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2년 5월이었다. 조현종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최상종 연구원이 부리나케 광주 신창동 유적으로 달려갔다. 유적 주변에 살고 있던 최 연구원이 “지금 국도 1호선 확·포장 공사가 한창인데, 신창동 유적이 훼손될 수 있는게 아니냐”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신창동은 1963년 유·소아의 무덤인 독무덤(옹관묘) 53기가 확인되어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한 2000년 된 매우 중요한 유적이었다. 그런데 도로공사가 벌어지면 유적파괴는 불보듯 뻔한 것이 아닌가.
■2000년 전의 생활도구들이 줄줄이
두사람이 깜짝 놀라 현장에 달려가보니 과연 큰일이었다. 유적 주변을 감고 돌아가던 국도 1호선의 직선화 방침에 따라 도로가 유적의 중앙부를 관통할 판이었다. 1963년 조사된 독무덤의 구릉 윗부분은 이미 깎여나가 아스콘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나머지 구간도 중장비가 출입할 참이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현장의 모래와 흙을 긁어모아 들고간 비닐봉지에 담아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저희가 연약지반, 즉 2000년 전 홍수 등으로 범람한 저습지 퇴적층에 주목했는데요. 이곳에 농경지 유적이 존재했 수 있었으니까요. 공사현장 관계자들의 눈을 피해 그 지점의 흙과 모래를 서둘러 모은 겁니다.”(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
과연 그 예상이 맞았다. 가져온 모래와 흙에서 볍씨와 토기 편들이 보인 것이다. 상황이 급박했다. 아스콘이 현장을 깔아뭉갤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공사 중단’이 결정됐고, 6월부터 정식 발굴로 전환됐다.
당시의 발굴구역은 도로확장 공사 범위엔 저습지 9평 규모에 불과했다.
그러나 ‘9평의 기적’이라고 할까. 그 좁은 공간에서 엄청난 생활 유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간도기와 덧띠도기, 나무 머리빗, 굽다리 옻칠잔, 옻칠 칼자루, 그릇뚜껑, 대나무통발, 괭이, 빗자루 등이 줄줄이 나왔다. 무엇보다 까맣게 탄 쌀과 보리 등 2000년전 사람들의 식량도 보였다.
하지만 본격발굴은 이후 2년간 중단된다. 왜냐. 사실 저습지 발굴은 쉽지 않다. 습지 속에서 수백, 수천년간 보존된 퇴적층과 그 속의 유물이 공기에 노출되면 어찌되는가. 퇴적층은 산화되어 까맣게 변하고, 노출된 유물 또한 순식간에 쪼그라들고 변색되며, 썩게 된다. 자칫하면 유구와 유물 전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
게다가 30년 전이 아닌가. 발굴경험과 기술도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결국 ‘외국 사례를 공부한 후에 발굴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조현종 학예사 등은 일본 국립나라(奈良)문화재연구소 등을 오가며 일본의 저습지 유적 발굴 기법을 공부했다.
■출토품마다 ‘최초’, ‘최고’
이윽고 1995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었고, 발굴 때마다 ‘최고’, ‘최초’의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우선 무려 155㎝ 두께의 왕겨층이 확인됐다. 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벼농사 유적(기원전 5000년)인 저장성(浙江省) 허무두(河姆渡)의 왕겨층(72㎝)보다 2배 이상 두꺼운 것이었다. 2000년 전 한반도의 곡창지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발화구와 문짝, 신발골, 나무칼, 괭이, 절구공이 등의 목기류와 다양한 칠기류, 삿자리, 그물망, 새끼, 빗자루 등이 줄줄이 출토됐다. 베틀부속구인 바디와 실감개 등도 나왔다. 바디(베를 짤 때에 베의 날을 고르게 하는 도구)는 동아시아에서 출토된 것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국보급 유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제작된 이러한 생활도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 주변의 농촌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생활용기이기도 하다. 당대의 농사 및 생활 도구의 제작 기술이 2000년 이상 큰 변화없이 이어질만큼 뛰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레의 부속품인 수레바퀴축·바퀴살·가로걸이대 등도 출토되었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수장이 타고 다닌, 요즘으로 치면 승용차 혹은 관용차일 수도 있지 않은가. 또한 수레가 다닐만큼 넓은 길이 닦이고, 활발한 교역이 이뤄졌음을 증거하는 유물이다. 이밖에 새 및 칼모양 나무제품과 돼지모양 흙인형, 점뼈, 바람개비 무늬 칠기 등 제사 때 쓰인 의례품도 쏟아져 나왔다.
■홀연히 나타난 2000년 전의 현악기
그러나 이 모든 유물을 무색하게 한 ‘존재감 만렙’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것이 1997년 4차 조사에서 확인된 ‘현악기’를 비롯한 악기세트다. 먼저 현악기를 보자.
처음 발굴 당시에는 반쯤 쪼개진채 확인된 이 나무 유물이 악기인 줄 몰랐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니 오목하게 파낸 나무판의 밑부분에 뭔가를 고정한 듯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치 기타줄을 매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반쪽만 확인됐지만 형태상 현악기가 틀림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랬다. 벚나무로 만든 이 악기는 높이 77.2㎝, 폭 28.2㎝ 였다. 현(絃)을 고정하는 머리부분과, 현이 올려져 작음(作音)기능을 발휘하는 탄음부(彈音部·떨림부), 현을 거는 구멍(현공·絃孔)이 있는 현미부(絃尾部)로 돼있다.
‘현을 거는 구멍’은 현미부의 일부를 V자형으로 파낸 뒤 그 내부를 직경 0.3㎝ 정도의 둥근 원으로 뚫었다. 남아있는 구멍이 6개지만 전체 규모와 형태를 감안해보면 10개로 추정된다. ‘10현금’임을 알 수 있다.
발굴단에서는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를 들춰보았다.
“악기로는 슬(瑟)이 있는데, 그 모양이 축(筑·중국 현악기)과 같다. 이것을 타면 소리와 곡조가 나온다.”
그런데 신창동에서만 이와같은 현악기가 출토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1989년 경남 창원 다호리(11·15·17호)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출토된 바 있었다.
그러나 1989년 나온 다호리 보고서는 “다호리 11·15·17호의 동벽과 나무관 사이의 충전토 내에 세워진 흙칠판은 용도 불명인데, 형태상 생활용구로 쓰인 것 같지 않다”고 설명해놓았다.
보고서는 다만 “뭔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물건이 아닐까”하고 추정해놓았다. 뭔가 의미있는 유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무리 봐도 형태상 생활도구로는 쓰이지 않은 것 같아 ‘종교적인 도구’로 표현한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신창동에서 현악기가 발견되기 직전인 1996년 10~97년 3월 사이 경북 임당동의 한 목관묘에서 희한한 흔적이 보였다. 즉 A-1지구 121호묘로 명명된 무덤의 바닥에서 옻칠을 한 나무제품의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
즉 나무는 썩어 없어졌지만 옻칠 흔적이 마치 그림처럼 흙에 노출된 것이다.
물론 이때는 이 옻칠 흔적을 남긴 목제 유물이 무엇인지, 또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바로 그해(1997년) 7월 신창동에서 현악기가 발견되자 임당동과 다호리 발굴자들이 무릎을 쳤다.
정체불명의 유물과 그 흔적이 바로 신창동 출토품과 비슷한 ‘현악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예전의 발굴 유물과 발굴보고서를 들춰보니 과연 그랬다. 물론 크기는 차이가 났다.
경산 임당동(높이 67㎝, 너비 27㎝)과 창원 다호리 3점(높이 56,4~64.5㎝, 너비 28.5~30㎝) 등과 신창동 출토품(높이 77.2㎝, 폭 28.2㎝)은 크기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제작시기(기원전 1세기 무렵)과 악기의 형태가 매우 흡사했다.
그렇다면 경산, 창원, 광주 신창동까지….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에 등장하는 ‘중국의 현악기인 축(筑)과 비슷한 현악기(슬·瑟)’이 한반도 남부의 한(韓·마한, 진한, 변한) 지역에서 폭넓게 연주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공장에서 생산된 규격품이 아니라 각 지방의 기호에 맞게 제작된 비슷한 현악기가….
■신창동 출토 악기 5종은 어떤 의미?
또 신창동에서는 현악기 뿐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악기가 출토되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즉 1995년 발굴에서는 ‘용도 불명’으로 분류했던 나무제품 역시 ‘현악기’의 확인과 함께 ‘찰음악기’로 특정됐다.
이 찰음악기는 각목에 새겨진 ‘톱니 무늬’를 마찰해서 소리를 내게 하는 타악기였다. 마찰봉의 형태와 마찰의 속도에 따라, 혹은 각목의 깊이와 간격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또한 바가지 모양으로 깎아 만든 통형 나무 제품은 북일 가능성이 크다. 통형 나무에 가죽을 씌워 리듬감있게 두들겼을 것이다.
중국 상나라 시대부터 청동 북과 함께 등장한 청동방울의 부속품인 탁설(흔들면 소리나는 방울알)과, 사람얼굴이 새겨진 토제방울 또한 악기로 쓰였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를 다시 들춰보자.
“해마다 5월 파종 후와 10월 추수 후에 하늘·조상신에 제사를 지낸다.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기를 밤낮으로 계속한다. 춤은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면서 땅을 밟고 (몸을) 굽혔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는데 손과 발의 동작이 서로 조응한다. 그 가락이 마치 (중국의) 탁무(鐸舞·목탁을 갖고 추는 춤)와 같다.”
“귀신을 믿고 국읍에 한사람씩을 받들어 천신의 제사를 주재토록 하였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 여러 국에는 각각 별읍이 있으며 소도(蘇塗)라 부른다. 큰 나무를 세우고(立大木) 방울과 북을 매달아(懸鈴鼓) 귀신을 섬긴다.”
■2000년전 오케스트라? 밴드?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파종 후, 추수 후 당대 제사장(천군)이 주도한 대대적인 제천행사와 함께 며칠 밤낮으로 그 마을 공동체의 집단 연희가 열렸을 것이다. 그 이벤트가 열린 곳은 신성한 공간인 소도였을 것이다.
<삼국지>가 전한대로 큰 나무를 세우고 그곳에 방울과 북 등을 매달아 ‘몇날몇일’을 두들기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물론 그 이벤트에는 현악기와 찰음악기가 동원되어 공연을 주도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고고학적 상상력이 발휘된다. 발굴자였던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이 귀띔했다.
신창동에서 열린 봄철·가을철 이벤트는 최소 5종의 악기(현악기·찰음악기·통형 목제 가죽북·청동방울·흙방울)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진행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 5종의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노동요)까지 부르는 밴드 공연을 펼쳤을 가능성도 있다. 맑고 고운 음악이 흐르는 공연의 관람객은 1차적으로는 농경을 관장하는 하늘신이고, 가족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해주는 조상신이었을 것이다. ‘부디 강림하셔서 공연을 즐기고 이 마을을 풍요롭게 해주십사’하고…. 물론 공동체 구성원들 역시 그 축제를 즐겼을 것이다.
■가야를 망하게 한 우륵의 음악?
이런 말이 나올 법하다. 신창동 출토 악기가 뭐 그렇게까지 중요하다는 건가.
또 옛 사람들은 하늘신·조상신을 초대하는데 음악까지 동원했단 말인가. 그러나 음악을 그저 사람들의 즐길 거리로만 여겨서는 안된다. <삼국사기> ‘잡지·악(樂)’편에서 현금(玄琴·거문고)을 설명한 내용을 보자.
“금의 길이 석자 여섯치 여섯푼은 366일을 상징하는 것이고, 너비 여섯 치는 천지와 사방을 뜻하며 위가 둥글고 아래가 네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본받은 것이다.”
가야금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사기>는 “가야금의 12줄은 사시(四時), 기둥의 높이 3촌은 삼재(三才), 즉 천(天)·지(地)·인(人)을 뜻하는 것”이라 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신라에 망명한 가야국 출신 악사인 우륵(생몰년 미상)이 신라 진흥왕(540~576)을 위해 5곡을 지어 바쳤다. 그러자 신라 조정의 신하들은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우륵의 음악을 허용할 수 없다”고 극력 반대했다.
이는 음악을 나라의 흥망과 연결시킨 옛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만능뮤지션’ 공자의 음악 철학
스스로 동이족의 후예인 은(상)나라 출신이라고 고백한 공자(기원전 551~기원전 479)는 어떤가.
공자는 거문고를 뜯고, 경(磬·돌이나 옥조각으로 만든 타악기)도 치며, 노래도 잘 불렀던 만능 뮤지션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기타와 드럼은 물론 보컬까지 소화하는 만능 뮤지션이었던 것이다. 제나라 음악을 배울 때는 3개월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사기> ‘공자세가’)
공자가 어떤 거문고 곡을 열흘 동안 연주한 뒤 그 곡의 주제를 맞췄다. 즉 “이 곡의 주인공은 피부는 검고, 눈은 빛나고 사방 제후국을 바라보는 원대한 분입니다. 그 분은 바로 문왕이 아니겠습니까?”
공자의 거문고 스승인 사양자는 감탄사를 연출했다.
“역시 성인(聖人)이십니다. 이 곡은 주나라(기원전 1046~771)의 주춧돌을 쌓은 문왕의 덕을 칭송한 문왕조(文王操)입니다.”
공자는 거문고 연주만 해도 곡의 주인공을 알아차릴 정도였을 정도로 음악 천재였다. 그런 공자의 언급을 들어보자.
“감정이 소리에 나타나 그 소리가 율려(律呂)를 이루게 되면 그것을 가락이라고 한다. 다스려진 세상의 가락은 편안하고 즐겁고 화평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가락은 슬프고 시름겹고 그 백성은 고달프다.”
단적인 예로 춘추시대 오나라의 정치가·외교가인 계찰은 “정풍(鄭風), 즉 ‘정나라(기원전 806~기원전 375)의 노래’는 매우 가냘퍼서 백성들이 견디지 못할 것이니 가장 먼저 망하는 나라가 될 것”(<사기> ‘오태백 세가’)이라고 경고했다. 공자 역시 “정나라 음악은 매우 음탕해서 반드시 추방해야 한다”(<논어> ‘위령공’)고 설파했다. 음악으로 나라의 흥망을 점친 것이다.
이렇게 옛 사람들은 악기 하나, 노래 하나에도 심오한 뜻을 새겼다. 광주 신창동을 비롯해 경산 임당동·창원 다호리 등에서 출토된 악기가 이렇게 또 후손들에게 교훈을 던져준다. 한가지 궁금한게 생긴다.
공자와 계찰 등에 따르면 말초적이고 음란한 음악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말세의 음악이다. 그렇다면 요즘의 음악은 말세의 음악인가 성세(盛世)의 가락인가. 그것이 알고싶다.(이 기사를 위해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 최장열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이현희 학예연구관·최경환 학예연구사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조현종·김민구·이영철·정인성·박지훈·홍종하, <광주 신창동 마을, 서른번째 가을풍경>(발굴 30주년 기념 학술대회), 국립광주박물관, 2022
조현종·신상효·장제근,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 Ⅰ-95년 조사개보(목제유물을 중심으로)>, 국립광주박물관, 1995
조현종·신상효·선재명·신경숙,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 Ⅳ-목제유물을 중심으로>, 국립광주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광주 신창동 유적-1차 발굴조사 개보>, 1993
이건무, ‘유물·유적에 나타난 삼한사회의 생활상’, <한국고대국가의 형성>, 국립중앙박물관, 1998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경산임당유적(Ⅰ)>, 1998
오해향, ‘한국과 일본의 현악기 비교연구’, 영남대 박사논문, 2015
황미연, ‘삼한시대 음악상에 관한 연구’, <한국음악연구> 27권, 한국국악학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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