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적으로 ‘전(典)’자’를 읽었습니다.” 박홍국 위덕대 연구교수가 12월31일 발행되는 학술지(<목간과 문자연구> 29호, 한국목간학회)에 실릴 따끈따끈한 논문 한 편(‘파주 감악산 고비에 남은 명문’)을 보내왔다.
내용인즉은 경기 파주 감악산(해발 675m) 정상에 서있는 비석을 면밀하게 살펴본 결과 맨 밑바닥에서 ‘법 전(典)’자를 읽어냈다는 것이었다. 아니, 겨우 딱 한자를 읽어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냐고 의문을 품은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것이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살펴볼까 한다.
■조선시대 때도 판독 불가였던 비석
요즘 출렁다리로 유명해진 적성 감악산 정상 위에는 수상한 비석 한 기가 떡하니 서 있었다.
이름하여 ‘감악산비’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비석의 정체를 두고 설왕설래했던 것 같다.
1666년(현종 7) 감악산 정상에 오른 미수 허목(1595~1682)의 <기언 하> ‘산천 상’을 인용해보자.
“9월29일…감악산에 유람했다…석단 위에 비석이 있는데 오래되어 글자라 마멸되었다.”
1742년(영조 18) 당시 연천 현감이었던 문신 신유한(1681~1752)의 언급은 더 구체적이다.
“감악산 정상에 옛 비석이 서 있다. 높이는 1장 가량으로 돌을 가지런히 깎았다. 쓰다듬어 만져보았으나 한 글자의 형태도 확인할 수 없었다.”(<청천집> ‘감악산기’)
신유한은 승려의 말을 인용해서 “이 비석은 1000년 이상 된 것이어서 노인들에게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고 덧붙였다.
하기야 감악산비에 명문이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보는게 상식적이다. 생각해보라.
어느 누가, 어떤 이유로 해발 675m나 되는 산 정상에 글자를 새기지 않은 비석을 가져다 놓았다는 말인가.
그래서 허목·신유한 두 분도 ‘무자비(無字碑)’가 아니라 글자가 마멸된 ‘몰자비(沒字碑)’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자가 보인다…진흥왕 순수비인가
신유한 이후 239년이 지난 1981년이었다. 감악산을 관할하던 ○○사단 정보과장(윤일영 소령)이 ‘비석=진흥왕순수비’ 가능성을 개진하는 글을 군내부 자료(‘임진강 전사 연구초’·1981년 1월30일)에 소개했다.
이 글에 학계에 알려지면서 동국대 조사단이 공식 조사에 나섰다. 곰곰이 따져보면 경천동지할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북한산·황초령·마운령·창녕 등 4곳에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진흥왕순수비가 파주 감악산 정상에도 서있었단 말인가.
아닌게 아니라 감악산비를 실측해보니 크기(높이 167~170㎝, 너비 평균 74.4㎝, 두께 약 15㎝)가 북한산비(잔존 높이 154㎝, 너비 69㎝, 두께 15㎝)와 비슷했다. 화강암 석재 또한 똑같았다. 나중에 얹어놓은 덮개돌을 빼면 두 비의 형태와 규모는 거의 동시대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당대 내로라는 학자(임창순·고병익·황원구·남도영·이병도 등)들이 비문 판독에 나섰다.
그럼에도 쉽지 않았다. 다만 12~13자 정도의 글자 흔적만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동국대 조사단은 최종 판단을 유보했다.
“삼국시대의 고비는 틀림없지만, 기적적으로 어떤 새로운 자료가 나오든가, 새로운 판독방법이라도 개발되지 않는 한 이 고비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고 만다.
그렇게 또 40년 가까이 흐른 2019년 9월 서체연구자인 손환일 한국서화연구소장이 1999년 뜬 탁본을 토대로 새로운 글자 3자를 읽었다고 주장했다.(경향신문 2019년 9월24일자) ‘광(光)’, ‘벌(伐)’, ‘인(人)’자 였다.
손환일 소장은 “이중 ‘벌(伐)’자는 중국 간쑤성(甘肅省) 우웨이(武威) 무덤에서 확인된 ‘무위의례’ 목간의 ‘벌’자와 유사하다”고 해석했다. 그는 “‘벌’자 중 ‘一’자처럼 그은 획의 양끝이 살짝 올라가있는데, 이런 서법은 6세기대 신라고비에서 흔히 나타나며 삼국시대가 끝날 무렵엔 사라진다”면서 “예서 기법이 가미된 삼국시대 해서체가 맞다”고 언급했다.
손 소장이 읽었다는 세 글자 중 ‘벌’자는 의미심장한 글자다. 다른 나라의 땅을 정벌했다는 의미이거나, ‘이벌찬’ 처럼 신라의 관등명을 뜻하는 낱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울퉁불퉁한 비석, 보일리 없다”
손 소장의 주장은 감악산비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 모았고, 또 학계에도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솑
물론 이와같은 주장이 학계의 인정을 받기는 사실상 쉽지 않다. 연구자에 따라 글자로 볼 수도 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쪽도 있다. 감악산비의 마멸도가 그만큼 심각하기에 때문에 선뜻 누가 맞다 하고 손을 들어 줄 수 없다.
당장 ‘인, 벌, 광자 판독’ 주장을 두고 정식 논문으로 반박한 연구자(하일식 연세대 교수)도 있었다.(하일식의 ‘감악산비 논란과 감악신사에 대하여’, <역사와 현실> 117, 한국역사연구회, 2020년 9월)
하교수는 “화강암 재질인 감악산비의 경우 풍화가 심해 석영이 떨어져 나가면서 표면이 울퉁불퉁해졌고 그래서 현재 상태로는 어떠한 글자 또는 글자의 흔적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맨눈으로 살펴봐도 그렇고, 비석 표면의 요철 상태로도 최첨단 기기인 3D스캐너 등을 동원해도 판독이 어렵다고 했다.
아니 17세기(허목), 18세기(신유한)도 글자를 읽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 그에 앞서 감악산 정상에 새로운 사당을 짓거나(세종 연간), 그 이후 제사를 지냈을 때도 ‘글자’ 이야기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500~600년 전부터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들도 읽지 못한 글자를 지금와서 어떤 수로 판독한단 말인가, 더구나 그 때보다도 훨씬 마멸된 상태일텐데…, 이런 이야기였다.
하교수는 관련 논문을 쓰게 된 계기도 “대중적 흥미를 자극하는 분위기가 연구자들에게까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기적적으로 눈에 띈 ‘전(典)’자
그러나 올해(2022년) 7월부터 반전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파주시의 의뢰를 받은 서진문화유산(대표 김선덕)이 감악산비의 과학적 정밀조사 사업을 벌이던 도중 뜻밖의 성과를 얻어낸다. 이 대목에서 사업의 자문위원을 맡은 박홍국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2019년부터 감악산 비문에 관심을 뒀지만 육안 및 탁본상 판독 가능한 글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탁본을 2년 이상 벽에 걸어두고 틈나는대로 살폈지만…올 8월부터 감악산비 정밀조사 자문위원을 맡아 다시 탁본 작업을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박교수가 판독에 애를 먹은 이유는 역시 마멸의 정도가 너무 컸다는 것이었다. 3D 스캔 결과 비석의 모든 면이 거의 6.2~6.9mm 두께로 떨어져 나갔다. 심지어 총탄 자국으로 짐작되는 가운데 윗부분의 파손부는 18㎜에 달할 정도였다.
북한산 순수비와 같은 화강암 석재를 썼지만 석영·장석·운모 입자가 훨씬 커서 박락(떨어져 나감)의 정도가 심각했던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비석에서 글자획과 비슷한 부분을 찾아 판독한다 해도 객관성을 갖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저로서는 1,2,3차 탁본을 하고, 판독을 시도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거의 포기상태였죠.”
그러던 10월13일 김선덕 대표와 마지막으로 뜬 탁본의 맨 밑부분을 살펴보던 박홍국 교수의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비석 맨 밑에서 한 글자가 보인 겁니다. 11월2일 그 부분만 도드라지게 탁본해본 결과 과연 글자가 맞았습니다.
“이 부분은 1982년 동국대 탁본과 1999년 손환일 탁본에도 잘 드러나지 않았던 곳이었습니다.(김선덕 대표)”
박교수는 명문을 보는 순간 몇 글자가 뇌리를 스쳤다. ‘전(典)’인자 ‘흥(興’)인가, ‘곡(曲)’자인가…. 그러나 ‘곡(曲)’으로 보기에는 글자의 가로가 넓고, ‘흥(興)’자로 보기에는 윗부분의 세로획이 위로 나와 있어 보였다. ‘여(與)’자 일 수도 있지만 신라 비석(황초령 순수비) 등에서 여자는 약자로 쓰인다. 따라서 ‘전(典)’자로 일단 판독됐다.
과연 이것이 글자는 맞는 것일까. 필자가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와 이영호 경북대교수, 이용현 경북대 연구교수 등 연구자들에게 문의했더니 공통적인 답변이 나왔다. 100%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전(典)’자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었다.
3D 스캔 같은 장비를 써도 글자를 확인할 길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과는 사뭇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이다.
■비석 틈새의 풀포기가 보호한 1500년전 글자
그렇다면 또다른 의문점이 생긴다.
조선 중후기 학자인 허목·신유한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왜 이 ‘전(典)’자를 놓쳤을까.
보통 상태가 열악한 비문을 읽을 때는 비석의 가장 밑부분을 간과하게 된다. 왜냐.
비석 맨 밑바닥 명문이 상대적으로 마모가 심해진다. 비석의 받침돌에서 튀어 오르는 빗물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전’자가 남아있었을까.
“현재 감악산 비석의 맨 밑바닥은 받침돌에 꽂힌 채 홈과 비석 사이의 틈을 시멘트로 메운 상태인데요. 예전에는 오랜 세월 동안 그 틈새에 풀이 자라고 있었을 겁니다. 그 풀이 받침돌의 빗물 튀김이나 바람을 조금이나마 막아 주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비석 바닥의 틈새에서 1500년 가까이 살았다 죽었다 풀 한포기가 ‘전’자 1자를 기적적으로 보호해주었던 것이다.
“그런 경우가 또 있습니다. 경주 표암의 통일 신라시대 암각화 앞에도 높이 1m 남짓한 나무가 있었거든요. 나무 덕분에 가려졌던 부분은 불과 100~200년 전에 새긴 것처럼 또렷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 왜 지금까지의 탁본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앞서 밝혔듯이 열악한 비문의 탁본작업에서 밑부분은 허투루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탁본 작업도 만만치 않다.
탁본을 하려면 화선지에 물을 묻혀 비석에 붙인다. 그런데 밑부분 화선지를 타고 내린 수분이 잘 마르지 않아 조심스레 탁본하여도 자칫 번지기 쉽다. 나아가 화선지가 최하부 바닥까지 늘어져 있을 때는 모세관 현상으로 수분이 종이 위로 올라와서 주변의 먹을 번지게 하는 경우도 흔하다.
“저도 감악산 비석의 경우 덮개돌 덕분에 조금이라도 보호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윗부분 탁본에만 치중했거든요. 그래서 아랫부분을 간과했던 건데, 명문을 발견 한 직후 하단부를 다시 부분탁본 해서 재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판독에서 정말 ‘전’자 하나만 확인했을까. ‘전(典)’자로 판독된 글씨는 비면 좌측 하부에서 오른쪽으로 약 17cm되는 부분에 있다. 가로 약 4cm, 세로 약 4.5cm 크기이며, 예서체에 가까워 보인다. 그 양 옆에는 글자의 획 같은 것이 몇 곳 보인다는 게 박교수의 설명이다. 분석 결과 감악산비는 10~11행에 1행당 30자 정도 새겨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 순수비와 왠지모를 친연관계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겠다.
300자가 넘는 글자 중에서 이번에 겨우 읽어냈다는 ‘전’자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전’자가 심상치않은 글자이기 때문이다. 즉 신라시대 비석인 포항 중성리비(441년 또는 501년)의 ‘전서여(典書與)’, 포항 냉수리비(443년 혹은 503년)의 ‘전사인(典事人)’, 창녕 진흥왕 척경비(561년)의 ‘고나말전(古奈末典)’, 황초령 진흥왕순수비(568년)의 ‘△전(△典)’,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568년)의 ‘나부통전(奈夫通典)’과 ‘급벌참전(及伐斬典)’ 등등….
무엇보다 감악산비와 직선거리로 35㎞ 떨어진 북한산 순수비와의 친연관계는 처음부터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감악산 비석의 크기 비율(너비 74.4㎝:높이 167cm)은 약 2.25배 정도이다. 그런데 북한산 순수비의 비율(너비 71.5㎝:높이 155㎝)은 약 2.15배이다. 비슷하다. 추정글자 수도 300~330자(감악산비), 316자(북한산비)로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감악산비를 비롯해 진흥왕 시대에 조성한 비석은 모두 시간에 쫓긴 듯 새겨진 글자 획의 깊이가 비교적 얕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감악산비가 ‘제5의 진흥왕순수비’일 가능성을 한층 높이는 방증자료라 할 수 있다.
감악산비는 북한산비의 조성연대인 555~568년 사이가 될 가능성이 짙다.
■감악산에 왜 순수비를 세웠나
또하나 드는 궁금증이 있다. 진흥왕은 왜 감악산에 순수비를 세웠을까.
다른 예를 댈 필요가 없다.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북한산과 창녕, 황초령, 마운령의 경우를 보라.
한결같이 중요한 국방시설 인근지역이다. 창녕비(561년) 인근의 화왕산성은 낙동강 남쪽 의령과 함안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다.
마운령비 인근 운시산성은 청진과 함흥을 잇는 통로를, 황초령비 인근 중령진은 강계와 함흥을 잇는 길목을 각각 통제하는 곳이다. 북한산비가 있는 북한산성은 또 어떤가. 개성과 서울을 잇는 통로를 감시하는 군사요충지다.
감악산비는 어떤가. 감악산 앞에는 삼국시대부터 요충지였던 칠중성이 버티고 있다. <삼국사기>는 “638년(선덕여왕 7)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범하니 백성들이 감악산으로 들어갔고, 대장군 알천이 고구려군과 싸워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고구려 보장왕 19) 고구려·신라간 전투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신라의 칠중성 현령 필부가 고구려군에 맞서 20일간이나 성을 지켰다, 고구려가 포기하고 퇴각하려 했지만 반역자 대사마 비삽이 은밀히 고구려와 밀통해서 ‘성안에 양식이 떨어졌으니 공격하라’는 편지를 보냈다…고구려군이 화공(火功)으로 공격했다. 필부는 고구려군의 화살을 맞아 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릴 때까지 싸우다 죽었다.”(<삼국사기> ‘열전·필부전’)
그 뿐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이곳은 영국군·중국군의 치열한 국제전쟁터가 된다. 캐슬고지로 명명된 칠중성을 지키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는 중국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 공세를 3일간이나 지연시켜 중국군의 서울 재점령을 막았다.
칠중성(캐슬고지)를 지키던 영국군은 감악산 쪽으로 퇴각했다.
멀게는 1400년 전부터 가깝게는 60여 년 전까지 칠중성과 감악산이 전략적 요충지로 각광을 받은 이유가 있었다. 이곳을 흐르는 임진강이 유난히 얕아 사람은 물론이고 인마(삼국시대)와 탱크(한국전쟁)가 도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악산 정상에서는 북으로는 개성 송악산과 남으로는 삼각산까지 훤히 조망하며 통제할 수 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뒤 북한산 비봉 정상(556m)에 순수비를 세웠다면 어떨까. 황해도~한강을 잇는 지름길인 임진강 유역을 확보한 뒤 바로 감악산 정상에 같은 성격의 비석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니 이번에 풀포기의 기적으로 읽었다는 ‘전’자 1자가 던지는 의미(그것이 정말 100% 맞다면)는 금석문 1만자의 무게와 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 역사·고고학을 다룰 때(연구자나 기자나)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한가지가 있다.
100% 단정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 그 시절 살아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 시대가 이렇다 저렇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절대’와 ‘단연코’, 뭐 이런 표현은 말 그대로 쓰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그 순간부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새로운 발굴 및 연구성과가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부터는 아집과 독선을 부리게 된다.
그것은 기자인 필자도 마찬가지다. 한가지 여담을 해보면 1982년과 1999년, 2022년 감악산비의 탁본을 한번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필자의 눈에도 뭔가 글자의 형태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학계의 인정을 받기 힘들겠지만...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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