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불상의 공간은 단 5㎝ 차이(lls’en est fallu de cinq centimetres)…(불교계 인사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 했다.”
2007년 9월 13일자 프랑스 ‘르 몽드’지는 ‘1300년 전 넘어진 경주 마애석불, 원형 그대로 보존…’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대문짝만한 불상 사진을 1면에 실었다. 이 불상이 경주 남산 열암곡에서 ‘엎어진채 발견된 대형 마애불’이다.
마애불의 규모는 엄청나다. 불상을 새긴 바위는 폭 4.0m, 높이 6.8m, 두께 2.9m나 되고, 무게는 무려 80t에 이른다.
그런 바위가 40도 가까운 경사면에 거꾸로 박힌 것도, 불상의 코가 지면에서 불과 5㎝이 거리를 둔채 떨어진 것도 불가사의하다. 그런 거대한 몸이 속절없이 고꾸라지면서도 코 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에누리없는 ‘해외토픽’ 감이었다.
■거대한 바위 밑 흙을 드러내자…
발견 스토리도 극적이었다. 마애불이 발견된 경주 남산은 예부터 석가모니 부처가 머무는 ‘영산(靈山)’으로 알려져왔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개의 계곡과 산줄기에 150여 곳의 절터, 120여 구의 석불, 100여 기의 석탑이 산재해있다. 마애불이 발견된 곳은 남산의 여러 계곡 중 하나인 열암곡에 자리잡고 있다.
그 주변에 예부터 절터가 있었고, 그 절터에 불상 머리(불두)가 잘린 이른바 열암곡 석불좌상(8세기 후반 9세기초 추정)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2005년 10월 그 일대를 답사하던 남산연구소 회원(임희숙씨)이 석불좌상이 놓은 구릉의 약 40m 아래 계곡에서 불상의 머리를 발견했다. 그 머리를 석불좌상과 맞춰보니 꼭 맞았다. ‘몸 따로, 머리 따로’의 불상이 합체된 순간이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그 참에 석불좌상과 그 주변의 절터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2007년 5월 22일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박소희·채무기 연구원이 수상한 바위를 발견한다.
“절터로 통하는 옛 진입로의 흔적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고 작은 암석이 쌓여있던 동남쪽 경사면 사이 오솔길 옆에 길쭉한 바위 하나가 엎어져 있었습니다.”(박소희씨)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낀 두 사람은 바위의 아래 윗부분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런데 바위 사이의 경사를 따라 반쯤 엎드려 기어 올라가던 박소희 연구원의 시선에 울퉁불퉁한 가공의 흔적이 보였다.
“이상한 기분을 느껴 바위 옆에 덮인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일부 걷어냈습니다. 그런 뒤 틈 사이로 손을 넣어 바위 표면을 더듬어 보니 손가락 끝에 조각품의 촉각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상은 그렇게 앞으로 엎어진채 기적적으로 현현했다.
긴급 조사 결과 마애불의 대좌와 양 다리, 가슴 및 어깨는 물론 ‘부처님의 얼굴(相好·상호)’까지 제대로 확인했다.
코 끝이 아슬아슬 살아남은 이유가 알게 됐다. 마애불이 넘어질 때 그 앞에 조성된 난간 등의 영향으로 불상의 몸체가 먼저 땅에 닿는 바람에 얼굴이 산산조각 나는 참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태를 드러낸 불상의 타원형 얼굴엔 오뚝한 코와 날카로운 눈매,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잘 표현돼 있다.
4등신의 ‘서있는 상(입상·立像)인 마애불은 머리부분이 크게 표현됐다는 특징이 있다.
예불하는 사람이 마애불을 우러러볼 때의 비례감을 고려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볼륨있는 상호와 날카로운 눈매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함은 통일신라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불상의 옷은 ‘편단우견(偏袒右肩)’, 즉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옷 모양새를 보였다. 또 다른 불상과 달리 양발을 좌우로 완전히 벌리고 있다.
■10년 동안 최대 2.5㎝ 미끌어진 부처님
이렇게 거대한 불상이 속절없이, 그것도 앞으로 고꾸라졌을까.
열암곡 마애불상의 주변 입지를 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마애불상은 40도에 이르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마애상 뒤에는 노두(露頭·암석이 지표면에 직접 노출된 곳)에서 떨어져 나온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너덜겅(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산비탈)처럼 쌓여있다. 또 그 뒤를 받치고 있는 바위의 암석은 마치 인절미 혹은 깍두기의 형상을 보인다. 절리(풍화로 생긴 틈), 토르(차별 풍화로 툭 튀어나온 바위), 핵석(풍화된 동글동글한 암석)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런 암석들이 맨 앞에서 우뚝 서있던 마애불상을 ‘모종의 힘’으로 확 밀어붙였거나 가격하는 바람에’ 엎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모종의 힘’은 지진일 가능성이 크다.
2016년에 경험했듯이 경주 지역은 지진 가능성이 높은 활성단층이 존재한 곳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열암곡 마애불이 조성된 8세기말~9세기 초 경주의 지진 기록은 13차례(765~831)에 달한다. 이 중 “779년(혜공왕 15) 3월 일어난 경주 지진으로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00여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만약 이 지진이 화근이었다면 열암곡 마애불은 조성한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고꾸라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려 초기나 혹은 조선 중기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1966년 석가탑 해체·수리 중에 발견된 묵서지편(종이뭉치)은 “1024년(현종 15)과 1038년(정종 4) 경주 지진으로 석가탑이 두 차례 붕괴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때의 강진으로 열암곡 마애불상이 붕괴되었을 수도 있다.
또 2018년 건설기술연구원이 펴낸 용역보고서는 지진 등에 의해 햇빛에 노출된 광물입자(석영) 등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1550년 무렵에 붕괴된 것으로 해석했다. <실록>에 따르면 1521년(중종 15)~1564년(명종 19) 사이에 모두 8차례에 걸쳐 경주에 지진이 발생했다. 물론 집중 호우나 홍수에 따른 산사태도 붕괴의 요인이 될 수 있겠다.
■‘원산폭격’ 당하는 부처님?
이렇게 고꾸라진 마애불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까. 엎어진 마애불을 세우는 것은 불교계의 숙원사업인 듯 하다.
‘천년을 세우다’는 캐치플레이즈까지 내걸웠다.
조계종 총무원(원장 진우 스님)은 최근 ‘열암곡 마애불 바로모시기 불사’의 시작을 알리는 고불식을 열었다.
진우 총무원장은 “만약 서양에서 예수의 성상이나 십자가가 누워있었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라며 “이것은 불제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이며, 문화유산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국격의 문제”라고 밝혔다.
경주시도 현재 용역을 통해 마애불상을 어떻게, 어디에 세울지 연구중이다. 불교계의 입장은 이해할만하다.
40도 경사면에, 그것도 지표면에서 코 끝까지 단 5㎝ 간격을 두고, 엎어져 있는 부처님이 아닌가. 어떤 연구자는 “시쳇말로 ‘원산폭격’ 자세로 힘겹게 엎드려 있는 부처님을 어떻게 두고 볼 수 있겠느냐는 게 불교계의 입장”이라고 설명한다.
■경주 지진 때 2.2㎝ 미끌어졌다
불교계나 일부 학계의 지적대로 경사면에 비정상적인 자세로 엎어져있는 불상의 안정성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2012년부터 마애불의 상태를 체크해온 국립문화재연구원 안전방재연구실의 계측결과 점진적인 미끄러짐 현상이 나타났다. 즉 2012~2016년 사이 해마다 0.2~0.8㎜씩 지속적인 침하현상이 보였다.
특히 2016년 경주 지진 때 마애불은 불상의 윗부분(불상 하부)에서 최대 23㎜ 가량, 밑부분(머리)에서도 10㎜ 정도 미끄러진 것으로 측정됐다. 진도 6의 강진은 80t이 넘는 거대 불상을 순간이동 시킨 것이다.
2018년 설치한 상시 계측 시스템에 따라 측정한 4년간(2019 11월~2022년 7월20일)에도 미세하게나마 ‘미끄러짐’ 현상이 지속됐다. 즉 2018년을 기준(0)으로 할 때 불상의 배(복부) 부분은 5.5㎜, 오른쪽 이마 부분은 3.1㎜ 가량 미끄러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종합해보면 2012년 최초 계측 이후 불상의 ‘발’ 부분은 25.03㎜(2.503㎝ 가량), ‘이마’ 부분은 10.54㎜(1.054㎝), ‘배(복부)’ 부분은 9.046㎜(0.9046㎝) 정도 ‘미끄러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무엇보다 들쭉날쭉이 아니라 해마다 지속적으로 경사면을 따라 미끌어지고 있다는 것은 가벼이 볼 일은 아니다. 더욱이 경주 지진 같은 돌출변수가 생기면 또다시 ‘순간 이동’ 할 수 있다는 걱정도 생긴다.
■80t넘는 불상을 어떻게 세우나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지 않은가. 그냥 첨단 공법으로 일으켜 세우면 될 일이 아닐까. 그러나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해발 300m가 넘는 산 중턱, 그것도 급경사에 아슬아슬 엎어져있는 무게 80t이 넘는 불상을 어떻게 일으켜 세운단 말인가.
크레인이 필요하지만 현장은 사람 한 명도 지나기 힘든 산길이다. 길부터 닦아야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경주 남산은 ‘천불천탑’이라는 명성이 있을 정도로 탑과 불상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헬기를 이용하자는 말도 나왔지만 이 방법도 불상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일단 90도 방향으로 돌려 와불형태로 일반에 공개할 방침”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안전을 장담하지 못해 성사되지 않았다. 하기야 누가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일으켜 세우다가 혹시 삐끗해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게다가 제 자리를 벗어나 미끌어진 마애불의 원위치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아직 특정짓지 못했다.
■더 미끄러지지만 않는다면…
그런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지만 문화유산의 측면에서도 ‘지금 위치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현재 마애불에는 2020~21년 사이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보호각과 함께 구조 장치를 더 보강해놓았다. 데크용 나무로 감싼 콘크리트 옹벽과 함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유압잭까지 이 마애불을 떠받치고 있다.
지난해(2021년) 설치를 완료한 이후 0.212㎜(오른쪽 이마)의 침하와, 0.835㎜(배)의 미끄러짐 현상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국립문화재연구원 안전방재연구실은 “보강 공사 후 구조물이 안정화하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면서 “앞으로 2~3년 정도의 계측값을 검토한 후에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만약 2~3년 간의 추이를 검토해본 결과 ‘미끄러짐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렇게되면 오히려 이 상태로 그냥 두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왜냐면 이 마애불을 조성한 뒤 언제인지 모르지만 지진 등에 의해 붕괴되었고, 천년, 혹은 수백년 동안 엎어져 있다가 지표면에서 5㎝ 정도 떨어진채 아슬아슬 온전한 몸으로 발견된 그 스토리 자체도 역사가 아닐까.
■태국 보리수 나뭇뿌리 속 불상 머리의 교훈
또 중생의 업보를 온몸으로 안고 있는, ‘거꾸로 선 부처님’이 오히려 더 극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닐까.
어떤 연구자는 태국 아유타야 왕조(1350∼1767)의 유적인 왓 마하탓 사원의 불상머리를 예로 든다. 이 불상 머리는 보리수 나무 뿌리에 휘감겨 있다. 여기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스토리가 있다. 즉 1767년 미얀마의 아유타야 침공 때 불상의 머리를 모두 잘랐다. 그런데 그 중 보리수 나무에 놓여있던 불상 머리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처럼 나무뿌리에 휘감긴 모습이 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불상의 사진을 찍으려면 반드시 불상보다 낮은 자세로 엎드려야 한다. 그렇다면 열암곡 마애불은 어떨까.
오체투지의 자세로 몸을 잔뜩 낮춰 마애불을 친견하는 불교 신자들의 모습 또한 그럴듯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원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운 마애불을 어디에 세운다는 것인가. 또 이 마애불이 온전히 선 채로 발견되었다면 어떻게 르 몽드와 같은 세계적인 언론에 실렸겠으며, 어떻게 그렇게 유럽인들에게 소개되었겠는가.
열암곡 마애불상은 불교계만의 문화유산도 아니다. 바로 세우든, 혹은 그대로 두든 불교계 뿐이 아니라 각계 전문가와 시민들의 의견까지 수렴한 뒤 결정해야 할 대한민국, 아니 세계적인 문화유산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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