검을 들이대고 후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눈앞에서 선조의 영역을 유린하고 강탈하는 만행까지 저질렀습니다. 특히 수난을 당한 문화유산은 고려자기였습니다.
사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고려청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인기수집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고려청자의 도굴을 조장한 자가 바로 1906년 초대 한국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였답니다.
‘국뽕 억측’이 아니냐구요? 아닙니다. 일본의 도자전문가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의 회고담(‘고려도자서설’, <세계도자전집 제13집 조선상대·고려편>, 좌우보간행회, 1955)을 봅시다.
“고려자기가 세인의 주의를 끈 것은 이토 히로부미공이 초대통감으로 부임한 1906년부터라 한다. 이후 고려자기 수집열기가 폭증해서 1912~13년 사이 절정이 이르렀다.”
도굴범을 처벌한 판결문. 요시다라는 도굴범은 1909년 7월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백주대낮에 개성 청효면 고려고분을 도굴한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좌에서 우로 ‘싹 다’
1906년 통감부 법무원 재판장의 평정관으로 부임한 미야케 조사쿠(三宅長策)의 기록(‘그 당시의 추억-고려고분 발굴시대’, <도자> 6집6권, 1934)은 이토의 행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즉 이토 히로부미의 하수인이 있었는데, 니타(新田)라는 자였답니다. 니타는 이토의 술자리에 수행해서 노래와 춤을 추면서 좌흥을 돋구던, 지금으로 치면 ‘술상무’였습니다.
이토는 니타에게 “고려자기를 보이는 대로 다 사들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니타는 개성과 강화, 장단 등에서 불법 발굴된 고려자기들을 진열한 골동품상을 찾아가 좌(左)에서 우(右)로 50~100점씩을 손가락으로 지정해서 한꺼번이 구입했답니다. ‘고려자기 싹쓸이 쇼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하수인인 니타가 즐겨 찾아간 골동품상이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라는 자였답니다.
포도동자무늬 표주박주전자(왼쪽). 1909년 이왕가박물관은 도굴품인 이 고려청자를 95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오른쪽 사진은 일본으로 흘러간 청자음각연당초문정병. 일본의 중요문화재가 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토가 한국통감에서 물러나 귀국했을 때 회계원에게 “이만큼의 고려자기를 사는데 얼마나 들었냐”고 물었답니다. 회계원이 10만엔이 조금 넘는다고 하자 이토는 그 회계원을 칭찬했답니다.
“아니 그만한 돈으로 이 정도의 고려자기를 모았단 말인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싹쓸이 쇼핑 때문에 경성(서울)에서 고려자기가 품귀현상을 빚어 매매가 자취를 감춘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청자광(高麗靑瓷狂)’ 즉 ‘미친 고려청자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고려청자 도굴업과 밀매업 등에 종사하는 자들이 수 천 명에 달했답니다. 고려왕과 왕족 귀족 무덤이 즐비한 개성과 강화도, 해주의 고려고분에서 무자비한 도굴이 자행됐답니다. 요즘도 고려고분을 발굴해보면 멀쩡한 데가 단 한 곳도 없을만큼 난도질 당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0년대 한반도를 도굴천지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인에게, 일왕에게 선물용으로
그렇다면 이토는 고려자기의 예술적인 우수성을 평가해서 그렇게 많은 고려자기를 수집한 걸까요. 아닙니다. 그나마 양심적이었다는 미야케의 분석이 참 기가 막힙니다.
“당시 고려자기의 문화적, 예술적인 가치를 알아서 수집하는 예는 적었다. 그냥 조선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고려인삼과 고려청자를 선물용으로 사갔는데 이토 공도 선물 목적으로 열심히 사모았다.”
이토가 모은 고려자기는 수천 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중 완형만 1000점에 이른답니다. 이토는 귀국 때마다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선심 뿌리듯 선물했답니다. 심지어 한번에 30~50점씩 남에게 주었고, 이중 최상품은 일왕에게 상납했답니다.
안중근 의사가 만약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청자 싹쓸이 쇼핑’ 사실을 아셨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이토의 죄악은 15개조가 아니라 16개조가 되었을 것이며, 그 죄악을 앞쪽에 배치하지 않았을까요.
■이토가 싹쓸이한 청자는 박물관 수장고에
참 한 가지 덧붙일 게요. 이토가 일왕에게 상납한 고려자기 중 103점은 국립도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는데요. 그중 97점이 1965년 맺은 한·일 협정에 따라 반환문화재 1432점 속에 포함되어 1966년 5월28일 돌아왔습니다.
한일협정에 따라 돌려받은 문화재 목록. 그러나 도자기 분야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가져간 것이라는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그저 도자기 이름과 시대만이 기록되어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런데 제가 1966년 한·일 협정에 따라 반환된 문화재를 정리한 <반환문화재특별전시목록>(국립박물관)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제공받았는데요. 그중 ‘청자 구룡형 주전자’, 즉 연꽃 위에 앉아있는 거북 모양 주전자가 보물(제45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물론 이토가 쓸어간 고려자기 등 한국 문화재가 수천점에 달했으니 돌아온 턱도 없는 숫자이겠죠. 생각할수록 분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돌아온 97점이라도 잘 관리해야겠죠.
그 목록에는 ‘청자탁’(받침대)-고려시대, ‘청자양각모란문주발-고려시대’, ‘청자양각포도당초문주발-고려시대’ 등으로만 되어있더군요. ‘이토 히로부미’ 관련품이라는 표시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50여년이 흘렀답니다. 제대로 관리되고 있겠지만 97점의 유물에 '이토'의 흔적이 지금처럼 없다면 어찌될까요.
시간이 더 지난다면 이토 히로부미와 얽힌, 결코 잊어서는 안될 그 뼈아픈 역사는 지워지고 말겠죠. 국립중앙박물관은 뒤늦었지만 이토의 ‘싹쓸이 흔적’인 97점이라도 제대로 정리해서 제대로 연구하고, 제대로 특별전도 열어서 반면교사로 삼아주기를 바랍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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