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다.’
1650년 무렵, 영국 국교회의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아주 흥미로운 계산을 해낸다. 성경의 인물들을 토대로 천지창조일을 역산한 결과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날짜를 지목한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후 이 날짜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날’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로부터 꼭 206년이 지난 1856년, 독일 뒤셀도르프 인근의 네안더 골짜기 석회암 동굴에서 이상한 화석이 발견됐다. 채석공들의 삽에서 골반뼈와 눈 위 부분이 뚜렷하게 튀어나온 머리뼈를 비롯, 상당량의 뼈들이 걸려나온 것이다. 사람 같지만, 오늘날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돌출이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네안더 골짜기에서 확인된 고인류라는 뜻에서 네안데르탈인이라 명명됐다.) 다시 그 후 3년 뒤인 1859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을 개진한다. 이는 ‘창조론’을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우스터 교구의 주교 부인은 “맙소사! 우리가 원숭이의 후손이었다는 말이냐.”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하자”며 “두 손 모아 기도하자”고 촉구했다.
1891년 네덜란드 해부학자 외젠 뒤부아(1858~1940)는 자바섬 솔로강변 트리닐 섬에서 흥미로운 뼈무더기를 발견한다.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정도 쯤 되는 동물의 두개골과 아래턱뼈, 이빨 3개, 대퇴골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이 세 화석을 조립한 결과 두 발로 서서 걸었음이 확실해졌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 과정 중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즉 원숭이~인간을 이어주는 고리를 찾은 것이다. 뒤부아는 ‘직립(直立·곧추 선) 원인(猿人·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이라면서 ‘자바원인(Pithecanthropus erectus)’이라 이름붙였다. 뒤부아의 주장은 유럽에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뒤부아의 화석은 ‘소두증에 걸린 기형아의 뼈일 뿐’이라 폄훼했다. 뒤부아는 결국 여론의 십자포화에 밀려 자바인의 유골을 두고 ‘넓은 어깨 원숭이의 유골’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자바인이 발견된 후 30년이 지난 1921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생물학자 오토 즈단스키는 중국 베이징에서 50㎞ 떨어진 저우커우뎬(주구점·周口店) 유적을 발굴하다가 심상찮은 치아(이빨) 한개를 발견했다.
즈단스키는 스웨덴의 지질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이 주도한 저우커우뎬 유적 발굴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때 즈단스키가 발견한 치아는 놀랍게도 인간의 치아였다. 그러나 즈단스키는 유인원의 치아로 잘못 해석하고 말았다. 1923년 그가 발표한 <중국지질조사보고서>에 이 의미심장한 치아를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3년 뒤인 1926년, 저우커우뎬 유적에서 발굴한 화석표본들을 정리하던 즈단스키의 눈이 번뜩였다.
인간의 치아로 보이는 화석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아뿔사! 1921년 즈단스키 스스로가 발굴했다가 치워버린 화석과 같은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정밀조사해보니 손상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아관(牙冠·잇몸 위로 노출된 이빨)이 마모된 부분이 전혀 없는 온전한 이빨이었다. 흥분한 즈단스키는 그 치아를 현생인류의 것과 비교 분석했고, 그 결과 인간의 것임을 확인했다.
저우커우뎬 발굴의 책임자인 안데르손의 발표는 학계를 놀라게 했다.
“저우커우뎬 유적지의 지층은 아마도 신생대(200만 년 전~)일 가능성이 많다. 중요한 것은 오랜 인류의 화석이 아시아 동부에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자바에서는 자바원인이 있었고….”
아시아 대륙에서는 오래된 인류의 화석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전문가들은 경악했다. 안데르손의 발표에 미국의 고생물학자 아마데우스 그레이보(1870~1946)은 즉석에서 치아의 주인공에게 ‘베이징 원인(北京猿人)’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안데르손의 발표는 여전히 ‘믿기 어려운 학설’에 불과했다.
■베이징원인의 흔적
‘베이징 원인’의 존재를 확증할 증거가 필요했다.
미국 록펠러 재단의 재정지원 아래 본격적인 저우커우뎬 발굴에 돌입했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 인류학자인 데이비슨 블랙이 선봉에 섰다.
이후 베이징인의 부분체가 잇달아 확인됐다. 1927년 10월 발굴팀의 일원인 안데르스 비르거 볼린(스웨덴 고생물학자)이 즈단스키가 고인류의 치아를 발견한(1921년) 바로 그 지점에서 오른쪽 아래 어금니를 발굴했다. 이 치아 화석은 보전상태가 전혀 훼손된 곳 없이 완벽했다. 어금니 발견소식을 접한 블랙은 어쩔줄 몰라했다.
“우린 지금 아주 멋진 인간의 치아를 발견했군!”
블랙은 원숭이와 현대인의 중간에 속하는 이 고인류에게 ‘북경원인 북경종(Sinanthropus pekinesis)’이란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레이보가 이미 붙여준 이름인 ‘베이징 원인(Homo erectus pekininesis)이 더 널리 쓰이고 있다. 연구결과 볼린이 발견한 치아는 성인의 왼쪽 첫번째 어금니였으며 즈단스키가 발견한 어금니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이후 저우커우뎬에서는 다양한 ‘베이징 원인들’이 현현했다. 소녀의 아래턱뼈(28년 봄)와 성인남자의 아래턱뼈(28년 11월)가 잇달아 나왔던 것이다. 특히 성인남자의 아래턱뼈에서는 완벽한 형태의 어금니 3개가 붙어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1929년이 다가왔을 때 저우커우뎬의 발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때까지 발굴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하나 둘씩 현장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발굴단은 1928년의 조사에서 저우커우덴 현장에서도 가장 단단한 지층(제5층)까지 도달한 바 있다. 이 지층 아래에서는 어떤 동물의 화석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발굴단은 “아마 이 단단한 암반층이 베이징 원인이 살았던 최후의 지층이 아니겠느냐”고 판단하고 있었다. 발굴에 참여했던 볼린 등 전문가들은 “이제 현장을 마무리하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속속 현장을 떠났다.
하지만 “저우커우뎬의 화석분포는 매우 복잡하므로 화석이 없을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발굴 강행을 주장한 이가 있었다.
중국지질조사소의 신참 연구원이었던 페이원중(裴文中)이었다. 그는 1927년 대학(베이징대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저우커우뎬 발굴에 참여한 25살의 젊은 고고학도였다.
페이원중은 물론 풋나기였지만, 미친듯 고고학 공부에 빠졌다. 고생물학 영어 원서를 밤세워 읽다가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촛불이 책과 이불에 옮겨붙어 큰 일 날 뻔 한 적도 있었다.
1928년의 발굴에서 수습조사원으로 참여했지만 단 1년 만에 능숙한 발굴 전문가로 변모했다. 그가 저우커우뎬 발굴의 강행을 주장하고 나서자, “그럼 한번 네가 해보라”는 명령을 받게 된 것이다. 졸지에 발굴책임자를 맡게 된 페이원중의 회고.
“모두들 ‘이제 그만 끝내’라는 지시만 내리고 떠난 후였다. 산 속은 정적 만이 감돌고, 외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매우 단단한 암반층(제5층)을 폭파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마치 ‘닭쫓던 개’의 신세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제5층을 폭파시키고, 제6·7·8층에 이어 제9층까지 파내자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다. 사슴의 턱뼈 145개 등이 확인됐고, 제8~9층에서는 베이징인의 이빨이 몇 개 나왔다.
발굴층의 깊이는 더해갔고. 퇴적물의 범위 또한 좁아졌다. 마침내 깔대기 모양의 발굴 구덩이 맨 밑바닥에 도달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겨울철인 11월 말에 이른 것이다.
얼어버린 땅에서 발굴은 불가능하다. 지금이야 거액을 들여 비닐하우스를 치고 발굴작업에 나설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겨울이 다가오면 그 해의 발굴을 끝내야 했다.
역시 베이징에서 “겨울이 됐으니 올해의 작업은 끝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페이원중은 갈등했다. 마지막 남은 깔대기 모양의 좁디좁은 맨 밑바닥 퇴적층….
‘저기에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중단해야 한다는 건가.’
베이징에서 온 전보를 만지작거리던 페이원중은 장고 끝에 ‘발굴 강행’을 결정했다.
‘그래 단 며칠만이라도 더 해보자.’
■“틀림없는 사람 머리야!”
1929년 12월 2일, 날씨는 매우 추웠다. 발굴자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북풍 한기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서산으로 해가 저물기 시작한 오후 4시였다. 겨우 몇 사람이 쭈그려 앉을 수 있는 깔대기 모양의 퇴적층을 파고 있던 바로 그 때…. 망치와 정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아주 자그마한 틈새가 벌어졌다. 그 틈새를 벌리니 작은 동굴이 노출됐다. 페이원중은 전율에 휩싸였다. 즉시 밧줄로 허리를 묶고 동굴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한 5~6m쯤 나아갔을까. 잠시 발길을 멈추고 쭈그리고 앉아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잡혔다. 동굴 밑바닥에 흰 뼈가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페이원중은 자신이 아주 작은 동굴에 앉아있다는 사실도 잊고 벌떡 일어나다가 동굴 천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기절할 뻔했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정신이 없었다.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동굴 밖으로 빠져 나오던 페이원중의 말이 떨렸다.
“내가 사람(원인·猿人)을 찾았어. 난 난…. 뭔가가 더 안에 있는 것 같아.”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페이원중은 발굴단원 3명과 함께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페이를 비롯한 4명은 아무 말없이 한 손엔 촛불을 다른 한 손엔 망치와 삽으로 흙을 파냈다.
“여기 보세요.”
작업자 가운데 누군가 소리쳤다. 페이원중이 용수철 튀기듯 달려갔다.
“이건 사람 머리 같은데…. 틀림없는 사람머리야.”
두개골은 절반 정도는 단단한 모래 흙에 묻혀 있었고, 나머지는 노출돼 있었다. 페이원중은 지렛대를 이용해서 땅 속에 반 쯤 파묻혀있는 두개골을 수습했다.
지렛대 과정에서 두개골의 밑바닥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떨어진 파편을 살펴보니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이 현대인의 두개골 보다 훨씬 두껍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날 체포해라!”
이미 발견된 이빨과 아래턱뼈 등으로 베이징인의 연대가 50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었던 때였다. 페이원중은 놀라운 발견 소식을 베이징에 타전했다.
완벽한 ‘베이징원인’의 두개골이 확인됐다? 그야말로 두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25살의 풋나기가 그런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상당수의 전문가들이 반신반의했다. 위대한 발굴이 있은지 4일 뒤인 12월 6일, 페이원중은 겹겹이 포장한 ‘베이징인’ 화석을 들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베이징 성 입구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은 것이다. 검문은 삼엄하고 집요했다. 모든 짐을 풀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페이원중이 ‘중요한 화석이니 포장을 열면 큰 일 난다’고 애원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겉을 발라놓은 마대와 종이를 떼어내고 두개골의 표면을 벗겨내려 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한 페이원중은 경찰의 손을 밀어내고 외쳤다.
“멈춰. 포장을 걷어내려면 차라리 날 체포해!”
나이 지긋한 경관이 개입한 뒤에야 소란이 그쳤다. 경관의 무지한 손에 의해 훼손될 수 있었던 50만 년 전의 고인류가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50만 년 전의 인류
두개골은 천신만고 끝에 화석 전문가인 데이비슨 블랙에게 전달됐다.
“맞아요. 정말 사람이군요. 사람!”
얼마나 손이 떨렸던지 하마터면 두개골을 떨어뜨릴 뻔했다. 블랙은 왜 ‘베이징원인’을 보고 몸을 떨었을까.
사실 진화론에 입각하면 원숭이~현생인류 사이에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300만년~100만 년 전인 고원류(古猿類)의 단계이고, 셋째 단계는 20만 년 전~1만 년 전에 존재한 지인(智人·호모 사피언스)이다. 그런데 첫번째와 세번째 단계의 고리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직립인(直立人·호모에렉투스)’ 단계이다.
이미 1891년 자바섬에서 확인된 자바인이 바로 이 단계의 고인류였지만, 그 때까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그것도 다름아닌 아시아 대륙의 동쪽, 베이징에서 ‘직립인’이 확인됐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최소한 20만 년 전으로 올린 희소식이었다.
1929년 12월 29일자 <신보>는 베이징인의 출현소식을 대서특필했다.
“국내외 학자들이 참석한 중국 지질학회 특별회의가 열렸다. 전문가들은 저우커우뎬에서 확인된 두개골 화석의 연대를 50만 년 전이라 했다. 전문가들은 베이징인은 바자에서 확인된 ‘자바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풋나기 고고학자인 페이원중은 현장 고고학을 통해 다윈이 제기한 진화론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 인물로 평가됐다.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을 토대로 만든 두상. 중국인들은 지금도 저우커우뎬에서 발굴된 실물 두개골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불과 도구 사용의 증거
페이원중의 관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1년부터 시작된 저우커우덴 유적 발굴 때마다 상당량의 석영조각들이 확인된 바 있다.
그동안의 발굴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페이원중은 1931년 저우커우뎬의 거쯔탕 동굴에서 확인된 석영 조각편에서 사람의 채취를 맡았다.
석회암 지대인 동굴 지역에서는 석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곳에는 왜 이렇게 많은 석영조각들이 있단 말인가. 페이원중은 멀리 내다보이는 강변을 주목했다. 석영편에서는 사람의 손으로 가공한 흔적들이 완연하게 보였다. 이 뿐이 아니었다. 거쯔탕 동굴에서 확인된 진흙층은 다름아닌 타고 남은 재였다. 거쯔탕 뿐 아니라 베이징원인의 흔적이 보인 동굴에서도 불에 탄 흙이 보였다. 재가 쌓인 흙에는 불에 타서 남은 돌과 뼛조각이 보였다. 이것은 베이징인이 도구를 사용했고, 채집·사냥한 먹이를 불에 태워 조리했음을 알려주었다.
인류가 도구와 불을 사용한 역사가 몇 십 만 년 앞당겨진 것이다.
한번 완전한 형태로 선을 보인 베이징인은 또 한 번 그 자태를 드러냈다.
1936년 11월 15일, 페이원중에 이어 저우커우뎬 발굴에 나선 자란포(賈蘭坡)가 또 한 명의 ‘베이징인’을 찾아낸 것이다,
차례로 나타나는 뼛조각을 짜맞추자 하나의 완전한 두개골이 완성됐다. 흥분도 잠시, 한 명, 또 한 명의 베이징인들이 줄줄이 나왔다. 이 때(36년) 발굴에서 11일 사이에 확인된 3개의 두개골은 성인 남자 2명과 여성 한 명이었다. 성인의 뇌용량은 1015~1225㏄ 정도였는데, 이는 현대인(1400㏄)보다는 적지만 원숭이의 평균 뇌용량보다는 훨씬 많았다.
■실패한 베이징인 피난작전
그런데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의 루거우차오(蘆溝橋) 도발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저우커우뎬 발굴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때까지 발굴된 베이징 원인의 화석들은 모두 베이징 협화의학원 B동 연구실 금고에 안치돼 있었다. 협화의학원은 1917년 미국 록펠러 재단이 설립한 의과대학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그러나 1941년 들어 미·일 관계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자 베이징 원인의 안녕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당시 협화의학원 신생대연구실을 책임지고 있던 페이원중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베이징 원인들’을 뉴욕 자연사박물관으로 피신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페이원중은 중칭(重慶) 국민당 정부의 허락을 얻고자 했다. ‘베이징 원인들의 미국 피신’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답신은 없었다. 그 사이(4월) 불안감에 휩싸인 연구소측은 베이징 원인들의 두개골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모형제작이 얼마나 중요한 결정이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중칭 정부의 답신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1월 말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그 사이 일본인들은 끊임없이 연구실 금고에 있던 베이징 원인의 화석을 노렸다.
동경국제대학 교수인 하세베 고톤도(長谷部言人)가 연구실을 찾아와 베이징 원인의 공동연구를 제의했다. 물론 페이원중은 하세베의 제의를 단칼에 잘랐다. 급기야 일제에게 매수당한 청소부가 ‘베이징인’을 보관해놓은 금고를 뒤지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중칭으로부터 답신은 오지 않고…. 일제의 집요한 노림수는 계속되고….
11월말 쯤 애타게 기다리던 중칭 정부의 답신이 도착했다. 연구실 직원인 후청즈(胡承志)가 베이징인들을 포장했다. 얇은 면포와 부드러운 종이, 의학용 솜, 반투명 종이, 의학용 세마포로 귀중한 인류화석을 겹겹이 쌌다. 화석은 두 개의 상자로 나뉘어 포장됐다. 베이징 원인들을 실은 트럭이 미국 공사관을 향해 출발했다. 트럭은 다시 베이징에 주둔한 미 해병대 막사로 갔다.
다시 12월 5일 미 해병대 전용열차가 발해 연안의 친황다오(秦皇島)로 향해 달렸다. 미 해병대가 ‘베이징인’ 화석을 담은 나무상자를 미국 상선 프레지던트 해리슨호에 옮겨 싣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이 불바다가 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다. 중국 대륙의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친황다오로 일제히 진격했다.
하루 뒤인 12월 8일 일본군은 모든 미국의 기관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미 해병 전용열차도 친황다오에서 일본군에 의해 역류됐다. 베이징인들을 태울 계획이었던 프레지던트 해리슨호는 친황다오로 가던 중 징발됐다. 이 선박은 앙쯔강(揚子江) 부근에서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베이징 원인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베이징 원인을 발굴한 페이원중. 그는 25살의 젊은 나이에 세계 고고학사에 남는 위대한 발굴의 주인공이 됐다.
■일본 첩자의 할복
일제는 협화의학원 신생대연구실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찾는 물건(베이징 원인 화석)은 없었다.
그후 1년 반 후(1942년 말~43년 초) 일본인 첩자인 조사 시게하루(錠者繁晴)가 연구실을 찾아와 페이원중 등 관계자들을 모두 잡아 현병대로 끌고 갔다. 관계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뚜렷한 단서는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뒤 갑자기 베이징 원인을 톈진에서 찾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때 이후 일본인들의 수색이 거짓말처럼 종료됐다. 일본인들이 정말로 베이징 원인을 찾았는 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니면 베이징 원인의 화석 일부라도 찾았을까.
알 수 없는 것은 일본인 첩자 조사 시게하루가 ‘임무 실패’의 책임을 지고 할복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과연 무슨 일 때문이었을까.
이후에도 사라진 베이징 원인의 행방은 미·중·일 3국 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베이징 원인을 찾았다는 소식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문제가 된 화석들은 가짜이거나 석고 모형들이었다.
예컨대 1951년 3월, 베이징 원인이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돼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미국을 주적으로 여겼던 중국은 미국의 문물 약탈행위를 맹비난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도 맞대응했다.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됐다. 영국의 저명한 생물학자가 자연사박물관을 방문했다가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 모형’을 보고 진품으로 오인한 것이다.
그 밖에도 베이징 원인을 둘러싼 수많은 에피소드가 양산됐다.
돌이켜보면 베이징 원인의 실종은 조상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을 중국인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베이징 원인’은 전 인류의 유산이지 중국의 유산만은 아니다.
지난 1998년 베이징 원인을 발굴한 주인공인 자란포 등 14명의 중국과학원 원로들이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 해 여름 베이징 TV에서 베이징 원인을 찾기 위한 ‘세기말 최후의 추적’을 방영했을 때 90살의 고령이 된 자란포 등이 노구를 이끌고 나선 것이다.
“비록 베이징 원인의 화석이 전란 속에 훼손됐다 해도 정확한 행방을 찾아야 한다. 전 인류가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우리가 후손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인류의 조상은 어딘가에 있다.
여기서 헛된 상상 하나.
베이징 원인은 분명 있을까. 모두가 정신없던 전쟁통에 운송 도중에 완전히 훼손되거나 아니면 수장된 것은 아닐까.
아니 누군가 숨겨놓았다면…. 지금도 중국인들은 여전히 희망의 끈을 잡고 있다.
우선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이 귀중한 유산을 훼손시키지 않았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또한 다른 일반 포장 물품보다 확연히 다른 상자가 아닌가.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일왕의 명령으로 헌병들과 정보원까지 총동원, 샅샅이 뒤졌다. 관련자들을 고문까지 하면서 자백을 받아냈다. 따라서 베이징 원인의 운반경로와 이동방향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톈진에서 베이징 원인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베이징 원인 수색에 선도를 섰던 하세베 등이 종적을 감춘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베이징 원인은 결국 일본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임무실패’의 책임을 절감한다며 할복자살을 기도한 첩자 조사 시게하루는 또 무엇인가.
아니면 혹 중국인의 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인가.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경황이 없는 틈에 중국인에게 주었거나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중국인의 수중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기야 신중국 건국 이후 좀 사건이 많았는가. 반우파 투쟁에, 대약진운동에, 문화대혁명에, 개혁개방까지…. 엄청난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칫 정치적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 베이징인의 존재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미국인의 품에 있는 것은 아닐까. 베이징인의 운반에 관여한 인물들이나 미해병대원들은 어떨까. 그 또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베이징 원인 발굴작업에 참여한 프랑스인 신부를 용의자로 보기도 한다.
모든 게 온통 수수께끼이다. 50만년 만에 현현한 베이징인들은 그렇게 태평양 전쟁의 개막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또한번 사라지고 말았다.
미국인들은 1941년 12월 7일을 진주만이 피격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날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전 인류는 그 날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50만년 전의 고인류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전쟁이라는 괴물 때문에 사라진 날을…. 지금도 중국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베이징인들 애타게 찾고 있다.
“조상들이여! 어디 계십니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문헌>
장자성, <근세 백년 중국 문물 유실사>, 박종일 옮김, 인간사랑, 2014
웨난·리밍셩, <주구점의 북경인>, 심규호·유소영 옮김, 일빛,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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