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8월 풍납토성 성벽을 발굴 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뜻밖의 흔적을 발견했다.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누군가 뻘층에 남긴 발자국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양생 중인 콘크리트에 실수로 찍힌 발자국이었다.
이 발자국의 연대는 기원후 200년 쯤으로 추정됐다. 백제는 최소한 2차례 이상에 걸쳐 풍납토성을 완성했는데, 발자국이 찍힌 곳의 연대측정 결과 기원후 200년 쯤으로 측정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발자국은 최소한 1800년 전 백제인의 발자국인 셈이다.
발자국의 크기는 폭 12㎝, 길이 36㎝ 정도됐다. 주인공의 발자국은 뻘을 밟으면서 약간 밀려 실제의 발 크기보다 크게 나온 것이리라.
■콘트리트에 찍힌 발자국?
그렇다면 이 발자국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였을까.
풍납토성은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년)의 왕성으로 지목된 곳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은 기원전 6년 이곳 풍납동에 도읍을 정했다. 그런 뒤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다.
최소한 2차례에 걸쳐 쌓은 성의 규모(길이 3.5㎞, 폭 43m, 높이 11m)는 엄청났다. 고고학자들은 흙을 운반하고 성을 쌓은 인원이 연 450만명 정도 됐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흙의 양(226만t)과 <통전(通典)> ‘수거법(守拒法)’ 등에 나온 척(尺) 등을 종합해서 계산한 것이다. 송곳으로 찔러도 끄떡없는 판축토성이었다.
나무판을 하나하나 세워 틀을 만든 뒤 그 안에 진흙과 모래를 다져 쌓았다. 기술자들은 목봉으로 일일이 흙을 다져댔다. 10겹 이상 나뭇잎과 나뭇껍질을 뻘흙과 함께 다진 곳도 보였다.
바로 이곳이 발자국이 확인된 뻘흙층이다. 나뭇껍질과 낙엽 등을 뻘흙과 함께 다진 이 부엽공법(敷葉工法)은 김제 벽골제와 부여 나성 축조에도 활용된 선진공법이었다. 또 400년 뒤 쌓은 일본 규수와 오사카의 제방에서도 확인됐다. 그렇다면 발자국의 주인공은 최신 기술을 가진 당대 최고의 토목기술자가 남긴 것일까.
아니 이 분은 그저 나라의 명에 끌려온 힘없는 노역자일 수도 있다. 고고학의 즐거움은 상상력이다. 우리는 1800년 만에 현현한 발자국 하나로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으려 하는가?”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 되지 못한 지도자가 왕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똥폼’을 잡는 것이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자.
진시황에 이어 황위에 오른 진 2세(재위 기원전 210~207)는 70만 명을 동원, 아방궁과 만리장성을 쌓았다. 신하들이 “제발 그만하라”고 상주하자 진2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은 내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맘대로 하겠다는 데 무슨 헛소리냐.”(<사기> ‘진시황본기’)
사마천(司馬遷)은 진2세를 두고 “사람의 머리를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人頭畜鳴)”고 장탄식 한다. 결국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지 불과 15년만에 몰락하고 만다.
굳이 중국의 예를 들을 것도 없다.
고구려 봉상왕(재위 292~300)도 진2세를 쏙 빼닮았다. 기원후 300년 봉상왕이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징발, 대대적인 궁실수리를 명령했다. 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공사중단’을 간언하고 나섰다. 봉상왕은 화를 벌컥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내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이 나를 비방하는 까닭이 뭔가. 백성들에게 칭찬을 얻기 위한 것이냐.”
신하가 백성의 민심을 얻는다? 이것은 임금이 되고자 하는 것이냐는 무시무시한 추궁이었다. 창조리는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임금이 백성을 근심하지 않으면 어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으면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전 이미 부족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국상의 자리에 있으니….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어찌 명예를 얻고자 하겠습니까.”
왕이 빙긋 웃으며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무서운 경고발언이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 더이상 뒷이야기가 없기를 바란다.”
■개로왕의 실착과 문무왕의 판단
391년(진사왕 7년), 백제 진사왕은 궁실을 중수했다. 단순한 중수가 아니었다. 대대적인 토목공사였다.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화려하고 뛰어난 조경기술을 과시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호사스러운 궁궐 중수에는 많은 비용이 투입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조달이 가능했다는 분석이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혹은 호화로운 궁궐수축 때문에 민심이 이반된 결과일까. <삼국사기>를 보면 진사왕이 궁궐을 수축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말갈이 백제의 변경을 침략, 적현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불과 1년 뒤인 392년(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은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4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 석현 등 10개성을 함락시켰다.
백제는 요처인 관미성까지 잃었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이 때(396년) 백제는 58성 700촌을 빼앗겼다고 기록했다. 더불어 백제는 이 때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백제는 이 결정적인 패배로 고구려와의 건곤일척 싸움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고구려는 위축된 백제의 숨통을 완전히 끊으려는 계책을 마련한다. 당대의 바둑 고수이자 승려인 도림을 스파이로 삼은 것이다. 마침 백제의 개로왕은 바둑광이었다.
백제땅으로 흘러 들어간 도림은 개로왕에게 “바둑을 지도하겠다”고 접근한다. 과연 도림은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상객으로 모셨다. 개로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도림은 마각을 드러냈다.
“백제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한데 성곽과 궁궐이 수축·수리 되지 않았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백성들의 집들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집니다.”
개로왕은 그만 “알겠다”고 허락한다. 개로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풍납토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사대를 지었다. 웅장하고 화려했다.
<삼국사기>는 “이 때문에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맞았다”고 기록했다. 목적을 달성한 도림은 잽싸게 고구려로 달려가 장수왕에게 고했다.
장수왕은 ‘옳다구나’ 하고 대대적인 침략전쟁을 벌인다. 475년 9월 고구려의 침략에 개로왕은 땅이 꺼지도록 후회한다.
“어리석었구나.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니….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 위급해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삼국사기> ‘백제본기·개로왕조)
한성백제의 최후는 이렇게 허망했다.
이렇듯 대형 토목공사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기 일쑤다.
반면 신라 미추왕과 문무왕이다. 276년(미추왕 15년) 봄 신료들이 대궐을 수축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미추왕은 단호했다.
“그것은 임금이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입니다. 따르지 않겠습니다.”
문무왕은 또 어땠는가. 681년(문무왕 21년), 임금이 왕경에 성을 새로 쌓으려 의상대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의상대사의 간언은 단호했다.
“들판의 띠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곧 복된 왕업은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사람을 힘들게 해서 성을 만들면 이익되는 바가 없습니다.”
문무왕은 의상대사의 이 한마디에 궁궐 신축의 유혹을 뿌리쳤다.
■성(城)은 높지만 민심이 더 높다
조선시대의 예를 들자.
1446년(세종 28년) 양계(兩界·평안·함경도)에 성을 쌓는 대역사가 펼쳐지자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이 상소문을 올렸다.
“변방에 성을 쌓는 일은 나라의 큰 역사인데…. 고아와 과부가 울면서 변방의 성(城)을 바라볼테니 그 원통하고 원망스러움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을 쌓는 일이 만세의 이익이라 하지만, 또한 만세의 폐단이 있습니다. 축성(築城)은 성인(聖人)이라도 반드시 삼가는데 하물며….”
이계전은 “기상이변이 잇달아 일어나 수해와 한발이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다”며 이같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세종 임금도 이계전의 뜻을 알아차리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래. 근래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백성이 삶을 유지하지 못하니, 사람의 일이 다하지 못함이 있는가 두렵도다. 어찌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이 없겠는가. 일의 완급을 조절해서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말자. 좋은 대책을 마련하라.”
또 있다. 1745년(영조 21년) 사간원 정언 이훈이 강화도 축성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성이 높아서 100척이나 되고 견고하기가 철벽같다 해도 여러 사람의 마음으로 이룬 성만 못할 것입니다.(雖使城高百尺 堅如鐵壁 不如衆心之城也)”(영조실록)
숙종 때(숙종 29년·1703년) 북한산성의 축조를 반대한 행사직 이인엽의 상소를 보자.
“비록 높은 성벽이 솟아있다 한들 백성이 진심으로 좇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은 군주의 덕에 있지, 지세의 험준함에 있지 않습니다.”(<숙종실록>)
■발자국의 주인공이 남긴 메시지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백제 진사왕이나 개로왕이 창업주인 온조왕의 신신당부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 온조왕은 기원전 4년(온조왕 15년), 위례성을 쌓으면서 후대에 길이 빛날 특명을 내렸다.
“도성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쌓아라.(儉而不陋 華而不侈)”(<삼국사기>)
아마도 진사왕이나 개로왕이나 뒤늦게 온조대왕의 유훈을 깨닫고 땅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그랬든 저랬든 한가지 더 드는 생각.
주야장천 간단없는 노역에 시달려온 백성은 상관없다. 검소했든 화려했든 어떻든 간에 고단한 노역이었을테니까….
발자국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성을 쌓은 지 30년도 안된 기원후 23년(온조왕 41년) 15살 이상인 한강의 동북 쪽 백성들이 징발됐다.
농사철을 앞둔 2월(음력)에 성을 고쳐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에 남긴 발자국의 주인공은 혹 이 분들 가운데 있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뻘흙을 다지는 작업을 벌이다가 아차 실수로 발도장을 찍어놓고는 남이 볼세라 살짝 덮어버린….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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