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360m인 강원 철원 평야에 서있는 동주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라.
물론 북한 땅 평강이다. 지평선을 마치 담벼락처럼 가로막고 있는 것과 같은 평강고원이 어렴풋 시야에 들어온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야트막한 봉우리가 보인다. 그곳이 낙타고지(432m)다. 이름에서 보듯 한국전쟁 때 피아간 피를 흘린 곳이며, 낙타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었다.
그 뒤, 더 멀리 한탄강의 발원지라는 장암산(1052m)가 보인다. 그런데 낙타고지의 바로 곁에 아주 얕은 구릉 같은 산을 지나치면 안된다
그것이 바로 오리산(鴨山)이라 한다. 오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해발 453m이니, 서울의 북악산(342m)보다 더 높은 산이다. 하지만 군사분계선 너머 저 멀리 보이니만큼 그저 봉긋한 구릉처럼 보일 뿐이다. 그렇다고 무시하면 큰일난다,
이 야트막한 오리산이 바로 한반도 문명을 낳은 ‘한반도의 배꼽’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산이기 때문이다. 오리산은 화산이다.
그 너머에는 또 다른 화산의 흔적인 검불랑(680고지라고 함)은 보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 오리산과 검불랑이 단순한 휴화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민감한 곳
한반도 고인류와 구석기문화, 그리고 지금과 같이 빼어난 절경을 탄생시킨 어머니 산이다. 물론 지금은 갈 수 없는 이북 땅에 자리 잡고 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대체 무슨 근거로 ‘한반도의 배꼽’이나 ‘문명의 어머니’니 하는 것일까.
우선 한탄강, 임진강 유역의 특징을 살펴보자.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듯이 이곳이 포함된 이른바 추가령 구조대는 제주도, 울릉도, 백두산 등과 함께 가장 젊은 지층이다.
가장 역동적이고 민감한 지층이기도 하다. 한반도는 원래 하나의 땅덩어리가 아니었다. 2억3000만 년 전 북중국지판과 남중국지판이 충돌해서 합쳐져 만들어졌다.
중국의 충돌대가 한반도로 이어지는 곳이 바로 평남분지와 경기육괴가 만나는 임진강대, 그리고 영남육괴를 가르는 옥천대이다.
대륙충돌을 뒷받침하는 고압성 광물인 각섬암이 발견되는 곳이 있다. 바로 임진강 유역인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와 한탄강 부근 도로변인 포천군 관인면 중리이다.
포천군 삼율리의 고남산(644미터) 자철광도 마찬가지다. 남북의 서로 다른 습곡대 충돌의 중심부가 임진강, 한탄강이었으니 ‘민감한 곳’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지역 땅 밑 깊숙한 곳이 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지역은 용암의 분출구가 된다. 중생대 백악기(1억3500만 년 전~6500만 년 전) 때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나 지금의 보개산군을 탄생시킨 것은 너무 먼 옛이야기다. 4기 홍적세는 20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를 일컫는다. 인류가 등장했던 시기다.
이때 한반도 내륙, 즉 평강 오리산과 검불랑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한 번이 아니었다. 최소한 10번 이상 뜨거운 마그마를 분출시켰다.
오리산과 검불랑의 화산 분출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한 폭발, 즉 증기와 용암이 폭발하는 스타일(중심 분출이라 한다)이 아니다. 벌어진 지각 틈에서 마그마가 꿀렁꿀렁 흘러나오는 ‘열하(熱하)분출’이었다. 이 경우 주로 점성이 약한 현무암질 마그마가 흘러나오게 된다. 때문에 백두선과 한라산 같은 거대한 규모의 화산체는 형성되지 않는다. 다만 흐르는 용암이 엄청난 평원을 이루게 된다.
■용암의 바다
명색이 화산이라는 오리산의 정상이 주변보다 ‘불과’ 140m 밖에 높지 않은 분화구를 갖고 있는 이유가 된다. 그러니까 대체 구릉인지, 화산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오리산·검불랑의 화산분출 모습을 재현해보자.
평강읍에서 5㎞ 떨어진 오리산에서 용암이 꾸역꾸역 분출한다. 용암은 추가령과 전곡 도감포 사이의 낮은 골짜기를 메우기 시작한다.
용암은 무려 97㎞를 흘러 경기 파주 화석정에 도달해서는 그 긴 여행을 끝낸다. 한편 평강·철원 일대를 뒤덮은 용암이 식으면서 광활한 현무암 대지가 형성된다.
지금의 철원과 평강, 이천, 김화, 회양 등 무려 2억 평(650㎢)에 달하는 지역이 용암의 바다로 변한다. 낮은 곳을 찾은 용암은 포천~연천을 지나 검불랑에서 흘러온 용암과 합류한다.
용암이 흘러간 포천-연천-파주 지역에도 역시 좁은 용암대지가 생긴다.
그런데 빙하기를 겪으면서 평강·철원 지역에 두꺼운 빙하가 덮이게 되는데 간빙기가 되자 빙하가 녹기 시작한다. 진원지 오리산이 있는 평강의 현무암층이 가장 두꺼운 것은 당연한 일. 평강~철원~포천~연천~파주로 이어지면서 용암 두께가 얇아졌을 것이다.
지금 보면 평강은 해발 330m, 철원은 220m 정도 된다. 그러니 지금 동주산성에서 보면 철원 쪽보다 더 높은 평강고원이 거대한 둑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포천군 영북면 대회산리에 자리잡고 있는 비둘기낭이다. 절경 덕분에 드라마 '신돈'과 '선덕여왕', '추노' 등의 단골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에는 '괜찮아 사랑이야', '늑대소년' 등에서도 나온 바 있다.
어쨌든 고도가 높은 평강·철원에서 녹기 시작한 빙하가 흐르기 시작했다. 흐를 곳을 찾은 물은 당연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렀다.
액체 상태 마그마가 고체 상태의 현무암으로 식자 수축작용이 일어났다. 그러자 흐르는 용암과 맞닿았던 원래의 지형과 수축해버린 현무암 대지 사이에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오리산 쪽에서 흐른 물은 한탄강이 되었고, 검불랑 쪽에서 내려온 역곡천과 평안천은 다시 임진강과 합쳤다. 그곳이 바로 경기 전곡 도감포다.
물이 흐르면서 온갖 조화를 부렸다. 용암과 현무암 대지, 그리고 물이 연출하는 절경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에서 한반도의 선사시대가 열린다.
고인류는 물을 마시기 위해 강으로 내려오는 동물을 사냥했다. 산과 들, 강가에서 자라는 식물과 그 열매를 채집했을 것이다. 겨울엔 추위를 막기 위해 움막을 지었을 것이다. 두 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주먹도끼와 찍개, 주먹대패, 긁개, 밀개 등이 바로 그 흔적이다.
오리산과 그 산이 낳은 임진강과 한탄강은 한반도에서 가장 젊고 뜨거웠으며, 민감한 곳이었다. 삼국시대 땐 백제-고구려-신라간 쟁탈의 요소였다. 신라-당나라가 동북아 패권을 놓고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대동방국의 기치를 든 궁예(재위 901~918년)는 용암의 바다였던, 그래서 에너지가 충만했던 철원 풍천원 들판에 도읍을 정했다.
현대에는 한국전쟁의 접전지였으며,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 지역은 남북세력이 늘 충돌했던 곳이다.
2억3000만 년 전 서로 다른 대륙이 대충돌했던 지점이라 그런가. 오리산이 낳은 것은 인간의 역사 뿐이 아니다.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절경까지 탄생시켰다. 불(용암)과 물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바로 끊임없이 펼쳐지는 병풍의 수직단애, 즉 적벽이다.
수직단애는 왜 생겼을까. 설명을 위해 다시 오리산 용암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오리산에서 분출하여 흘러가는 액체상태의 용암은 식어 굳을 때까지 낮은 곳을 메운다.
섭씨 900~1200도에 이르는 용암은 공기 중에 노출되고, 다른 물질과 접촉하면서 급속하게 식는다. 그동안 용암 내부에 있던 기체는 빠져 나가는데,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기체는 암석 속에 기포로 남게 된다. 철원·연천·포천·파주 등에서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이 지천에 깔려있는 이유다. 그런데 용암은 급속하게 식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결정체를 이루게 된다.
■용암과 물과 바람과 날씨
또한 현무암 내부의 절리현상은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수직단애 풍광을 빚어냈다.
현무암이 물에 의해 침식될 때 바위가 절리면을 따라 덩어리째 떨어져 나간다. 원래 약한 현무암지대이므로 침식이 시작되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침식원인이 있는 취약한 곳부터 빠르게 무너지는데 특히 수직절리현상이 있는 곳은 거의 직각에 가까운 절벽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오늘날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유명한 적벽(赤璧)이다. 특히 임진강·한탄강 유역은 기온의 연교차가 상당히 크다. 겨울 혹한이 길고, 지표에 서리가 앉는 날이 많다.
하절기엔 덥고 집중호우가 많다. 풍화와 침식 작용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조건인 것이다. 냉탕 온탕의 조건에 거센 강물의 침식에 노출된 적벽의 하부는 계속 깎인다. 반면 물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부는 그대로 남아 있다보니 이렇게 수직절리 현상이 생긴 것이다.
지금도 임진강·한탄강의 단애면 침식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다. 단애 아래 절리면을 따라 떨어져 나온 현무암괴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어쨌든 오리산이 품어낸 용암과 물, 바람, 날씨의 자연이 빚어낸 절경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왠지 ‘센치’해지는 이유는
한반도의 배꼽(오리산)이며, 문명의 젖줄(임진강·한탄강)이자, 어머니의 품 안(철원평야)이라서 그런가.
철원을 가면 왠지 푸근한 어머니 품 같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풀어헤치며 응석을 부릴 수 있을 것 같은…. 어머니(오리산)의 자궁 같은 그런 2억 평에 이르는 드넓은 땅과 탯줄과 같은 그런 강이 있어서인가. 1100년 전 궁예도 그랬을까.
그랬을 지도 모른다. 젖먹이 때부터 ‘나라를 해롭게 할 아이’라며 버림을 받고 한쪽 눈까지 잃었던 그 비운의 영웅이었기에….
훗날 왕건에게 쫓기면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궁예의 흥망성쇠가 바로 저 오리산과 오리산이 낳은 철원·평강에 간직돼있다.
철원을 노래한 문인들도 한결같이 궁예의 흥망을 애수(哀愁)에 가득 찬 시구로 노래했다.
아마도 풍천원 벌판에 방치된 궁전의 흔적을 보고는 폐허가 된 은허(殷墟)의 모습에 슬피 울었다는 은(상)나라 성인인 기자(箕子)의 ‘맥수지탄(麥秀之嘆)’을 떠올렸을 것이다.
태봉국 궁예와 은(상) 주(紂)왕의 난행과 망국, 그리고 폐허로 변한 도읍지의 황량한 모습을…. 그러고 보니 은의 인쉬(은허ㆍ殷墟)와 태봉국의 철원은 닮은꼴이 아닌가.
“나라가 깨져 한 고을이 되었구나. 태봉의 자취에 사람은 수심에 가득 차네. 지금은 미록(미鹿ㆍ고라니와 사슴)이 노는 곳. 가소롭다 궁예왕은 멋대로 놀기만 일삼았으니.…”(서거정의 시)
“(파괴된 궁실 자리에서) 보리는 잘 자랐고, 벼와 기장은 싹이 올라 파릇하구나. 개구쟁이 어린애(주왕)야! 나하고 사이좋게 지냈더라면….”(기자ㆍ箕子의 ‘맥수지가’)
저 멀리 오리산과, 오리산의 땅을 보면 왠지 ‘센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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